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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2년 6월 26일 (일)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Berardus 2022. 6. 27. 05:15

[금주의 말씀묵상]

2022년 6월 26일 (일)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제1독서 1열왕 19,16ㄴ.19-21 

제2독서 갈라 5,1.13-18 

복음 루카 9,51-62


주님, 저희가 안아 드릴게요!

주님께 진정한 힘이 되고자 한다면
온전하고 복된 믿음의 삶 살아야
교황님과 하나 되어 굳게 기도하고
하느님께 ‘쉼’ 선물하는 신앙인 되길



강론을 준비하면서 ‘교황 주일’이라는 사실만으로 기뻤습니다.

그런데 뉴스에서 교황님께서 휠체어를 사용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마음이 저렸습니다. 아, 할 수만 있다면, 업어드리고 싶었습니다.

오늘만큼은 꾸준히 바치던 기도 제목을 내려놓고 오직 교황님의 건강과

교황님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것’을 이루어주시기를 청하겠다 마음먹습니다.

어떤 기도로 하루를 여십니까?

엉뚱한 생각이지만,

가끔 미사에서 봉헌되는 지향을 보며 갑갑할 적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 드리는 청원이 고작, 이리도 작고 소소한가?” 싶은 겁니다.

크고 원대하고 비할 데 없이 은혜로운 주님의 사랑을

기껏 자녀의 성적을 위해서 소비하고 고작 취업을 목표로 쏟아붓고

건강한 몸을 위해서 허비하는 게 너무 아까운 겁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의식주의 걱정과 염려에 매달리는 것은

“믿음이 약한” 증거라 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라고

똑 부러지게 일러주셨습니다.

생각해 봅니다. 종교를 불문하고

수십억 인구는 모두 저마다의 소원을 빌며 살아갑니다.

신중의 신이신 주님께서는 그 고만고만한 청원을 총괄하실 테니,

얼마나 피곤하실까 싶습니다. 너도나도 이런저런 잡다한 것을 소원해대는 통에

주님의 귀는 소란스러움에 지쳐 골이 지끈거릴 것도 같습니다.

하물며 하느님의 자녀로 등극한 그리스도인의 기도 안에서도

당신의 뜻과 주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간절함이 없다면

예수님의 외로움은 극에 달할 것이라 싶습니다.

시급히 바치는 화살기도도 손에서 묵주를 놓지 않는 질긴 기도마저도 죄다

‘급출세’ 전략일 뿐일 때, 예수님께서는 다시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라며

쓸쓸함을 토로하실 것만 같은 겁니다.

저는 성경 말씀을 통틀어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루카 2,7)라는 문장을 제일 슬프게 여깁니다.

그리고 오늘 듣는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라는

주님의 고백은 읽을 적마다 마음에 통증을 느끼는 아픈 구절입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다”라는 주님의 읊조림 속에서

외양간에서 시작된 가난의 여정을 만나고 사랑으로

당신의 전부를 내던지셨음에도 철저하게 거부당하신

하느님 아들의 고독을 마주하는 느낌입니다.

때문에 이 구절을 대할 때마다 ‘무엇이든, 어떤 일이든

예수님을 위로해드릴 수만 있다면 못 할 것이 없다’라는

기특한 다짐을 하곤 합니다.

당시의 주님의 인기는 급상승 중이었습니다.(마태 8,18 참조)

그러나 그들의 환호는 단지 병이 낫고 빵을 거저먹은 기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께서는 수많은 제자 안에서도 외로우셨습니다.

그들의 이기적인 마음가짐은 주님의 진심을 알고 난 후,

일언반구도 없이 돌아서버리는 모습에서 드러나는데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뒷걸음질을 치는

제자들을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심정이 어땠을지요.

남은 제자가 고작 일흔두 명에 불과했을 때,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쓸쓸하고 외롭고 처량했을지요.

