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셩 예레미야 예언자
ST. JEREMIAH
San Geremia Profeta
Old Testament prophet.
Born :c.760 BC
Died :stoned to death c.705 BC at age 55 in Egypt; relics at Venice, Italy
(Anatot, Gerusalemme, 650 a.C. - Egitto, 587 ca. a.C.)
Geremia = esaltazione del Signore, dall’ebraico = exaltation of the Getlteman,
dall’ebraico
예레미야서
라틴어 Prophetia Jeremiae
영어 Book of Jeremia
만일 성서에 이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유다이즘과 그리스도교는 그 종교적 본질 을 아주 달리 했을 것이다.
예레미야(Jere-mias, 기원전 650∼588)가 마음과 인격의 종교를 주창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예언자 이사야보다 1세기 뒤에,
그러니까 기원전 650년경 예루살렘 근교의 어느 사제가문에서 출생하였다.
성서는 예레미 야의 생애와 성격을 그 어느 예언자들 보다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예레미야를 3인칭으로 묘사하는 이야기들[傳記]이 성서에 다수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예레미야서의 다음 장(章)들을 직접 읽어보기 바란다.
예레미야서 19:1∼20:6과 26.36.45.28-29.51-59-64, 34:8-22.37-44
(이 본문들은 시대적 순서를 따른 것이다).
또 다음의 구절들은 `예레미야의 고백록’이라 부를 수 있으니,
예언자가 체험한 내적인 갈등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레미야서 11:18-12:16, 15:10-21, 17:4-18, 18:18-23, 20:7-18. 이 `고백록’은
예언자의 은밀한 체험에서 터져나온 외침으로서 시편의 탄원시의 문체와도 비슷하다.
예레미야는 기원전 626년 그러니까
요시야왕 치세 제13년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젊은 예언자로 나섰다(예레 1:2).
그는 유대왕국의 멸망이 예견되었고 드디어는
예루살렘의 몰락을 초래한 비극적 시대를 살고 있었다.
요시야왕의 종교개혁과 주권회복은 유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 주었지만,
불행하게도 609년에 그 왕이 므기토에서 전사하게 됨으로써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고대종동의 세계는 또다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으니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 612년에 함락됨으로써 바빌론제국이 세력을 구축하게 되었다.
바빌론왕 느브갓네살은 팔레스티나를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집트는 유대왕국을 사주하여 바빌론의 지배에 항거하도록 하였으니,
느브갓네살은 597년에 예루살렘을 함락하였고 주민의 일부를 유배지로 끌고 갔다.
이집트의 조종에 끝내 놀아난 유대는 또다시 바빌론 세력에 항거하였다.
587년에 바빌론군대는 한 번 더 예루살렘에 쳐들어와 성전을 파괴하였고
저항세력의 지도자들을 또다시 유형지로 끌고 갔다.
예레미야는 이 어두운 시대의 역사적 비극을 모두 지켜 보았다.
그가 이 비극을 좌시한 것은 아니었다.
예언자는 지도자와 민중에게 하느님 말씀의 대변자로 나서서 맹렬히 설교했고 위협했으며
왕국의 몰락을 예고했던 것이다.
다윗의 왕좌를 차지했던 유대의 왕들은 예언자의 이 불칼 같은 경고를 아예 무시했으며
또 군인들은 예레미야가 패배주의를 선동한다고 비난하며
그를 박해하고 고문하며 투옥시키기까지 하였다. 드디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 강기슭에 유배가 있던 사람들(시편137)에게서 희망을 보았지만
망명하는 것을 끝내 거부하고 고국 땅 팔레스티나에 머무르기로 하였다.
그의 보호자는 바빌론인들이 임명한 총독 게달리야였다.
하지만 유태인의 한 무리가 총독을 암살하기에 이르렀으니,
그들은 바빌론인들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예레미야를 인질로 삼아 이집트로 망명하였다.
아마도 예레미야는 이집트에서 소리없이 죽어간 것 같다.
이 험난한 운명의 사이의 드라머는 단순히 사건들만을 반영하고 있지는 않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전생애가 일종의 비극이다.
시애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끝까지 그 말씀에 충실하다 보니
예레미야는 그야말로 `말씀의 고독한 예언자’가 되고만 것이다.
그는 성품이 온순했고 사랑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야훼는 그에게 `무너뜨리고 파괴하며 전복하고 없애버리는’ 사명(1:10)을 주셨다.
