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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2년 6월 19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Berardus 2022. 6. 18. 03:43

[금주의 말씀묵상]

2022년 6월 19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제1독서 창세 14,18-20 

제2독서 1코린 11,23-26 

복음 루카 9,11ㄴ-17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가는 금빛 날개

예수님이 기꺼이 내어주신 몸과 피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영약
기쁜 마음으로 성체성사 봉헌하길



■ 유한한 세상의 빵과 영원한 생명의 빵

공동체 아침 식사가 빵을 위주로 한

식사이기에 가끔 빵을 사러 갑니다.

빵집 문을 열고 들어가면 우선 기분이 참 좋습니다.

빵집 특유의 흐뭇한 냄새가 진동합니다.

빵집 사장님은 얼굴이 상기된 채 열심히 빵을 굽고 있습니다.

어떤 빵은 막 오븐에서 나와 멋진 자태를 자랑합니다.

참으로 다양한 종류의 빵이 제 눈을 현혹시킵니다.

그러나 언제나 들고 나오는 것은 달랑 식빵 두 줄입니다.

지원자 시절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어찌 그리 빵이 맛있었는지.

요즘은 계란 프라이 하나에 식빵 한 개면 아침 끝인데,

그때는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가시지를 않았습니다.

도대체 몇 개면 양이 찰까, 한번 실험을 해봤습니다.

다섯 개, 여섯 개, 열 개, 마침내 길고도 긴

식빵 한 줄이 다 사라지더군요.

그런데 세상의 빵이 지닌 특징이 있습니다.

늘 부족해 보입니다. 많이 먹었다고 생각했는데도

늘 뭔가 양이 차지 않습니다.

한번 배부르게 먹었다고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서너 시간 지나면 또 다른 빵으로 주린 배를 채워야 합니다.

결국 세상의 빵은 이렇게 유한합니다.

세상의 음식은 한순간

우리의 미각을 자극하지만, 그때뿐입니다.

돌아서면 그걸로 끝입니다.

인간의 입이란 것이 간사해서

그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더 이름난 집, 더 좋은 맛집을 찾아가게 합니다.

세속적인 것들의 특징이 대체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 한 가지,

그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한때뿐이며 신기루 같고,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방울 같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배고프지 않을 생명의 빵,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명의 피를 양식으로 제공해주십니다.

어떻게 보면 그분께서

우리에게 맛있는 밥상을 한 상 차려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밥상에 올라온 음식들의 재료가 당신의 몸입니다.

당신의 피와 살입니다.

결국 당신의 몸으로 요리를 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어주신 몸과 피를 우리는 생명의 빵,

생명의 피라고 칭합니다.

그런데 그분의 성체와 성혈이 ‘정말로’ 생명의 빵,

생명의 피로 변화되는 기적의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셨듯이

우리도 똑같이 우리의 몸과 피로

이웃들에게 밥상을 차려줄 때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해 봉사할 때,

우리가 이웃에게 헌신할 때,

우리가 이웃을 사심 없이 사랑할 때,

우리가 받아 모시는 그분의 성체와 성혈은

참 하느님의 몸과 피로 변화될 것입니다.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마음에서 이웃의 굶주림 앞에 나 몰라라 할 때, 슬

퍼하고 고통받는 이웃을 우리의 식탁에 초대하지 않을 때,

나누지 않고 베풀지 않을 때,

성체성사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슬퍼하실 것입니다.

빵은 이웃들을 위해 쪼개어지고, 나누어지고,

그들의 손에 일일이 건네질 때 참된 성체로 변화됩니다.

쪼개어지지 않는 빵은 참된 빵이 아닙니다.

이웃과 나누지 못한 음식은 참된 음식이 아닙니다.

쪼갬과 나눔을 통해 빵은 거룩한

주님의 몸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이웃을 위해 쪼개어지고 나누어진 우리의 삶은

거룩한 주님의 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영하는 생명의 빵인 성체는

인간이 즐겨 먹는 빵이나 가축들이 먹는 사료와

결코 비교할 수 없는 빵입니다.

