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일
성 필립보와 알패오의 아들 성 야고보 사도
Saint Philip & James, Apostles
Sts. Philppus et Jacobus, Ap
San Filippo Apostolo
San Giacomo il Minore Apostolo
필립보는 베싸이다에서 태어났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으나, 후에 그리스도를 따라갔다.
알패오의 아들이며 주님이 친척이었던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를 다스렸고 한 편의 서간을 썼다.
보속과 극기의 생활을 하면서 많은 유다인들을 신앙에로 귀의시켰다.
62년에 순교의 팔마를 얻었다
전승에 따르면, 로마에 뎔두 사도 대성전을 봉헌할 때 제대 및에
필립보 성인과 야고보 성인의 유해를 모셨다(565년5월1일?)고 한다.
이러한 전승 때문에 서방 교회는 두 사도의 축일을 함께 지내게 되었다.
필립보는 베드로와 안드레아와 마찬가지로 베싸이다에서 태어났고,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요한 1,43-44 참조).
필립보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날,
예수님을 뵙게 해 달라고 청하는
몇몇 그리스 사람들을 위하여 중개를 맡는다(요한 12,20-22).
그리고 필립보는 무엇보다도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하고 청한 것으로 유명하다.
예수님께서 필립보의 청에 이렇게 대답하셨다.
"필립보야,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예수님과 필립보의 이 대화는 오늘 교회가 바치는 기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본기도, 복음 환호성, 영성체송, 영성체 후 기도).
우리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요한의 형제 야고보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야고보를
예루살렘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주님의 형제"(♣62)와 같은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알패오의 아들과 주님의 형제를 같은 인물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야고보가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할 것이다(마르 3,18).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야고보에게 나타나셨다(1고린 15,7)는 사실과,
야고보 사도가 후에 신약성서의 정경이 된 서간(야고보서) 하나를 남겼다는 사실뿐이다.
-(가톨릭홈에서)-
Crucifixion of St Philip - LIPPI, Filippino
1502. Fresco. Strozzi Chapel, Santa Maria Novella, Florence
테르툴리아누스 사제의 저서 [이단자들에 대한 규정]에서
(Cap. 20, 1-9; 21,3; 22,8-10: CCL 1,201-204)
사도들의 복음 선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이 어떤 분이며 또 과거에 어떤 분이었는지를 알려 주셨고,
당신께서 실현하시고자 오신 성부의 뜻은 무엇이고 인간이 무엇이며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이것은 어떤 때 백성들 앞에서 드러나게 전해 주셨고
또 어떤 때에는 당신 제자들에게만 따로 전해 주셨습니다.
이 제자들 중에 열두 명의 으뜸들을 뽑으시어 민족들의 스승으로 삼으셨습니다.
부활하신 후 성부께로 돌아가실 때
제자 중 하나를 제외하고 나머지 열한 명의 제자들을 민족들에게 파견하시어
그들을 가르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도록 하셨습니다.
사도(이 명칭은 "파견된 자"를 뜻합니다.)들은 즉시 주사위를 던져
다윗의 시편에 있는 예언의 귄위에 의거하여 열두 번째 사도로
유다 대신 마티아를 뽑았습니다.
그들은 약속에 따라 기적을 행하고
담대히 말할 힘을 주시겠다는 성령의 은총을 입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먼저 유다에서 선포했고,
그 다음 유다인들이 거부할 때 그 동일한 신앙의 가르침을
온 세계에 나아가 선포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도시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다른 교회들은 신앙의 새싹과 가르침의 씨앗을 받았고
또 끊임없이 받아 교회들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그 교회들은 사도들의 교회의 후예로서 사도적 교회라고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물들은 그들의 기원에 종속시켜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들 교회는 수적으로 많다 해도 그들이 유래한 시원적 사도 교회와 동일합니다.
따라서 모든 교회들이 하나의 교회를 이루므로 모두가 시원적이고 모두가 사도입니다.
이 교회들이 서로 보여 주는 평화와 형제애와 환대가 이 일치를 표시해 줍니다.
이와 같은 것들의 기초는 동일한 신비의 유일한 전승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친 것, 즉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계시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알리려면
사도들이 세운 이 교회의 신앙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사도들은 이 교회에서 생생한 목소리로 직접 복음을 선포하였으며,
훗날 편지를 통해서 그 신앙을 선포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어느날 "아직도 나는 할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감당할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고,
이에 더하여 "그러나 진리의 성령의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완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들이 진리의 영을 통하여 진리를 완전히 깨닫게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기에
그들은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사도행전의 성령 강림 기사가 증명해 주듯이 주님은 이 약속을 분명히 성취하셨습니다.
-(가톨릭홈에서)-
알패오의 아들 성 야고보 사도와 성 필립보 사도
우리는 야고보에 대하여 그의 이름 외에 아는 것이 없다.
물론 예수님이 그를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의
열두 기둥 가운데 하나로 뽑으셨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야고보,
즉 클레오파의 아들이며 예수의 형제로서 나중에 예루살렘의 주교가 되고
전통적으로 야고보서의 저자라고 알려진 그 야고보는 아니다.
필립보는 베드로나 안드레아와 같이 갈릴래아의 베싸이다 출신이다.
