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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0일 성 비오 5세 교황 / 성 요셉 베네딕도 코톨렌고

Berardus 2022. 4. 29. 16:53
 
 
 

4월  30일

성 비오 5세 교황


Saint Pius V, Pope
St.Pope PIUS V(Michael Ghisleri)
San Pio V (Antonio Ghislieri) Papa
(Papa dal 17/01/1566 al 01/05/1572)
Born:17 January 1504 at Bosco, Italy as Michael Ghisleri
Died:1 May 1572, apparently of a renal disorder
Beatified:1 May 1672 by Pope Clement X
Canonized:22 May 1712 by Pope Clement XI
Pio = devoto, religioso, pietoso (signif. Intuitivo)
=devout person, religious, pietoso (signif. Intuitivo)
 
 
1504년 이탈리아의 알렉산드리아 근처에서 태어났다.
도미니꼬회에 입회하여 신학을 가르쳤다.
주교와 추기경이 된후 1566년에 교황이 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부터 시작된 교회 개혁을 강력히 추진했고
신앙 전파를 향상시켰으며 거룩한 전례를 쇄신했다.
1572년 5월 1일 세상을 떠났다.
 
 
성 아우구스띠노 주교의 [요한 복음 주해]에서
(Tract. 124,5: CCL 36,684-685)
 
교회는 베드로가 고백한 그 반석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불쌍한 인류를 끊임없이 위로해 주시지만
이 일반적 위로 외에 또 다른 특별한 위로를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때가 차자, 즉 그렇게 할 시간이 이르렀다고 하느님께서 생각하실 때,
그를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신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시어 하느님으로 계시면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인간 예수 그리스도 곧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믿고 재생의 물을 통하여
 온갖 죄의 씻음을 받은 이들이 영원한 단죄에서 해방되고,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또 그들이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서 고통스럽고도 위험한 시련속에 길을 걸어가야 하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육체적 영신적 위로를 얻어
길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 앞에 걸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걸어간다 해도
이 현세 생활에서의 나약성 때문에 아무 죄 없이 걸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
하고 청하는 죄의 용서를 더 쉽게 얻을 수 있도록,
주님은 애긍 시사라는 유익한 치료제를 주셨습니다.
교회는 인생의 역경에 직면하는 동안 복된 희망 속에서 이것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도들 가운데 으뜸이므로 이 교회의 대표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인격 안에서
 한 인간이었고, 은총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그리스도인이었으며,
더 풍부한 은총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사도, 첫 사도였습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이 그에게 전해졌을 때
그는 온 교회를 대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현세에서 여러 가지 시련들,
말하자면 폭풍, 심한 비 그리고 태풍으로 흔들리지만 넘어지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반석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즉 반석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나오는 이름입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보고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베드로가 먼저 "당신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으로 주님이 뜻하시는 바는 베드로가 고백한
그 반석 위에 당신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반석은 그리스도였으며 그 기초 위에 베드로 자신도 세워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가 이미 놓여 있으니 아무도 다른 기초를 놓을 수 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교회는 베드로를 통하여
 천국의 열쇠 곧 죄를 묶고 풀 권세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교회도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따름으로써 악에서 구출되고
죽기까지 진리를 위해 투쟁하는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더 잘 따르게 됩니다.
-(가톨릭홈에서)-
 
 
1. 생애
 
교황 성 비오 5세는
 1504년 1월 17일 북쪽 이탈리아의 보스꼬 마렌고(Bosco Marengo) 촌락에 있는
안토니오 기슬리에리 가문에서 출생하여 영세때에 미카엘이라는 본명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수도생활을 동경하여 부근의 도미니꼬회의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15세로서 도미니꼬 수도회의 입회 허가를 얻어 더욱 면학과 기도,
고행등 신심행사에도 더욱 주력 하였다.
 
1528년 제노바에서 사제가 된 후 여러 곳에서 철학과 신학을 강의하였다.
1550년 코모(Como)의 종교 재판관으로 임명되었다.
코모는 스위스 국경 근처여서 이단자들이 많았다.
이후 종교 재판에 상당히 관여하였고 1556년 수트리(Sutri)와 네피(Nepi)의 주교,
1557년 3월 15일 추기경이 되어 1558년에 로마 교회의 이름 난 종교 재판총관이 되였다.
종교 재판을 완화시키고 정치와 외교적으로 기울어진 교황 비오 4세와는 불편한 관계였다.
교황의 서거 후 19일간 지속된 콘클라베에서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다수표를 얻었다.
 