우리가 매일 영하는 생명의 피인 성혈은

동네 슈퍼마켓 냉장고 안의

음료수와 결코 비교할 수 없는 음료입니다.

성체와 성혈은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만드는 영약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훨훨 건너갈 수 있게 하는 금빛 날개입니다.

순교를 목전에 두었던

이냐시오 성인의 증언은 언제 들어도 가슴이 뭉클합니다.

“세상의 목표도 세상의 왕국도 제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이 세상 끝까지 다스리는 것보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이 더 낫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밀이니 맹수의 이빨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성체성사를 그대 하루의 태양처럼 여기십시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성체성사의 중요성에 대해서 크게 강조합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 안에 교회의 영적 전 재산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선교 활동 전체의 원천이요 정점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2001년 축성 생활의 날을 맞아, 모든 사제, 수도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일의 성체성사 안에서

개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삶과 사도적 활동의 원천이자 정점으로서

우리가 매일 기념하고 경배하는 성찬례 안에서

가장 특별한 방식으로 그분을 만나고 관상하십시오.”

베네딕토 16세 전임교황님께서는

성체성사와 선교, 그리고 일상 안에서의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을 연결시키셨습니다.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건너가지 않는 성찬례는

그 자체로 불완전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 식탁에 나아가면 선교에 이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교적 노력은 그리스도인 삶의 성찬적 모습의 한 부분입니다.”

살레시오회 전 총장 파스칼 차베스 신부의 간곡한 당부입니다.

“매일의 성체성사를 기쁨, 창의성, 열정으로 거행하십시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의

성체성사에 관한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성체성사가 시작되기 전 천사들은

우리를 위한 청원 기도를 하려고 기다립니다.

바로 이때가 천상의 은총을 얻기에 가장 좋고

유리한 시간임을 천사들은 잘 알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의 가경자 구엔 반 투안 추기경께서는

성체성사를 기쁨과 연결시킵니다. “

만일 그대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성체성사를 봉헌하십시오.

성체성사만큼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선물은 다시 또 없습니다.”

살레시오회 요셉 과드리오 신부는

성체성사에 있어서 파견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매일 그대가 봉헌하는 성체성사를

그대 하루의 태양처럼 여기십시오.

그대가 매일 미사 경본을 덮을 때마다 그대의 미사는

다시 한번 그대의 생활 안에서 새롭게 시작됨을 기억하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경기 남양주소재 마재성지



[한주간 전례]

2022년 6월 20일 (월) [녹]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7,1-5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내가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는

하느님과 나의 관계를 좌우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단죄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하느님께 단죄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형제들을

단죄하는 그대로 우리를 단죄하실 것입니다.

이는 곧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에서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시며

모든 이를 구원에 초대하시는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시기에,

우리 또한 이웃을 판단하거나 심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때로는 이웃과 갈등하고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어쩌다

이웃의 부족한 모습이 도드라져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다른 이들의 모습에서

먼저 자기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예

수님께서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끌,

먼지는 보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커다란 기둥,

들보는 보지 못하는 이를 꾸짖으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형제’라는 낱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예수님께 세상 모든 사람은 ‘타인’이 아닌 ‘형제’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한 ‘형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아주 작은 흠

쉽게 찾으면서도 자신의

큰 허물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그 형제에게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고 말하는 기막힌 현실을 지적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위선자야!” 하시며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형제들의 모습에서 먼저 자신을 바라보고 성찰한 다음,

맑고 따뜻한 눈으로 형제들을 다시 바라본다면,

우리는 모든 이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닮아

주변의 형제들을 더욱 깊이 이해하며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형제들은 나를 비추어 주는 거울입니다.