문제는 지금 교회 안에도 주

님의 놀라운 능력을 내 것을 챙기는 수단으로 삼는

‘어떤 사람’이 존재하는 한 주님은 외롭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무늬만 신자인 사람들 탓에

예수님은 오늘도 머리 둘 곳조차 없이 힘드십니다.

이러한 군중은 아무리 많아도 주님께 힘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삶에는 의외의 변수가 널려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매일 수많은 문제성과 대치하기 위해서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고 주님께 의지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오직 세상의 이치에만 마음이 묶여서

복음적 사고방식을 뒷전으로 한다면 슬프고 아픈 일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오히려 주님의 속을 답답하게 할 수도 있다는 걸

깊이 새기지 않는다면 야고보와 요한처럼 일상의 성급함에 사로잡혀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는

수준 이하의 기도로 예수성심을 기진하게 할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지금 모든 그리스도인이

삶의 무게에 짓눌려 시간의 가혹함에 압도되지 않는

지혜를 선물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렇게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주님의 온기가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 성심의 뜨거운 온기를 지녀서 마음에 흉터를 지닌 채

앓고 있는 이웃을 보듬어 위로하며 용기를 선물해주는

복된 믿음의 삶을 살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과 하나 되어

우리 예수님의 성심께 쉼을 선물해 드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특별한 제안을 드리려 합니다.

교황 주일인 오늘 하루만이라도 자신의 것을 깡그리 내려놓고

오직 교황님의 ‘6월의 지향’에 일치해주시길 강권하려 합니다.

‘매일미사’ 첫 장에 실려 있는 교황님의 지향에 마음을 모아

탄탄한 기도의 탑을 쌓아주시길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온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이 교황님의 기도에 힘을 실어드릴 때,

주님께서 정말 기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황님의 청원에 응답해주지 않고는 못 배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침 예수 성심 성월에 바치시는 교황님의 기도 지향이

‘전 세계 그리스도인 가정들이 일상생활에서 조건 없는 사랑을 실천하고 체험하여

성덕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니 진정 모두에게 복된 일이라 의심치 않습니다.

부디 이 주간, 교황님과 하나 되어

주님께 쉼을 선물해 드리는 은혜인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이탈리아 로레토지역 바실리카성당 제대



[한주간 전례]

2022년 6월 27일 (월) [녹]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8,18-22
<나를 따라라.>

한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에게 예수님의 존재는 말씀과 행동으로 그를 가르치고

이끌어 주시는 ‘스승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께 배우기를 바랍니다.

“어디로 가시든지”라는 표현은, 온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시던

예수님의 일상을 떠오르게 합니다(마태 4,23; 9,35 참조).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예수님께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미 ‘주님’이십니다.

그런 그에게 당장 해야 할 중대한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바로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장례’라는 자식된 도리를 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인륜대사의 중요한 의무마저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드시며 당신을 따르라고

명하시는 이 분은 도대체 누구이십니까? ‘주님’이시고, ‘하느님’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이야말로 우리가 머물러야 할

‘집’이며 궁극적으로 우리 ‘구원’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주님이시며 또한

생명의 주님이시기에 죽음과 삶은 오직 그분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을 알고

믿으며 따르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드린 고백을 기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스승’이시며 ‘영원한 생명의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2022년 6월 28일 (화) [홍]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레네오 성인은 130년 무렵 소아시아의 스미르나

(오늘날 터키의 이즈미르)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공부한 그는 프랑스 리옹에서 사제품을 받고, 뒤에 그곳의 주교가 되었다.

이레네오 주교는 특히 프랑스 영지주의 이단들의 오류를 거슬러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는 일에 많은 힘을 쏟았다.
2세기 교회의 중요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동한 그는,

영지주의 이단의 오류를 낱낱이 지적한 「이단 논박」이라는 유명한 저서를 남겼다.
성인은 200년 무렵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2년 사도적 권한으로 이레네오 성인을

일치의 학자(Doctor unitatis)라는 칭호와 함께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2022년 1월 21일 교령 참조).

