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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Berardus 2022. 6. 9. 05:18

[말씀묵상]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구별되지만 한 분이신 하느님

제1독서 잠언 8,22-31 

제2독서 로마 5,1-5 

복음 요한 16,12-15

 

서로 다르지만 동시에 하나인 신비
삶을 관통하는 주님 사랑을 통해
삼위일체 하느님 깨닫게 되는 것

 

장 푸케 ‘삼위일체와 모든 성인들’.

「H마트에서 울다」는

작년 미국 서점가를 떠들썩하게 했던

미셸 자우너 작가 회고록입니다.

버락 오마바 전 미국 대통령이 추천했고

여러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는

광고 문구는 다소 식상하지만,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이 책을 읽은 것은

저자의 이야기가 누구나 겪는 관계의 문제에 닿아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저자 미셸은 미국 소도시에서 성장하면서 친구들 엄마와

너무 다른 자기 엄마와 갈등을 빚습니다.

늘 ‘예쁘게’ 입히려 하고 음식 장만에 별나게 공들이는 엄마,

매사에 엄격한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음악가로 자유롭게 살기 원했던 딸은 급기야 엄마와 대판 싸우고 독립합니다.

몇 년이 흐른 다음,

미셸은 엄마가 말기 암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부모님 집으로 돌아와 투병과 임종 과정을 지키지요.

장례를 마친 미셸은 엄마와 함께 한국 음식재료를 사러가던

H마트에서 비로소 엄마의 삶이 자기 삶 안에

얼마나 진하게 녹아있는지 깨닫고 오열합니다.

엄마의 잔소리, 엄마가 해주던 음식들,

그 모두가 지금의 자기를 만드는 뿌리였고

엄마 나름의 사랑이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비슷한 성장과정을 겪습니다.

부모님께 껌딱지 마냥 붙어있던 어린 시절을 지나면

‘내 인생은 나의 것’을 외치며 독립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내 부모와 같은 삶을 살지 않겠노라 다짐하기도 합니다.

부모의 관심과 기대가 너무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기도 하지요.

그렇게 부모와 다른 길을 걸으려 하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알게 됩니다.

자기 삶이 결코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부모의 삶은 나와 달랐지만

그 깊은 바닥에는 같은 무엇이 흐르고 있음을….

인격적으로 성숙한다는 것은,

이렇게 내 삶이 타인의 삶과 구별되는 고유한 것이지만

동시에 하나의 사랑이 서로를 관통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 삶이 고립된 무인도의 삶이 아니라

수많은 생명과 사랑의 결정체임을 깨달을 때

인생을 보는 눈이 깊어집니다.

더 나아가 존재하는 모든 생명과 내 삶이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면

그의 삶은 범속한 단계를 넘어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깨달음을

온전히 실현하신 분이었습니다.

이미 탄생에서부터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루카 1,35)라는 천사의 예고가 있었습니다.

성자 예수의 삶은 근본에서부터 성부와 성령과 하나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오늘 첫째 독서는 “한처음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영원에서부터 모습이 갖추어졌다”(잠언 8,23)고 표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삶은 시간의 범주를 넘어

영원으로부터 하나라는 뜻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할 때도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루카 3,21; 마태 3,13-17; 마르 1,9-11)이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셨는지 암시하는 구절입니다.

그분은 아버지께 사랑받는 아들로서,

성령께 인도되는 아들로서 완전한 친교를 누리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렇게 당신 신원을 성부와 성령의 친교 안에서 이해하신 까닭에,

하느님의 친교에로 모든 이를 초대하는 것이

당신 사명임을 받아들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는 고립된 사람들,

단절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친교의 풍요로움을 누리게 하는데 진력을 다하셨습니다.

외롭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알리시며

인간에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셨습니다.

고난에 지친 사람들마저도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시나이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시나이까?”

(화답송, 시편 8)하고 탄복할 수 있도록,

소외받은 이들과 함께 머무시며 그들이 버려져 있지 않음을,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명이 정점에 달한 것은

수난과 부활의 파스카 신비를 통해서였지요.

뭇 사람들 눈에는 철저히 버림받은 것처럼 보이는 십자가의 죽음,

그 누구도 함께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까지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순명하셨습니다.

부활은 그런 성자의 죽음이 버려진 시간이 아니었음을 입증합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성부께 순종하신 성자는

부활을 통해 성부 오른편에 앉으십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 신앙인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게 되었음을 힘차게 선포하지요.

그 누구도 하느님으로부터 버려지지 않았고,

그 어떤 고통의 순간에도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 때문에

신앙인은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로마 5,2) 여기고,

환난조차도 인내와 수양과 희망을 자아내는 계기로 여깁니다.

복음서 가운데서 삼위일체 하느님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요한복음은 시종일관

예수님의 삶이 삼위일체의 친교 안에 있음을 증언합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고,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

(요한 16,15 참조)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서로 다르지만 동시에 하나인 신비이심을 알려 줍니다.

우리가 신앙의 희망 속에

사랑의 삶을 추구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도록 창조되었고,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하나가 동시에 셋이라는 이상한 산수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고유한 가치를 가지면서도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하는 진리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