예수님은 그를 직접 부르셨으며 이로 인해 그는 나타니엘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모세가 말한 분’이라고 말했다.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필립보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는 데에 오랜 시일이 걸렸다.
한번은 예수님의 수많은 군중이 당신을 따라 오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싶어서
필립보에게 사람들이 먹을 빵을 어디에 가서 사올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다.
"이것은 단지 필립보의 속을 떠보려고 하신 말씀이었고
예수께서는 하실 일을 이미 마음 속에 작정하고 계셨다."고 요한복음 사가는 말한다.
필립보는 "이 사람들에게 빵을 조금씩이라도 먹이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를 사온다 해도 모자라겠습니다."하고 말했다.
요한의 이야기는 필립보를 깎아 내리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교회의 초석이 되어야 할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떠나서는 인간에게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과
하느님의 선물로 천상 능력의 힘을 가득히 받은 사람들의
엄청난 능력 사이에는 뚜렷한 구별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경우,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화가 난 것 같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토마가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모른다고 불평하자 예수님은
"나는 길이다.
만약 너희가 참으로 나를 안다면 나의 아버지도 알 것이다.
너희는 이미 그분을 뵈었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필립보가 "주여, 저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만족하겠습니다." 하고 청하자,
예수님은 "필립보야, 내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었는데 아직 나를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아마도 필립보가 희랍어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니면 그가 예수님과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몇몇 이방인 개종자들은 그에게 와서 자신들을 예수께 소개시켜 달라고 청했다.
요한 복음에 있는 예수님의 대답은 간접적인 것이다.
예수님은 "아직 나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
얼마 있지 않아서 나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위하여 똑같이
나의 생명을 바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회홈에서)-
Apostle St Philip, Apostle St James the Less -GRECO, El
1606 Oil on canvas, 97 x 77 cm Museo del Greco, Toledo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두 사도의 기념은 옛날부터 같은 날 지내기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날 천국으로 개선한 것도 아니며, 주님의 승천 후 같이 일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서로 갈라져 다른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그들의 유골은 똑같이 지금도 로마에 안치되어 있다.
성 필립보는 성 베드로와
성 안드레아와 같이 겐네사렛 호숫가 부근에 있는 베싸이다에서 태어났다.
베드로가 주님께 부름을 받은 다음날의 일이다.
도중에서 주님을 만나 ’나를 따르라!"는 고마운 말씀을 들은 필립보는 즉
시 그대로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곧 나타나엘이란 친구를 찾아가서
"우리는 모세의 율법서와 예언자들의 글에 기록되어 있는 분을 만났소.
그 분은 요셉의 아들 예수인데 나자렛 사람이요"하고 말했다.
그러나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하고 신통치 않게 말하자,
필립보는 "와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하며 그를 주님께로 인도했다.
그 결과 나타나엘도 주님께 몇 마디 말씀을 듣고 즉각
구세주이시라는 것을 믿어 그의 제자가 되었던 것이다.
성서에는 또한 필립보에 대한 기록이 두세 군데 실려져 있다.
그 중의 하나는 베싸이다에서 예수께서 빵을 많게 만드신 기적을 행하시려고 할 때
주님을 다라온 수많은 군중을 보고 "이 사람들이 먹을만한 빵을
어디서 샀으면 좋을 것인가?"하고 시험하신데 대해서
그는 "2백 데나리오의 빵을 사서 조금씩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도저히 당할 수 없습니다"(요한 6, 1-15)하고 대답해 드린 것으로 보아
필립보는 세상 물정에 능란한 이였던 것을 짐작할 수 도 있고,
또 두번째로는 다음해 주님과 더불어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동무 둘 셋이 찾아와서 주님을 뵙고자 했는데,
그는 혼자서 주님께 말씀드리지 못하고 안드레아와 더불어
그들의 소원을 말씀드렸다는 이야기(요한 12, 20-26)이고,
최후로는 저 최후 만찬 때 성체 성사를 세운 예식이 있은 후
예수께서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요한 14, 7)하신 말씀에 대해
필립보는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시면 더 바랄것이 없겠습니다";하고
말씀 드렸다는 이야기이다.
그때에 필립보는 다른 사도들과 똑같이 주님의 말씀을 납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인자로이 나무라듯이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니
무슨 말이냐?"하고 말씀 하셨던 것이다.
성 필립보 사도의 그 후의 생애와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는 점이 극히 적다.
전설에 따르면, 사도들이 각각 사방으로 전교를 떠났을 때 그는 그리스를 무대로 설교했고,
도미시아노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히에라 폴리스에서
대략 78년겅에 십자가형으로 순교했다고 한다.
The Apostle Philip - DURER, Albrecht
1516.Tempera on canvas,46 x 37 cm.Galleria degli Uffizi,Florence
또한 같이 축일로 지내는
성 야고보는 7월 25일에 지내는 야고보와는 다른 인물이다.
아버지는 알패오라 하고,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와 친척관계에 있었으므로
그도 예수와 혈통의 인연이 있었던 셈이다.