그러나 교황이 된 비오 4세의 친척편애 통치하는 방법과 같이 일치 하지 못하니까
1559년에 신임을 얻어 전쟁으로 폐허가 된 "몬도비"(Mondovi)의 주교좌로 옮겨 교구를 부흥시켰다.
그리고 1565년 12월 9일 비오 4세가 서거하자, 카롤로 보로메오 추기경의 지지를 받아,
1566년 1월 7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성 가롤로 보로메오 추기경 축일:11월4일.게시판1454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우선 교황은 트렌트 공의회의 정신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교황청을 수도원과 비슷하게 꾸미고 검소한 식사와 생활을 하였다.
족벌주의를 반대하면서도 도미니꼬회원이었던 조카 미켈레 보넬리(Michele Bonelli)를
추기경에 임명하여 국무 장관으로 삼았다.
교황은 종교 재판과 금서목록을 강화시켜
 이단 근절에 힘쓰고 이탈리아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였다.
교황은 주교들의 정주(residentia)를 강조하여 장기 출타 시에는
 사목직과 성직록을 박탈하기도 하였다.
 
수도원을 정비하고 후밀리아티(Humiliati)와 같은 수도원들은 폐쇄하였다.
신학교를 세우고 지방 종교회의를 열었으며 성직자들의 회의를 독려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은 밀라노에서 트렌트 공의회의 결정을 실행에 옮긴
 카롤로 보로메오 추기경이었다.
교황은 전례 갱신에도 노력하여 두 개의 업적을 남겼다.
 
1568년에 로마 성무일도와 1570년에 로마 미사 경본을 만들었다.
교황은 1567년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교회의 박사로 공포하고
1570년 성인의 전집 17권을 출판하며 불가타 성서의 새출판을 계획하였다.
이런 식으로 교황은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대해
로마 가톨릭 안에서 개혁(Counter-Reformation, 반종교 개혁)
을 조직적으로 시행해 나갔다.
 
영국의 여왕 엘리사벳 1세를
 1570년 2월 25일에 Regnans in excelsis(천상의 통치)라는 칙서로 파문하고
프랑스에서 위그노 파의 근절을 위하여 드 메디치의 가타리나를 지원하였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축일:1월28일.인창동성당게시판1590번.
*불가타 성서:405년에 라틴어로 완역되어 가톨릭 교회에서 널리 사용된 성서(聖書)의 이름
*프랑스 위그노 파: 프랑스의 칼빈주의자들은 위그노로 불렀다.
*로사리오의 복되신 동정마리아 축일:10월7일.게시판1409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오스만투르크와의 대립에 있어서 교황은 유럽인들과 연합하여
유럽과 그리스도교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스페인, 베네치아, 교황령의 함대들이 고린토 만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
(소위 1571년 10월 7일 레판토[Lepanto] 전투) 대승하였다.
이 승리를 로사리오 기도의 덕분으로 돌리기도 하였다.
이 승전을 기념하여 교황은 승리의 성모 축일을 10월 첫 주일에 지내게 하였다.
(후에 그레고리오 13세에 의해“로사리오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변경되었음).
 
이듬해 봄에 비오 5세는 병을 얻어 1572년 5월 1일 세상을 하직하였다.
로마 시민은 그가 너무나 엄격한 인물이라는 소문 때문에
처음에는 그의 등극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서는 성인을 잃었다고 진심으로 슬퍼하였다고 한다.
1672년 5월 10일 클레멘스 10세에 의해 시복되고, 1712년 5월 22일
 클레멘스 11세에 의해 시성 되었다.
 
 
2. 업적
 
비오 5세가 1566년 교황으로 선출되어 1572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산산이 분열된 교회를 하나로 모아야 한다는 막중하고도 힘겨운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 서방국가들은 부패와 종교개혁, 새로 생긴 군소 국가 사이의 치열한 싸움,
그리고 오스만투르크(터어키)의 침략 위협 등으로 온통 혼란의 도가니였다.
 
1545년 전임 교황은 이러한
시급한 문제들의 해결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했었다.
공의회에 모인 학자들은 18년에 걸쳐 토론하고 확인하고 단죄하는 작업을 통해
가톨릭이 취해야 할 행동방향을 결정했다.
 
그후 비오 5세는 교황좌에 오름과 동시에 공의회를 정착시키고,
공의회가 요구하는 철저한개혁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을 맡았다.
사제를 올바르게 양성하기 위한 신학교를 세우도록 했으며,
새로운 미사경본과 성무일도, 교리서 등을 발간하고,
청년들을 흡수하기 위해 크리스챤 교리위원회를 설립했다.
또한 교회 내의 부조리를 막기 위한 법 제정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 밖에도 병원을 세워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도 하고
 구제사업을 시행하기도 했으며,
정기적으로 돈을 주어 가난한 로마의 수도원에 잔치를 베풀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와 국가의 개혁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1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막시밀리안 2세의 반대에 부딪혔다.
 
