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묵상]
2022년 6월 12일 (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제1독서 잠언 8,22-31
제2독서 로마 5,1-5
복음 요한 16,12-15
구별되지만 한 분이신 하느님
서로 다르지만 동시에 하나인 신비
삶을 관통하는 주님 사랑을 통해
삼위일체 하느님 깨닫게 되는 것
「H마트에서 울다」는 작년
미국 서점가를 떠들썩하게 했던
미셸 자우너 작가 회고록입니다.
버락 오마바 전 미국 대통령이 추천했고
여러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는 광고 문구는 다소 식상하지만,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이 책을 읽은 것은
저자의 이야기가 누구나 겪는
관계의 문제에 닿아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저자 미셸은
미국 소도시에서 성장하면서 친구들
엄마와 너무 다른 자기 엄마와 갈등을 빚습니다.
늘 ‘예쁘게’ 입히려 하고 음식 장만에 별나게 공들이는 엄마,
매사에 엄격한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음악가로 자유롭게 살기 원했던 딸은
급기야 엄마와 대판 싸우고 독립합니다.
몇 년이 흐른 다음,
미셸은 엄마가 말기 암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부모님 집으로 돌아와 투병과 임종 과정을 지키지요.
장례를 마친 미셸은 엄마와 함께 한국 음식재료를 사러가던
H마트에서 비로소 엄마의 삶이 자기 삶 안에
얼마나 진하게 녹아있는지 깨닫고 오열합니다.
엄마의 잔소리, 엄마가 해주던 음식들,
그 모두가 지금의 자기를 만드는 뿌리였고
엄마 나름의 사랑이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비슷한 성장과정을 겪습니다.
부모님께 껌딱지 마냥 붙어있던 어린 시절을 지나면
‘내 인생은 나의 것’을 외치며 독립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내 부모와 같은 삶을 살지 않겠노라 다짐하기도 합니다.
부모의 관심과 기대가 너무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기도 하지요.
그렇게 부모와 다른 길을 걸으려 하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알게 됩니다.
자기 삶이 결코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부모의 삶은 나와 달랐지만
그 깊은 바닥에는 같은 무엇이 흐르고 있음을….
인격적으로 성숙한다는 것은,
이렇게 내 삶이 타인의 삶과 구별되는 고유한 것이지만
동시에 하나의 사랑이 서로를 관통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 삶이 고립된 무인도의 삶이 아니라
수많은 생명과 사랑의 결정체임을 깨달을 때
인생을 보는 눈이 깊어집니다.
더 나아가 존재하는 모든 생명과 내 삶이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면 그의 삶은 범속한 단계를 넘어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깨달음을
온전히 실현하신 분이었습니다.
이미 탄생에서부터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라는
천사의 예고가 있었습니다.
성자 예수의 삶은 근본에서부터
성부와 성령과 하나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오늘 첫째 독서는
“한처음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영원에서부터 모습이 갖추어졌다”
(잠언 8,23)고 표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삶은 시간의 범주를 넘어
영원으로부터 하나라는 뜻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할 때도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루카 3,21; 마태 3,13-17; 마르 1,9-11)
이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셨는지 암시하는 구절입니다.
그분은 아버지께 사랑받는 아들로서,
성령께 인도되는 아들로서 완전한 친교를 누리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렇게 당신 신원을 성부와 성령의 친교 안에서 이해하신 까닭에,
하느님의 친교에로 모든 이를 초대하는 것이
당신 사명임을 받아들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는 고립된 사람들,
단절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친교의 풍요로움을 누리게 하는데 진력을 다하셨습니다.
외롭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알리시며 인간에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셨습니다.
고난에 지친 사람들마저도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시나이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시나이까?”
(화답송, 시편 8)하고 탄복할 수 있도록,
소외받은 이들과 함께 머무시며 그들이 버려져 있지 않음을,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명이
정점에 달한 것은 수난과 부활의
파스카 신비를 통해서였지요.
뭇 사람들 눈에는 철저히
버림받은 것처럼 보이는 십자가의 죽음,
그 누구도 함께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까지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순명하셨습니다.
부활은 그런 성자의 죽음이
버려진 시간이 아니었음을 입증합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성부께 순종하신 성자는
부활을 통해 성부 오른편에 앉으십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 신앙인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게 되었음을 힘차게 선포하지요.
그 누구도
하느님으로부터 버려지지 않았고,
그 어떤 고통의 순간에도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 때문에
신앙인은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로마 5,2) 여기고,
환난조차도 인내와 수양과
희망을 자아내는 계기로 여깁니다.
