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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 영성 이야기] 사랑, 그대로의 사랑

[생활 속 영성 이야기] 사랑, 그대로의 사랑 “주님,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최근에 누군가 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한 적이 있었다. 내가 진행했던 일에 대해 좋지 않게 이야기를 했는데, 조언보다는 비판을 위한 비판 같이 느껴졌다. 게다가 그는 천주교 신자이고 교회 안에서 이런저런 활동도 하는 사람이어서 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 봉사 활동도 많이 하면서 어쩜 저렇게 남을 깎아내리고 자신의 잘났음을 드러내려 하는 것일까. 저러고도 신자라고 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나는 저렇지는 않은데…. 그에 대한 분노와 경멸감이 올라왔다. 그러다가 묵상 기도를 하면서 다음 구절에 머물게 되었다.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

[교회교리] 고해성사 / 「가톨릭 교회 교리서」 1467항

[교회교리] 고해성사 「가톨릭 교회 교리서」 1467항 고해 비밀의 봉인은 고해 사제의 의로움으로부터 사제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자비 고해 비밀 지키는 것으로 완성 죄 덮어주고 완전히 잊음으로써 사제의 의로움도 실현될 수 있어 체코 프라하의 가장 유명한 명물 중 하나는 ‘카를교’라는 다리일 것입니다. 카를교 한 편에 어떤 사제가 다리 밑으로 떨어지는 장면의 청동 부조물이 있습니다. 사제 부조물을 하도 만져서 다른 부분은 어두운데 그 부분만 금색으로 더 밝게 빛납니다. 이렇게 부조상의 한 사제의 모습을 닳도록 만지는 이유는, 그것을 만지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 때문입니다. 그 부조에 새겨진 신부의 이름은 ‘성 요한 네포무크’입니다. 1393년 당시 왕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왕비는 왕이 전쟁터에 나..

[사회교리] 복음과 사회교리 인간과 제도를 완성하는 것은 하느님의 가르침과 실천

[사회교리] 복음과 사회교리 인간과 제도를 완성하는 것은 하느님의 가르침과 실천 「간추린 사회교리」 565항 신앙인의 삶, 세상 속 촛불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결코 완전할 수 없는 사회제도 복음에 부합하는지 식별하고 하느님 말씀 실천에 힘쓸 때 인간과 제도 완성될 수 있어 “정치 참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봉사 의무의 한 표현으로서, 이는 가치 있으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섬김의 정신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선의 추구, 빈곤과 고통 상황에 특별히 주목하면서 이루어지는 정의의 발전, 지상 실재들의 자율성 존중, 보조성의 원칙, 연대를 통한 대화와 평화 증진은 정치 활동에 영향을 주어야 하는 기준들이다.” (「간추린 사회교리」 565항) ■ 어리석은 자에게는 매우 높은 자리가 주어지고(코헬 10,6..

[세상살이 신앙살이] ‘수도자보다 더 수도자다운…’

[세상살이 신앙살이] ‘수도자보다 더 수도자다운…’ 예전에 개갑순교성지의 구석진 수풀 속에 있던 수국을 성지 입구에다 옮겨 심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녀석들이 꽃을 피울 때에는 성지 입구가 보기 좋았는데, 꽃이 지고 시간이 흐르자 성지 입구가 휑– 한 것이…! 무언가를 심어야 할 것 같은데 조건이 맞지 않아 주저하고 있던 어느 날. 광주와 화순에 사시는 연세가 지긋하신 자매님 두 분이 가끔 성지로 미사를 오시는데, 그날따라 두 분은 나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셨는지 먼저 말을 건네셨습니다. “신부님, 여기 성지에 꽃나무가 필요하죠?” “당연히 필요하죠.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저희들이 성지에 올 때마다 꽃나무가 피어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성지를 보는 마음은 누구나 비슷하네요. 그런..

17.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신 예수님 / 2. 나자렛의 소년시절

2. 나자렛의 소년시절 17-2 나자렛의 소년시절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자라셨습니다. 요셉은 목수였고(마태 13, 53) 예수께서도 이 일을 배우셨습니다(마르 6, 3). 서른 살쯤 되실 때까지 예수님은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한 한 사회인으로 사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생활은 우리에게 훌륭한 모범이 되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의 마을 생활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행동하시는 분인가를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나자렛은 하느님의 아들께서 평범한 인간 생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영위하는 모든 생활, 노동자, 학생의 생활, 짐스럽기도 하고 즐겁기도 한 가정생활과 사회생활, 얼핏 보기에는 아무런 역사적 의미도 없는 듯한 갖가지 생활, ..

