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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교리] 성품성사 / 성품성사는 본질적으로 ‘직무’를 위한 성사다

[교회교리] 성품성사 성품성사는 본질적으로 ‘직무’를 위한 성사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1572~1600항) 다른 이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 하느님 본성으로 살아야 하는 직무의 엄중성을 지닌 사제 주교 대리자로 직책·직무 받아 하느님께서 마지막에 우리를 심판하실 때 교회에서 평신도였는지, 수도자였는지, 혹은 성직자였는지를 따지실까요? 하늘에서 성직자들은 평신도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게 될까요? 단테의 「신곡」에는 스스로 하느님을 떠난 고위 성직자들이 지옥에 있는 모습이 묘사됩니다. 이는 심판의 기준이 교회에서의 직책이 아닌 사랑의 실천임을 되새기게 해줍니다. 성직자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직무’에서 배제될지언정 ‘직책’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영적 인호”(1582)가 새겨져 ‘엄밀한 의미’..

[교회교리] 성품성사(부제는 사제가 기도와 말씀 봉사에 집중하도록 돕는다)

[교회교리] 성품성사 부제는 사제가 기도와 말씀 봉사에 집중하도록 돕는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1569~1571항) 성품성사를 통해 인호 새겨진 사제 직무 보조해주는 성직자 사제들이 본질에 충실하도록 초대교회 때 새롭게 만든 직무 성품성사로 축성되는 소위 ‘성직자’는 교회 내에서 세 품계를 가집니다. 「교회 헌장」은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교회 직무는 이미 옛날부터 주교, 사제, 부제”(1554)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제(司祭)라는 용어는 주교와 신부만을 가리키며, 부제는 해당되지 않습니다.”(1554) 하지만 부제라고 하더라도 성품성사를 받기 때문에 성직자로서의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인호’가 새겨집니다.(1570 참조) 우리는 이 시점에서 왜 교회가 부제라는 새로운 품계를 만들었는지 살펴볼 필요..

[교회교리] 성품성사

[교회교리] 성품성사 「가톨릭 교회 교리서」 1554~1568항) 주교와 사제는 머리와 몸처럼 유기적 관계다 주교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사제들에게 봉사 임무를 위임 주교는 그리스도 사제직에 참여 사제는 주교의 사제직에 참여 성품성사는 주교, 신부, 부제로 나뉩니다. 여기서 부제를 제외하고 신부와 주교를 사제라고 합니다.(1554 참조) 주교가 미사 때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라고 인사할 때, “또한 주교의 영과 함께!” 하지 않고,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라고 대답하는 이유는 주교도 사제이기 때문입니다. 주교는 충만한 사제직을 수행하고 사제는 주교가 행하는 사제직의 협조자들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주교 축성으로 충만한 성품성사가 수여된다”라고 가르치고 주교는 분명 “대사제직, 거룩한 봉사 ..

[교회교리] 성품성사

[교회교리] 성품성사 「가톨릭 교회 교리서」 1533~1553항 그리스도 사제직 참여는 구원의 족보에 참여하는 것과 같다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중개하신 성모님 사제직에서 볼 수 있듯 하느님과 이웃을 이어주는 구원의 통로가 사제직의 본질 이제 사제직의 ‘성품성사’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사제의 직무는 ‘보편 사제직’과 ‘직무 사제직’으로 구분됩니다. 직무 사제직은 “성사적 행위”(1538)인 성품성사에 의해 사제로 축성된 이들의 직무입니다. 그런데 이 직무 사제직도 ‘은총의 중개자’가 되어 하느님과 이웃을 이어준다는 본질적인 면에서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과 다르지 않습니다.(1546 참조) 우리 사제직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1티모 2,5)이신 예수 그리스도”(1544)의 사제직과의 결합입..

[교회 교리] 병자성사

[교회 교리] 병자성사 「가톨릭 교회 교리서」 1514~1532항 병이 치유되어도 치유되지 않아도, 병자성사 은총은 한결같다 은총의 본래 목적 ‘영혼 구원’ 외적인 치유만 바라지 말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합치된 영혼의 내적 치유 먼저 바라야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많습니다.(로마 5,20 참조) 죄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질병도 은총을 끌어당깁니다. 하지만 약국이나 병원에 가도 되는 정도의 병으로 병자성사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약국이나 병원도 주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그러나 성사를 통해 받는 은총이 약국이나 병원에서 주는 것과 비교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병자성사는 “환자가 질병이나 노쇠로 죽을 위험이 엿보이는 때”(1514)에 받는 것이 가장 적절합니다. 그래야 그 은총이 확연히 드러날 ..