복음서 가운데서 삼위일체 하느님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요한복음은
시종일관 예수님의 삶이 삼위일체의
친교 안에 있음을 증언합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고,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요한 16,15 참조)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서로 다르지만
동시에 하나인 신비이심을 알려 줍니다.
우리가 신앙의 희망 속에
사랑의 삶을 추구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도록 창조되었고,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하나가 동시에 셋이라는 이상한 산수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고유한 가치를 가지면서도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하는 진리인 것입니다.
-박용욱 미카엘 신부-
[한주간 전례]
2022년 6월 13일 (월) [백]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안토니오 성인은 1195년
포르투갈 리스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우구스티노 수도회를 거쳐
성 십자가 수도회에서 생활하다가 사제가 되었다.
성인은 모로코에서 최초로 순교한
작은 형제회 수사 다섯 명의 유해가
포르투갈에 도착하였을 때 깊은 감명을 받아,
아프리카 선교의 꿈을 안고 수도회를 작은 형제회로 옮겼다.
선교사로 모로코에 파견되었다가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탁월한 설교로
파도바의 많은 이를 주님께 이끌었다.
그러나 1231년 열병으로 서른여섯의 젊은 나이에 선종하였다.
안토니오 성인은 이례적으로 선종한 이듬해에
그레고리오 9세 교황에게 시성되었다.
[복음묵상] 마태오 5,38-42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동태 복수법’은 함무라비 법전을 비롯한
고대 근동의 옛 법전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는 구약 성경에서도 언급된
(탈출 21,24; 레위 24,20; 신명 19,21 참조) 것으로
예수님께서는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온
구약의 가르침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도 이를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연하다고,
마땅히 정의롭다고 생각하던
기존의 가치를 넘어서 새로운 가르침을 전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하시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과거의 가치관과 편견,
세상의 소리를 초월하여 오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목소리입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악인과 악에 대해서 그저
소극적으로 대응하거나 저항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당신의 적극적인 방식으로 이에 대응하도록 하십니다.
복수하지 말고, 오히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고,
속옷을 달라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어 주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 말씀이 우리에게 가당하기나 합니까?” 하고 반문해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 구원을 위한
당신 십자가의 길에서 이를 직접 행동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기존의 가치관이나 세상의 소리에 파묻혀,
당한 만큼 똑같이 돌려주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때때로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손길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기며 예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께서 걸으셨던 그 길을 따라야 합니다.
홀로 매달려 계시는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를 위하여 그야말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셨던
그분을 조금이라도 더 닮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2022년 6월 14일 (화) [녹]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43-48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앞에서 자신을 참으로 낮춘 아합을 보시고
그에게서 재앙을 거두십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서 부족하고 부당한 죄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시편 말씀을
입으로 고백하며 주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하느님, 당신 자애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시편 51[50],3).
하느님께서는 죄인이며
참으로 보잘것없는 우리를 자비로이 부르시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당신 자녀가 되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의 길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한편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서의
여섯 가지 대당 명제(마태 5,21-48 참조) 가운데 마지막인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이미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씀을 너무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좀 더 주목하게 되는 구절은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라는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 줄 알았는데,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의 중심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핵심 조건으로
원수에 대한 사랑과 박해하는 이들을 위한 기도를 요구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악인과 선인에게
똑같이 기회를 주시는 분이시고,
모든 이가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십니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성품을 본받고 따르며
아버지의 모습을 비추는 이들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고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하는 일입니다.
서양 격언에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마귀의 일이며,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사람의 일,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고,
또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주님과 영원히 함께 살기 위하여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아버지를 닮아
사랑과 자비로 주위의 모든 사람을 품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2022년 6월 15일 (수) [녹]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6,1-6.16-18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전통적으로 유다인들은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조건으로
자선, 기도, 단식이라는
세 가지 종교적 신심 행위를 강조하였습니다.
자선, 기도, 단식은 하느님과 형제들 그리고
나 자신과도 화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이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거룩한 자녀로
거듭날 수 있는 은총을 얻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선, 기도, 단식을 말씀하시면서
이를 행할 때에 제자들이 갖추어야 하는
올바른 자세를 깨우쳐 주십니다.
여기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내용은
먼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사람들에게서 칭찬과 존경을 받으려고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하는 이들을
‘위선자’에 빗대며 경고하십니다.
