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St. Athanatius
Saint Athanasius of Alexandria
Sant’ Atanasio Vescovo e dottore della Chiesa
Born:c.295 at Alexandria, Egypt
Died:2 May 373 at Alexandria, Egypt; relics in San Croce, Venice, Italy
Name Meaning:immortality (Greek)
아타나시오 주교 성인은 295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하였다.
319년 알렉산데르 주교에 의해 부제로 선출되었고, 후에 그의 비서가 되었으며,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년)가 열렸을 때는 알렉산데르 주교를 따라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328년에는 알렉산데르를 계승하여 알렉산드리아 주교가 되었으며,
알렉산드리아가 낳은 4세기의 가장 위대한 학자가 되었다.
그는 파란만장한 생애 가운데서도 오로지 교회의 정통 신앙과 니케아 신경의 가르침을 수호하였다.
당시 아리우스파는 황제와 결탁하여 아타나시오를 괴롭혔는데,
이 때문에 다섯 번이나 교구장직을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으며 17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였다.
그의 사상은 한마디로 아리우스 주의를 반대하여
이성을 앞세우면서 교회의 정통 가르침을 수호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함께 강조하여
후대의 그리스도론 및 성삼론의 완전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수도 생활의 창시자로 불리는 이집트의 성 안토니오의 전기를 쓰는 등
서방에 수도원 운동을 처음 소개하였다. .
성 아타나시오 주교의 강론에서
(Oratio de incarnatio Verbi, 8-9 PG 25, 110-111)
말씀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비육체적이고 부패할 수 없으며 빗물질적인 하느님의 말씀께서 우리가 사는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렇다고 그 전에 멀리 떨어져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주의 어느 부분에도 그분이 계시지 않은 곳이 없었고
그분은 성부와 함께 계시면서 만물을 채우고 계셨습니다.
말씀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오셨고 우리에게 환히 나타나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고 또 우리의 부패를 보시고는
마음이 움직이시어 죽음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실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창조된 것이 멸망하지 않고 성부께서 사람을 지어내실 때 행하신
그 업적이 헛된 것이 되지 않도록
우리의 육신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육신을 친히 취하셨습니다.
말씀께서는 단순히 육체 안에 머무르거나 또는
육신의 모양으로만 발현하시는 것으로 그치기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발현만 하시기를 원하셨더라면
인간이 지닌 육신보다 더 고귀한 육신을 취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실제 육신을 취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께서는 동정녀 몸에서 육신의 성전을 지어내시어
그안에서 거처하시고 그 육신을 자신을 드러내는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이처럼 그분은 우리에게서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취하셨고,
모든 사람이 죽음의 부패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그 육신을 모든 이를 위해 죽음에 내맡기시어 지극한 사랑으로 그것을 성부께 바치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한편으로는 당신 안에서 죽으려 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활에서
그들을 거슬러 공포된 죽음의 법을 폐기시키셨습니다.
죽음은 주님의 육신을 너무도 강력히 공격했기에 그힘을 잃어,
같은 육신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에게 해를 입힐 기력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부패의 법에 빠진 사람들에게 불멸을 되돌려 주시고
그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돌이키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취하신 육신과 부활의 은혜로 말미암아 흡사 밀짚을 불에 태우듯
그들 안에서 죽음을 소멸시켰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친히 죽을 수 있는 육신을 취하시고,
그 육신은 모든이들 위에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참여함으로써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서 요구하는 것을 충족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육신 안에 거하신 말씀으로 말미암아 부패하지 않으시고
부활의 은총으로 인해 모든 이에게서 부패를 없애 버리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취하신 이 육신을 아무 흠도 없는 희생 제물로 죽음에 내 맡기심으로써
그 봉헌의 힘으로 같은 육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죽음을 쫓아 버리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만물들 위에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께서는
모든이들을 위해 당신 육신의 성전을 바치심으로써 죽음에게 빚진 것을 갚으셨습니다.
우리 육신과 동일한 육신을 취하심으로
우리와 일치하신 부패할 수 없는 하느님의 말씀께서는 부활의 약속으로써
우리 모두에게 불멸을 입을 권리를 주시고 또 실제로 입히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사람들 가운데 거처하신 하느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부패마저 이제는 사람들에게 아무힘도 미치지 못합니다.
-(가톨릭홈에서)-
성 아타나시오 주교의 편지에서
(Epist. ad Epictetum, 5-9: PG 26,1058.1062-1066)
말씀께서는 마리아에게서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사도의 말에 의하면 "말씀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시고자
모든 점에 있어서 당신의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하고"
우리와 같은 육신을 취하셔야 했습니다.
마리아가 존재하게 되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께서는 우리를 위해 바치신 당신의 육신을 마리아에게서 취하셨습니다.
성서는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서 말할 때 "마리아는 그를 포대기로 쌌다." 고 하고
또 그를 젖 먹인 젖가슴은 복되다고 합니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어머니의 태중에서 나온 그 순간부터 희생물로 바쳐졌습니다.