비오 5세의 치하(治下)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 하면 터어키(오스만 투르크)의 왕 세림 2세가
대군을 거느리고 이탈리아와 그 외 그리스도교의 여러 나라를 침범하여 온 사실일 것이다.
용감무쌍한 터어키 군 앞에는 대항하는 적이 없고, 전 유럽이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오스만투르크에 대항하기 위해 전 유럽이 단결할 것을 바라는 교황의 희망에
프랑스와 네덜란드간의 분쟁은 큰 장애요소였다.
결국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유럽은 단일 함대를 조직하여
그러나 비오 5세는 매괴신공( 로사리오 기도)을 친히 바치기도 하고
 전 신자들에게도 기도를 바치도록 하였다,
적군을 레판토에서 맞아 싸우게 된 오스트리아의 태자 돈 요한은
1571년 10월 7일 기적적인 대승리를 거두게 되었던 것이다.
 
 
3. 신심과 수덕적 태도
 
교황의 높은 지위에 올라서도 그는
 조금도 수도자로서의 기도와 고행의 생활을 버리지 않았다.
그 뿐 아니라 종래의 호화스럽던 교황의 의식주를 되도록이면 간단하고 검소하게 하였으므로
교황청을 방문하는 자는 마치 수도원과 같은 감을 느꼈다고 한다.
게다가 그가 교황에 피선되자,
시민들은 전례대로 성대한 교황 취임식이 곧 있으리라 기대하였으나
시일이 경과해도 아무 소식이 없더니,
취임의 대식전은 중지되고 그의 경비는 모조리 빈민구제 및
 경영 곤란한 수도원 원조의 목적에 기부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시민들은 모두 놀라는 동시에 새교황의 자선박애의 정신에 감탄하였다 한다.
그 외 비오 5세는 결코 교황의 복장을 새로 맞추지 않고 전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 만족하며
때때로 모자없이 맨발로 로마의 성당을 순례하였다고 한다.
 
비오 5세의 등극(登極)은 마침 트렌트 공의회의 직후였었다.
그러므로 그는 수많은 주교들과 신학박사들이 그 회의에서 결정한 것을 세밀히 실행하도록 하고,
종교개혁의 미명하에 전「유럽」의 종교계를 혼란 속에 빠지게 한 신 교파에 대항하기 위하여
우선 공교요리를 편찬하도록 하고, 1567년 이를 경향 각지에 배부하는 등
온갖 방법으로써 참된 성교(聖敎)의 쇄신과 혁신의 실적을 올려
교황청부터 주교, 다음은 사제, 수도자, 최후에 평신자 등의 순서대로
 점차 신앙생활의 향상을 도모하였다.
 
그는 조금이라도 악이라 불리우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히 처단하였다.
일요일에 노동하는 자는 주일을 모독하는 자로 단호 배격하고,
신성 모독 등의 대죄에 대해서는 추상과 같이 엄벌을 가하였다.
비오 5세는 인간을 천사처럼 취급하고 그의 연약함을 돌보지 않았다는 비난이 있었던 것도
실로 이 같은 점에 기인되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그의 선임자인 제교황들에게는
 누구나 다소 친척을 등용하는 악폐(惡弊)가 있었으나
그는 깊이 이 점에 대해서 경계하였다.
 
독일의 세뻬르트 레프레르 두 박사의 편찬으로 되어있는
 교황사(敎皇史)라는 서적에는
제1대의 교황 성베드로 부터 제259대 교황 비오 11세 까지의 초상화가 있는데,
그중에는 화려한 교황의 모습을 갖춘 모상이 있기도 하고
 오른손을 들어 강복을 주는 모상도 있는가 하면,
집필과, 설교하는 모습 등 가지가지로 되어 있으나,
성 비오 5세 교황은 장궤 합장한 태도로 그려져 있다.
 
그 이유는,
 "그가 당시의 로마시민에게 비오 5세 처럼 경건한 교황은 지금까지 본 일이 없다."는
말을 듣기도 하고, 또한 그리스도교 제국을 침공해온 터어키의 왕 세림 2세 에게,
"나는 모든 그리스도교국의 무력에는 꼼짝도 안하지만
다만 저 교황의 기도의 힘에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신앙이 깊고 열심한 성인이었기 때문이다.  
-(도미니코수도회홈에서)-
 
 
비오는 ’경건한’이란 뜻이다.