복음서에는 그에게 대해서 다만 12사도 중의 한 사람으로만 기록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전설이 있기 때문에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도들보다는 비교적 그의 생애에 대해서 알려져 있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그는 어려서부터 엄격한 생활을 해 육식과 음주를 하지 않고,
머리털이나 수염도 자라는 대로 내버려두고, 맨발로 걸으며 긴 겉옷과 망토만 걸칠 뿐이었다.
그리고 틈만 있으면 기도에 몰두했으나, 유다인처럼 서서하지 않고
반드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고 하니다.
성서의 정신에 철저했던 그는 신전의 예식이나
그 외의 유다인의 선량한 습관을 몹시 존중하며 또한 극히 경건했으므로
모든 사람들에게 의인 혹은 민중의 편을 드는 자로서 공경을 받은 것이었다.
그는 주 예수 보다 두세 살 위였으나,
시초에 그의 제자가 된 한 사람으로서 주님의 신임이 두터웠고,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친히 예루살렘의 전교를 위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에루살렘 최초의 주교가 되어 그 임무를 완수했다.
그는 주예수의 말씀을 자기 스스로도 알뜰히 지키며 남에게도 올바르게 가르쳐 왔으나,
구약의 율법에 제정된 것도 동시에 준수할 필요를 느끼던 논자(論者)로서,
이교에서 개조안 이들에게도 이를 요구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첫 번째의 공의회가 열려 교황 베들로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것이 필요없다는 단정을 선언하자 그는 기쁜 마음으로 이에 복종했던 것이다.
그는 언젠가 이교도들 사이에 생활하고 있는 유다인으로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인 사람들에게 한 통의 서한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것은 지금도 성서에 야고보서라는 명칭으로 전해지고있다.
그 안에는 주로 선덕의 필요와 병자 성사의 제정에 관해 역설되어 있다.
성스러운 생활을 보낸 야고보는 물론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으나,
한편에서 또한 그를 미워하는 원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전에 주 예수를 박해하고 십작가에 못박은 바리사이들은 그 충실한 제자인
야고보에게도 박해를 가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 당시의 예루살렘 시장이었던 한나는 그를 돌로 쳐죽일 것을 선언했다.
그러나 처형에 앞서 부활 대축일에 그는 우선 신전의 꼭대기에 끌려나와
감언이설로써 배교하기를 강요당했다.
그러나물론 그런 꾀임에 빠질 그가 아니었으므로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자 그들은 즉시 그를 꼭대기에서 떨어뜨리고 돌로 쳐서 참살했다.
그때 그는 고상하게도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일을 알지 못하오니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하고 원수들을 위해 기도했다고 한다.
그를 사형에 처한 한나는 곧 시장직에서 파면되고 그의 피로 젖어진 예루살렘은
2,3년후 로마의 대군대에게 점령되어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것도 야고보와 같은 의인을 박해한 이들에 대한 천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구대교구홈에서)-
Apostle St Philip - GRECO, El
1606.Oil on canvas, 97 x 77 cm. Museo del Greco, Toledo
5월 3일
성 필립보 사도
St.PHILIP the Apostle
San Filippo Apostolo
Born:at Bethsaida, Palestine
Died:martyred c.80 at Hierapolis, Phrygia
Canonized:Pre-Congregation
Patronage:hatters, Luxembourg, pastry chefs, Uruguay
Filippo = che ama i cavalli, dal greco = that it loves the horses, from the Greek
필립보는 ’말(馬)의 친구’란 뜻이다.
갈릴래아의 베사이다 출신인 필립보는
아마도 세례자 요한으 제자인듯 하며, 사도들 명단에도 등재되었다.
이외에 그가 언급된 곳은 요한 복음서이다.
그는 예수로부터 직접 제자로 간택되었고,
나타나엘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였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중에도 그가 참석했고,
예수를 찾아온 이방인들을 예수께 소개도 하였다.
예수의 수난 직전에 그는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하고 간청도 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그리스를 무대로 설교하였다고 하였고,
도미시안 황제의 박해때 히에라폴리스에서 십자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62년에 순교의 팔마를 얻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예수님의 첫번째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요한 1,43).
베사이다 출신인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그리스식 이름과 그가 가졌던 이방인들과의 관계(요한 12,20-30)를 볼 때
헬레니즘화된 사회에 속해 있었음이 틀림없다.
4복음서중 필립보와 관련된
세 가지 사건은(요한 1,45; 6,5-7; 14,8) 여러가지로 구약의 사건을 연상케 해준다.
그는 사람의 아들인 그리스도 속에서 구약의 예언이 성취를 목격하고자 하는
자신의 희망을 표현한다.
그는 빵과 고기의 기적(요한 6,1-15 :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참조)을
출애굽 때 광야에서의 사건(민수 11,21-23)을 통하여 우리가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또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소서"(요한 14,8) 하는 그의 소망은
"당신의 존엄하신 모습을 보여주십시오"(출애 33,18)하던 모세의 소망의 재현이다.
필립보가 복음을 전파하다가 순교를 당한 장소가 터어키라는 전설은 확실하지는 않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실 언
좋은 인상을 주고 올바른 말을 하려고 애를 쓰다가
오히려 더 바보처럼 행동해서 난처해졌던 경우가 있었는가?