그리고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잉태의 소식을 전할 때 그것을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육신이 외부로부터 마리아 안으로 주입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천사는
마리아에게 단순히 "당신 안에서 태어날 것입니다." 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그 육신은 정말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을 믿을 수 있도록 천사는
"당신에게서 태어날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말씀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당신이 우리 인성을 취하시어 그것을 희생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우리 인성을 완전히 흡수하여 우리를 당신 신성으로 옷 입히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도 바울로가 "이 썩을 몸은 불멸의 옷을 입어야 하고
이 죽을 몸은 불사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하나의 단순한 가현이 아니었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참으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인간은 전인적인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 구원은 절대로 허구가 아니고 육신만의 구원도 아닙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전인 즉 육신과 영혼의 구원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말씀대로
마리아에게서 탄생한 분은 참 인간이셨고, 주님의 육신은 참 육신이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육신이었으므로 참 육신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우리 자매이십니다. 그분과 우리 모두 다 아담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라는 요한의 말은 이 의미를 지니고 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받은 자가 되셨다." 라는
바울로의 말도 같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 육신은 말씀이신 그리스도와의 통교와 결합을 통하여 큰 보화를 받았습니다.
즉 멸하고야 말 것은 불사 불멸의 것이 되었고 육적인 것은 영적인 것이 되었으며
땅에서 지음 받은 것은 천국 문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자께서 마리아로부터
육신을 취하신 후에도 삼위 일체는 항상 삼위 일체이십니다.
그 안에 어떠한 첨가나 감소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삼위 일체는 항상 완전하십니다.
삼위 안에 한 분 하느님이 계십니다.
따라서 교회는 항상 말씀이신 성자의 아버지이신 한 분 하느님을 전합니다.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홈에서)-
Athanasius the Great and Cyril of Alexandria
성 아타나시오 주교의 「아리우스 이단을 거슬러」에서
(Oratio 2,78.79: PG 26,311.314)
창조물 안에는 지혜의 창조된 모상과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 인간과 다른 모든 창조물 안에는 지혜의 창조된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만물을 창조하신 참 지혜께서는 창조된 이 형상들을 당신의 것으로 여기시면서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주께서는 당신이 지어내신 창조물 안에서 나를 지어내셨다."
이 말씀에서 주장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즉 인간은 인간의 지혜를 자기 것으로 여기지만,
실상그것은 인간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창조주이신 분이 창조되셨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모든 창조물에는
그분의 형상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위의 성서 말씀이 흡사 당신에 대해서 일컫듯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또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다." 라는
성서의 말씀에서도 같은 것을 보여 주십니다.
이는 그분의 모상이 우리 안에 새겨져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창조물 가운데의 하나로 여겨서는 안되지만,
창조물에 주님의 형상과 모상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이것들이 주님 당신 자신인 듯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만물을 지으시려던 태초에 만물 안에서 나를 지으셨다."
그런데 창조물 가운데 지혜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 까닭은
세상이 자기 안에서 자신을 지어내신 말씀을 깨닫고
또 그 말씀을 통해서 아버지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바울로 사도가 가르쳐 주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께 관해서 알만한 것은 하느님께서 밝히 보여 주셨기 때문에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창조물을 통하여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같은 보이지 않는 특성을 나타내 보이면서
인간이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말씀은 본성상 창조되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위의 성경 구절에서 언급한 지혜는 참으로 우리 안에 있고
또 그렇게 있다고 말해야 할 지혜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단자들이 이런 말을 믿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우리의 다음 질문에 대답하면 좋겠습니다.
창조물 안에 지혜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면 왜 사도는 "하느님의 지혜로운 경륜에 따라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수 없다." 고
불만을 터뜨립니까?
정말 지혜가 없다면 왜 성서는 수많은 지혜로운 사람들에 대해 말합니까? "
지혜로운 사람은 근심스레 악을 피한다." "지혜로써 집을 짓는다."
성서에는 이와 같은 말이 많습니다.
집회서도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 고 말합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다음의 말로 소심한 자를 나무랍니다.
"이런 말을 하지 말라. ’지나간 세월이 지금보다 좋았지요? ’
지혜로운 사람은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창조물 안에 지혜가 있습니다.
시라의 아들은 다음의 말로 그것을 증거해 줄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모든것과 모든 인간에게 지혜를 너그러이 내리시고
특히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지혜를 풍부히 나누어 주신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지혜의 신적 본성이 아닙니다. 그 지혜는 나뉨이 없고 절대적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세상에 새겨진 지혜의 형상입니다.
세상에 흩어져 있는 지혜와 지식이 그분의 모상과 형상이라면
만물을 창조하시는 지혜 자체께서 다음의 말씀을 하시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넙니다.
"주께서는 당신이 지어내신 창조물 안에서 나를 지어내셨다."
