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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8일. 복자 루케치오와 보나돈나 부부 /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마리아 사제/성 베드로 샤넬 사제

Berardus 2022. 4. 27. 19:34
 
 

 Legend of St Francis: 1. Homage of a Simple Man-GIOTTO di Bondone

1300. Fresco, 270 x 230 cm. Upper Church, San Francesco, Assisi

 


4월 28일

복자 루케치오와 보나돈나 부부


Bl. LUCHESIUS

Bl. Luchesio

Beato Lucchese e Beata Buonadonna Sposi

Born:at Poggibonsi, Umbria, Italy

Died:1260 at Poggibonsi, Umbria, Italy

Beatified:1273 (cultus approved)

Patronage:death of children, lost vocations

first Franciscan terziaries  

 

 

1221년에 프란치스코는 제3회라고도 불리우는 재속 형제회를 설립했다.

이 회는 이미 결혼을 했거나 세속 생활을 하는 신자들이,

"세속 안에 살면서'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의 생활양식과 정신을 따라

겸손한 표양, 사랑의 자선, 가난의 정신을 실천하면서 회칙에 따라 살아가는 단체로,

호노리오 3세 교황은 프란치스코와 형제회 보호자인 우고리노 추기경이 함께 작성한 회칙을

기꺼이 인준해 주었다.

 

첫 회원은 포기본서 지방에 사는 상인 루케치오와 아내 보나돈나였다.

루케치오는 대단히 완고하고 인색하며 탐욕스러운 사람이었으나 프란치스코의 설교에 감화되어

재산을 팔아 자선사업에 헌신했고, 환자들에게도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그의 아내 보나돈나도 남편의 자선과 봉사를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회개하여 훌륭한 회원으로 살다가

1260년 4월 28일, 같은 날 불과 몇시간 간격으로 두 사람은 영원한 행복이신 주님의 품에 안겼다.

이들은 현재 복자로 추앙받고 있다.

 

첫 회칙은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인준한 것으로 "회개의 형제 자매회" 라고 불리웠으나,

그동안 여러 차례 개정되었다. 현재 한국에는 일만 명 가까운 회원들이 프란치스코를 따르고 있다.

이 회의 정식명칙은 1978년 6월 24일 교황 바오로 6세께서 인준한 회칙상의

"재속 프란치스코회"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작은형제회홈에서)-


  

 4월 28일 복자 루케치오 (첫 3회원)   


  
루치오 또는 루케치오 모레스터니는

최초의 3회원이었던 매우 영적으로 뛰어났던 인물이다.

 그는 1181년에 투스카니에 있는 발 델사에서 태어났다.

그는 젊었을 때 종교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대신 세상사에 몰두해 있었다.

그는 돈을 좋아하였다.

 한편으로는  정치적으로 국민을 갈라놓는 분쟁 속에서 그는

 너무나 격렬한 열성당원이어서 고향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포지본지에 정착을 했고, 거기서 상인과 돈놀이꾼이 되어 살았다.
   자식들의 죽음으로 그는 마음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는 병자들과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는 일과 같은 자선사업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과거에 고리대금업을 하였던 것을 보상하기 위해 그는 자신과 아내가

겨우 먹고 살만큼의 조그만 땅 외에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에 성 프란치스코가 포지본지에서 설교를 하였다.

성인의 열렬한 가르침은 루케치오와 그의 아내 보나돈나에게 깊은 영감을 주어

 그들은 성인에게 다가가 자신들을 안전하게 천국으로 이끌어 줄 생활양식을 청하였다.
   세상에 살면서 수도생활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단체를 만들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던 성인은

 기꺼이 그들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들을 위하여 마련해 준 짧은 생활양식은 후에 늘어나서 3회 회칙이 되었다.

그들은 생활 처지에 맞는 수도복을 받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3회의 최초 회원들이 된 것이다.

 두 사람의 삶은 거룩하였고, 사랑과 자선사업에 온전히 헌신하였다.

이렇게 루케치오와 보나돈나는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보속하며 열심히 일하였다.

그들은 탈혼의 은총과 병자를 치유하는 은총의 보답을 받았다.

두 사람은 같은 날 하느님께 돌아가는 은총을 받았다.