[교회교리] 병자성사 ① 「가톨릭 교회 교리서」 1499~1513항

[교회교리] 병자성사 「가톨릭 교회 교리서」 1499~1513항 병은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려고 존재하는 것 병은 벌이 아닌 은총의 통로 그리스도의 수난에 결합시켜 하느님 백성의 선익에 기여하며 주님께 돌아오는 기회로 삼아야 중병을 20년 가까이 앓으신 분이 상담을 신청하였습니다. 핵심 고민은 이것이었습니다. “제가 죄인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많은 고통을 받을만한 죄는 짓지 않은 것 같은데, 하느님은 왜 제게 이런 큰 보속을 주시나요?” 보통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약해져서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처럼 여깁니다. 이런 생각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일단 병이 죄와 연관된다는 것은 맞습니다. 교회는 “병은 단지 세상의 죄의 결과일 뿐이다”(1505)라고 말하며 죄 때문에 병이 세상에 들어왔음을 인정합니..

[교회교리] 고해성사 / 「가톨릭 교회 교리서」 1480~1498항

[교회교리] 고해성사 「가톨릭 교회 교리서」 1480~1498항 고해성사는 ‘공동 고백’보다 ‘개별 고백’을 지향한다 개별 고해가 일반적인 방식 죄에 대한 온전한 책임을 통해 용서의 은총 깊게 느낄 수 있어 고해성사의 형식은 크게 ‘개별 고백’과 ‘공동 고백’이 있습니다. 공동 고백은 “중대한 필요가 있을 때 일괄적으로 고백하고 일괄적으로 죄를 용서해 주는”(1483) 형식입니다. ‘중대한 필요’란 곧 전투에 나가야 하는 군인들, 바이러스 범유행처럼 대면 고해가 어려운 상황, 고백자의 수보다 사제의 수가 턱없이 부족할 경우 등입니다. 하지만 공동 고해가 일반화되는 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공동 고해를 할 때도 “사죄가 유효하려면 신자들이 적절한 때에 자신들의 대죄를 고백하겠다는 의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교리] 고해성사 / 「가톨릭 교회 교리서」 1468~1470항

[교회교리] 고해성사 가톨릭 교회 교리서」 1468~1470항 고해성사는 관계회복의 열쇠 모든 사람이 양심 가지고 있기에 죄 지은 후엔 ‘양심의 가책’ 느껴 남탓·자책으론 문제 해결 못해 고해성사 통해 가책 덜어내야 고해성사의 가장 중요한 목적과 효과는 무엇일까요? ‘관계회복’입니다. 교리서는 고해성사의 효과가 “하느님과 이루는 화해”(1468), 그리고 자연과 이웃을 포함한 “교회와 화해”(1469)로 나타난다고 가르칩니다. 다시 말하면 죄의 용서를 받지 않고서는 하느님과 이웃 자연과의 친교와 일치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죄가 관계를 단절시키는 근원적인 이유는 우리 안에 ‘양심’이 있어서입니다. 게다가 원죄까지 입고 태어납니다. 모든 인간은 죄책감의 노예란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죄에서 벗어날 수 있..

[교회교리] 고해성사 / 「가톨릭 교회 교리서」 1467항

[교회교리] 고해성사 「가톨릭 교회 교리서」 1467항 고해 비밀의 봉인은 고해 사제의 의로움으로부터 사제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자비 고해 비밀 지키는 것으로 완성 죄 덮어주고 완전히 잊음으로써 사제의 의로움도 실현될 수 있어 체코 프라하의 가장 유명한 명물 중 하나는 ‘카를교’라는 다리일 것입니다. 카를교 한 편에 어떤 사제가 다리 밑으로 떨어지는 장면의 청동 부조물이 있습니다. 사제 부조물을 하도 만져서 다른 부분은 어두운데 그 부분만 금색으로 더 밝게 빛납니다. 이렇게 부조상의 한 사제의 모습을 닳도록 만지는 이유는, 그것을 만지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 때문입니다. 그 부조에 새겨진 신부의 이름은 ‘성 요한 네포무크’입니다. 1393년 당시 왕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왕비는 왕이 전쟁터에 나..

[교회교리] 고해성사 / 「가톨릭 교회 교리서」 1461~1466항

[교회교리] 고해성사 「가톨릭 교회 교리서」 1461~1466항 고해 사제의 모델은 탕자를 기다리다 맞아들이는 아버지 용서는 하느님만의 고유 권한 고해성사 직무 위임 받은 사제 심판 주체 아닌 용서의 도구로 자비로운 하느님 사랑의 표지 가끔 신자들이 고해성사 보다가 사제에게 상처를 받아 성당에 아예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말을 듣습니다. 사제도 인간이기에 실수합니다. 고해를 듣다 보면 화도 납니다. 그러나 고해성사는 하느님의 정의가 아닌 자비를 보여주는 자리입니다. 돌아오는 탕자를 맞아들이는 아버지가 화를 내는 모습을 상상할 수는 없습니다. 고해성사가 오히려 신자들을 주님 앞에 돌아오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면에서 사제는 조금 더 자비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일만 탈렌트 탕감받은 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