그의 예언은 끝없는 불행만을 예고하였다(20:8).
예레미야는 평화를 원했건만 자기 가족과 왕들과 사제들, 그리고 거짓 예언자들과
모든 민중을 반대하여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예레미야는 "온 나라 안에서 싸움과 불화의 사나이로 통한 것"이다(15:10).
그가 이같은 사명을 수행하기 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에레미야는 말씀에 의해 완전히 가루가될 뻔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20:9).
하느님과의 내적인 대화는 온통 고통의 외침이었다.
"무엇 때문에 나의 고통은 끝이 없나이까?!"(15:18)
욥의 저주를 예고한 예레미야의 그 외침은 고백론의 절정이다.
"내가 태어난 그날은 저주받을지어다!"(20:14이하).
하지만 이 고통은 예레미야의 영혼을 정화시켰으니 하느님과의 내밀한 친교를 가능케 하였다.
우리에게 이 예언자가 그토록 귀중하고 가까운 인물로 나타나는 것은
새로운 계약을 성문화시켜 예고하기에 앞서(31:31-34)
자신이 먼저 마음의 종교와 내적인 종교를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인격적 종교는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종교의 가르침을 심화시켰다.
하느님은 마음과 콩팥을 꿰뚫어 보시는 분(11:20)이요, 각자의 행실대로 갚아주시는 분이다(31:29-30).
하느님과의 우정은 인간의 거짓스러운 마음의 소산인 죄에 의해 끊어진다.
거짓말이 모든 죄의 뿌리란 것을 예레미야만큼이나 강조한 사람은 없다(4:4, 17:9, 18:12).
이 점에 관한 한 예레미야는 호세아 예언자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 같다.
율법은 그에 의해 내면화되었으며
또 하느님과의 모든 관계는 마음의 소산임을 그가 밝혔기 때문이다.
예레미야가 인간의 개인적 인격에 큰 관심을 둔 것으로 보아 신명기(申命記)의 영향을 받은 것같다.
물론 그가 신명기에 바탕을 둔 요시야왕의 개혁을 처음에는 환영하였으나
마음의 회개가 없는 제도적 개혁이 무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민중의 윤리적 종교적 삶을 변혁시키기 위하여 내적 인간의 개조없이는 불가능함을
예레미야가 간파하였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사명은
살아 생전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으나
죽은 뒤의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만 갔다.
마음의 종교에 기초를 둔 `새로운 계약의 사상’은
예레미야로 하여금 유다이즘의 아버지가 되게 하였다.
우리는 에제키엘서와 제2이사야서(40-55)와 시편들에서도 그의 영향을 찾아 볼 수가있다.
마카베오 시대의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민족의 수호자들 중의 한사람으로 꼽았다(2마카 2:1-8, 15:12-16).
예레미야는 힘과 물질보다는 영성적 가치를 더 중대시하였고 또한 영혼이
하느님과 맺은 내밀한 관계를 밝혔다 하여 이 예언자는
그리스도교의 새 계 약을 준비한 인물로 통한다.
말씀에 대한 정열적인 사랑과 말씀 때문에 당한 그의 고통은
이사야서 53장의 야훼의 종의 모습을 예고하였으니,
예레미야는 그리스도의 형상(形象)을 앞질러 보여 준 것이다.
예레미야의 영향은 막대하였으니,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의 말씀을 읽고 명상하며 또 해석하였다.
하여 그의 책, 예레미야서는 단번에 쓰여진 것이 아니다.
예레미야서는 시문(時文)으로 쓰여진 신탁(神託)과 전기적 이야기들 뿐 아니라
신명기와도 비슷한 문체로 쓰여진 산문(散文)의 연설들도 많이 수록하고 있다.
그중의 어떤 본문들은 예레미야의 친저(親著)가 아니라
유배 이후의 신명기적 경향을 띤 편집자들의 작품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모든 작품들이 예레미야의 신학과 설교의 사상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으니,
신명기를 알고 있던 예레미야의 제자들과 청중들이 수집한 예언자의 전언(傳言)임이 확실하다.
문제는 예레미야적 전승이 하나의 형태로 전수되지 아니 했다는 것이다.
성서의 그리스역본은 마소라 본문보다는 8분의 1가량 짧게 예언자의 말씀을 수록하고 있으니
그 세부묘사도 서로 차이가 있다.