루케치오는 1779년 비오 6세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기도
오 하느님,

당신의 풍요로운 자비로 복된 루케치오를 회개의 생활로 초대하시어

신심과 자비의 공로로 빛나게 하셨으니,

그의 중재와 공로로 저희에게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시고

신심과 자비의 행위로 당신의 자비를 받을 수 있게 하소서

.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묵상
우리는 육적으로 지혜롭고 밝아서는 아니 되며,

오히려 더욱 단순하고 겸허하며 순수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죄로 인하여 비참하게 되고 부패되었으며

악취를 풍기고 또한 벌레들이기에 우리의 육신을 수치와 멸시를 받을 만한 것으로 여깁시다.

주님이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나는 사람도 아닌 구더기,

 세상에서 천더기, 사람들의 조롱거리". 우리는 절대로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고 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종들이 되어야 하며 하느님 때문에

 피조물인 모든 사람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모든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 2-

-(재속프란치스코한국국가형제회홈에서)-

 


루케시오 혹은 루치오라고도 불리는 그

는 발 델사 태생인데 이곳은 후일 플로렌스로 불린다.

그는 첫번째 재속 프란치스꼬 회원이다.

 

젊어서 그는 매사에 세속적인 탐욕을 부렸는데, 특히 재산과 정치에 욕심이 많았다.

이때문에 그는 구엘프란 사람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고향 마을 가찌아노를 떠나 뽀기본지로 이사하였는데,

이곳에서 그의 사업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나이 35세쯤 되었을 때 인생의 큰 전환기를 맞게 되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의 자식의 죽음 때문인듯 여겨진다.

이 때에야 비로소 그의 영혼에게 하느님의 속삭임이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조금씩 가난한 이와 병자들을 돕고 또 위로하였으며, 감옥을 찾기도 하였다.

이 모든 그의 변화는 성 프린치스꼬가 그 지방을 방문하여 설교한 뒤부터 일어난 일이다.

이제 그는 세속 안에서 수도생활을 꿈꾸게 되었다.

 

루케시오와 보나돈나는 매우 적극적인 성격이었으므로,

그들의 소망을 성인께 말씀드려, 천사적 성인으로부터 재속 3회의 수도복과 띠를 받았다.

이 순간부터 그들은 철저한 통회와 보속의 생활을 하였다.

그들이 먹을 빵도 없을 때가 많았다고 한다.

이리하여 이 부부는 높은 성덕을 얻었으며,

탈혼과 치유의 은사까지 받아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면서 여생을 참으로 행복하게 지냈는데,

부부가 거의 동시에 임종하는 은혜까지 입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San Francesco abbraccia Gesu crocefisso

 

프란치스코성인께서

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1

 

1.회개하는 이들

 

1)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마르 12,30) 주님을 사랑하고,

자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마태 22,39) 사랑하고,

2) 악습 및 죄악과 더불어 자신들의 육신을 미워하며,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고,  

4)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들 :

5) 오, 그런 일을 실행하며 항구하는 남녀 모든 이들을 얼마나 복되고 얼마나 축복받은 사람들인지!  

6) 주님의 영이 그들 위에 내리고(이사 11,2), 주님이 그들을 거처와 집으로 삼으실 것이며(요한 14,23),  

7) 그들은 아버지의 일을 하기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들이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들이요 형제들이요 어머니들이기 때문입니다.(참조: 마태 12,50).

 

8) 믿는 영혼이 성령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할 때 우리는 그분의 정배들입니다.  

9)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마태 12, 50) 실천할 때 우리는 그분에게 형제들이 됩니다.  

10) 우리가 거룩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가지고 우리의 몸과 마음에 그분을 모실 때

우리는 그분의 어머니들이 됩니다.  

표양을 보여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할 거룩한 행실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게 됩니다.

 

11) 거룩하시고 위대하신 아버지를 하늘에서 모시는 것은, 오, 얼마나 영광된 일인지!  

12) 위로되시고 아름다우시고 감탄할 만하신 그러한 정배를 모시는 것이 오, 얼마나 거룩한 일인지!  

13) (아버지의 마음에)드시고 겸손하시고 평화로우시고 달콤하시고 사랑할 만하시고

또한 무엇보다도 바랄 만한 그러한 형제와 그러한 아들을 모시는 것이 오,

얼마나 거룩하고 좋은 일인지!  