[톡 쏘는 영성] 탈레반

[톡 쏘는 영성] 탈레반 타인에 대한 공공연한 적개심 표출 열등감서 비롯된 ‘우위욕구’도 커져 ‘공격성 배타적 집단주의’ 벗어나야 모든 이슬람 신도들이 탈레반은 아니다. 그러나 탈레반은 이슬람 신도들이다. 어떤 마을에 붙은 현수막의 내용 때문인지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우리사회 안에 이슬람 신도들에 대한 혐오감이 생긴 듯하다. 문제는 이런 혐오감이 혐오감을 갖는 사람 자체를 괴물로 만들 가능성이 높으니 깊이 숙고해야 한다. 코로나19 이후 해외에서 동양인을 혐오하는 자들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을까 혀를 차던 사람들이, 같은 행동을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슬람이란 외피를 뒤집어쓰고 반인륜적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탈 레반이란 자들의 실체는 무엇..

[세상살이 신앙살이] 이상한 부작용(하)

[세상살이 신앙살이] 이상한 부작용(하) 후배 신부님은 하루아침에 잔여 백신을 맞았는데, 그 후로 분명 이상 증세가 생긴 것 같았습니다. 그 주된 증상은 웃기지도 않는 일인데 혼자 유난히 크게 웃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아침도 그랬습니다. 새벽에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면서, 천둥 번개가 쳤습니다. 아침 미사를 드릴 때는 이러다 공소가 떠내려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의 비가 왔던 것입니다. 미사를 봉헌한 뒤 방에 들어온 나는 수도원 건축과 순례자 쉼터 마련, 굴비 구입을 신청한 분들의 주문서와 주소를 입력한 후 굴비 공장에 메일을 보내는데, 정말 - 천둥 번개 소리와 함께 ‘퍽’ 하더니 컴퓨터가 꺼져버렸습니다. 그래서 놀란 나는 컴퓨터를 잘 다루는 후배 신부님 방을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신부님, 내 방..

[사회교리[] 복음과 사회교리 / 복음과 은총, 그리고 사랑

[사회교리] 복음과 사회교리 복음과 은총, 그리고 사랑 「간추린 사회교리」 63항 고통 속에서도 회복을 체험했던 신앙인의 지혜, 사랑 불안한 현실 속에 처해 있어도 복음으로 사회현상 해석하고 은총에 대한 믿음·희망 지녀야 그 시작은 바로 다름아닌 ‘사랑’ ■ 사랑받음의 자격? “사랑합니다”, “당신은 참 소중한 사람입니다!” 이런 이야기들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얼마나 들으십니까? 진심을 담은 이런 이야기를 누가 해 주나요? 서로 쑥스러워서 못하지만, 사실 이것은 우리 삶의 원동력이자 존재의 이유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사회교리에서 강조하는 인간존엄은 “결국 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소중합니다!”를 진심으로 표현하라는 권고가 아닐까요? 반대로, “당신은 이번 시험에서 형..

[생활 속 영성 이야기]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생활 속 영성 이야기]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날마다 거저 주시는 은총과 선물 추석을 앞두고 어린이집 추석 행사와 10월에 진행할 평가제 준비를 하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라는 표현이 딱 맞을 정도로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디스크를 앓고 있어 앉아 있는 시간을 줄이라는 처방이 있었지만, 어린이집 평가제의 지표 평가는 거의 문서로 확인되는 것들이라 의자에 앉아 컴퓨터 작업을 할 수 밖에 없다. 매일 늦게까지 업무를 보면서 8월 초 허리 통증으로 입원하게 해 주신 자비로운 하느님의 예비하심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지금 아팠다면 이 상황이 얼마나 힘들었을까…’하는 생각이 들면서 준비하는 마음도 달라져 있음을 느낀다. 허리가 아프기 전에는 평가제 등급은 ‘무조건 A등급을 받아야 해’라는 강..

[교회교리] 고해성사 / 「가톨릭 교회 교리서」 1461~1466항

[교회교리] 고해성사 「가톨릭 교회 교리서」 1461~1466항 고해 사제의 모델은 탕자를 기다리다 맞아들이는 아버지 용서는 하느님만의 고유 권한 고해성사 직무 위임 받은 사제 심판 주체 아닌 용서의 도구로 자비로운 하느님 사랑의 표지 가끔 신자들이 고해성사 보다가 사제에게 상처를 받아 성당에 아예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말을 듣습니다. 사제도 인간이기에 실수합니다. 고해를 듣다 보면 화도 납니다. 그러나 고해성사는 하느님의 정의가 아닌 자비를 보여주는 자리입니다. 돌아오는 탕자를 맞아들이는 아버지가 화를 내는 모습을 상상할 수는 없습니다. 고해성사가 오히려 신자들을 주님 앞에 돌아오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면에서 사제는 조금 더 자비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일만 탈렌트 탕감받은 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