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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교리] 감정의 도덕성 / 「가톨릭 교회 교리서」1762~1775항)

[교회 교리] 감정의 도덕성 「가톨릭 교회 교리서」1762~1775항) 기도 중 잠깐의 고통은 기도 후 오랜 기쁨으로 부활한다 주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기도’ 기도로 오시는 분은 성령이며 의로움·기쁨·평화로 열매 맺어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속담은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또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도 합니다. 이렇게 사람은 “자신의 정서를 통해서 선을 예감하고 악을 예측합니다.”(1771) 따라서 감정은 삶의 나침반과 같습니다. 어떤 감정을 추구하느냐로 그 사람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라고 하시고, 바오로 사도도 “언제나 기뻐하십시오”(1테살 5..

19.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 4.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

19.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19-4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 사도행전은 예수 승천에 대해서, 비교적 자세하게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신 다음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사도 1,9).' 이처럼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느님 오른 편에 앉으셨다(마르 16, 19)고 기록한 것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뜻을 그대로 이루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미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이제는 인간의 모든 제약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하느님과 일치하시어 권세와 영광을 누리신다는 뜻입니다(시편 110, 1-2 참조). 그리고 또한 그분은 이미 부활하심으로써 장소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요한 20, 26). 예수께서는 우리와 똑..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말의 위력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말의 위력 아무리 좋은 충고나 조언이라도 과시 위한 무의식적 욕구로 인해 상대방의 기분 상하게 하기에 되도록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 입에서 나오는 말은 눈에 보이지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말에 대하여 경각심을 갖지 않고 함부로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말은 참으로 위험한 것이다. 상담가들은 말은 보이지 않는 칼이라고 정의를 내린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을 수도 있지만 세치 혀가 화를 불러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말 중에서 가장 좋은 말은 칭찬하는 말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듯이 칭찬 한마디가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주기도 한다. 인생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부모와 어른들로부터 칭찬을 충분히 받고 자란 사람들이다. 반면에 가출청소년들을 비롯한 ..

[사회교리] 복음과 사회교리 / (「간추린 사회교리」44항)

[사회교리] 복음과 사회교리 (「간추린 사회교리」44항) 복음 간직하고 실천하려는 노력이 세상 환하게 만들어 부활하신 주님께 희망을 두고 일상에서 복음 살고 전하는 일 세상 속 그리스도인의 사명 “만약 이 밤 당신이 어둠의 시간을 경험하고 있다면, 아직 새벽이 오지 않은 날을 경험하고 있다면, 어둑한 빛이나 산산이 부서진 꿈을 경험하고 있다면 가서 부활절의 이 메시지에 대한 놀라움을 가지고 당신의 마음을 여십시오…. 왜냐하면 주님께서 언제나 당신보다 먼저 가시고 그분께서 언제나 당신 앞에서 걸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과 함께 삶은 언제나 다시 새롭게 시작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2021년 파스카 성야 미사 강론 중)- ■ 「간추린 사회교리」 1항–부활하신 그리스도 봄과 함께 주님 부활 대축일이 찾아왔..

[교회교리] 인간 행위의 도덕성 / 「가톨릭 교회 교리서」 1749~1761항)

[교회교리] 인간 행위의 도덕성 「가톨릭 교회 교리서」 1749~1761항)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인간, 선하거나 악한 존재 아닌 선악 분별 가능한 도덕적 주체 도덕성 갖추려면 윤리기준 필요 그리스도를 거울 삼아 따라야 인간의 본성은 선할까요, 악할까요? 결론이 나지 않는 이 커다란 논쟁은 대부분 인간은 본성상 악하다는 결론으로 끝납니다. 역사상 인간끼리 동물적 본성을 통제하지 못해 스스로 자멸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20세기 한 노르웨이 탐험가가 남태평양 한가운데에서 우연히 하나의 섬을 발견합니다. 세상과 단절된 문명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발전된 문명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은 한때 이 섬에서 많은 사람이 발전된 문명을 누리고 살았으나 두 민족으로 나뉘어 경쟁하듯 모아이 ..