이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양들을 위해 목숨을 비치셨고(참조: 요한 10,15)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14)거룩하신 아버지, 본래 아버지의 사람들이었지만 나에게 맡겨 주신(요한 17,6)

이 사람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켜 주십시오.(요한 17,11).  

15) 그리고 나는 나에게 주신 말씀을 이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였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참으로 믿었으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16)나는 세상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요한 17,8-9).  

17) 그들을 축복하시며 거룩하게 하시고(요한 17,17).

그들을 위하여 나도 나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요한 17,19).  

18) 나는 이 사람들만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도 간구합니다.(요한 17,20).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요한 17,11)  이들도 거룩해져 하나가 되게 하소서(참조 : 요한 17,23)  

19) 그리고 아버지, 그들도 내가 있는 곳에 함께 있게 하시고(요한 17,24),

당신의 나라에서(마태 20,21)나의 사랑을 그들이 볼 수 있게 하소서(요한 17,24).

아멘.

 

 

성프란치스코.나환자와 함께

 

2. 회개하지 않는 이들

1) 그런데 회개 중에 있지 않고
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지 않으며 
3) 악습과 죄악을 일삼고 욕정과 자기 육신의 나쁜 욕망을 좇아 다니며, 
4) 하느님께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고, 
5) 육적인 욕망을 가지고 세속의 걱정과 살아갈 근심에 싸여

세상을 육적으로 섬기는 남녀 모든 사람들, 
6) 악마의 짓을 그대로 하고 악마의 자식들이 된 이들은 악마에게 붙들려 눈이 멀었습니다.
7) 참된 빛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8) 그들은 아버지의 참된 지혜이신 하느님의 아들을 모시지 않기에 영적인 지혜를 가지지 못합니다. 
9) 그들에 관하여 이런 말이 있습니다 : "한다한 그 재주도 다하였다"(시편 106,27).

그리고 : "당신의 영을 어기는 자는 저주를 받나이다"(시편 118,21). 
10)그런 이들은 악을 보고 알아채며 알면서도 행하여, 고의로 자기 영혼을 파멸시킵니다.
11) 눈을 뜨십시오,

소경들이여, 그대들은 우리 원수들인 육신과 세속과 마귀에 속았습니다.

죄를 짓는 일은 육신에 달콤하고, 하느님을 섬기는 일은 육신에 씁니다. 
12) 복음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모든 악습과 죄악들은

 "사람의 마음에서 솟아 나오기"(참조 :마르 7,21) 때문입니다. 
13) 그리고 그대들은 이승에서도 내세에서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합니다. 
14) 그리고 그대들은 이 세상의 헛된 것들을

오랫동안 소유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사실은 속았습니다.
그대들이 생각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며,

 모르고 있는 그 날과 시간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쇠약해지고 죽음이 다가오고 결국 육신은 쓰디쓴 죽음을 당합니다.
15) 그리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람이 죽든 보속을 할 수 있는데도

 보속을 하지 않고 회개와 보속 없이 대죄 중에 죽으면, 당해 보지 않고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격렬한 고통과 시련 중에 마귀는

그의 몸에서 그의 영혼을 빼앗아 갑니다. 
16) 그리고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재능과 능력과 "지식과 지혜"를 빼앗깁니다. 
17) 그리고 그는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유산을 넘겨주었고 이들은

그것을 받아 가지고 서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서 그들은 나중에 말했습니다 : 그는 우리에게 더 많이 줄 수 있었고

 더 많이 남길 수 있었던 재산을 벌지 못했으니, 그의 영혼은 저주나 받아라. 
18) 벌레들이 시체를 먹어 버립니다. 이리하여 그는 짧은 이 세상에서

 육신과 영혼을 잃고 끝없이 고통받을 지옥으로 갈 것입니다.
19) 이 편지를 받으시는 모든 이들에게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참조 : 1요한 4,16) 부탁합니다 :
위에서 언급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로운 말씀들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잘 받아들이십시오.
20) 그리고 글 모르는 사람들은 읽어달라고 자주 부탁하십시오.
21) 그리고 이 말씀들이 "영과 생명이니"(요한 6,63) 거룩한 행동으로 끝날까지 간직하십시오.
22) 그리고 이것을 행하지 않은 사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참조 :로마 14,10) "

심판 날에 헴 바쳐야 할 것입니다"(참조 :마태 12,36).