당신이 그런 경험이 있었다면 성 필립보를 이해할 것이다.
예수님은 열두 사도들과 최후 만찬을 나누시면서
당신이 먼저 가셔서 제자들이 있을 곳을 마련하겠다고 말씀하셨다.
토마스가 “주님,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대답하셨다.
그 다음 상황을 상상해 보자. 토마스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뜻을 알아듣지 못해서 어리벙벙했을 것이다.
그래서 필립보가 분위기를 좀 부드럽게 해 보려고 이렇게 청한다.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해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실망을 감추시지 못하고 이렇게 책망하신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필립보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을 것이다.
의도하지 않은 경망스러운 말로 난감하고 곤혹스러운 입장에 놓일 때가 있다.
그때는 깊은 숨을 내쉬고 자신이 실수를 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자신을 용서하고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자.
성 필립보도 예수님 앞에서 공공연하게 곤혹스러움을 당하였지만
성령강림 후 곳곳에 그분의 가르침을 전파함으로써 영광스럽게 되지 않았는가?
실언으로 난처한 상황에 빠졌던 적은 없는가? 버릇처럼 실언을 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Apostle St James the Less-GRECO, El
1606 Oil on canvas, 97 x 77 cm Museo del Greco, Toledo
5월 3일
알패오의 아들 성야고보 사도
St. Jacobus
St. JAMES the Lesser
San Giacomo il Minore Apostolo
Died:martyred c.62 at Jerusalem by being thrown from a pinnacle of the Temple,
then stoned and beaten with clubs, including fuller’s mallets, while praying for his attackers
Canonized:Pre-Congregation
Patronage:apothecaries, druggists, dying people, fullers, hatmakers, hatters, milliners, pharmacists, Uruguay
Giacomo = che segue Dio, dall’ebraico = that it follows God, dall’ebraico
야고보
라틴어 Jacobus
①열두 사도의 하나이며 알패오의 아들.
고대 전승은 작은 야고보와 동일 인물로 보는데 `작은’이란 신장이나 나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차야고보라 불러왔다.
전승은 나아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글레오파의 아내 마리아를 동일시한다.
그러므로 알패오와 글레오파는 동일 인물을 가리키는 두 개의 이름이며,
더구나 글레오파의 아내 마리아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자매이므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주님의 형제뻘인 야고보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하여 최근의 다수 학자들은 신약성서에서
사도들과 주님의 형제들이 구별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구별은 사도 1:14와 1고린 15:7에서도 드러난다.
주님의 동생 야고보는 예루살렘의 야고보와 같으며
바울로가 `야고보와 게파와 요한’을 교회의 기둥으로 열거한 것도
갈라 1:19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 다.
정경인 야고보의 편지는 주님의 동생 야고보가 쓴 것이다.
예루살렘의 야고보는 62년 혹은 66년경에 순교하였다.
동방전례에는 예루살렘의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다른 인물로 보고 축일을 달리 지내나
로마 전례에는 양자를 동일인으로 보아 5월1일(3일)을 축일로 지낸다.
②열두 사도의 하나이며 제베대오의 아들. 축일은 7월 25일.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하여 장야고보라 불러 왔으나, 성서에서 붙인 호칭은 아니다.
갈릴래아의 어부였으며 삯꾼을 고용할 정도로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살로메이며,
이들 형제가 `천둥의 아들’이라 불린 이유는 사마리아 동네의
냉대를 참지 못해 하던 과격한 성격때문일 것이다.
44년 헤로대왕에 의하여 죽음으로써 사도들 중 첫 순교자가 되었다.
전승은 야고보의 스페 인 여행시기를 예수님의 죽음이후,
야고보의 순교이전으로 잡고 있으나 이는 바울로의 말씀과 맞지 않는다.
스페인 콤포스텔라의 산티아고에 안치된 유해가 야고보의 것인지에 관하여
교황레오 13세가 칙사에서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다투어지고 있다.
회화에서 순례자의 종을 들고있는 모습이 많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야고보는 ’발꿈치를 잡다’란 뜻이다.
우리는 야고보에 대하여 그의 이름 외에 아는 것이 없다.
물론 예수님이 그를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의
열두 기둥 가운데 하나로 뽑으셨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야고보,
즉 클레오파의 아들이며 예수의 형제로서 나중에 예루살렘의 주교가 되고
전통적으로 야고보서의 저자라고 알려진 그 야고보는 아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며 알패오의 아들인 그는(마태 10,3;마르 3,18;루가 6,5)
예수의 동생이며(마르 6,3;마태 13,55)
’야고보의 편지’의 저자라는 설도 있다.
예수님의 부활의 목격자(1고린 15,7)라는 사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의 그의 위치를 뚜렷하게 해주었으며
베드로가 그에게 옥에서 풀려난 사실을 전파하게 한 일과(사도 12,17)
개종한 바오로가 그와 접촉한 일 등은 예루살렘 회의에서 그로 하여금
중요한 역할을 하게 한다(사도 15,13-29).
AD 36-37년 야고보는
교회의 지도자로 나타나며(사도21,18-26), AD 62년 순교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사도들의 일대기를 읽고 그 축일을 지내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을 하느님의 나라에 이끌기 위하여 그들이 순교하면서까지
전파한 하느님의 말씀에 감사하고
지금도 우리를 거룩한 성찬에 초대하고 있으며,
우리는 지금 사도들의 터전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다.