이탈리아의 알렉산드리아 교외 보스코에서 태어난 그는 귀족의 후손인데,
원래 이름은 안토니오 미카엘 지스리에리였다.
그는 14세 때에 도미니칸이 되었고, 1528년에 사제가 되었는데,
그 이후로 16년간 철학과 신학 교수를 재임했으며,
1556년에는 바오로 4세에 의하여 네피와 수트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1557년에 추기경이 된 지슬리에리는 1566년에 비오 4세를 계승하여 교황에 등극하면서부터
트랜트 공의회의 칙서들을 실시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새 교리서를 완성했고(1566년), 성무일도서를 개정했으며(1568년), 미사경본을 다시 펴냈고(1570년),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집을 새로 발간케 하는 한편, 그를 교회 박사로 선언하였다.
 
그의 재임기간은 주로 프로테스탄트와 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1570년에는 잉글랜드의 엘리사벳 1세를 파문했다.
또한 그는 크리스챤 수도회의 일치를 도모하였으며,
크리스챤 국가들의 동맹을 호소한 인물이기도 하다.
1712년에 시성되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칼빈주의  
영어 Calvinism
 
프랑스의 종교개혁가 칼빈(1509∼1564)이
인간의 예정(predestination)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교리에 반대하여 일으킨 종교사상.
칼빈주의에 의하면, 아담이 타락한 결과,
인간에게는 이미 의지의 내적(內的) 자유가 없고 인간은 하느님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개인의 노력과는 전혀 상관없이 미리 천국이 아니면 지옥으로 가도록 예정되어 있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따라서 천국으로 예정된 선택받은 사람이 지옥으로 가는 법은 없다.
칼빈주의의 요점은 그의 저서≪그리스도교 요강≫에 잘 기술되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하느님은 절대무한(絶代無限)한 존재로 우주에서 하느님만이
참된 유일한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피조물은 하느님의 단순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칼빈주의는 인간의 윤리적 종교적 의지의 자유를 철저히 부정하는 절대적 `예정설’이다.
그의 교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함을 외적(外的)으로 결부시키려는 점에 있고,
그것이 이 신앙의 유일한 구원의 전제가 된다.
따라서 전례나 성사도 구원에 필요불가결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교회는 선택받은 자들만의 단체이며 내부에는 사제직이나 교계(敎階)제도도 없고,
교단은 공화적(共和的)으로 조직되어 국가로부터 독립된다.
국가는 관념적으로 신정제(神政制)를 취해야 된다고 하였다.
칼빈주의는 너무 엄격했던 처음의 절대적 예정설이 완화되면서 급속히 교세가 확장되었으며
변증법 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근대 자본주의의 정신이
 칼빈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설은 막스 베버(Max Weber) 등에 의해 주장되었다.
노동의 쾌락과 노동의 성과를 하느님의 선택받은 증표로 보는 칼빈주의의 구원사상은
일반적으로 경제적 정신의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칼빈주의의 노동윤리, 즉 `세속생활의 금욕주의’라는 윤리가
자본주의의 발생기에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또 퓨리턴에게 인민주권(人民主權)의 사상을 불어넣음으로써 민주주의 정신을 촉진시켰다.
 
칼빈의 사상과 이념은 제네바를 중심으로하여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스코틀랜드,
독일의 라인강 지방으로 전파되었으며
특히 프랑스의 칼빈주의자들은 위그노로 불렀다.
이들은 가톨릭 교도들과의 충돌로 위그노전쟁(1562∼1598)을 일으켰으며,
1598년의 낭트칙령으로 위그노파의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가톨릭대사전에서)-


                       


트리엔트공의(公議會)
라틴어 Concilium Tridentinum
영어 Council of Trent
 
1545∼1563년까지 약 18년간에 걸쳐
이탈리아의 북부 트리엔트(현 Trento)에서 개최된 공의회로
종교개혁으로 혼란스러워진 가톨릭 교의(敎義)를 명백히 하였고,
교회개혁을 추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해 소집되었고, 율리오 3세를 거쳐 비오 4세의 재위기간에 폐회되었다.
세리판도(G. Seripando), 소토(Dominicus de Soto), 라이네스(D. Lainez), 살메론(A. Salmer n),
그로퍼(J. Gropper), 베르타노(P. Bertano),
포스카라리(A. Foscarari) 등 저명한 신학자들이 대거 참석하여 가톨릭 고유의 교의르 확립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대체로 다음의 3기로 구분된다.
① 제 1 기 :
1545년 개회되어 1548년 정회(停會)될 때까지 약 3년간의 기간으로 이 동안 공의회는
성서만이 신앙의 유일한 원천이 된다고 한 프로테스탄트의 주장을 이단으로 배척하고,
전통적인 해석에 따라 성서와 성전 (聖傳)모두가 신앙의 원천임을 재확인하였다.
아울러 불가타역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였고,
성서의 해석권은 교회만이 갖는다는 점을 명백히 하였다.
 