 

 

Il Crocefisso di San Damiano

 

재속 프란치스코회란?

Ordo Franciscanus Saecularis

 

"Ordo Franciscanus Saecularis" 라는 명칭은

이전까지 ’프란치스코 3회’라고 불리우던 것을

교황 바오로 6세께서 1978年 새 회칙을 인가하시면서 붙여준 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이천년의 긴 역사를 살아오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수많은 영적 가족들을 탄생시켰고,

그 중에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창설자로 모신 1, 2, 3회의 영적가족이 있으니

그 숫자가 오늘까지 8백년 동안 수천만에 이르렀고 현재의

 가족수도 백만이 훨씬 넘는다.

 

성 프란치스코의 영적 가족들

1회는 프란치스코 남자 수도회를 말하고,

2회는 글라라회라고 불리우는 여자수도회(관상수녀회)이며,

3회에는 수도생활을 하는 정규3회,수도자인 수도 3회와

 재속 신분으로 구성된 재속프란치스코회를 말하며,

(전국 51개의 형제회와 6,500여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있다.)

이들 프란치스코 영적 가족의 공통된 특징은 말할것도 없이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점이다.

 

세 가족의 친교와 고유 역할

이 세가족은 활기에 찬 친교를 이루면서도 각기 다양하고 독특한 방법으로

성 프란치스코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아 실천한 빛나는 영성들을 스스로 배우고 익혀,

교회가 더욱 주님의 거룩하심으로 충만되도록 돕는다.

 

"선교활동"을 펴서 이 세상을

하루 빨리 하느님 나라의 질서에로 돌아오는데에 그 공동목표를 두고

가톨릭 교회 안에서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여러 계층의 형제회 즉.

지역, 지구, 전국, 국제형제회들을 묶은 하나의 조직체이다.

"입회자격은, 50세 미만의 가톨릭 신자이면 되고, 영세한지 3년이상.

 견진성사를 받은 자라야 합니다.

 

교황이 인가한 세계적 공동체

재속 프란치스코회는 성 프란치스코 가족 중의 하나로서 독자적인 위치를 가지고

온세계 모든 평신도와 재속 사제들에게 개방되어 있습니다.

또한 가톨릭 교회 안에서 교황이 인가한 회칙으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여러 계층의 형제회,

즉 지역, 지구, 국가형제회들을 묶은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기원과 발전

재속 프란치스코회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제자들과 함께 로마로 사도적 여행을 한 1212년경,

기혼 남녀 평신도들이 프란치스코와 그 동료들의 복음적 생활에 매력을 느껴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따르려고 헌신하였던데서 비롯하였다.

당시에 귀족이나 천민이나 성직자나 평신도 등 많은 사람들이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에 이끌려

프란치스코에게 오기 시작하여 성인은 제3회를 생각했고,

그들에게 생활규범과 모든계층의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였다.

복자 루케치오 와 보나돈나 부부가 첫회원으로 알려져있다.

 

3회 배출 성인

제3회가 배출한 성인은 성 루도비꼬, 성 토마스모어, 성 요한 비안네,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등 60여명이 되고,

그레고리오 9세로부터 바오로 6세까지 20여명의 교황과 비테르보의 성녀 로사,

시성 단테, 예술가 미켈란젤로, 라파엘, 탐험가 콜럼버스,

레지오마리애 창설자 프랭크 더프, 빈첸시오와 바울로회 창설자 프레데릭 오자남 등

각계 각층에서 3회원들이 프란치스코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 교회를 빛냈다

-(재속프란치스코 한국국가형제회홈에서)-

 

 

*성왕 루도비코 9세(3회 주보성인)축일:8월25일.인창동성당게시판1331번.

*성 토마스 모어 순교자(정치인들의 수호성인:축일:6월22일.게시판1237번.

*성 요한 비안네 사제(본당사제의수호성인)축일:8월4일.게시판1302번.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3회 주보성녀)축일;11월17일.게시판1474번.

*비테르보의 성녀 로사 동정 축일:9월4일.게시판1348번.

*복자 프레데릭 오자남(빈첸시오와 바울로회 창설자)축일:9월8일.게시판1356번.