쿰란(Qumran)의 발견은 원래 예레미야서의 두 가지 대본이 히브리말로 쓰여졌음을 전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역본은 25:13의 뒤에 수록된 민족들에 대한 신탁들을
히브리성서의 순서와는 달리 예레미야서의 끝부분 곧 46∼51장으로 옮겨 배치시키고 있다.
이 예언들이 처음에 특수한 문집(文集) 안에 수록된 것같다.
어떻든 그 문집의 전체가 예레미야의 전승 안에서 연유한 것이라 볼 수가 없다.
가령 모압가 에돔에 관한 신탁들은 해석의 흔적이 매우 뚜럿하며, 또 바빌 론에 대한 긴 신탁,
50∼51장은 유배시대의 끝에 가서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52장은 2 열왕기(列王記) 24:18-25:30 에 병행하는 내용으로서 일종의 역사적 부록이다.
그 밖에 여러 가지 작은 문헌들이 예레미야서에 삽입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바빌론에 유배가 있던 사람들과 새로 탄생한 유다이즘의 공동체들이
얼마나 예레미야를 존중했는가를 입증하고 있다.
편집자들은 여러 가지 사건과 예언을 이중적으로 수록하고 있다.
예레미야서는 시대에 대한 지시사항을 많이 기록하고 있지만 엄격한 의미로
연대기의 순서에 따라 그 본문들을 정리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가 알 고있는 이 책의 무질서한 배치는 오랜 시간 동안의 편집작업이 낳은 결과이다.
또 그 편집과정을 역사적으로 세밀하게 밝히 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36장은 매우 중댜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605년 예레미야는 비서 바룩을 시켜
자신의 소명 초기부터(626년) 발설한 신탁들을 받아 적게 하였다(36:2).
이 신탁들이 적힌 두루마리를 여호야킴왕이 불태웠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불타버린 신탁들을 다시 보완하여 썼다(36:32).
이 문집의 내용을 파악하는 것은 일종의 가설에 불과하다.
그 가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아마도 그 문집은 25:1-12을 서문으로 삼고
1∼18 장 안에 들어 있는 605년 이전의 신탁들을 묶었을 것이다.
36:2에 따르면 예의 문집은 25:13-38이 암시하고 있듯이
민족들에 대한 옛 신탁들도 포함시키고 있는 것 같다.
또 보충문헌들이 문집에 첨가되었으니 그 내용은 605년 이후의 문헌과
민족들에 관한 다른 신탁들이다.
또 거기에 `고백론’이 삽입된 것 같다.
그 다음에 따로 수집한 문헌으로서 왕들과 (21:11-23:8) 예언자들(23:9-40)에 관한 소책자가
거기에 삽입되었다.
예레미야서는 다음의 장들로 구분시켜 볼 수가 있다.
제1부 : 1∼20장. 제 1부는 전반적으로 시대순서를 따르고 있으며 25:1-13로 연장된다.
이 연장부분은 1∼20장의 결론이다. 20장과 25장사이에, 21:1-10과 24장은 왕들과(21:11-23:8)
예언자들에 관한 소책자(23:9-40) 들을 끼어들게 하고 있다.
제2부는 25:13-38에서 시작되는 민족들에 관한 신탁들을 수록하고 있다.
제2부는 46∼ 49장에 와서 다시 연장되며, 또 여기에 바빌론에 관한 신탁(50-51:58)이 첨가되었도
또다시 전기(傳記)의 소단위 (51:59-64)가 부연되었다.
제3부는 편집자가 `구원의 약속’으로 간주한 본문들(26-35)을 순서없이 수록한 것이다.
제4부는 전기적(傳記的)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본문은 36∼45장에 이른다.
45장은 전기에 대한 예레미야의 비서 바룩의 결론이다.
52장은 예레미야서의 부록에 해당하며 기원전 587∼586년의 참변을 묘사하고 있으며
또 여호야 킴왕의 출감을 보도하고 있다.
-(가톨릭대사전에서)-
Jeremiah-DUCCIO di Buoninsegna
1308-11.Tempera on wood, 42,5 x 16 cm.Museo dell’Opera del Duomo, Siena
예레미야 입문
1. “말씀의 사람”과 고독
예레미야서의 저자로 알려진 예레미야 예언자는 스스로를 외톨이로 소개한다.
“저는 홀로 앉아있나이다”(15,17).