또한 프로테스탄트의 은총절대설과 정의 가산설을 배척하고
 원죄와 의화에 대한 정의를 명백하게 규정하였다.
성사에 대한 교리도 제1기에 규정되었다. 황제 칼과 교황 사이의 관계 악화로 중단되었다.
 
② 제 2 기 :
교황 바오로 3세의 후계자 율리오 3세가 1551년 개회하여
다음 해 독일 제후들의 봉기로 좌절될 때까지 약 1년간의 기간으로
성체성사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現存)’과 `실체변화(實體變化),
고해성사, 병자성사, 사죄 (赦罪), 비밀고해, 보속 등의 교리가 정의되었다.
제2기에는 제1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독일지방의 주교들이 참석하였고,
황제의 입김으로 프로테스탄트들도 참석하였다.
 
③ 제 3 기 :
가장 성과가 많았던 회기로 제2기가 끝난 뒤 약 10년 후인 1562년에 개회되어 이듬해 폐회되었다.
이 회기 중 가장 중요한 심의대상은 성체성사와 미사, 사제서품, 혼인성사에 관한 것들이었고
이에 관한 교리가 규정되었다.
그밖에도 모든 성인의 통공, 성인유해의 공경, 연옥, 대사, 성화상의 사용, 교구신학교 설립,
주교의 임명, 교구 시노두스, 강론 등에 관한 교령이 반포되었다.
 
예딘(H. Jedin)이 "트리엔트 공의회는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에 대한 교회의 교도직으로 응답한 최고의 대답이었다"고 한 바대로
프로테스탄트가 제기한 문제를 수렴하여 가톨릭의 신앙과 교리에 대해 명확히 함으로써
교회의 영성생활에 기반을 제공하였고,
그 뒤 계속된 교회의 개혁에 기초를 닦아 놓았다.
 
공의회의 신앙고백은 공의회가 폐막된 1년 후인 1564년
<트리엔트 신앙고백>(Professio fidei Tridentina)이란 이름으로 발표되었고,
그밖에 공의회 에서 마무리짓지 못한 문서들은 후임 교황들에 의해 차례로 발표되었다.
-(가톨릭대사전에서)-
 

 
불가타  
라틴어 Vulgata
영어 Vulgate
 
405년에 라틴어로 완역되어 가톨릭 교회에서 널리 사용된 성서(聖書)의 이름,
불가타란 일반에게 널리 보급되고 있다는 뜻으로,
예로니모(Sophronius Eusebius Hieronymus)가 번역하였다.
 
시편을 제외한 구약성서는 히브리어에서 직접 번역하였고,
신약성서는 이미 번역되어 있던 라틴어 역본(譯本)을 그리스어 원본과 대조해서 정정한 것인데,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그 신빙성을 공인받았다.
 
1907년 성 비오 10세는 베네딕토회 수사들로 구성된 불가타 위원회를 로마에 설치하여
새로운 개정판 간행을 촉진하였다.
[참고문헌] S. Berger, Histoire de la Vulgate,
1893/ W.E. Plater and H.J. White, A Grammer of the Vulgate 1926.
(가톨릭대사전에서)


  


  4월 30일
성 요셉 베네딕도 코톨렌고


St. Joseph Cottolengo

St. JOSEPH BENEDICT COTTOLENGO
San Giuseppe Benedetto Cottolengo Sacerdote
Born : 3 May 1786 at Bra, Piedmont region, Italy
Died : 30 April 1842 of typhus at Chieri, Italy
Beatified : 1917
Canonized : 1934 by Pope Pius XI
Name Meaning : whom the Lord adds (Joseph)
Giuseppe = aggiunto (in famiglia), dall'ebraico 

Third Order Franciscan

 


   이탈리아 토리노(Torino)의 브라(Bra)에서 출생한

 성 요셉 베네딕투스 코톨렌고(Josephus Benedictus Cottolengo)는

 사제로 서품된 후 본당 사목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토리노에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의료시설이 없었다.

그는 본당내의 어느 부인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큰 충격을 받아 가난한 병자들을 위한 하느님 섭리의 작은 집을 개원하게 되었다.

 이것이 점점 확대되자 그는 자원 봉사자들을 모집하여 단체를 구성하였는데,

 이것이 성 빈첸시오 수도회와 빈첸시오 수녀회의 모태가 되었다.

 

   1831년 콜레라가 창궐하게 되었을 때 병원도 문을 닫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즉시 도시 외곽인 발도코로 자리를 옮겨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계속하였다.