그래서 세상에 있는 지혜는 창조자이신 지혜가 아니고 창조물 안에 조성된 지혜입니다.
그 지혜 때문에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얘기하고, 창공은 그 손수하신 일을 알려 줍니다."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홈에서)-
[이콘] 세명의 기독교교육자. 러시아19세기. 40.5 x 34cm
성 대 바실리오.나지안제의 성그레고리오.성요한 크리소스토모.만딜리온.포차엡스카야성모
이 성화에서는 대부분 함께 그려지는 세 명의 기독교 교육자들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을 경배하는 것이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하나의 통례로 되어 있다.
세 명의 총주교들은 모두 제복(祭服)을 차려입고 정면을 향해서 나란히 서있다.
그들의 오른손은 축복을 내리며 왼손에는 복음서를 들고 있다.
사람들은 체사레아(Casarea)의 주교였던 대 바실리외 (330-379) 학식과 맑은 정신을 숭배한다.
사람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였던 나지안즈(Nazianz)에서 온 그레고리 (Gregorios)의
빛나는 웅변술과 그의 비상한 어법을 경탄하였다.
사람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신학자이며 총주교였던
요한 크리소스토모스(Johannes Chrysostomos) (354-407)가
저술한 책의 아치(雅致)를 따를 자가 없다고 생각했다.
세 명의 성자 위에 있는 두 개의 작은 화면에는 그리스도의 초상이 그려진 무명수건(Mandylion)과
포차엡스카야 (Potchajevskaja)의 성모상을 그려 넣었다.
*유럽 聖畵(ICON)集 에서
니체아콘스탄티노플신경
†한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또한 한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을 믿나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나이다.
성자께서는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음을 믿나이다.
또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믿나이다.
본시오 빌라도 통치아래서 저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수난하고 묻히셨으며
성서 말씀대로 사흗날에 부활하시어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심을 믿나이다.
그분께서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또한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
죄를 씻는 유일한 세례를 믿으며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아멘.
성 아타나시오는
성 (대)바실리오와 나지안제의 성 그레고리오,
그리고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함께 교회의 희랍박사이다.
알렉산드리아가 낳은 4세기의 가장 위대한 학자이며,
파란만장한 생애 가운데서도 오로지 교회의 정통신앙과 니체아 신경의
가르침을 수호하였습니다.
그의 사상은 한마디로 반아리우스주의로 요약 될 수있습니다.
이성을 앞세우면서 교회의 전통 가르침을 수호하였습니다.
이성과 철학이 학문상 꼭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는 이것을 신학과 신앙을 위한 길잡이로 생각하고,
신앙과 전통의 우위성을 강조 하였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인성 및 신성을 함께 강조하여
후대의 그리스도론 및 성삼론의 완전한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또한 수도생활의 창시자로 불리는 이집트의 성 안토니오의 전기를 쓰는 등
서방에 수도원 운동을 처음 소개하였습니다.
*성 (대) 바실리오 주교 학자 축일:1월2일.인창동성당게시판1548번.
*나지안제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축일:1월2일.게시판1548번.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축일:9월13일.게시판1363번.
*이집트의 성 안토니오 아빠스 축일:1월17일.게시판1572번.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 주교 학자 축일:6월27일.게시판1243번.1840정.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에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주교 성 알렉산드리아의 부제를 지내다가
그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재 확보시킨
니케아 공의회The First Council of Nicaea(AD 325년)에 참석하였다.
많은 박해를 겪으며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매우 지성적인 교회로 성장했지만
위험한 이단의 요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주교들과 귀족들의 추앙을 받았던 아리우스 사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본래부터 신의 아들이 아니며
단지 신성을 지닌 하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의 구원을 부인하였다.
이에 비해 AD 328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된 아타나시오는
사도들로부터 계승되어 온 교리의 충성스러운 수호자였다.
황제와 아리우스 파에 의해 수많은 박해를 받고 다섯번이나 유형에 처하면서도
결국은 진실한 믿음으로 승리를 하였다.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교리와 꺼질 줄 모르는 사랑은 동방 교회로부터
위대한 교부로 인정받게 하였다.
아리우스 주의는 서방, 제국에서 사를르 마누 대제 기간까지 존재하였다.
그리스도를 단지 인간으로 보는 점에서 현대의 이성주의와 수많은 이데올로기들은
아리우스 주의와 그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분명히 하느님의 아들이며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닌 구세주이다.
아타나시오주교가 열렬히 확신하고 주장하였던 것 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모든 성품은 바로 이러한 사실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아마도 알렉산드리아의
크리스챤 가정 출신으로 여겨지는 아타나시오는 잘 교육받은 사람으로서,
특히 성서와 신학이 뛰어났는데, 부제로 서품된 후,
318년경 자기 고향의 알렉산델 주교의 비서가 되었다.
그는 아리우스 이단을 단죄했던 325년의 니체아 제 1차 공의회에
자기 주교를 수행하여 참석하였다.