이 말은 예언자가 자신과 외부 사회의 관계를 묘사하는 전형적 표현이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에게 이해를 받지 못하고 박해를 받았으며,
심지어 그를 두둔하고 격려해 주어야 할 친지들,
특히 가족들에게서조차도 사랑을 받지 못했다(12,6; 20,10).
그는 그들과 함께 혼인잔치에도,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다(16,5-9).
그는 혼인도 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될 수도 없다(16,1-4).
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하며,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에집트로 끌려가다가
타향에서 생애를 마치게 된 그의 무덤을 아무도 찾아내지 못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레미야서에서 예언자의 내적 삶에 관한 매우 풍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예레미야의 고독은 그의 본성과 전혀 관계가 없다.
그의 고독은, 그를 압도하고 갑자기 그에게 몰려와 그의 존재 전체를 채우며 그를 괴롭히고
그의 의지를 온전히 사로잡은 외적 힘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이 외적 힘은 예언자에게 유다 백성 한복판에서 고독을 행동 양식으로 삼도록 강요한다.
이 어찌할 수 없는 힘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었다.
어떤 예언자도 예레미야만큼 하느님의 말씀과 그 실천 방안을 철저하게 알리지 못했다.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1,4).
이 말은 예레미야가 자신의 담화를 소개하고 규정하는 통상적인 표현이다(1,2 각주 참조).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었나이다”(15,16).
때로는 이 말씀이 파괴자가 된다.
“내 심장이 내 안에서 터지고 / 내 모든 뼈가 떨린다. / 나는 술 취한 사람처럼 /
술에 전 인간처럼 되었으니 / 이는 주님 때문이요 /그분의 거룩한 말씀 때문이다”(23,9).
예레미야는 “불과 같고 바위를 부수는 망치와 같은”(23,29. 그리고 20,9 참조)
이 도발적인 말씀을 일상적 체험이 따르는 환시에서뿐 아니라(1,11-14 참조),
주님의 천상 어전회의에서도 받는다(23,18.22. 그리고 5,1과 각주 참조).
이 어전회의에 예레미야는 예언자의 자격으로 참석할 수 있었다.
게다가 주님께서 직접 말씀을 예레미야의 입술에 담아주시고(1,9)
이 말씀이 고집센 이스라엘 백성을 삼킬 때까지(5,14) 지켜보신다(1,12).
때때로 말씀이 그를 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말씀이 드물게 그를 찾거나,
다시 그에게 내릴 때까지 형벌처럼 그를 오랫동안 기다리게 만든다(42,7).
예레미야의 삶에서 말씀은 해결의 열쇠인 동시에
골칫거리요, 흥을 깨뜨리는 자인 동시에 존재 이유이며,
그 자신과 친지들을 갈라놓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사건의 한복판으로
그를 빠져 들게 만드는 전제군주다.
우리는 여기서 예레미야가 이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그리고 이 말씀 앞에서
자신이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끊임없이 기울여야 했던 노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노력의 흔적은 이 책 곳곳에 들어있는 수많은 대화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거기서 예레미야는 예언자로서 자신의 삶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하느님과 격렬한 논쟁을 벌인다.
그 가운데 가장 빼어난 것들은 현대의 주석가들이 ‘예레미야의 고백’이라고 부르는 대목들이다
(11,18 - 12,6; 15,10.15-21; 17,14-18; 18,18-23; 20,7-13.14-18).
이 다섯 고백에서 예언자는
자신의 고립과 소외, 열악한 주변 환경에 대하여 신랄한 불평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그는 이런 삶의 조건이 어쩔 수 없는 것이며 그 자체가 예언직의 일부라는 사실을
주님에게서 들어 확인할 뿐이다.
한편 예레미야의 다섯 고백만이 예언자 자신과 하느님 사이에 오간 대화의 전부는 아니다.
이 책에는 처음부터 다른 형태의 대화도 나온다.
예레미야가 성소를 받는 장면에서도 대화가 대부분인데,
여기서 그는 아직 나이가 젊다는 핑계를 대면서
말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헛되이 발버둥친다(1,4-10).
그의 예언직을 규정하는 초기 환시들(1,11-14),
그에게 유다 사회에 대한 하느님 심판의 정당성을 인정하게 해주는 대목(5,1-`6),
이스라엘을 황폐케 하는 가뭄을 그치게 하려고 헛되이 노력하는 대목(14,1―15,9)들도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대화들을 보면 사람의 말이 하느님의 말씀과 고투하다가 결국 승리하는 쪽은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임이 드러난다.
