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한 요즘입니다.
코로나에게 짓눌린 세상의 아픔은
끝이 아득하여 막막하기만 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읊었던
마음 쓰린 눈물의 애가가
모두 우리의 사연인 듯 마음에 고여 듭니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만 같아 겁납니다.
“당신께서 듣지 않으시는데”라며
하바쿡 예언자처럼
항의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습니다.
이 깊고 질긴 시련을 허락하시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여쭙고 또 여쭙게 됩니다.
그럼에도 저는 지금 이런 얘기마저
입에 발린 위로에 그칠지 모른다는
조바심을 떨치지 못합니다.
어떤 격려도 힘을 드리기엔 미흡할 것만 같아,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그런데 오늘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너무너무너무 위로가 되는군요.
그 무엇도 보탤 것 없이 말씀 그대로,
덜어내지도 손대지도 말고
온전히 전해드리고 싶어서
소리 내어 읽고 읽고 또 읽었습니다.
이야말로 아픈 세상을 향해서 들려주시는
주님의 고백이니 말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고통을 몰라라하지 않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끊임없이 치유의 손길로
세상을 어루만지고 계시다는 증거이니 말입니다.
때문에 힘 빠진 세상을 위해서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신다는
주님의 고백에 우리 모두가
힘을 얻을 수 있기를 청합니다.
우리 모두가 세상을 위해서 간구하시는
성령님의 심정을 헤아려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시련을 이겨내기 원합니다. 그
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열매가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호의와 선의와
성실과 온유와 절제임을 기억하여
결단코 기가 꺾이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놓여 있는 역경을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헌신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너끈히 이겨내는 지혜를 얻기를 소원합니다.
지금이야말로 교회에서 배우고 익히고
체험했던 성령의 선물을 세상을 위해서
제대로 활용해야 할 기회이니까요.
성령은 우리를 위해서
쏟아 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가라지 같은 우리를 튼실한 알곡으로
변화시켜주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마침내 당신의 복음을 살아내도록
이끌어주는 주님의 손길입니다.
덕분에 우리는
이 땅의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하늘의 기쁨을 살 수 있습니다.
아니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꼭 그렇게 살아야합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주신 선물을 간직한
그리스도인이기에 그렇습니다.
세상의 절박한 소식이 난무하는 중에도
마음이 짓눌리지 않고 그래서 더욱,
사랑과 인내를 살아내야 하는
믿음인 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사랑과 인내와 희망이
성령께서 선물해주신 은사라는 점을
새로이 새겨 살 것을 권고 드립니다.
더하여 성령께서 선물해주신 인내는
오직 사랑에서 시작되어 사랑으로 귀결되는
사랑의 결실임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그저 단순하게 오래 오래 참아내는 것,
그저 이를 악물고 견뎌내는 것은
사랑이 아님을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사랑이 없다면 제아무리 끈질긴 인내도
희망도 다 부질없는 허세일 뿐입니다.
사랑으로 견디어내는 삶은 거룩한 어느 장소,
특별한 어느 시간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일상에서
하느님을 기억하는 향기로운 기도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도움주시는 하느님께 의탁함으로
완전한 찬미의 삶으로 돋움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하느님과 관계를 맺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인내하고 견디는 일마저도
사랑에서 비롯되어 사랑으로 이어져야 옳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모든 군중에게 직접
속뜻을 풀이해주신 경우는
오늘 복음말씀이 유일합니다.
그만큼 소중한 까닭이라 짚어져서
마음을 여미게 되는데요.
물론 이 말씀은 누구에게나 친근한 이야기일 터입니다.
덕분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실 것입니다.
문제는 너도 나도
자신은 알곡인 줄로
착각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점이겠지요.
사실은 속은 텅 비어있는
쭉정이 임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를 알곡이라 여기며 자신의 삶을
과대평가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런 분들의 특징은
세상은 원래 다 그렇고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라는 말을
예사로 하는 것에서 드러나는데요.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가지 않느냐고
변명하는 일에도 익숙하지요.
한편 무슨 수로 주님의 말씀을 모조리 지키면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느냐며 말씀을
변형시키는 일마저 서슴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이러한 허세를 지녔다면 이야말로
사탄이 들려주는 사탄의 복음에
오염된 증거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는 자만,
나아가 이만큼 기도했으니 이제는 하느님이
감동하시어 응답해주실 차례라고 여기는 오만이야말로
조잡하고 너절한 ‘인간의 복음’에 불과하니까요.