그런 후 3년 뒤에는 그 자신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는 즉시 에집트 아리우스파의 신한 반발에 직면하였는데,
이러한 반기는 지중해 제국 전역으로 무섭게 파급되었고,
아리우스를 지원하던 멜레씨안 이단도 덩달아 기세를 올렸다.
물론 이런 세력 뒤에는 황제의 지원이 있었다.
그는 355년, 트리엘로 첫번째 추방되었으나, 337년에 귀향이 허락되었으나,
2년 후 재차 추방되었다.
이 때 그는 로마로 가서 7년 동안 머물러야 했다.
346년부터 356년까지가 그의 생애에 있어서는 가장 평화로운 기간이었고
또 그의 주요 저서들이 이 때에 나왔다. 그
러나 황제 콘스탄씨우스가 그를 추방시키기로 하고, 군인들을 보냈다.
아타나시오는 몸을 피하여 사막으로 들어갔으며, 이곳에서 콘스탄씨우스가 361년에 죽기까지
자기 교구민들을 지도하였다.
그 이후에도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두 차례나 유배를 더 당하였고,
36년부터 죽을 때까지는 평화롭게 자기 교회를 다스리고 사목할 수 있었다.
그는 지난 날이 모든 갈등과 폭력으로 인하여 피폐된 교회들을 재건하고,
아픈 상처들을 치료하는데 주력하면서,
저술과 강론을 통하여 위대한 사도직을 수행하였다.
성 아타나시오는 신체적 조건으로 볼 때는 작은 사람이었으나, 아주 강인하고 정신력이 뛰어났다.
아리우스 이단을 단죄하고 파문하기로 결정한
니체아 공의회의 결정을 따르는 평신도들도 우왕좌왕하였고,
수많은 주교들도 주저하였다.
이런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아타나시오는 죤 헨리 뉴만의 말대로,
"그리스도 교회의 거룩한 진리를 세상에 전해 온 사도들의 후예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도구였다."
아리우스 이단을 대항하여 저술한 그의 뛰어난 저술과 연설들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또한 그는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저서들을 많이 남겼는데, <성 안토니오의 생애>를 비롯하여,
성서 주식, 시편의 주 등을 남겼다.
성 아타나시오는 대 바실리오, 요한 크리소스또므 그리고 나지안제의 그레고리오와 함께
교회의 희랍박사이다.
유배 중에 저술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콘스딴시오 황제에 대한 항변, 수도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아리우스파의 역사 등.
아타나시오가 <아타나시오 신경>을 직접 기록하지는 않았다.
-(부산교구홈에서)-
아타나시오는 희랍어로 ’죽지 않는’이란 뜻이다.
교회를 위해 봉사한 아타나시오의 생애는 파란만장하고도 헌신적인 것이었다.
그는 광범하게 퍼져 나간 아리아니즘 이단에 대항한 위대한 신앙의 투사였다.
그가 저술한 책에 나타나는 열정과 힘은 그가 교회 박사라는 칭호를 얻게 된 것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나
고전적인 교육을 받은 아타나시오는 사제단에 들어가서
알렌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데르의 비서가 되었고 후에는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의 선임자인 알렉산데르는 동방에서 새로운 운동으로 성장해 가고 있던 아리아니즘에 대하여
솔직하게 비판을 한 인물이었다.
아타나시오는 알렉산드리아 주교의 임무를 수락하고는 아리아니즘에 대한 투쟁을 계속했다.
처음에는 투쟁이 쉽게 승리로 끝날 것 같았으며 아리아니즘은 곧 단죄될 것 같았다.
그렇지만 사건은 그렇게 간단히 끝날 일이 아니었다.
티로의 공의회가 소집되었고 아직도 명백히 밝혀지지 않은 몇 가지 이유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타나시오를 북부 프랑스 지방으로 귀양을 보냈다.
이것은 성바오로 사도의 생애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은
일련의 여행과 귀양살이 가운데 첫번째에 불과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죽고
그의 아들이 후계자가 되자 아타나시오는 다시 주교로 복직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1년 밖에 지속되지 않았으니,
그는 아리안파 주교들의 결탁에 의하여 또다시 파면되었다.
아타나시오는 자신의 문제를 로마에 상소했으며 교황 율리우스 1세는
이 일과 기타 관련된 문제들을 검토하기 위하여 교회 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교리를 옹호하다가 다섯 번이나 귀양을 갔다.
그는 그의 일생 중 10년 동안을 비교적 평화롭게 지내며
그가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수도 생활의 이상에 따라서
그리스도인 신앙 생활을 진작시키고 독서와 저술을 하면서 지냈다.
그의 교의적이고 역사적인 저술들은 대부분 아리아니즘을 모든 관점에서 철저하게 논박한 것이다.