*레지오마리애 창설자 프랭크 더프(Frank Duff):1921년9월7일 레지오 마리애를 창설.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San Francesco a Subiaco

 

한국의 재속 프란치스코회 역사

 

일본의 조선인 재속 3회원

한국의 첫 재속 프란치스칸은 1922년 미국 유학 중

재속 3회에 입회하여 서약한 장 면(요한)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400여 년 전에 이미 조선인 재속 3회원이 있었다.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끌려갔으며,

이들 중 다수는 노예 생활 중에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여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그들의 쓰라린 생활을 극복해 나갔다.

 

그 당시 일본에는 프란치스꼬 회원들이 전교를 하고 있었는데,

많은 조선인들이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 프란치스꼬 재속 3회에 입회했던 것이다.

 

1597년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박해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26명이 나가사끼에서 순교의 화관을 쓰게 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프란치스칸으로 성 베드로 밥티스타를 비롯하여

 17명의 프란치스꼬 재속 3회원이 있었으며,

이들 중에 3명이 조선인이었다.

 

이들은 1627년에 우르바노 8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862년 6월 8일에 비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또한, 1867년 7월 2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복된 순교자 205위 중 두 명도

한국인 프란치스꼬 재속 3회원이었다.

한 명은 파스칼 보스이고, 다른 한 명은 가이오리 에몬인데 모두 같은 날 순교했다.

따라서 한국의 3회의 역사에 있어 그 첫 자리는 일본에서

 3회원이 된 순교자들이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다

(재속프란치스코 한국국가형제회홈에서)

 

 

[일본의 순교자]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 축일:2월 6일(게시판1605번)

일본에서 태어난 바오로 미키(1564,1565-1507년) 성인은 예수회에 들어간 다음,

복음을 널리 퍼뜨리는 데 큰일을 하였다.

박해 때 다른 동료 25명과 붙잡혔는데,

그 25명은 베드로 밥티스타와 5명의 프란치스코 제1회 회원들과 17명의 제 3회 회원을,

그리고 미키 신부와 일하던 2명의 교리교사였다.

그들은 모진 고문을 받고 1597년 2월 5일 나가사키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하였다.

 

성 레오 가라수마루
ST. LEO KARASUMARU
in Owari, Korea -
crucified on 5 February 1597 at Tateyama (Hill of Wheat), Nagasaki, Japan
First Korean Franciscan tertiary

 

한국 태생인 그는 원래 이방 종교의 사제가 되었으나,
1589년에 일본에서 예수회원들에 의하여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첫번째 재속 프란치스꼬 회원이 되었고, 또 전교 회장이 되었다.
도요또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일본 내의 크리스챤 박해 동안,
그와 25명의 다른 교우들은 1597년 2월 5일에 나가사끼 교외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와 함께 그의 동생 바오로 이바라끼 및

그들의 20세 되는 조카 루도비꼬 이바라끼가 십자가형을 받았다.
그들은 모두 1862년의 일본 순교자로 간주되어 시성되었다.

 

*동료순교자

*성 베드로 밥티스타 사제 순교자(1회)축일:2월6일.게시판1605번

*성 바오로 스즈끼 순교자(3회)

*성 레오 가라수마루 순교자(3회):한국인으로 첫번째 재속 프란치스코회원

*성 바오로 이바라끼 순교자(3회):성 레오 가라수마루의 동생

*성 루도비꼬 이바라끼(3회):성 레오 가라수마루의 조카

*복자 파스칼 보스(3회):한국인.

*복자 가이오리 에몬(3회):한국인.


 

평화의 기도

 

주여, 나를 당신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주여, 위로를 구하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를 구하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을 구하기보다는 사랑하게 해 주소서.

 

자기를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잊음으로써 찾으며,    

용서함으로써 용서받고,    

죽음으로써 영생으로 부활하리니.

 

- 성 프란치스코

 

 

 

4월 28일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마리아 사제


St. LOUIS MARIE de Monfort

San Luigi Maria (Grignion) da Montfort Sacerdote

Born:31 January 1673 at Montfort-La-Cane, Brittany, France

Died:1716 at Saint-Laurent-sur-Sovre, France

Canonized:1947 by Pope Pius XII

Luigi = derivato da Clodoveo = deriving from Clodoveo

 

 

"지혜의 딸 수녀회"의 창설자이기도 한 루도비코는

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였는데 그의 주요 신심은 마리아와 로사리오였다.