’야고보의 편지’에 나타난 가난한 자에 대한 찬양과 부자에 대한 무서운 경고의 메시지는
우리의 믿음이 능동적이어야 하며 정의로움이 없이는
결코 열매맺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야고보의 편지
라틴어 Epistola Catholica Beati Jacobi Apostoli
영어 Epistle of St. James
1. 문학적 성격 :
1장 1절의 인사말 외에는 편지다운 특징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저서는 구체적 상황에 관한 언급없이 윤리 도덕적인 훈계를 별 순서 없이 늘어놓고 있다.
따라서 야고보서는 편지가 아니라 구약 성서의 지혜서들과 가까운 교훈집이다.
본서는 주제가 서로 다른 명제를 나열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서로 비슷한 내용의 단절어 를 연결하기도 하며,
또 흔히 한 주제에서 다음 주제로 넘어 갈 때 양쪽에 나오는
공통적인 낱말을 `연쇄어’로 삼아 문장을 연결하기도 한다.
그리고 짤막한 문장과 직설성, 많은 비유와 명령법은 이 저서가 정열적이며 분명한 결정과
행동을 요구하는 설교자의 작품임을 드러낸다.
2. 저자와 집필상황 :
본서의 필자는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야고보 가운데 이 편지의 저자는 누구일까?
인사말 가운데 사도라는 명칭이 없으니 예수와 동기간인 야고보가본서를 집필 했을 가능성이 짙다.
그는 일찍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등장했으며
유태인들의 율법에 대한 애착을 가진 동시에 이방인 신자들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이 사실은 야고보서의 내용에 잘 들어맞는다.
그 분위기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팔레스티나의 유다주의를 지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본서를 가명작품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세련된 그리스어.
②70인역의 그리스어 구약성서의 사용.
③오랜 신자생활을 하다가 권태에 빠진 상태를 전제하는 실천의 강조.
④갈라디아서나 사 도행전에 등장한 야고보와는 달리 본서에는 율법의 준수를 요구하지 않는점.
따라서 야고보서의 친저성에 관해 확실한 판단을 내릴수 없다.
야고보서는 2세기 말에 작성된 무라토리 경전목록에 없다.
3세기 초에 오리제네스가 처음으 로 본서를 성서로서 언급한다.
그러나 4세기 말 이전까지는 본서를 정경으로 보지 않은 교부들이 많았다.
그러다가 16세 기에 이르러 마르틴 루터가 다시 본서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 까닭은 루터가 일방적으로 따른 바울로의 신학에 비해서 야고보서는
선행을 너무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개신교에서 본서를 경전목록에서 뺀 적은 없다.
본서의 수신인들은 팔레스티나 본토를 떠나서 사는 유대계 그리스인들이며
그 집필 연도는 예수의 동기인 야고보가 사형 받은 62년 이전이다.
그러나 이 편지를 가명작품으로 보는 학자들은 그 연대를 80년 이후로 내려잡는다.
3. 내용 :
본서의 윤리적 교훈들은 그 성격상 구약과 유태교 윤리관과의 지속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윤리관은 공동체의 질서와 개개인의 생활을 하느님의 말씀과 게명에 따라 규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형제애와 기도, 그리고 세말에 이루어질 하느님 심판에 대한 각오와 기대가 강조된다.
그리고 예언자들의 전통을 이어 야고보는 치부를 경계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선다.
이 점들은 모두 예수의 윤리적 교훈, 특히 산상설교의 내용과 잘 통한다.
야고보는 신앙의 실천을 강조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바울로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인상을 줄수 있다.
같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근거로 해서 야고보는 인간의 의화가 행실이 없어
오직 신앙으 로 말미암아 실현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양자가 반박하려는 오류들이 다르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바울로는 유태인들을 상대로 인간이 율법준수로
하느님의 구원을 살수 없다는 진리를 증명하려고 한 반면에,
야고보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신앙이 쓸데없는
신앙 또는 사이비 신앙이라는 사실을 설명한다.
여기서 야고보는 바울로를 직접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로의 본 의도를 잘못 알아듣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그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선행의 필요성을 아예 부정하기에 이른 사람들을 반대하는 것이다.
실상신앙의 실천을 요구하는 데 있어서는 야고보와 바울로는 완전히 일치 한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야고보서는 어떤 책인가요?
야고보서란 이름은?
야고보서는 공동(catholic)서간에 속하는 첫번째 편지입니다.
13개의 바오로 서간은 모두 이 편지를 받는 개인이나 교회 앞으로 편지를 띄우지만,
공동서간은 이 편지를 받는 지역이 명기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누가 편지를 띄우는지만 첫머리에 밝혀져 있지요. “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가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인사를 드립니다”(야고 1,1)는 내용에 따라
‘야고보서’란 현재의 책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어요.
누가 썼나요?
야고보서에 대해 명확한 언급을 한
최초의 교부인 오리게네스는 이 서간의 저자를 단순히
‘야고보’ 또는 ‘사도 야고보’라고 밝히고 있어요.