자주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느님과

형제들 앞에서 어떠하였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오전 일을 마치고, 또 잠들기 전에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청하고

매 순간 하느님 말씀에 충실한 자녀로 살아갈 것을 새롭게 다짐해 봅시다.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2022년 6월 21일 (화) [백]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알로이시오 곤자가 성인은

1568년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인이 될 처지였던 그는

귀족 사회의 폭력과 방종에 실망하고

선교사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찼다.
그는 열일곱 살 때 재산 상속의 모든 권리를 포기한 채

로마에서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성인은 1591년 로마 전역에 흑사병이 번졌을 때

그 환자들을 정성껏 돌보다가 감염되어,

스물셋의 젊은 나이에 신학생 신분으로 선종하였다.
1726년 베네딕토 13세 교황은 그를

성인의 반열에 올리며 청소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복음묵상] 마태오 7,6.12-14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여기서 ‘거룩한 것’은 하느님께 바쳐진 제물을 떠올리게 하며,

이 구절을 산상 설교(마태 5―7장 참조)에 견주어 보면

‘거룩한 것’과 ‘진주’는 예수님의 가르침,

곧 하늘 나라의 복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실 예수님 시대에 유다인들은

이방인을 ‘개’에 빗대기도 하였지만,

문맥상 여기서 ‘개와 돼지’는 예수님께서 전해 주신

복음의 진리를 완강히 거부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더욱이 이어지는 구절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겪었던 모진 박해와 시련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황금률’이라 불리는,

율법과 예언서, 다시 말해서 구약 성경의 정신을 일깨워 주십니다.

이는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사랑의 이중 계명(마태 22,34-40 참조)과 더불어

예수님 가르침의 요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의 끝자락에 이처럼 ‘황금률’을

당신 가르침의 결론으로 강조하십니다.

한편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히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문이 바로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는 문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하늘 나라의 가르침을 실현하고 예수님을 따라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이는,

오늘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이 가르침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2022년 6월 22일 (수) [녹]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7,15-20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제1독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스라엘을 쇄신하고자 한 요시야 임금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분열된 유다 왕국의 16대 임금이 된 요시야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서의 내용을 듣고서,

그들의 조상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제대로 실천하지 않았기에 주님의 진노가 내렸음을 선언합니다.

이어서 모든 백성을 데리고 성전에 올라가

계약 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주고,

주님을 따라 걸으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의 계명과 말씀을 실천하기로 주님 앞에서 계약을 맺습니다.

온 백성도 이 계약에 동의합니다.

이후 요시야 임금은 하느님 말씀을 충실히 따르며

이스라엘의 종교 개혁을 이룹니다.

이렇게 하느님 생명의 말씀은 언제나

그것을 새로이 듣고 실천하도록 우리를 다그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고 하시며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하고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과 행동은

좋은 열매를 맺으며 사람들을 생명으로 이끌지만,

악하고 거짓된 마음에서 비롯하는 말과 행동은

나쁜 열매를 맺고 사람들을 파멸로 이끕니다.

그런데 우리 삶은 과연

주님께서 바라시는 좋은 열매를 맺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하느님의 좋은 열매를 풍성히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5,4.5).

하느님과 나누는 친밀한 기도 안에,

말씀과 성체 안에 깊이 머물 때, 우리는 하느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그분을 닮아 형제들을 더 사랑하여 좋은 열매를 더욱 풍성히 맺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또한 성령의 도우심을 청해야 합니다.

갈라티아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5,22-23).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2022년 6월 23일 (목) [백]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세례자 요한은 사제였던

즈카르야와 성모님의 친척인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세례자 요한은 주님에 앞서서

그분의 길을 닦은, 구약과 신약을 이어 주는 위대한 예언자다.
그는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라고 고백하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 임금의 비윤리적 생활을 책망하다가

헤로데 아내의 간계로 순교하였다.

그는 ‘말씀’이신 주님의 길을 준비한 ‘광야의 소리’였다.

[복음묵상] 루카 1,57-66.80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제1독서는 주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부르시고 선택하셨음을 전합니다.

그를 통해서 온 백성을

당신에게 모으실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구원을 알리시고

모든 민족들에게 빛을 전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의 빛’이시며 ‘계시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이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환히 드러납니다.

제2독서는 바오로가

안티오키아 회당에서 유다인들에게 설교한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다윗과 같은,

아니 다윗보다 더 위대한 그들의 주님,

메시아가 나오기를 고대하였습니다.

그분께서 바로 온 세상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에 앞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요한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며

자신을 낮추고, 우리 가운데 찾아오신

구원의 말씀이신 예수님께 자리를 내어 드립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전합니다.