그의 수덕에 관한 저술 중에는 성안토니오의 생애에 대한 것이 있으며,
놀랄 만큼 대중화 되어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가 수도 생활을 시작하는 데 큰 공헌을하였다.
아타나시오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있는 동안 수많은 시련을 겪었다.
그는 그 당시에는 아무도 극복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던 적대 세력에 대항하여
끝까지 강하게 버틸 수 있는 은총을 받았다.
아타나시오는 주교로서의 자기 직무를 완수했다.
그는 어떠한 대가가 자기에게 돌아올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기 양떼를 위하여 참된 신앙을 옹호하였다.
현대 세계에서 어떠한 적대 세력이 우리 앞에 가로놓일지라도
우리가 우리의 신앙에 충실히 머물기 위해서는 이같은 소명을 체험하고 있어야 한다.
아타나시오는 귀양살이와 피신하기 위해 여기저기 도망다니면서 겪은 어려움은
바오로 사도가 자기 자신의 생애에 대하여 말한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자주 여행을 하며서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도시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가짜 교우의 위험 등의 온갖 위험을 다 겪었습니다.
그리고 노동과 고역에 시달렸고 수없는 밤을 뜬눈으로 새웠고 주리고 목말랐으며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며 헐벗은 이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제쳐 놓고라도 나는 매일같이
여러 교회들에 대한 걱정에 짓눌려서 고통을 다하고 있습니다."
(2고린 11,26-28)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견진 성사를 받고 그리스도의 용맹한 군사가 된 신자는 자기 영혼을 위해,
또는 신앙을 위해 노력을 다해 싸우지 않으며 안 된다.
그러나 이 세상의 군인과 같이 무기를 사용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학식으로,
또는 기도로,또 박해 시에는 신앙을 선언함으로써 싸울 수 있는 것이다.
성 아타나시오와 같은 이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가장 용감하고도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293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그리스 인으로서 교를 봉행하고 있었으므로 그도 그리스도교의 교육을 받았으며
또한 학교 교육도 충분히 받았다.
게다가 그는 청년 시절에 종종 광야로 은수자들을 찾아가 그네들의 아름다운 표양을 보며
유익한 말씀도 많이 들었으므로 한층 더 열렬한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는 곧 알렉산드리아 주교의 비서로 임명되어 당시 일어난 아리우스 파의 이단에 대해
같이 우려를 나누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이단 사설을 주장한 아리우스는 다 같이 알렉산드리아에 있으면서 구세주이신 예수께 관하여
교회의 신앙과 위반되는 것을 가르치고,
특히 천주 성부는 영원한 분이시지만 하느님의 제2위이신 예수는
성부께 창조된 한(限)이 있는 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구세주와 그 외 점에 있어서
그가 정통 교회와 의견을 달리하게 이른 것도 또한 당연한 결과였다.
이 아리우스의 이단은 삽시간에 널리 퍼졌다.
이를 보고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도 도저히 그저 묵과할 수 없었다.
그는 교회의 원수와 일전을 불사할 각오로 비서 아타나시오에게 협력을 구했다.
아타나시오는 곧 주교의 뜻을 받들어 분연히 일어나 활동을 개시했다.
그리고 곧 이단과의 논쟁의 총지휘자가 되었다.
결국 아리우스의 설은 326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판결되고 배척되었는데,
이에는 무엇보다도 아타나시오의 분투가 큰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교회 이단자들한테 미움을 사게 된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어서
그들 중의 두사람은 중신을 통해 콘스탄티노 대제의 마음에
아타나시오에 대한 의혹을 가지게 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328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서거하자 아타나시오는
민중의 일치된 추천을 받아 그의 후임이 되었으나,
원수들은 그 후에도 모략을 그치지 않고 모함과 중상으로 그를 실각시키려고 애썼고,
콘스탄티노 대제는 불법적으로 하등의 심문이나 조사도 해 보지 않고 그들의 말만을 믿어
그를 파면시키고 멀리 추방했다.
국외로 추방당한 아타나시오는 독일의 트리엘에 가서
그 지방의 주교 막시미노에게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막시미노는 그를 동정하며 기꺼이 보호해 주었고 이때에 맺어진 두 사람의 우정은
평생 변함이 없었다.
그의 귀양생활은 9년으로 끝을 맺었다. 그것은 337년에 콘스탄티노 대제가 세상을 뜨고
황태자 콘스탄티오가 등극하자 아타나시오를 알렉산드리아로 소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단자들은 아직도 강하게 그를 매장시키려고 암중비약을 계속해
2년후 또 다시 그는 추방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때 이단 측에서는 재빨리 아타나시오의 파면을 발표했으나 율리오 1세 교황은 그를 지지하고
사르디스에 있어서의 교회측의 집회에서 그의 파면이란 근거없는 낭설이란 것을 공포했다.
그러나 이단자들은 황제의 권력에 아첨해 무리하게도
그의 파면과 9년간의 추방 등을 실현 시켰던 것이다.