유세비우스는 이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사도 15,13; 21,18)며
“주님의 형제”(갈라 1,19)로 여겼지요.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야고 1,1)이라고 야고보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이며,
“자유를 주는 완전한 법”(야고 1,25)을 지키라는 권유가
유다교의 율법을 철저히 지켰던 야고보(사도 15,13-21; 21,18-24)를 연상케 했기 때문이죠.
나아가 사도 15장에 나오는 야고보의 설교와 문체가 서로 비슷할 뿐만 아니라,
팔레스티나의 기후현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가을비와 봄비”(야고 5,7)라는
언급도 이런 추정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아요.
서간에 쓰인 그리스어 문체가 갈릴래아 농부 출신치고는 너무 유창할 뿐 아니라,
주님의 형제로 오래도록 생활해 온 것에 비해서는 예수 자신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으며,
‘율법의 효력’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으면서
믿음과 행동을 다루고 있음이 의아하다는 점을 들어,
익명의 저자가 야고보의 이름을 빌어 집필했을 거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어요.
언제 쓰여졌나요?
야고보서의 집필연대는 저자가 누구인지에 따라서 크게 달라져요.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가 썼다면 야고보가 순교하기 전에는 집필되었을 거에요.
야고보는 페스도와 알비누스가 유다 총독으로 이취임하던 62년
또는 베스파시안 황제가 팔레스티나를 점령해 들어오던 67년에 숨졌을 것으로 추정되어요.
반면에 야고보서가 차명서한이라면, 1세기 말이나 2세기 초에 집필되었을 거에요.
왜 썼나요?
교회는 지역상으로도 도시와 농촌에 걸쳐 있고,
직업상으로도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그 안에 모여들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들의 생김새나 차림새를 보고 박대하거나,
선행은 뒷전에 밀쳐놓은 채 믿음만이 최고라는 환상을 갖기 쉽지요.
이에 야고보는 진정 하느님의 자녀라면 가난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이해야 하며,
주님 앞에서 겸손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이웃을 위해 사랑을 실천해야 함을
일러주고자 이 서간을 집필했어요.
-(가톨릭홈에서)-
야고보서 입문
야고보서는 언뜻 볼 때에
특이하거나 신비로운 면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서간 역시 당시에 통용되던 서한체로 시작하는데, 먼저 서신을 보내는 이가 자기 이름을 밝힌다.
이어서 필자가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임이 드러난다.
그는 훌륭한 그리스 말을 구사한다. 2장과 3장에는,
당시의 대중 철학에서 가끔 이용하던 문학 유형으로,
‘디아트리베(diatribhj)’라고 불리는 생생한 연설조로 쓰인 여러 가지 짧은 설명도 나온다.
그리고 구약성서를 인용할 때에는 줄곧, 히브리 말로 쓰인 본문이 아니라
그리스 말로 번역된 칠십인역을 이용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 문헌이 헬레니즘 세계에서 쓰였음을 가리키는 단서이다.
필자는 2,14-26에서 바오로의 교리와 관련하여 논쟁을 펼친다.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바오로의 교리를 바탕으로 실천은
아예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잘못된 해석을 맹렬히 논박한다.
이로써, 바오로 사도의 선교 활동이 큰 성공을 거둔 1세기 중엽 이후에
이 문헌이 쓰였다고 확실히 추정할 수 있다.
반면에, 정치는 조금도 시사되지 않고 예루살렘 성전도 전혀 언급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유다 지방에서 독립 항쟁이 일어나고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는 66-70년과
그 이후의 십여 년은 저술 시기에서 배제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야고보서에는 바오로와 요한의 서간들의 가치와 매력을 드높이는
교리 설명에 비견할 만한 내용이 들어 있지 않다.
물론 그 서간들이 지닌 여러 가지 어려움도 내포되어 있지 않다.
야고보서는 때로 진부하기까지 하고 게다가 대부분 당시의
헬레니즘 도덕에서 빌려 온 교훈만을 역설하는 것처럼 보인다.
1. 야고보서의 문제
야고보서가 이렇게 전반적으로 명백하게 보이지만,
그 뒤에는 여러 가지 난해한 문제가 숨겨져 있다.
교회 전통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오로 사도의 서간들에 부여하던 것과 같은 권위를 야고보서에도 인정하는 것을 가끔 주저하였다.
베드로 1서와 요한 1서는 1세기부터 모든 사람에게 성서로 인정을 받는다.
반면에 야고보서는 3세기 초엽에 와서야 비로소 신약성서 안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그 뒤 동방에서는 야고보서의 경전성에 관하여 거의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지지만,
서방에서는 오랜 논쟁 끝에 4세기 말에야 경전으로서의 권위를 얻게 된다.
종교 개혁 시대에 와서 루터가 이 서간을 둘러싼 논의에 다시 불을 지핀다.
그는 이 서간의 교리가 ‘사도적(使徒的)’인 면에서 매우 빈약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루터는 가끔 이 서간을 그리스도교 경전에서 떼어 놓아야 하는
유다교 문헌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렇게 극단적인 입장은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 역사를 통하여 이 서간이 그리스도교 성서로 인정받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1세기의 그리스도교 신학에는 큰 흐름이 여럿 있었는데,
야고보서는 그 안에 들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 서간은 전통적으로 “주님의 동생”(갈라 1,19 각주 참조) 야고보가 쓴 것으로 여겨져 왔는데,
이 역시 문제를 안고 있다.