역사적으로 그 전개 과정이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든지` - `
예언 체험을 심리학적으로 탐구해 들어가기란 쉽지 않다 -
이 모든 대화는 예레미야가 줄기차게 몰두한 대상이 하느님의 말씀이었음을 증언한다.
2. 예언직 소명의 진정성
예언자의 실존을 뒤흔드는 모든 문제 가운데 예언직에 대한 확신보다 더 큰 문제는 없다.
사실 예레미야만이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한 사람은 아니었다.
예레미야서 자체만 보더라도 예레미야와 같은 자격으로 그 곁에서 예언자로서 지위와 특권을
주장하던 사람들의 활동도 소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26,20-24), 아쭈르의 아들 하나니야(28장),
콜라야의 아들 아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키야(29,21),
그 밖에 수많은 무명의 예언자들(2,8.26.30; 4,9; 5,13.31; 6,13-14; 14,13; 26,7-16; 27,16-18),
바빌론으로 유배 간 예언자들(29,1) 등이 그들이다.
예레미야서 본문을 보면 처음에 이 예언자는 자신의 동료 예언자들과의 관계에서
유달리 눈에 띄는 행동을 할 뜻이 전혀 없었다(14,13-16; 28,6-9; 29,1 참조).
그는 한번에 그들을 ‘거짓 예언자들’로 분류할 아무런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예레미야의 고독과 관련하여 미묘한 특성을 만나게 된다.
예레미야는 고독을 자초한 적이 없었다.
그는 특정한 몇 가지 윤리적 비판을 제외하고(23,14.17.22; 29,23) 참과 거짓을 구별하고
스스로 참된 예언자라고 여기는 자들 앞에서
자신의 고유한 메시지를 특별히 옹호하는 어떠한 객관적 비판도 내놓지 않았다(28,8은 예외).
예레미야 역시 그의 경쟁자 하나니야처럼 틀릴 수 있다(28,6-9).
하나니야는 당시의 정치와 군사를 책임진 대다수와 견해를 같이하였다(아래 4항 참조).
예레미야가 받은 특별한 소명의 진정성은
그가 자신의 삶 한복판에서 하느님과 얼마나 깊은 관계를 유지하느냐에 달려있다.
하느님께서 그의 메시지에 영감을 불어넣으신 분이라면, 어찌하여 그 메시지에 일관성이 없는가?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파견하셨다면,
어찌하여 그 혼자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혼자서 그 진리를 주장해야 했던가?
(여호야킴에 의해 살해된 예언자 우리야 같은 사람도 예레미야를 옹호해 주지 못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에게 임무를 맡기셨다면,
어찌하여 이 예언자는 사람들의 학대를 받아야 하는가?
오히려 사람들은 그를 동료 형제로 또는 자신들의 스승으로 기꺼이 떠받들고 환영해야 하지 않을까?
문제는 계시에 적합한 인물이 어떤 모습의 인간으로 드러나는가 하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정신적 갈등을 숨기지 않는다. 자신의 고유한 사명에 관한 한
그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그는 말씀에 충실히 동화되었고 심지어 그 말씀을 “받아먹기까지”(15,16 참조) 하지 않았는가?
그는 늘 완벽한 성실로 살아가지 않았던가?
그는 자신의 동료들뿐 아니라 원수들을 위해서까지 실제로 참 예언자처럼 중개하지(18,20.
그리고 14,13; 17,16 참조) 않았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그는 고독과 적응 불능과 영원한 반동의 슬픈 주인공으로 드러나는가?
하느님의 단호한 응답은 아무런 설명도, 아무런 정당화도 시도하지 않는다.
그의 모든 불행은 하느님께서 미리 마련하신 것으로서 갈수록 점점 심해질 것이다(12,5).
불만에 찬 하느님의 일꾼은 그분의 말씀이 다시 들리도록 개인적인 노력을 기울이면서
자신의 길을 되찾고 그 길을 성실하게 걸어야 한다(15,19-21).
다른 예언자들과 관련하여, 그들에게 아무런 임무를 맡기지 않으신(14,14-16)
주님께서는 그들의 거짓을 폭로하실 것이다(23,16).