주님께서는 오늘도
속빈 이삭이 되어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팔랑거리고 있는 우리 모습에 애간장이 타십니다.
멀대 같이 키만 웃자라서 건들건들 으스대는
우리의 꼴에 진저리를 치십니다.
때문에 오늘도 지금 이 순간에도
아버지 하느님께 꿇어 엎드려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시며 피땀을 흘리고 계십니다.
쓸모없는 가라지 같은 나를
알곡으로 변화시키기 원하시는
주님의 호소를 흘려듣지 마십시오.
하느님 자비에는 유예 기간이 있다는 사실에
깨어나 삶을 정리 정돈하도록 합시다.
오늘 우리의 자잘한 시간들은
그날 “해처럼 빛날” 존재가 될지
“불구덩이에 던져”지는
신세가 될지를 결정하는 자료가 됩니다.
지금 우리가 지나치는
모든 찰나와 순간은 그만큼 소중하고 귀합니다.
그분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분의 사랑을 잊지 않으므로
어제보다 한 뼘 더 주님께로 가까워지면 좋겠습니다.
나보다 더 내 삶을 사랑하시는 주님께 온 것을
봉헌함으로 하느님의 용사가 되면 더 좋겠습니다.
길고 길어서 더 힘들고 훨씬 막막한 시간마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좋고 유익한 것’임을 기억하여
‘아멘’으로 화답해드린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힘들고 어려워서 더욱,
갑갑하고 막막해서 더 더욱,
‘알렐루야’로 하느님께 찬미 드리며
난관을 극복해나가는 용덕이 선물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
▲경기도소재 용문성당입구
[한주간 전례]
2020년 7월 20(월) [녹]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2,38-42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에 응하는 대신 그들을 질책하십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구약 성경에서 ‘악하고 절개 없다.’는 표현은
하느님을 거슬러 대항하는 것을 말하는 비유로 사용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을 나타낼 때 ‘기적’이나
‘표징’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기적이 예수님의 능력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라면,
표징은 일을 일으키는 사람의 신원에,
예수님 당신에 더 관심을 가집니다.
차이는 조금 있지만 기적이나 표징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렇기에 기적이나 표징은 단순히
놀라운 일이 아니라 믿음을 위한 것입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요나의 표징을 통하여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하였던 것처럼,
표징은 회개를 통한 믿음을 가져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복음에서 종교 지도자들은
단순히 놀라운 일을 보고자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요구는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
더 이상의 표징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표징은 회개와 믿음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표징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드러내고,
믿는 이들이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걸을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7월 21일 (화) [녹]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2,46-50
미카 예언자는
책의 마지막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찬양합니다.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미카’라는
이름의 뜻이기도 한 이 표현은
하느님의 업적과
그분의 위대하심을 잘 나타냅니다.
대천사 미카엘도 같은 뜻의 이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충실하시며
그들의 죄를 묻지 않으시는,
전능하시면서도
자애가 가득하신 분으로 소개됩니다.
이런 하느님의 업적은 예수님을 통하여
새로운 관계 안에서 지속됩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혈통이 중심이라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연결됩니다.
그 뜻을 따르고 실행하는 이들이
하느님의 백성이자 새로운 가족입니다.
그들은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입니다.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은 입으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마태 7,21 참조), 삶
을 통하여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지만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실행하는 것이 신앙인들의 정체성입니다.
새로운 관계 안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삶은,
나약하지만 하느님을 향하여 가는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도 이런 우리를 격려하시고
우리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7월 22일 (수) [백]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복음서의 여러 군데에 나오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루카 8,2)로 소개되어 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던 십자가 밑에(마태 27,56 참조),
예수님의 무덤 곁에 있었던 여인이다(마태 27,61 참조).
또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첫 번째 사람으로(요한 20,11-16 참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 주었다(요한 20,18 참조).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
시신이나마 모셔 가려 하였던(요한 20,15 참조)
그녀에게서 주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에 대한 공경은
12세기부터 시작되어 널리 퍼졌다.
[복음묵상] 요한 20,1-2.11-18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루카 8,2)는
예수님의 공생활에 함께하였던,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활동에 함께하였을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실 때에도,
예수님을 무덤에 모셨을 때에도 줄곧 함께하였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의 삶에서 중요한 때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등장합니다.
또한 모든 복음서가
공통적으로 전하는 것처럼
그녀는 부활의 첫 번째 목격자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가장 먼저 전하는 인물입니다.