병원은 연일 만원이었고, 그래서 조금씩 확장되었다.

이제 그는 노인, 농아, 맹인, 불구자, 정신 이상자 및

거리의 여성에게도 보호의 손길을 뻗쳤다.

그래서 그의 피콜라 카사(Piccola Casa)는 큰 병원 조직이 되었다.

 

   그는 이런 불행한 사람들을 사목하기 위하여 연민회,

착한 목자회, 로사리오의 은수자회 그리고 삼위일체의 사제회를 설립하였다

. 장티푸스로 인하여 극도로 쇠약해진 그는 오랫동안 치료하였지만

이탈리아의 키에리(Chieri)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그는 1934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가톨릭홈에서)-

 

 

성 요셉 베네딕도 고또렌고

(St. Joseph Benedict Cottolengo) 증거자, 사제.

 

   토리노시에는 거의 일 백년 동안이나

 명예로운 제단에 모셔진 성스런 3회 사제들이 줄을 이었다.

 이들 중의 한 분이 성 요셉 베네딕도 고또렌고이다.

이 성인은 적어도 19세기의 다른 어떤 사람보다 훌륭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우주를 다스리시며 삶의 수고로움을 거쳐

영원한 축복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시고,

항상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찬미하며 간원하도록 이끌어준 도구가 되었다.

 

   요셉 베네딕도는 1786년 5월 3일 브라라고 불리우는

 피에몬테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이 세상의 재화에 있어서는 가난하였으나,

거룩한 마음과 인격의 특성에 있어서는 부유하였다.

 이 덕있는 부부에게서 12명의 아이들이 태어났는데 요셉이 제일 맏이였다.

어렸을 때는 매우 약해서 어머니는 혹시 죽지나 않을까 늘 노심초사 하였지만

그녀의 열렬한 기도와 충실한 보살핌은 결국 그를 건강하고 힘세게 만들었다.

그가 철이 들자, 어머니는 그의 마음을 성모님과 하느님의 생각으로 가득 채워 주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 행동을 하도록 가르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열심하며 매우 설교를 잘하고, 경건한 성 안드레아 성당의 본당 신부는,

가난하고 괴로워 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 예의 바르고 순수한 어린이에게

 9살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첫 영성체를 허락하였다.

   학교에서 요셉은 그의 성적이 학급의 맨 밑바닥에 있는 것을 깨닫고 몹시 슬퍼하였다.

몇분의 신부님들은 위대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기도해 보라고 충고해 주셨는데,

그 후로 성적이 뛰어 올라 학급의 우등생이 되었다.

이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축복이 담긴 사건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보답하고 싶어했다.

때때로 말하기를 "나는 성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어!" 하였다.

   거룩한 사제직을 준비하려고 했을 때,

여러가지 방해되는 것들이 있었어도 그는 많은 시험을 통과하는데 성공하였다.

1811년 6월 8일, 토리노의 무염시태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모든 사도적 의무에 열심히 전념하였고,

 특히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헌신하였지만 아직도

그의 마음은 만족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주님이 어떤 특별한 일에 쓰시려고 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토리노에 있는 '코르푸스 크리스티' 대성당에 있는 성인전에 의하면 그는

 성 빈첸시오 바오로의 생애를 읽고, 또 여러 곳에서 보이는 비참함을 목격하고서,

 인간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이 일의 첫 단계로 치료실로 쓰일 몇 개의 방과 이 일에 관심을 갖는

 몇명의 젊은 여성들을 구하여 본당의 빈곤한 환자들에게 거주지를 마련해 주었다.

   1832년 '섭리의 집'이 발도꼬에 세워졌다.

비오 9세는 이것을 '기적의 집'이라고 불렀는데 수입이나 전망에 상관 없이

 자비로운 하느님의 섭리에 충실히 의존하였다. 성인이 계획한

 다양한 자선사업 때문에 자선대학으로 불리워졌다.

   1842년 그가 죽을 때에도 오늘날 볼 수 있는 것처럼

사업은 여러 종류의 병원, 일터, 학교, 신학교, 은둔 수도원과 활동 수도원,

양로원을 갖추고 정신 박약아와 정신병자, 절름발이, 간질병자, 장님,

귀머거리와 벙어리, 그리고 이와 비슷한 사람들 모두를 수요함으로써 실제적으로 완벽했다.

 1917년 고또렌고의 시복식 당시 이 '자선의 도시'는 대략 8천의 인구를 헤아렸는데

 이들은 이곳에 세무소를 세우려는 당국의 시도에 분연히 반해하였다.