이 야고보는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인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는(마르 3,18과 병행구) 다른 인물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예루살렘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던
“주님의 동생” 야고보는(사도 12,17; 15,13-21; 21,18-25; 갈라 1,19; 2,9.12 참조)
순수한 팔레스티나 사람으로 그리스 문화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던 것 같다
(특히 에우세비우스, 「교회사」 II, 23,4-18 참조).
이러한 야고보가 이 서간처럼
그리스적인 성격이 명백한 작품을 썼으리라고는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가 말 그대로 이 서간을 직접 집필하였다는 것은 개연성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주님의 동생” 야고보가 이 서신을 집필하였다는
전통적 견해는 매우 오래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 왔었기 때문에 한 마디로 제쳐 놓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이 견해는 야고보서가 전체적으로 다 그리스적이지는 않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사실 이 서간에서도 셈족 말식의 어휘나 문법을 볼 수 있는데,
그러한 것들이 그리스 말로 된 칠십인역의 영향 때문만은 아님이 분명하다.
특히 1장과 4─5장에서는 성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특수한 표현 방식이 많이 쓰인다.
짧은 문장들이 이어지는데, 그것들이 앞뒤에서 똑같이 나오는 동일한 낱말로 서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는 헬레니즘 문학 규범에 별로 부합하지 않는 방법이다.
그리고 야고보서는 집회서와 유사성을 보이는데,
이는 성서의 지혜 문학서들과 접촉이 있었음을 생각하게 한다.
종말론의 여러 주제,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심판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은(2,12-13; 4,12; 5,9-12) 팔레스티나의 유다교와
예수님의 가르침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할 때,
“주님의 동생” 야고보가 이 서간에 자기 흔적을 남겼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야고보가 그리스 말을 모국어로 하는 비서에게
자기 가르침에 따라 자기 이름으로 이 서간을 집필하게 하였다고 생각한다.
다른 학자들은 앞의 것보다 개연성이 더 큰 다른 가설을 제시한다.
곧 야고보의 어록 같은 것이 전승되었는데, 규모가 훨씬 작기는 하지만
공관 복음서 전통과 비교할 수 있는 이 전통을 어떤 저술가가 이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저술가는 유명한 인물의 이름으로 글을 내는 당시의 문학 관습에 따라
이 문헌을 “주님의 동생” 야고보의 작품으로 내놓았다는 것이다.
이 가설이 맞을 경우, 야고보서의 집필 시기를 80-90년으로 잡게 된다.
현대의 주석가들은 야고보서의 수신인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민감한 문제를 지적한다.
이 서신은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보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1,1).
이를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유다인들이 야고보서의 수신인이 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단 두 번 언급되는데(1,1과 2,1), 그것도 그냥 스치듯 지나가 버린다.
이를 바탕으로 어떤 학자들은 야고보서가 본디는
순전히 유다교적인 문서였는데 후대에 이를 그리스도교 문헌으로 만들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덧붙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상당히 모험적인 이 가설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 가설로는 2,14-26, 곧 유다교와 전혀 관련 없이 바오로 이후에 전개된
그리스도교 교리 논쟁을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핵심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필자가 그리스도인임은 확실하지만,
그리스도인인 필자가 그리스도께서 이토록 희미한 역할을 하는 글을
어떤 사람들에게 보낼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이들은 틀림없이 그리스 문화 속에 살면서도 자기들이 예전에 속하였던
유다교 회당과 계속 관계를 유지하던 그리스도인들임에 틀림없다.
여기에는 그리스화한 유다인, 그 가운데에서도 에세네파의 경향을 지닌
유다인들도 포함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에세네파에 관해서는 「마태오 복음서」 신약성서 입문, 33-34쪽 참조).
이는 그리스도인들과 에세네파 유다인들의 공통 관심사에 주의를 기울일 때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곧 도덕적 법에 관한 열성, 이상화한 청빈, 강렬한 종말론적 고대,
구약성서에서 계시된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 등이다.
2. 집필 배경
그리스도인들과 에세네파의 경향을 지닌
유다인들을 결합시킬 수 있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들이 공동으로 실천하는 윤리이다.
여기에서부터 야고보서가 도덕적 문제에 부여하는 우월적 중요성,
그리고 유다교적인 주제와 그리스적인 주제의 긴밀한 배합이 나온다.
이러한 배합을 통해서 야고보서의 교훈이 그리스계 유다교와 연계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야고보서의 필자가 가르치는 윤리가 모든 사람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그저 그렇고 그런 평범한 도덕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전락한다는 뜻은 아니다.
야고보서의 윤리는
독창적인 면들을 지니고 있으며, 그러한 것들이 이 서간을 돋보이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섬기는 방식과 관련하여 2,1에서 3,12까지 펼쳐지는
세 가지 설명이 그러하다.