이런 내용들을 보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충실히 따르던 여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실 때에
그녀는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님 부활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는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주님 부활이라는 우리 믿음의 가장 핵심적인 사건은
이렇게 마리아 막달레나를 통하여 전해집니다.
주님 부활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들음’과 ‘기억’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예수님을 기억하고 알아봅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할 때,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들을 때,
비로소 우리 안에 살아 계시고
우리 곁에 서 계신 그분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그 말씀에 응답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7월 23일 (목) [녹]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3,10-17
예수님께서는 주로 비유를 통하여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려 주십니다.
비유는 전혀 모르는 것을,
때로는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것을
설명하기에 좋은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비유는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의 신비와
우리 인간에 대하여 모두
알고 계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둘을 모두 알지 못하면 비유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마음의 완고함에 대한 표현입니다(이사 6,9-10 참조).
성경에서 완고한 마음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을 애써 부인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말씀을 듣지만 새기지 못하고,
하느님의 업적을 보지만 외면합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그 자체로 하나의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육체적인 귀와 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들을 수 있는 귀”와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이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영적인 눈과 귀에 대한 말씀이고,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며 하느님의 업적을
보고 깨달을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은 그저 ‘소리’에 불과합니다.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업적은 그저 ‘사건’일 뿐입니다.
완고한 마음에서 돌아서 말씀에 귀 기울이고,
우리 안에 일어나는 일들 속에서
주님을 찾고자 노력하는 것이
하늘 나라의 신비에 다가서는 일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7월 24일 (금) [녹]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3,18-23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비유에는 설명이 달려 있습니다.
이 비유는 농사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말씀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과 흙이 많지 않은 돌밭과
가시덤불 때문에 씨가 자라지 못하는 땅과
좋은 땅은 말씀을 들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말씀은 이미 뿌려졌습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은 예수님을 통하여
이미 사람들에게 선포되었습니다.
이제 그 말씀은 우리 안에서 자라납니다.
비유의 해설은
가장 먼저 ‘나는 어떤 땅일까?’를 묻게 만듭니다.
길가,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
우리의 상황은 이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똑같은 말씀이 선포되었지만,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각자 다릅니다.
말씀이 달라서가 아니라
어떻게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삶에서 실천하는지에 따라 결과는 달라집니다.
비유의 설명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를 향한 호소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변할 수 있고
언제든지 좋은 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말씀이 내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귀 기울여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의 의미를 찾고
나를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도
말씀을 통하여 위로받고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의 걱정거리나 유혹은 항상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포기하게 만들지 못하도록
꾸준히 기도하면서 말씀을 따라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도 ‘좋은 땅’이 되어 갈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7월 25일 (토) [홍]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야고보 사도는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으로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요한 사도의 형이다.
어부인 야고보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손질하다가 동생 요한과 함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베드로 사도, 요한 사도와 더불어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세 제자 가운데 하나이다.
열두 사도에는 야고보가 둘 있는데,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
‘작은[소] 야고보’와 구분하여 ‘큰[대] 야고보’라고도 부른다.
야고보 사도는 42년 무렵 예루살렘에서 순교하였다.
[복음묵상] 마태오 20,20-28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를 알려 주는 적절한 표현입니다.
질그릇은 글자 그대로 화려하지 않고
투박하며 값지지 않은 평범한 그릇입니다.
그리고 질그릇은 쉽게 깨지고
부서질 수 있는 성질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질그릇과 같은 존재입니다.
이 비유는 우리의 현실을,
인간이 지닌 나약함을 잘 보여 줍니다.
이렇게 우리는 인간으로서 나약한 존재이지만
무엇보다 값진 보물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께서 보여 주신 구원의 업적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힘이 없지만
우리 안에 담긴 보물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을 통하여 어려움 속에서도
말씀을 선포하고 구원을 향하여 갑니다.
복음은 제자들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의 나약함을,
인간적인 욕심과 생각들을
이겨 내도록 일깨워 줍니다.
세상은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을 좋아하고
다른 이들을 다스리는 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높은 사람은 섬김을 받고 낮은 사람은 섬겨야 한다는
세상의 생각을 뒤집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임금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신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분이십니다.
제자들과 신앙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세상의 생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힘을 통하여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갑니다.
세상의 어려움과 우리의 나약하고
부족한 모습 역시 넘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보물 같은 하느님의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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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와 장미가
오락가락 하는 주간입니다.
세상은 어지러운데
서로의 주장만을 내세우는 형국입니다.
이번 주
제2독서의 말씀으로 대신합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로마서8,26)-
울님들 모두 건강한 한 주 되세요.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