그래서 하느님의 섭리에 맡긴 기념물을 최초의 모습 그대로 영원히 유지 할 수 있었다.

 

   젊었을 때 프란치스꼬 3회에 입회한 요셉 베네딕도는

완벽한 가난의 정신으로 유명하였다.

자기 자신을 꾸준히 수양하는 한편 성체성사와 예수 성심에 대한 사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느님의 섭리를 최대한 신뢰했던 이 성인은 어떤 반대나 폭풍이나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는 프란치스꼬의 훌륭한 성격을 칭송하였다.

토리노시 당국이 사람들의 항의에 따라 진료소를 패쇄하라고 명령하자,

성인은 웃으면서 그 요구에 따라 병원을 시골로 옮기면서

 "양배추는 옮겨 심어줘야 잘 자라는 법이지"라고 말하였다.

그는 방대한 모든 부대시설을 갖춘 그의 정착촌을 "노아의 방주"에 비유하였다.

 

   위대한 보상으로 불리움을 받았을 때 그의 나이는 56세 였다.

 마지막 시간까지 열렬한 기도를 바치다가 1842년 4월 13일, 저녁에 사망하였다.

여러가지 신체적 질병과 정신질환의 치유를 포함해서

 많은 기적이 그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어떤 사람은 그의 모습을 보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교황 비오 11세는 1934년 3월 19일,

그를 가톨릭의 여러 성인들 중의 한 분으로 시성하였다.
-(평화의 사도, 한국재속프란치스꼬회 50주년 기념집에서)-

 

 

요셉 베네딕토 코톨렌고 증거자, St. Joseph Benedictus Cottolengo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활 중

가장 중요한 활동은 사람들-그 중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주님의 뒤를 따른 모든 성인도 특별히 가난한 이를 사랑하고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도 이들을 구제하려고 노력했다.

이탈리아의 성 빈첸시오와 또 19세기 박애(博愛)의 사도라고 불리는

1934년 3월 29일 시성된 요셉 베네딕토도 그 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1786년 5월 3일 북 이탈리아 토리노의

프라에 있는 코톨렌고 가문에서 태어났다.

"될 듯한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격언대로 어려서부터

 이미 마음이 착해 어려운 아이를 보기만 하면

즉시 자기에게 있는 빵이나 용돈까지도 다 주어 버리고 아무것도 없으면

 어머니한테 달려가서 동냥거리를 타내는 것이었다.

다섯 살 때의 일이었다.

무슨 영문인지 어린 요셉이 자꾸만 연장으로 방의 넓이를 재고 있어

하도 이상해서 어머니가 그 이유를 물으니까 요셉은 "다 큰 다음에는

이런 방에다 병자들을 많이 수용하고 싶어서요..."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9세때에 첫영성체를 하고 나서 그는 성직자가 되려고 결심하고

아스티시의 신학교에 들어가서 25세에 사제과 되고 더욱 연구를 계속해

 토리노 시에서 신학 박사의 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그는 고향에 돌아와서 잠시 무보수로 성당 사목을 돕고 있었으나

 마침 그때에 무서운 전염병이 유행해 이에 신음하는 자가 많아졌으므로

요셉 베네딕토는 어려운 이들을 도와 활동할 때라 생각하고 실량, 약품,

의복, 붕대 등을 가지고 병원이나 마을 내의 가정을 찾아다니면서

신음하는 환자를 간호도 해 주고 임종에 처한 이에게 성사도 주며

 활발히 활동을 시작했다.

 부모는 아들이 악한 병에 감염되지나 않을까 해서

 이를 금지시키려고 했으나, 요셉은 "전쟁에 나서지 않으면

 병정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하며 끝내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병사로서 위험을 무릅쓰고 형제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은

 성스러운 태도를 그에게 엿볼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의 명성은 토리노 시까지도 널리 전파되어

성체의 성당 소속의 사제로 선임되어 거기에서 강론도 하고,

고해 성사도 주고 성체도 영해 주었는데,

그 진실하고도 열심한 태도는 신자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의 초점이 되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그것으로 만족치 않고 늘

 "주님의 뜻에 적합한 다른 선업은 없는가"하고 생각하던 때,

우연히 장상한테 받은 성 빈첸시오의 전기를 읽고 나서

자신의 갈 길을 발견한 듯이 기뻐하며 "그렇다.

성빈첸시오가 파리에서 빈민, 병자들을 위해 한 것이야말로

내가 토리노에서 해야 될 일이다"하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어느 날이었다. 그는 가난한 부인에게 초대되어

 성사를 주러 간 일이 있었는데, 그 병자는 여행 도중 병에 걸려 토리노 시의

 자선병원에 무료입원을 원했으나 허용되지 않고,

또 남편과 두 아이는 형편없이 누추한 초막에서 그날 그날을 간신히 보내는 것이었다.