 

그는 이 신심을 전파하기 위해 "복되신 동정 마리아 신심"이란 책을 저술하였으며,

여려명의 사제들을 규합하여 "마리아 선교회"를 창설하였다.

-(성바오로딸수도회에서)-

 

 

프랑스 몽포르의 어느 가난한 부모 밑에서 자란 그는

 렌느의 예수회 대학에서 교육받은 후, 1700년에 사제로 서품받았다.

그의 첫 임지는 프와티엘의 병원이었는데,

 병원 관계자의 재정비로 인하여 원성을 사게 되자 사임하였다.

그는 이 병원을 떠나기 전에 일단의 여성 그룹을 조직하였는데,

이 단체가 그후 ’지혜의 딸 수녀회’가 되었다.

 

그는 주로 가난한 이들을 대상으로 설교하였는데

 이것이 또 그곳 주교의 원성을 듣게 되어 설교권을 박탈 당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로마로 가서 교황 클레멘스 11세로부터

선교사 총대리로 임명되어 브리타니 선교길에 올랐다.

그가 늘 문제를 일으키게 된 주된 이유는 과도한 신심주의 때문이었으나,

또한 이때문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주요 신심은 마리아와 로사리오이다.

그는 이 신심을 전파하기 위하여 ’복되신 동정 마리아 신심’이란 책을 저술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1715년, 그는 수명의 사제들을 규합하여 ’마리아 선교회’를 창설하였다.

그는 프랑스의 쌩-로랑-쉬르-세브르에서 운명하고, 1947년에 시성되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레지오 마리애 공인 교본에서:제 24장. 레지오의 수호 성인들

 

3.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마리아  

 

"어떤 특정 성인이나 지역의 수호자를

레지오의 수호 성인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한 결정에 비추어 볼 때

몽포르의 복자 그리니용을 포함시키는 것은

얼핏 논란의 소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레지오 발전에 이분만큼 큰 역할을 한 성인 없다.

 

레지오 마리애 교본을 이분의정신으로 가득 차 있고,

 레지오의 기도문들은 바로 이분이 하신 말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분은 사실상 레지오의 스승이므로 레지오가 이 성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거의 도의적으로 당연한 의무이다."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마리아의 이름을 호칭 기도에 넣기로 한 레지오의 기도문)

 

이 성인은 1947년 7월 20일에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4월 28일이다.

"성 루도비코-마리아는 수도회의 창립자인 뿐만 아니라 선교사였다.

또한 그는 선교사 이상의 다른 면도 있는데, 교회의 박사와 신학자로서

그때까지 아무도 착상하지 못한 성모학을 우리에게 마련해 주었다.

 

그는 성모 신심의 뿌리를 매우 깊이 탐구하여 널리 보급하였고,

우리에게 현세에 일어난 모든 성모 발현을 미리 알려 주었다.

즉, 루르드로부터 파티마에 이르는 모든 성모 발현과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에 관한 교의 선포로부터

 레지오 마리애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예언한 분이다.  

 

그는 성모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왕국이 있음을 알리는 데 힘썼으며

 때가 차 하느님의 동정 성모님이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으로

인류가 목말라 하는 구원을 세상에 가져다 주신다는 사실을 전해 주었다."

(훼데리고 테데스키니 추기경/Cardinal Federigo Tedeschini

베드로 대성전 주임 사제:1948년 12월 8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행한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마리아 동상 제막식 강론)

 

 

"나는 성난 짐승 같은 무리들이 미칠 듯이 달려와서

 그 사나운 이빨로 이 작은 책과 성령께서 이 책을 쓰도록 하신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거나, 아니면 적어도 이 책을 궤짝의 암흑과

침묵 속에 묻어 버려 다시 나타나지 못하도록 하리라는 것을 뚜렷이 내다본다.