[복음묵상] 마태오 8,23-27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호수에서 풍랑을 가라앉히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고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 함께 배에 올랐는데,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일 지경에 이릅니다.

그야말로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제자들의 혼란과 공포를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 배가 뒤집힐지도 모를 참으로 급박한 위기 상황에서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태연히 주무시고 계십니다.

이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가

그분을 흔들어 깨우며 말합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제자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시며 그들의 ‘부족한 믿음’을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시어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니,

풍랑이 멎고 호수가 잠잠해집니다. 제자들이 몹시 놀라워하며 말합니다.

“이 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완전히 깨닫지 못하였지만,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정체를 보여 주십니다.

전통적으로 성경에서 배는 교회를,

바다는 세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을 항해하는 배로 자주 묘사됩니다.

또한 바다의 거친 바람과 파도는 세상을 항해하는 교회가 겪는

갖은 어려움과 곤경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겪는

그 어떤 어려움도 당신의 권능과 말씀만으로

다스리실 수 있는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녀야 할 것은, 주님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분에 대한 ‘믿음’입니다

. ‘부족한 믿음’이 아닌 ‘온전한 믿음’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어려움을 맡겨 드리며 도우심을 간절히 청한다면,

그분께서는 기꺼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2022년 6월 29일 (수)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베드로 사도는, 이스라엘 갈릴래아 호수에

인접한 벳사이다 출신으로 본이름은 시몬이다.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어부 생활을 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베드로(반석)로 바꾸시고,

그를 사도단의 으뜸으로 삼으셨다.
복음서에 소개되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은 소박하고 단순하다.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여 칭찬받기도 하고,

예수님의 수난을 반대하다가 심한 꾸중을 듣기도 하였다.
로마 교회의 첫 주교로서 첫 번째 교황이기도 한 베드로 사도는,

67년 무렵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였다.

바오로 사도는 열두 제자와는 달리 비교적 늦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본디 그리스도교를 열성적으로 박해하던 사람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려고 다마스쿠스로 가던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뒤 유다교에서 개종하여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들이 사는 여러 지역에 교회를 세웠다.

그 공동체들에 보낸 많은 서간이 오늘날 『성경』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67년 무렵 로마에서 참수되었다.

[복음묵상] 마태오 16,13-19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제2독서의 말씀은 바오로 사도가

그의 마지막 순간을 앞두고 느끼는 감회를

매우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바오로는 그야말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 구원의 기쁜 소식,

복음을 전하는 데 헌신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이제 자신도 예수님처럼 희생 제물이 되어

피 흘려 순교하게 될 것임을 예감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며 생의 마지막을 담담히 준비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이르러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으시고, 제자들에게도 물으십니다.

이에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1,1)로 복음서의 문을 여는데, ‘그리스도’, 곧 ‘메시아’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정체가 16장에서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으로 선포됩니다.

이를 시작으로 예수님께서는 세 차례에 걸쳐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예고하시고(16,21-23; 17,22-23; 20,17-19 참조),

인류를 위한 ‘구원자’로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처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주님의 제자였고,

제자들을 대표하여 예수님과 자주 대화를 나누었으며

(14,28-31; 15,15-20; 16,16-19 참조),

오늘 복음에서처럼 예수님의 정체를 밝혀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고,

그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매고 푸는 권한과 사명을 맡기십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졌고,

박해 속에서도 베드로는 주님의 보호 아래 교회를 충실히 이끌며

뒷날 순교에 이르기까지 본인의 사명을 다합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인 오늘,

특별히 주님의 사도이며 교회의 위대한

두 성인인 베드로와 바오로의 전구를 청하면서,

우리도 예수님과 더욱 일치하여 주님께 우리의 신앙과 사랑을 고백하고,

만나는 모든 이에게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도록 열성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2022년 6월 30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9,1-8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적을 몸소 행하시면서

하늘 나라의 도래를 드러내 보이시고 ‘메시아’로서

당신의 정체를 더욱 분명히 보여 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시고, 기적을 가져오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하늘 나라의 구원과 기쁨을 이 땅에 실현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오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질병은 죄로 말미암은 것으로 여겨졌고

(레위 26,16; 신명 28,22.35 참조),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오직

하느님께만 있었기에, 예수님을 믿지 못하던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을 마음속으로 단죄합니다.