그러나 예레미야 예언자의 영혼을 뒤흔드는 의심들을 없애버리시기 위하여
그분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진정 살아계신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구태여 확인시키려 하지 않으신다.
예레미야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자신이 예고한 재앙이 실현되는 것을 볼 것이다.
유다인들은 머지않아 자신들의 운명을 반성하게 될 것이다.
몇몇 정통한 신학자들은 예레미야의 신탁들뿐 아니라 그의 예언직과 관련된 전승들까지도
수집하게 될 것이고 마침내 그를 주님의 진정한 예언자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
-(입문 5항 참조)-
3. 몇 가지 전기적 사료
이상의 근본적인 갈등과 비교할 때
이 예언자의 삶과 연관된 외적 환경은 이차적인 관심사로 밀려난다.
또한 이 환경은 그리 잘 알려진 편이 아니며 주어진 자료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결론 또한 대부분 추론일 뿐이다.
1,1에 보면 예언자의 고향은 예루살렘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아나돗이라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그의 집안은 이곳에 토지를 갖고 있었다
(32장. 그리고 37,12 참조). 그는 사제 가문 출신이었다.
여기서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가 옛날 솔로몬에 의해 아나돗에 유배된 실로의 사제 아비아달의
먼 후손일 수도 있다는(1열왕 2,26-27) 가설을 끌어내었다.
나아가 조상이 물려준 종교적 전통과, 사라진 북부 왕국과 인접해 있는 지리적 조건은
그의 문체와 메시지 내용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가설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확실한 증거를 제시할 수는 없다.
1,2에 따르면 예레미야는 기원전 626년에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는데 아직 나이가 어린 때였다(1,6).
많은 사람들이 이 1장 2절과 6절의 자료를 바탕으로 그가 태어난 때를
기원전 650`?645년경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1,2(25,3에 다시 나옴)의 연대가 후대의 전승에 바탕을 둔 것이고
실제로 그가 성소를 받은 연대를 기원전 609 - 608년으로 잡아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어떻든 뚜렷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예레미야의
초기 예언활동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가설이 나온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가설들이다.
예레미야는 기원전 622년 요시야의 개혁을 진심으로 환영했고
자신의 설교로 이 개혁사업에 협력했을 것이다(11,1-4 참조).
개혁의 결과로 예루살렘 성전을 제외한
다른 모든 성소들이 문을 닫고 수많은 사제들이 할 일을 잃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예레미야의 친척들이 그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을 것이다(11,18-22 참조).
그러나 나중에 요시야의 개혁이 일시적 효과만 내고 끝나는 것을 보고 실망한 예레미야는
유다인들의 불충실을 강도 높게 비난하였을 것이다.
이런 가설들은 예레미야가 기원전 626년에야 성소를 받았다는 연대기 자료 때문만이 아니라,
이 책이 요시야의 저 유명한 개혁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22,15-16에
약간의 암시가 있다) 그리 큰 확신을 주지 못한다.
또한 11,1-14를 비롯하여 예레미야서 여기저기에 드러나는 신명기적 용어와 사상은
다른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입문 5항 참조).
결국 예레미야의 메시지에 대한 반발은 그를 통해 전파되었을(이 추측이 맞다면)
요시야의 개혁 정책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의 증언대로 그의 중개를 통한 하느님 말씀의 갑작스런 개입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11,21; 예레미야의 다른 고백들 참조).
우리로서는 아무리 그것을 얻으려 해도 예레미야의 초기 예언활동에 대해
불충분한 자료만을 입수할 수 있을 뿐이다.
그 대신 그의 생애 마지막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서는 이 책의 뒷부분에서
상당히 자세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기원전 608년에 극도로 악화된 상황을 맞아 예레미야는 성전 어귀에서 설교하는데
그 장면이 26장에 잘 나와있다(7,1―8,3 참조).
기원전 605-`604년에 그는 자신의 기억 속에 간직한 신탁들을
바룩을 통하여 처음으로 두루마리에 적게 하였는데,
그 글이 몇몇 청중이 모인 자리에서 읽혀진다(36장).
기원전 594년 그는 다른 예언자들과 토론을 벌이고 조금 뒤에
바빌론에 끌려간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하는데, 이 편지는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의 정신적 쇄신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다(29장).
기원전 588-587년 예루살렘이 포위된 기간에 예레미야가 시드키야 임금과 그 신하들과 겪은 갈등,
그리고 이 도성이 함락된 뒤 살아남은 자들 가운데서 펼친 그의 활동상은
32 - 35장과 37 - 44장의 본 내용을 이룬다.