재차 그가 추방의 형벌이 풀어져 알레산드리아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347년의 일이었다.
그는 그 후 약 10년간 그 시에서 마음껏 활약할 수가 있었고
그 사이 지금까지 동방에서만 성행하고 있던 이단이 서방 제국에도 유포되기 시작했으므로
아타나시오는 필사적으로 이를 방지하는데 분투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수많은 주교, 광야의 은수자, 수도자, 그리고 신자들은 그를 지지하며 후원해 주었다.
아타나시오의 서한은 사방에서 읽게 되었고 모든 이들의 신앙을 굳게 하는데 퍽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교회의 이단자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괘씸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단이 점차로 쇠퇴해지는 까닭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이단자들은 마침내 시리아노라는 대장에게 의뢰해 그를 살해할 것을 기도하기에 이르렀다.
시리아노는 부하 병정을 인솔하고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좌 성당으로 침입했다.
그러나 아타나시오는 다행히 구사일생으로 광야로 피신할 수 있었다.
광야의 은수자나 수도자들은 기꺼이 그를 숨겨 주었다. 그는 거기서 수많은 서적을 저술했다.
원수들은 사방 팔방으로 그를 찾아다녔으나 끝까지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361년 콘스탄티오 황제가 세상을 떠나고 율리아노 황제가 뒤를 잇자 아타나시오를 위시해
지금까지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주교들 일동에 대해 은사를 베풀었으므로,
그도 또다시 알렉산드리아에 돌아와 회의를 소집하고 다시 한 번
아리우스의 설이 이단사설이란 것을 단정하여 선언했다.
그 이단이 세력을 상실하게 된 것은 실로 이때부터이다.
율리아노 황제는 아리우스파에 빠져 교회를 박해했다.
이리하여 전에 스스로 아타나시오를 소환해 놓고도 그의 활동 특히 그가 교회를 위해
황제에게 한 충고에 대해 매우 분개하고 곧 네 번째의 추방을 단행하게 되엇다.
아타나시오는 또 광야의 은수자에게 가서 숨게 되었다.
교회의 원수들은 재차 그를 죽이려고 수색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때의 일이다. 어느 저녁나절에 그가 작은 배를 타고 나일강을 내려가고 있으려니까
그를 수색하는 병정들의 배가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아타나시오의 배에 탔던 사람들은 무척 근심했으나,
아타나시오는 침착하여 일부러 가까이 지나가도록 했다.
그리고 병정들이 "당신들은 아타나시오를 본 일이 없습니까?"하고 묻자 그는 예사로 대답했다.
"예 보았습니다."
"먼 데서요?"
"아니오, 가까운 데서요. 빨리 가 보시오."
그리하여 그들으 배는 그대로 지나가 버렸던 것이다.
은수처에 숨어 지내는 동안 반몬이라는 수도원장이 희소식을 전해 왔다.
그것은 교회의 박해자 율리아노 황제가 페르시아에서 적군의 화살에 맞아
363년 6월 26일에 사망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었다.
새로 왕위에 오른 이는 교회를 봉행하는 요비아노였다.
그는 아타나시오를 깊이 존경해 즉시 그의 추방을 풀어주었을 뿐 아니라
부단히 그를 해하고자 하는 원수들의 손아귀에서 보호해 주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황제는 다음해 364년 2월 서거했고, 그의 후계자는 교회 신자였으나
다만 서방제국을 통치할 뿐, 동방제국을 지배한 것은 그의 형제로 아리우스 이단자인 바렌스였으므로
그 다음해 아타나시오를 비롯해 요비아노가 소환한 많은 주교들은
또다시 유배의 세월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타나시오에게 있어서는 이번이 다섯번째의 추방이었다.
그는 이번엔 멀리 가지 않고
알렉산드리아 부근에 자리를 잡고 있다가 4개월이라는 추방령이 풀어져
기쁜 마음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시종일관 그를 앙모하던 그곳의 모든 신자들은 마치 개선장군을 영접하는 것처럼 환영하여 그를
맞아들였으며 교회의 이단자들이 이 거룩한 주교를 해치지 못하도록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는 죽을 때까지 평화롭게 자기 교구를 다스리고 사목할 수 있었다.
그는 지난나르이 모든 갈등과 폭력으로 인해 피폐된 교회들을 재건하고,
아픈 상처들을 치료하는데 주력하면서, 저술과 강론을 통해 위대한 사도직을 수행했다.
아타나시오는 신체적 조건으로 볼 때는 작은 사람이었으나, 아주 강인하고 정신력이 뛰어났다.
아리우스 이단을 단죄하고 파문하기로 결정한
니테아 공의회의 결정을 실행하는 데에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리를 따르는 평신도들도 우왕좌왕했고, 수많은 주교들도 주저했다.
그는 간난 신고 중에서 교회를 위해 분투 노력하여 결국 승리를 획득했다.