 

그 무리들은 심지어 이 책을 읽고 실천하는 사람들까지 공격하고 박해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그러한 일이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오히려 도 좋은 것이다. 이러한 일들을 생각할 때마다 용기가 솟아나고,

더욱더 크나큰 성공을 하리라는 희망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하면,

앞으로 다가올 가장 위태로운 시대에 마귀와 세속과 부패와 싸울 막강한 군단,

즉 예수님과 성모님의 용감 무쌍한 남녀 병사들로 이루어진

 대군단이 나타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마리아/St. Louis-Marie de Montfort 1716년 선종:

복되신 동정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

 

까떼나(Catena)는 그 주요 부분이 성모님 자신의 기도인

 마니피캇(Magnificat, 마리아의 노래)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기도는 교회의 성무일도 중에 저녁 찬가로서,

 "모든 찬가 중에서 가장 겸손하고 감사에 넘치며 가장 뛰어나고 가장 숭고한 노래이다."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마리아/St. Louis-Marie de Monfort)

 


 

 

 

4월 28일

성 베드로 샤넬 사제 순교자


ST. PETER CHANEL

St. Pedro M.Chanel

San Pietro Chanel Sacerdote e martire

Born:1803 at Cluet, Belley, France as Peter Louis Mary Chanel

Died:beaten to death with a club on 28 April 1841 on Fortuna Island,

New Hebrides; body hacked to pieces with hatchets

Canonized:1954 by Pope Pius XII

Patronage:Oceania

Pietro = pietra, sasso squadrato, dal latino

Peter = stone, squared pebble, from the Latin

 

 

1803년 프랑스 퀴에읍에서 태어났다.

성직 계열에 들어가 몇년간 사목 생활을 했다.

그 후 마리아회에 들어갔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선교사로서 오세아니아주로 갔다.

여러가지 난관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을 참된 신앙에로 개종시켰다.

신앙을 증오하는 풍토 속에서 1841년 푸투나섬에서 살해당하여 순교했다.

 

 

성 베드로 사제 순교자에 대한 찬사에서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씨앗이다

 

베드로는 마리아회에 입회하여 수도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자신의 요청에 따라

오세아니아주로 파견되어 아직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지 않은

 태평양의 푸투나섬에 발을 디뎠다.

그 곳에서 그를 어디에나 동행했던 수사는 그의 선교 생활을 이렇게 묘사한다.

 

"베드로는 태양열로 살갗이 그을고 때로는 배고픔으로 시달리면서

 전교 후 집으로 돌아올때

땀으로 범벅되어 피곤에 눌려 있었지만,

언제나 활기로 차 있었고 흡사 휴식에서 돌아오는 것처럼 정신적으로 생기 있고 쾌활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 번만이 아니라 거의 매일같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푸투나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았고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조차 언제나 이해해 주었습니다.

비록 그들의 행동이 거칠고 위협적이라도 그들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모든 이에게 비할 수 없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푸투나 주민들이

 그를 보고 "큰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고 부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는 동료 수사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 "이 어려운 선교직에서는 우리가 성인이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꾸준히 전파했으나 수고에 비해 매우 적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래도 굽히지 않고 선교 사업에 용감히 달려들어 주민들의 영적이고 현실적인 필요에 봉사하였다.

언제나 그리스도의 모범과 "한 사람은 심고 다른 사람은 거둔다."라는 주님의 말씀에 의탁하여,

깊은 신심으로 사랑했던 천주의 모친의 도움을 쉬지 않고 구했다.

 

그의 그리스도교 신앙의 선포는 푸투나 추장들이 주민들을

자기 지배하에 두려고 장려하고 있던 악령들에 대한 예배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때문에 추장들은 베드로가 뿌린 그리스도교 신앙의 씨앗들을

 그를 죽임으로 해서 없애 버리려고 하여 그를 처참하게 살해했다.

 

그러나 순교하기 전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어도 상관 없습니다. 이 섬에 그리스도의 신앙은

 너무도 견고히 뿌리를 박았기에 내가 죽는다 해서 제거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순교자의 피는 무엇보다 먼저 푸투나 주민 가운데서 열매를 맺었다.

즉, 그들은 모두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리스도의 신앙을 받아들였고

오세아니아주의 다른 섬들도 그 수확을 함께 나누었다.

이제는 베드로를 그들의 첫 순교자로 여기고 그의 전구를 비는

 그리스도교 교회들이 번창하고 있다.

-(가톨릭홈에서)-

 

 

1803년 프랑스 클뤼네에서 출생한 성인은 1827년에 사제로서품되었다.

크로제에서 본당신부로 일하다가 1831년에 마리아회에 입회했다.