우리는 이런 갖가지 정보가 아무리 자세하다 하더라도 이를 바탕으로 예언자의 전기를
작성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본문 안에서 이런 정보들을 연대기순으로 정확하게 배열할 수도 없다.
이 정보들은 가장 어려운 역사의 현장을 체험한
한 민족과 더불어 고뇌하며 살았던 한 예언자의 실존 안에서 말씀이
어떤 형태로 활동했는지를 밝혀주는
실례들일 뿐이다.
4. 여러 해에 걸친 말씀의 봉사직
처음부터 예레미야의 봉사직을 특징지었던 고독은 특이한 종교적 체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고독은 그에게 맡겨진 메시지의 내용에서 나온 결과이다.
이 메시지는, 유다인들이 공동체를 부정하고 창조까지도 철저하게 부정하는
상황과 끊임없이 마주치게 만들었다(4,23-26).
모든 것의 긍정이나 부정은 그가 전하는 메시지의 수용이나 거부에 달려있었다.
이 점에서 그의 고독은 정치적 차원을 갖는다.
그의 고독이 지속되고 유다인들이 그의 말을 계속 거부하는 한 그는
우주적 재앙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생존자가 될 것이요,
반대로 그의 말을 듣는 청중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재앙은 비켜가거나
적어도 늦추어질 것이며 사람들은 새로운 삶의 형태와 만나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의 껄끄러운 메시지는 근본적인 결정을 명령조로 요구한다.
대부분의 다른 예언자들처럼 그에게도 말씀은 인간의 삶 전체에 영향을 주는 인격적 특성을 지니는
동시에 통교의 매체가 된다.
-(가톨릭홈에서.새번역성서)-
예언서란 어떤 성서인가요?
예언자란?
먼저 ‘예언’하면 우리는 즉시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서나 그 주변 문화권에서 일컫는 예언은 그런 것이 아니라
신의 뜻이나 그 메시지를 해석하고
선포하는 것을 가리켜요.
다시 말해 예언의 중점은 미래에 있을 일이 아니라 ‘지금 해야 할 일’에 있는 것이죠.
고대 문화권에서는 대개 예언자가 있었고, 신탁을 통해 신의 뜻을 밝히고
기억시키며 중재하는 일을 맡은 그들의 역할은 중시되었어요.
이스라엘에서도 일찍부터 예언자가 있었다고 보아요.
아브라함도 예언자라 불리지만(창세 20,7),
공식적으로 첫 예언자로 꼽히는 이는 모세이지요(신명 34,10).
하지만 이스라엘에서 예언자가 본격적으로 대두된 때는 왕정시대 이후에요.
왕과 사제 계급이 생긴 것처럼 예언자 층도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들과 별도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나서는 예언자들이 있었어요.
예언자의 구분
이스라엘에서 예언자는
사제들과 달리 세습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으로부터 영을 받아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이었기에, 그들이 참된 예언자인지 거짓 예언자인지를 분별하는 일은
중요하면서도 곤란한 문제였어요.
같은 예언자들끼리 서로 진위를 다툰 대표적인 경우가 아합 왕 때의
시드키야와 미가야(1열왕 22,13-28),
예레미야와 그를 박해한 거짓 예언자(예레 6,13; 18,18; 20,1-6; 23, 9-40) 들이죠.
결국 예언자의 진위는 그들의 예언이 이루어졌는가 여부와,
설사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참된 하느님의 말씀으로 기억되었는가에 따라 갈렸어요.
기준은 예언자를 구분하는 또 하나의 예언서를 남겼는가의 여부에요.
가령 엘리야와 엘리사 같은 위대한 예언자는 아무 글도 남기지 않았지요.
그러나 예언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기원전 8세기 이후에 활약한 예언자들,
이를테면 아모스, 이사야 등은 대부분 예언서를 남겼어요.
그래서 그들을 ‘문서 예언자’ 또는 ‘정경 예언자’라고 불러요.
이들을 활동시기에 따라 갈라보면 아래와 같아요.
1) 유배 이전 :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나훔, 미가, 스바니야, 하바꾹, 예레미야.
2) 유배 기간 : 제2이사야, 에제키엘.