이런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아타나시오는
그리스도 교회의 거룩한 진리를 세상에 전해 온 사도들의 후예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도구였다.
아리우스 이단을 대항해 저술한 그의 뛰어난 저술과 연설들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는 교회를 잘 다스리고 성서와 극기 수도에 관한 서적을 저술했다.
그의 세력은 위대한 것으로서 그 당시의 다마소 교황께서도 그의 충고를 들어 주셨다고 한다.
공로를 담뿍 싸놓은 아타나시오는 373년 5월 2일 밤중에 고요히 선종했다.
신자들은 즉시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고 교회에서는 그에게 교회학자라는 칭호를 주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아리우스주의
라틴어 Arianismus 영어 Arianism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4세기경의 이단사상.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로부터 발단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신 안에 있는 세 개의 위격은 모든 면에서 대등하고 영원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부만이 그러하다.
성자는 모든 피조물들과 같이 무에서 유로 창조되었을 뿐이며, 신으로 불려질 수는 있지만
그것은 단지 피조물과 신의 중계역할을 하고 세상을 구원하도록 신에 의해 선택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의 은총과 선택에 의해 하느님의 양자가 되었으며
그가 죄를 지을 수도 있었으나 짓지 않는 것을 보시자 신은 그의 덕을 예견하고 선택하였다.
즉 그는 신이 아니라 덕을 갖춘 뛰어난 반신이며 이점에서 성부와 닮았다.
이러한 반 삼위 일체주의적 아리아니즘이 강생의 신비를 단지 수사학적인 문제로 돌림으로써
그리스도교의 근본교리가 해체될 위험에 처하자,
교회 는 325년 니체아 공의회를 소집, 아리아니즘을 단죄하였다.
또한 니체아 신경을 발표,
삼위가 모두 성부로부터 났으며 각 기 그 자체로서 완전한 신이라는 삼위일체설을 고백하였다.
381년의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다시금 고개를 든 아리아니즘을 단죄하고 니체아 신경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아리우스의 후계자들에 의해 북부 게르만 민족들에게 전파되었던 아리아니즘은
게르만족의 로마 진입과 더불어 로마제국 전역에 퍼졌다.
교회는 7세기에 이르러서야 아리아니즘을 몰아내고 정동 교리를 회복시킬 수 있었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신경 信經
라틴어 credo 영어 creed
신앙을 고백하기 위해 그리스도교 교의(敎義)의 요체(要諦)를 간추려 적은 공식적이고 권위 있는 진술.
처음에는 입교 때 행하던 간단한 신앙고백에서 시작하여 4세기경에
마태 28:19을 따라 차츰 3단락의 단일한 형식으로 정비되면서
니체아신경과 콘스탄티노플신경, 사도신경(使徒信經) 등으로 발달하였으며,
서방에서는 오래 된 로마신경에서 나온 사도신경을,
동방에서는 니체아 공의회에서 인정된 니체아신경을 각각 세례신경으로 체택하였다.
동방교회에서는 5세기말경부터 이미 성찬식 때 신경을 암송하기 시작했으나
로마 가톨릭 교회는 1014년에 비로소 이것을 채택하였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사도신경 使徒信經
라틴어 Symbolum Apostolicum 영어 Apostles’ Creed
그리스도교의 바탕이 도는 핵심교리를 담은 초대교회의 신앙고백문.
가톨릭 주요기도문의 하나. 사도신경의 기원은 6세기까지 올라간다.
그러나 ’사도신경’이란 표현은
이것이 12사도에 의해 공동으로 작성되었다는 전설이 퍼져있을 때인 390년경에 발견된다.
사도신경의 원초적 형태는 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마태 16:16, 사도 8:37).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비슷한 형태의 신경은 4세기경에 그 주축이 형성된 것이다.
4세기말 구피노(Rupinus of Aquileia)는 사도신경에 대한 주석에서
이 신경의 사도적 기원을 주장하고 있다.
즉 사도들이 성신(聖神)을 충만히 받고 복음전파를 위해 떠나기 전에
그리스도교 교리의 핵심을 확인키 위해 가르침의 골격과 믿음의 규정을 정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에 암브로시오(Ambrosius)도 동조하였는데
그는 신경에 포함된 12항목과 12사도를 연결시켜 생각하였다.
따라서 12사도가 각각 한 항목씩의 신조를 고백했다는 주장이 중세까지 별 이의없이 전달되어왔다.
그런데 피렌체공의회(1438년)에서 에페소의 대주교 마르코 에우제니코(Marcus Eugenicus)가
동방교회에서는 이러한 사도신경 및 그 사도적 기원에 대하여 아는 바 없음을 주장하였다.
몇 년 뒤에는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라우렌시오 발라(Laurentius Valla, ?-1547)가
보다 이론적으로 사도신경의 사도적 기원에 대하여 반대하였다.
그러나 최근 학자들의 연구결과는 사도신경에 나타난 신조(信條)의 내용이 모두
성서적 사도적 기원을 가지고 있음을 밝혀내고 있다.