이에 그들의 생각을 아신 예수님께서 죄의 용서와 치유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쉬운지 물으십니다.

사실 가치론적으로 본다면 육체의

치유가 죄의 용서보다 훨씬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라고 하신 다음,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하시니,

그가 치유되어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를 본 군중은 몹시 두려워하며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복음서에서 들려주는 이 같은 기적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알려 줍니다.

중풍 병자를 낫게 하신 기적 사건으로 우리는 죄와 질병,

고통과 죽음까지도 모두 다스리는 권한을 가지신

전능하신 하느님의 현존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합니다.

이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죄를 용서하시며 치유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하느님, 우리 구원자이십니다. 아멘.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2022년 7월 1일 (금) [녹]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9,9-13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구원 사명’이

마태오 복음사가의 성소 이야기 안에서 소개됩니다.

먼저, 마태오는 중풍 병자가 치유된 사건(9,1-8 참조)에 이어서

자신이 부르심을 받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평상에 누워 있던 중풍 병자가 예수님을 통하여 해방된 이야기가,

자신이 한평생을 묶여 살았던 세관에서 해방된 체험과 닮았다고 본 듯합니다.

또 마태오는 예수님의 부르심이

자신을 먼저 “보시고” 시작되었음을 전하면서

이 부르심은 전적으로 예수님께서 행하셨고,

다분히 의도적이었음을 강조합니다. 이어서 마태오는

자신의 성소 이야기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실인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이유’를 소개합니다. 예

수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마태오가 이 사실을 처음부터 알았을까요?

마태오도 우리처럼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것을

한참 뒤에나 알게 되었을 듯합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마태오는 회개하였기 때문에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회개하였다는 점입니다.

부르심이 회개에 앞섭니다.

교회는 회개한 이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오히려 회개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 모인 곳이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그런데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의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복음은 그런 우리의 속마음을 건드립니다.


-(김인호 루카 신부)-

2022년 7월 2일 (토) [녹]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9,14-17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드린 질문은 단순히

‘단식’에 대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전통과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묻는 모습에서 순수한 궁금증보다는

묘한 우월감과 비판 의식이 느껴집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요

한의 제자들처럼 신앙생활을 정해진 규범과 전통을 따르는

정도로 한정하여 이해하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왜 요즘 여성 신자들은 미사보를 안 쓰나요?” “

왜 요즘 신자들은 묵주 기도를 무릎 꿇고

바치지 않나요?” 등과 같은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신앙의 핵심을 마주합니다. ‘

신앙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규칙과 전통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예수님의 현존을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래된 것이라고 해서 다 버려야 하는 것도 아니고,

새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따르는 규칙과 전통 안에서 예수님의 현존을 느끼는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가끔 규칙과 전통으로 이루어 놓은

개인과 공동체를 찢어지고 터지게 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슬퍼할 일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이 닿는데도 어떤 찢어짐이나

터짐이 일어나지 않는 자신의 삶과 공동체의

‘고요함’이야말로 진정으로 슬퍼해야 할 일입니다.


-(김인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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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함께 부대끼며,
길들여지며, 기다리는 것,
녹슬지 않도록 스스로 갈고, 닦으며,
오늘 하루도 맑은 옹달샘 같은,
신선한 향기가 솟아나는 생활의
활력을 불어넣는 한 주 되시길....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