그의 이름 ‘요한’은 주님의 천사가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에게 미리 알려 준 것인데,

하느님께서는 요한을 통하여 많은 이를 하느님께

다시 돌아오게 하시고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그런데 즈카르야는 이를 믿지 않았고,

그 결과 말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아기가 태어난 지 여드레째 되는 날 할례식에서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에 순종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씁니다.

이렇게 즈카르야가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는 순간,

그는 다시 말을 하게 되어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 그 뒤 주님의 손길에 따라 성장한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루카 3,4)가 되어

예수님의 길을 미리 닦아 모든 사람이

그를 통해서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합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있고,

모든 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이끕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잘 아시며 참으로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세례자 요한의 삶은

시작부터 끝까지 오로지 모든 이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채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님을 전하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입니다.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2022년 6월 24일 (금) [백]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이다.

이 대축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내는데,

예수 성심이 성체성사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중세 때 시작하여 점차 보편화되었다.

1856년 비오 9세 교황 때 교회의 전례력에 도입되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해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 성화의 날’을 지내고 있다.

이날은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또한 교회의 모든 사람이 사제직의 존귀함을 깨닫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날이기도 하다.

[복음묵상] 루카 15,3-7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세리나 죄인과 같이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들을 받아들이시고 가까이 하시며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셨던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비유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루카 복음 15장은 세 가지 비유, 곧 되찾은 양(3-7절 참조),

되찾은 은전(8-10절 참조), 되찾은 아들(11-32절 참조)에 대한

비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복음은 되찾은 양의 이야기로,

예수님께서는 이를 통하여 잃었던 당신 자녀를

다시 찾았을 때 느끼시는 하느님의 큰 기쁨을 전하십니다.

백 마리의 양 가운데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고자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는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밤낮으로 길을 헤매며 애쓰는 목자,

마침내 잃어버린 양을 찾고서는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

이웃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목자의 마음이 바로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이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내면서 예수님의 그 마음을 기억하고

그분의 성심 안에 머물며 본받고자 다짐합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시는 착한 목자,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심장마저 꿰찔리시어

피와 물을 다 쏟으신 예수 성심은 오늘도 우리를 당신 품으로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8-29).

예수님께서는 또한 성체로 우리 안에 찾아오시어

목마르고 굶주린 우리를 당신 생명으로 가득 채우시고 다시 살게 하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38).

오늘 하루, 예수 성심과 하나 되어

그분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며,

우리도 누군가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따뜻한 마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사제 성화의 날인 오늘,

세상의 모든 사제가 예수님의 성심을 닮아

주님의 착한 목자로 충실히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2022년 6월 25일 (토) [백]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남북통일 기원 미사

민족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사는 한국 교회는,

1965년부터 해마다 6월 25일에 가까운 주일을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하였다.
1992년에는 그 명칭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바꾸었고,

2005년부터 이날을 6월 25일이나 그 전 주일에 지내다가,

2017년부터는 6월 25일에 거행하기로 하였다.
한국 교회는 남북한의 진정한 평화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노력하고 있다.

[복음묵상] 마태오 18,19ㄴ-22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오 복음 18장은 교회 공동체에 관한 설교로 이루어져 있는데,

주님의 자녀인 우리가 청해야 하는 주된 내용은 ‘형제에 대한 용서’입니다.

오늘 복음의 바로 앞 문장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용서와 화해를 강조하셨고(18,18 참조),

복음에서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하시면서,

그야말로 ‘무한한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조건 없고 한정 없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로 용서받은 우리는

또한 형제들을 주님과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갈라진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한마음으로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용서할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과 용기를 청합니다.

우리에게는 용서가 참으로 어렵고 힘들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용서하고자 간절히 기도하고,

사랑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이들과 함께하십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용서와 사랑의 삶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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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중순입니다.
여름 날씨였다가도

아침, 저녁으로는 선선한 가을 날씨입니다.
이렇듯 변덕이 심한 것이 꼭 사람들의 심보와 비슷합니다.
그래도 하느님께서는 따뜻이 감싸 주시니
올바른 길로 가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