19.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 3. 신앙의 신비

19.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19-3 신앙의 신비 우리가 믿어야 하는 '기쁜 소식'이란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 3-5)'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제자들의 부활 체험을 받아들임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사도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기쁜 소식을 믿을 수 있고 또 믿어야 합니다. 유다인들이 '모세나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 것 (루카 16, 31)'이 잘못되고 자멸하는 행위라면, 오늘날 사람들이 사도들의 말을 듣고도 믿지 않는 것 역시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당하는 부자처럼(루카 16, 19-31 참조) 영원한 불행을 자초하는..

성주간, 어떻게 보낼까?

성주간, 어떻게 보낼까? 주님 수난과 죽음 묵상하고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됨을 기념 사순 시기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4월 10일)에 이르러 절정을 향한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부터 한 주간을 ‘성주간’(聖週間)이라고 부른다. 사순 시기의 마지막 주간에 해당한다. 성주간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서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 전까지의 사순 시기와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부터 성토요일까지를 포함하는 기간이다. 예수님께서 죽음으로써 죽음을 소멸시키고 부활로써 생명을 되찾아 주셨음을 기념하는 성주간은 전례주년에서 가장 거룩한 기간이다. 신자들은 성주간 전례에 참례해 어느 때보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의 신비를 깊이 깨달을 수 있다. 성주간의 구성과 의미를 살펴본다. ■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주님 수난 성지 주..

[사회교리] 복음과 사회교리 / (「간추린 사회교리」148항)

[사회교리] 복음과 사회교리 (「간추린 사회교리」148항) 참된 지성은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께 있어 한국사회 반지성주의 본질은 이기심에 의한 경청·존중 결여 형제애 실천이 곧 상생의 길 ■ 한국사회의 반지성주의는 뭘까? 1963년 리차드 호프스태터(Ricard Hofstadter)는 미국 사회에 만연한 메카시즘(극단적 반공주의) 속에서 지식인에 대한 반감과 불신이 드러난 시대상을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라 표현했습니다. 이는 미국의 짧은 역사 속에서 아메리칸 드림과 성공지상주의, 애국과 반공, 엘리트층에 대한 반감, 개신교의 급진적 복음주의 등이 맞물려 형성된 일부 대중의 정서였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애국자와 공산당, 지성과 실용, 화이트 칼라와 블루 칼라, 남..

[교회교리] 구원 경륜에서 본 인간의 자유 /「가톨릭 교회 교리서」 1739~1748항)

[교회교리] 구원 경륜에서 본 인간의 자유 「가톨릭 교회 교리서」 1739~1748항)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욕망과 죄로부터 해방시켰다 욕망에 매여 살아가는 인간 죄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고통 바라보며 하느님 마음을 받아들여야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일까요, 아니면 본래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일까요? 근본적으로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항상 어떤 욕망에 매여 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그 욕망에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만약 아이가 학교에 가지 않고 게임만 하겠다면 그 아이는 자유로운 것일까요? 욕망에 얽매인 상태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니까, 내 자유예요”라고 말할 수 있지만, 어른들이 볼 때는 무언가에 사로잡힌 노예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

19.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 2.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의미

19.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19-2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의미 1)불의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 하느님께서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의로운 사람은 한 명도 없는(시편 143, 2) 이 세상을 단죄하려 하지 않으시고 다만 구원하시려고(요한 3, 17)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사람들의 손에 내 맡기시어 높이 들리게 하셨습니다(요한 3, 14). 또한 예수께서는 자신이 흘리는 피가 이 세상의 죄를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시기 위한 것임을 명백히 하시고(마태 26, 28) 죽는 순간까지 죄인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하느님께 청하였습니다(루카 23, 34). 결코 예수님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지른 분은 아니셨고 분명히 죄 없는 의인이셨습니다(루카 23, 47). 그리고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원조 아담 이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