또한 그들은 받을 상을 현세에서 이미 다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반면에 남몰래 자선을 베풀고,
골방에 홀로 숨어 아버지께 기도하며,
단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고
행하는 이들은 장차 하느님 아버지께 보
상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자선, 기도, 단식뿐만 아니라
오늘 하루 있었던 작은 노력과 실천들을
어떠한 지향으로 행하였는지 곰곰이 성찰해 봅시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는지,
그래서 세상의 영예와 존경과 보상을 바라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오직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고자 하였는지,
그래서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영원한 선물에 마음을 두었는지.
우리 삶의 방향이 사람들의 시선과 세상의 영예를 향할 때,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점점 멀어질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여
하늘나라의 상을 받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2022년 6월 16일 (목) [녹]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6,7-15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몸소 바치셨고
제자들에게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이는 산상 설교의 한가운데에 자리하며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또한 주님의 기도는 기도할 줄 모르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기쁨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바치셨던 이 기도를 바칠 때,
우리는 주님과 하나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나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이시며,
‘하늘에 계신’ 그분께서는 초월적이시고
전지전능하시면서 당신 자녀인 우리의 청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덕분에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을 “아빠!아버지!” 하고 언제든지 부를 수 있습니다.
든든한 아빠, 아버지 하느님께서 굳건히 우리를
받쳐 주고 계시기에 우리는 세상 어떠한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주님의 기도 앞부분은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기도 뒷부분은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매일의 양식을 청하고,
잘못한 이를 용서하고 서로 화해하며,
세상 유혹에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악의 지배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도록
하느님의 손길을 간청합니다.
이렇듯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자녀인 우리가 나누는 친밀한 대화입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일치하여 천천히 그분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시며
우리를 따뜻한 사랑으로 감싸 주시는 주님의 품 안에 머물러 봅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2022년 6월 17일 (금) [녹]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6,19-23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보물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자신을 위하여 땅 위에 쌓은 보물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을 위하여 하늘에 쌓은 보물입니다.
땅 위의 보물은 좀과 녹으로 훼손되고
도둑이 훔쳐 가기도 하는 불완전하고 순간적인 것이지만,
하늘의 보물은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이 훔쳐 가지도 못하는 완전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라고 하시면서,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우리 삶 전체를 이끌어 간다는 사실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 삶의 보물은 무엇입니까?
현세의 것과 하느님의 것 사이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세상과 하느님 사이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보물을 찾으려면 온 마음과
온 정성과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 ‘투신’해야 합니다.
하늘 나라의 비유를 전하는 마태오 복음 13장 44절에서도
밭에 숨겨진 하늘 나라의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고 전합니다.
한편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께서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던 청년은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주님을 떠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눈은 몸의 등불이다.”라고 하시는데,
이 말씀은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우리 몸 전체를 비추고 이끈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재물과 이기적인 욕심에 빠진 탐욕스러운 눈은
우리 몸을 어둡고 병들게 하며 우리를 고립시킵니다.
반면에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들에 대한
애덕과 나눔으로 가득한 맑은 눈은
우리 몸을 밝고 따뜻하게 하며 주님의 생명으로
우리를 더욱 충만하게 해 줄 것입니다.
오늘 나는 무엇을 바라며 살고 있는지,
내 마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으며,
내 눈은 어디를 좇고 있는지 곰곰이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2022년 6월 18일 (토) [녹]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6,24-34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대상이
결국 우리를 다스리고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반복되며 귓가에 맴도는 주님의 말씀은
“걱정하지 마라.”입니다.
이 말씀의 근거는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자녀들을 잘 아시고,
우리를 돌보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곧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며 생명의 주인이신
전능하신 분께서 세상 그 무엇보다도 귀하게 여기시는
당신 자녀들의 어려움과
고통, 눈물과 아픔을 잘 알고 계시기에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늘의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우리에게 몸소 마련해 주시며 우리를 보살펴 주십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하느님 우리 아버지에 대한 굳은 믿음입니다.
좋으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소중한 아드님마저 기꺼이 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 환호송처럼,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부유한 자녀들이고,
하느님께서는 ‘임마누엘 주님’으로
우리 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것입니다.
이는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예수님을 더욱 닮아 가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화답송이며 주님의 종 다윗에게 전해진 시편의
“영원토록 그에게 내 자애를 베풀리니”(시편 89[88],29)라는 말씀은
하느님 아버지의 귀한 자녀인 우리를 향한 주님의 변함없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참으로 아끼고 사랑하십니다.
날마다 무거운 수고와 힘겨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십자가 위의 예수님께서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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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차 여름으로 바뀌는 시기입니다.
약간씩 내리는 비가
그동안의 가뭄 해갈에는 부족하지만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작은 정성도
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웃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_Berar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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