수도회에서 5년간 신학교 교수로 봉직한 후

선교에 대한 열망으로 푸투나섬의 선교사로 파견되어 활동했다.

그러다가 원주민에 의해 살해당하여 오세아니아의 첫 순교자가 되었으며 1954년에 시성되었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대단한 적응력이 요구되면서도

 겉으로는 별로 성공할 기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을

고독한 가운데 수행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나 베드로 샤넬에게서 비숫한 정신을 발견할 것이다.

젊은 사제로서 그는 ’고약한’구역을 본당을 맡았으며

그곳 병자들에게 대단한 열성을 보임으로써 그 본당에 생기를 되찾아 주었다.

선교사 되기를 원한 그는 28세에 마리아회에 들어갔다.

 

그는 순명 정신으로 신학교에서 5년 동안이나 학생들을 가르치고 난 다음에

일곱 명의 마리아회 회원들의 장상으로서 자기가 감목대리구를 맡게 된 서대양주로 갔다.

선교사들을 데리고 간 주교는 베드로와 수사 한 사람을 뉴헤브리디스에 있는

 푸투나 섬에 남겨 두고 6개월 이내에 되돌아온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이 기간은 5년간이나 계속되었다.

그 동안에 그는 낯설은 언어와 씨름하여 결국 익히게 되었고 고래잡이,

장사꾼, 적대적인 원주민과의 어려운 생활에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별로 드러나지 않은 성공과 극도의 궁핍 가운데서도 그는 부드럽고

 위엄 있는 마음 자세를 견지하며 끝없는 인내와 용기를 잃지 않았다.

몇몇 원주민이 세례를 받았고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교육을 받았다.

 

추장의 아들이 세레를 받겠다고 청했을 때 추장의 박해는 절정에 이르렀다.

샤넬 신부는 그의 오두막 집에 갇히게 되었고 심한 매로 그의 몸은 토막토막 잘려졌다.

그가 죽은 지 2년 안에 온 섬사람들이 가톨릭 신자가 되었으며 아직도 계속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

베드로 샤넬 신부는 대양주의 첫 순교자이며 그곳의 수호 성인이다.

1889년 11월 17일에 시복되었고, 1954년 6월 12일에 시성되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기 때문에 고통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적대감은 우리 자신의 이기심이나 무모함의 결과일 때가 많다.

우리가 위협한 사람들에 의해서 박해를 받았다면 그것은 순교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순교란 그리스도처럼 하느님 사랑에 대한 단순한 증거가 되는 것이고

 이미 그곳에 있는 선이나 악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드러나게 된다.

 

"하나의 결론 때문에 순교자가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하나의 견해 때문에 순교자가 되는 사람도 없으며, 순교자를 만드는 것은 오직 신앙이다."

(뉴만 추기경, ’연석 회의에서의 연설’에서)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언어

 

성 베드로 샤넬은 태평양의

뉴 헤브리디스 제도에 처음으로 들어간 선교사들 중 하나였다.

그는 원주민의 말을 배우고 섬 사람들을 가르치는 데

 최선을 다했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하였다.

족장의 아들이 세례를 받겠다고 하자

 족장이 사람들을 보내서 베드로 샤넬 신부를 살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열심과 노력마저 죽은 것은 아니어서

그가 죽은 지 2년 만에 모든 원주민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래서 베드로 샤넬은 오세아니아 군도의 첫 순교자이자 수호 성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언어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너를 사랑한다.”라는 말을 할 때와 “너를 증오한다.”라는 말을 할 때

 느낌이 어떻게 다른가 비교해 보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 말을 듣게 될 때 받는 느낌은 어떠할지 생각해 보라.

언어는 단순히 교육 수준이나 지식의 깊이만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감수성과 자의식까지 드러낸다.

그러므로 말을 함부로 하지는 않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남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우는 말인지 아니면 남을 비판하는 말인지,

공격적인 말인지 아니면 부드러운 말인지 생각해 보자.

또 남에게 하는 말과 가족이나 친구에게 하는 말이 다르지는 않은지,

독설적이거나 외설적인 말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자.

끝으로 말을 하지 않고도 내적인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지도 생각해 보자.

내가 즐겨 쓰는 말은 무엇인가?

상냥하고 부드러운 말을 사용하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