3) 유배 이후: 즈가리야, 말라기, 오바디야, 요엘, 제3이사
예언서의 분류
그리스 성서와 라틴어 성서에서는 정경 예언자들의 문헌만 예언서라 불러요.
그러나 히브리 성서는 내용을 다룬 시기에 따라 둘로 구분해요.
즉 정경 예언서를 후기 예언서라 부르고,
그에 앞선 시기를 다룬 여호수아부터 열왕기 하권까지를 전기 예언서라 불러요.
그 까닭은 먼저 랍비 전승에 따라 사무엘, 예레미야 등의 예언자를
그 성서들의 저자로 보았기 때문이고,
또 그 성서들에 담긴 역사를 하느님의 예언이 성취된 과정으로 보기 때문이에요.
후기 예언서는 그 분량의 대소에 따라
대예언서 세 권(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과 소예언서 열두 권으로 분류하지요.
예레미야서는 어떤 성서인가요?
이 책은 예언자 예레미야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과 그의 행적을 적은 책이라 하여
그 이름을 따서 ‘예레미야’라 했어요.
후기 예언서 중 이사야, 에제키엘과 함께 분량이 많아 대예언서로 분류되지요.
예레미야는 대략 기원전 640년경에 아나돗의 사제가문에서 태어났어요.
아직 소년에 지나지 않았던
기원전 627년에 예언자로 불림받아, 이후 40여 년 동안 예언자 활동을 했지요.
그의 이름의 뜻인 “야훼께서 던지다, 급히 보내다”처럼,
그가 활동한 시대에 유다의 운명은 풍전등화 같은 위기에 처해 있었어요.
예레미야는 그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길로 회개를 호소하며 하느님의 심판을 알렸지만,
결국 귀담아 듣는 이 없어 처참하게 멸망당하는 조국의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보는 아픔을 겪었지요.
뿐만 아니라 조국의 배반자, 거짓 예언자로 몰려 여러 차례 죽을 위험을 겪는 등 예언자로서
개인적인 고통도 심하게 받았답니다.
그래서 그를 눈물의 예언자’, 수난의 예언자’라 부르기도 하죠.
언제 누가 썼나요?
물론 예레미야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서의 뼈대를 이루지요.
예레미야서는 제자 바룩이 예레미야가 불러주는 예언을 받아 적은 것이라고 해요(36,4).
그러니까 예레마야가 활동하던 시기에 많은 부분이 쓰여진 거죠. 하지만 예레미야서도
다른 성서와 마찬가지로 복잡한 편집과정을 거쳤어요.
예레미야의 예언이 참된 하느님의 말씀임을 깨달은 바빌론 유배기 때
예레미야의 정신을 이어받은 이들이 그의 말을 수집해서 덧붙였어요.
그래서 예레미야서는 시간 순서대로 되어 있지 못하고 왔다갔다하는 부분이 꽤 있답니다.
왜 쓰여졌나요?
요시아 왕이 죽은 다음 유다는 동쪽의 신흥 강대국 바빌론의 압력을 강하게 받았어요.
남쪽에는 비록 위축되긴 했지만 여전히 강대국인 이집트가 버티고 있었구요.
유다는 이 두 강대국 사이에서 눈치를 보았지만,
왕과 대신들은 이집트에 빌붙어 바빌론과 싸우려고 하였죠.
이러한 혼란기에 예레미야는 먼저 우상을 숭배하고 하느님의 말씀과 법을 무시하는
유다인들의 생활태도를 고치지 않으면 하느님의 심판이 내릴 것이라고 예언하죠.
아울러 그는 성전과 시온에서 하느님을 모시고 있기에 결코 멸망하지 않으리라는 거짓 믿음과
군사외교적인 정책으로 살 길을 찾으려는 지도층의 자세를 비판합니다.
결국 예레미야는 언제 어디서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충실하고
그분의 말씀을 깨어 들으며 그대로 실천하는 삶이고,
이것이 궁극적인 살 길임을 알려주어요.
때로는 바빌론에 항복하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말씀까지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는 가운데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기억하시고 그들과 새로운 계약을 맺어
새 공동체를 이루시는 희망 찬 미래가 펼쳐진다고 알려주어요.
악을 심판하시는 하느님과 새 계약으로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유다 멸망이라는 처참한 역사를 통해 뚜렷하게 드러나면서,
오늘 우리에게도 삶의 자세와 생활양식을 되돌아볼 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죠.
-(가톨릭홈에서.성서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