다만 현재의 사도신경을 수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공동체의 전례문으로 이해하고 있다.
사도신경은 우선 예비자들을 위한 일종의 길잡이며 교육 지침이다.
초대교회 때부터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명백한 신앙고백이 요구되었다.
여기에서부터 성세(聖洗) 준비와 신앙고백을 위한 장엄한 예식인 신경의 제시, 전수 및 수락,
응답(Expositio, traditio et redditio symboli) 등의 단계가 생겨났다.
이 신경은 또한 미사 중 말씀의 전례에 바쳐지는 감사의 기도이다.
이와 같은 이중의 의미로 인채 4∼5세기를 지나면서 교회공동체의 반성과 숙고,
전례를 통해 다듬어 지게 되었다.
특히 그리스도론, 성삼론(聖三論), 교회론 등 중요한 신조 및 교의에 관한 신학적 논쟁을 거치면서,
이단과 오류에 대한 반박이며 신앙의 선언이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그 골격이 형성되면서 내용설명도 첨부, 고정되어 6세기부터는
프랑스, 스페인, 아일랜드 등지에서 예비자교육을 위한 지침서로 보편화되었다.
사도신경의 내용은 그리스도께 대한 고백
(사도 8:37 이하, 로마 1:3 이하, 1고린 15:3 이하, 1베드 3:18-22, 필레 2:5-11)과
성삼적 고백 등 두 개의 고백이 종합되는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다.
성삼고백은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마태오 28:19의 말씀과 함께 성세성사와 직결되어 있다.
200년을 전후로 하여 로마에서는 8∼9개의 신조로 신경이 이루어지면서
신앙의 규범으로 정착되었다.
히포리토(Hippolytus)의 사도전승(traditio apostolica)에 나타난 신경은
고대 로마신경이라 불리며 사도신경의 모체였을 뿐 아니라
후기에 나타나는 모든 신경의 원형과 같은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동방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방교회에서는 그리스도를 고백함에 있어
그 인간성의 강조와 함께 동정녀 마리아의 잉태를 강조한 반면
동방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원성 및 선재성을 강조하였다.
사도신경의 12항목의 내용은 6세기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5세기경의 신경에는 천지의 창조주(creatorem coeli et terrae),잉태되어(conceptus),
고난을 받으시며 죽으시고 고성소에 내리시어(passus, mortuus, descendit ad inferos),
공번된(catholicam), 모든 성인의 통공(sanctorum communionem),
영원한 삶(vitam aeternam) 등의 표현이 누락되어있다.
중세초기에 이르러 현재까지 사도신경은 모든 서방교회에서 세례의식에 사용되었으며
매 주일 미사 때 신자들은 이 신경을 욈으로써 신앙을 고백하며 새롭게 한다.
동방교회에서는 사용되지 않으며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종교개혁 이후 사도신경의 채택과 평가문제로 논쟁을 거듭해 오고 있다.
20세기에 들어 사도신경은 교회일치에 관한 논의에 있어
그리스도교 신앙개조로써 그 중요성이 더욱 높아져 가고 있다.
사도신경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
-(가톨릭대사전에서)-
영적 독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 말은 우리의 독서 생활에도 적용될 수 있다.
만약 선정적인 내용으로 가득 찬 책만 읽는다면 우리의 영혼은 몹시 피폐해질 것이다.
사고의 폭을 넓히고 영적으로 성숙되기를 원한다면
지적인 부분과 정신적인 부분을 자극하고 활기를 주는 읽을거리를 가까이 해야 한다.
1600여 년 전 성 아타나시오는 ‘심은 대로 거두리라’는 진리를 잘 알고 있었고
영적인 성장과 독서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영적인 진보를 갈망하는 사람치고 영적 독서에 빠지지 않는 사람은 없다.
영적 독서를 게을리 하는 사람은 자신의 상태를 금방 드러내게 된다.”
당신이 이 책을 읽고 있다면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성인들은 그들이 어디에서 하느님과 거룩함과 기도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는지 알려 준다.
만일 우리의 영적 순례에 성인들을 초대해서 도움을 받으려 한다면
먼저 성인이나 저자가 어떤 하느님관을 가졌는지 살펴본 후 그와 친교를 나눌 것이다.
지나치게 중세적 이원론적 사고를 가지고 그것을 본받는다면
이 현실은 ‘눈물의 골짜기’가 되고 하느님 체험의 장이 될 수 없다.
영적 독서에도 식별이 필요하다.
하느님과 그분의 작품인 사람의 참 모습(성인)을 바르게 알려 주는 좋은 영적 독서는
우리 삶을 참으로 풍요롭게 할 것이다.
세계관을 넓혀 주고 사고방식을 바꾸는 데 도움을 주었던 책을 읽었던 때가 언제였는가?
나의 영적 여정에 필요한 책을 읽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