이 불쌍한 모양에 매우 애를 태운 요셉 베네딕토는 돌아오자마자

즉시 성모 마리아의 제대앞에 엎드려 열심히 기도하고

이런 사람들을 수용하는 장소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도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불다로싸라는 구영게 두 방을 빌려, 그때부터 박애 자선 사업에 착수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그곳에 병자를 수용하고 정성껏 간호해 왔으나 3년후에는

 마을 내 사람들의 반대로 말미암아 부득이 그곳을 폐쇄하고

 교외(郊外)의 왈도카라는 곳으로 이전하면서 '하느님 섭리의 작은 집'이라고 칭하고

 역시 무료로 빈민 병자의 구제에 헌신했다. 이곳은 오늘에 와서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작은 마을을 형성할 정도록 발전해 수용 인원이

 때로는 7천명이란 수에 달한 때도 있었다.

 

요셉 베테딕토는 왈도카에서 빈자의 아버지,

또한 착한 목자로서 활동하기를 10여 년, 그 후는 이탈리아의방방곡곡에

같은 사업을 일으키고 이에 종사하는 동지를 위해 빈센디니라는 남자

수도원과 빈센디네 혹은 흔히 코톨렌기니라는 여자 수도원을 14개소나 창립했다.

 이러한 수도원은 모두 자본금없이 세워진 것이었으므로

 종종 파산의 위기에 직면한 적도 있었으나, 요셉의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뢰의 정은 기이하게도 보답되어,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어디선가 독지가가 나타나서 부채를 갚아 주는 것이었다.

또한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쌓지도 않는 하늘의 새들까지도

먹여 살려주시는 인자하신 아버지께서는 박애의 사도인 요셉이나

그의 형제 자매들을 결코 굶도록 하시지 않으셨다.

 

 

요셉 베네딕토는 "분명히 말하지만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곧 내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 하신

 주님의 말씀을 잠시도 잊지않고 자신이 간호하게 될 환자를

 주님(主)이라고 부르며 사실 주님께 대한 것처럼 정성껏 간호해 주었다.

그가 가장 존경하던 성인은 성모 마리아, 다음으로는 성 요셉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였는데, 성 프란치스코가 세운 제3회에는

이미 청년시대에 입회하고 그의 청빈과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 등의 정신을 체득한 바가 있었다.

 

1842년 봄, 토리노 시에는 페스트(黑死病)가 만연해

 환자들의 수용 간호에 종사하고 있던 '하느님 섭리의 작은 집'의 사제들 중에서도

 희생자가 속출하는 상태에 있게 되어 요셉 베네딕토도 병에 감염,

중태에 빠졌으나 작은 집의 사람들에게 고생을 시키지 않으려고

스스로 자원해 키에리에 있는 형제의 집에 옮기게 하고 그곳에서 9일 동안 앓다가,

마침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해 4월 30일 천국을 향해 길을 떠났다.

임종시 그가 기도한 말씀은 다윗 성왕의 "야훼 집에 가자 할 때,

나는 몹시도 기뻤다"(시편 122, 1)라는 시편의 한 구절이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키에리의 마을 사람들이 거의 전부 다 참가해

 성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유덕을 높이 찬양했다고 한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창설자, 증거자. 이탈리아 또리노의 브라에서 출생한 요셉은


사제로 서품된 후, 본당 사목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또리노에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의료시설이 없었다. 

그는 본당내의 어느 부인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고,

가난한 병자들을 위한 집을 개원하게 되었다. 이것이 점점 확대되자,

그는 자원 봉사자들을 모집하여 단체를 구성하였는데,

이것이 성 빈첸시오 수도회와 빈첸시오 수녀회의 모태가 되었다.

1831년 콜레라가 창궐하게 되었을 때, 병원도 문을 닫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즉시 도시 외곽인 발도꼬로 자리를 옮겨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계속하였다. 병원은 연일 만원이었고, 확장되었다.

 이제 그는 노인, 농아, 맹인, 불구자, 정신 이상자 및 거리의 여성에게도

 보호의 손길을 뻗쳤다.

그의 삐꼴라 까사는 큰 병원이 되었다.

 

이런 불행한 사람들을 사목하기 위하여,

그는 연민회, 착한 목자회, 로사리오의 은수자회 그리고 성삼의 사제회를 설립하였다.

 장티푸스로 인하여 극도로 쇠약해진 그는 오랜동안 치료하였지만,

이탈리아의 키에리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그는 1934년에 시성되었다.
-(성 바오로 수도회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