곧 신자들의 자리 배치(2,1-13),
한 입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이웃에게 악담하는 괴리의 극복(3,1-13),
그리고 전례에서 재확인되는 형제애에 이어져야 하는 구체적 실천이다(2,14-26).
이 세 단락에서는 바오로 계통일 것으로 여겨지는 몇몇 교회에서 일어난
나쁜 관습에 대해 매우 날카로운 논박이 전개된다.
이 교회들은 또한 유다교와 가장 완벽히 결별한 곳이었다.
야고보서가 제시하는 윤리의 또 다른 독창성은 부자들에 대한
극도로 엄격한 비판이다(1,9-11; 2,5-7; 4,13-17; 5,1-6).
이 비판은 부자들을 눈앞에 두고 직접 말로 하기에는 너무 치밀하고 강렬하다.
처음부터 글로 쓰였기 때문에 이러한 말투가 가능하였을 것이다.
이 단락에 나오는 두세 가지 표현은 이 맹렬한 비판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일부 유력한 유다인들에게 가해지는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2,6-7; 5,6).
그래서 야고보서의 필자는 두 방향으로 투쟁을 전개하는 것 같다.
한쪽은, 너무 맹목적으로 바오로 사도에 대한 기억에 집착하는 여러 교회이다.
또 다른 쪽은 부유한 유다인들이다. 이렇게 해 나아가면서,
필자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수수한 신분의 유다인들을 통합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그에게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함께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60-65년에도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80년 이후,
그리고 디아스포라의 유다교 회당들이 바리사이적 유다교로 결집되기 시작하는
90년대 이전이 더 적절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대상으로 그리스 말을 쓰는 디아스포라 전체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서간 자체는 지중해변의 가이사리아나 갈릴래아 호수변의 티베리아처럼,
팔레스티나 지방에 있으면서도 그리스 말을 쓰던 고을에서 집필되었을 수도 있다.
유다교와 그리스도교를 분명하게 구분짓는 데에 익숙한 현대의 독자들에게는,
이러한 접근을 시도할 수 있게 하였던 사고 방식을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교회 일치 운동과 유다교-그리스도교의 화해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는 이 때에,
그리고 한 국가 안에서는 빈부의 격차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벌어지기도 하고 국제적으로는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가
더 뚜렷이 구분되는 이 시대에,
야고보서가 어떤 가르침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리고 갈라진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양쪽으로 이 서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촉진된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다.
개신교 쪽에서는 한때, 야고보서에는 복음적인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고(루터)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이 불충분하다고 하면서 이 서간을 경시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부정적인 자세가 바뀌었다.
가톨릭 쪽에서는 병자성사를 정당화하는 데에(5,14-15 참조), 그리고 더 유감스럽게도,
믿음을 통한 구원이라는 개신교의 교리를 논박하는 데에(2,14-26) 이 서간이 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이 글에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3. 구 성
야고보서에서는 2,1과 3,13에서 확인되는
문체의 변화가 시사하는 것 외에는 확실한 구조를 찾아볼 수 없다.
이 두 지점 사이에 펼쳐지는 서간의 중심 부분에는 상당히 일관성 있는 세 단락이 들어 있다.
이 세 단락은 내용과 형식의 공통성으로 결합된다.
내용상으로는, 셋 다 바오로 전통에 속하는 몇몇 교회에서
거행되는 경신례를 공통적으로 비판한다.
형식상으로는, 앞에서 말한 일종의 ‘도덕 논쟁’이라고 할 수 있는
‘디아트리베’라는 문학 유형에서 자주 쓰이는 수사학적 방식을 공통적으로 이용한다.
곧 청중을 부르는 것이라든가 질문하는 것, 그리고 가상의 대화 상대자와 토론을 벌이는 것 등이다.
반면에 1장에는 짧은 구절들이 명백한 순서 없이 나열되어 있다.
다만, 가끔 ‘연결 낱말’이 한 문장의 끝과 다음 문장의 시작을 이어 줄 따름이다.
3-4절의 “인내”, 4-5절의 “모자람”, 12-13절의 (그리스 말에서는 어근이 같은) “시련”과 “유혹”,
26-27절의 “신심” 등이다. 3,13에서 시작하는 셋째 부분은 더욱 잡다하다.
그 안에는 (4,1-10.13-17; 5,1-6.7-11처럼) 근거 제시가 빈약한 말이나
문맥과 직접 관련없는 문장이 차례 없이 뒤섞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무질서’는 교훈 부분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필자는 이러한 무질서 속에서도 (물론 번역본에서는 재생시킬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두운(頭韻)과 각운(脚韻)이라든가 운율 있는 말마디 등 문체상의 여러 기교를 노련하게 구사한다.
그리고 이 무질서는 필자가 적어도 서간의 몇몇 부분에서 이용하는
전통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전통이 (산상 설교와 야고보서 사이의 숱한 병행구가 시사하듯이)
예수님의 말씀이든 야고보의 어록이든,
그 자체에는 문학적 구조가 없었음에 틀림없다.
필자 자신도 어떤 구조에 따라 그것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것 같다.
그는 이런 유형의 글에서는 전체적인 인상과 세부 사항의 질이 중요할 뿐
잘 다듬어진 구조는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질서가 없다고 해서 힘이 없거나 매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톨릭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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