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7월 12일 (일) [녹] 연중 제15주일 제1독서 (이사 55,10-11)
제2독서 (로마 8,18-23)
복음 (마태 13,1-23 또는 13,1-9)
가시는 길마다 기름진 땅이 되기를
변방에서 군중을 상대로 가르치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언제 어떻게 따를 것인지 청중 자유 존중하고 그들의 능력 신뢰
좋은 땅 가리지 않고 아무 데나 씨 뿌리는 예수의 관대함과
어떤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인지 하느님께 맡기는 지혜 배워야
“하느님은 이 땅에 찾아오시어,
넘치는 물로 풍요롭게 하시나이다.
하느님의 강은 물로 가득하고,
당신은 곡식을 영글게 하시나이다.”(시편 65,10)
저는 말씀 묵상을 준비할 때
오늘 화답송 시편 저자의 체험을 종종 합니다.
말씀은 하늘에서 내려와 인간의 삶을 건드리고
그 인간의 찬미는 기도가 돼 하늘로 다시 올라갑니다.
모든 것이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이후의 일상에서도
이런 하느님 말씀의 활동은 매일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과
인간의 관계라는 지혜를
우리에게 가르치는 오늘 말씀은
참으로 생생하고 역동적입니다.
말씀 선포를 위해 하늘과 땅, 인간이 움직입니다.
하늘에서는 하느님 말씀이 비와 눈처럼 내려와
우리에게 뿌려야 할 씨앗과 양식을 주십니다.(제1독서)
땅에서는 하늘의 지혜이신 예수님이
어제의 위기와는 상관없이 오늘 성실하게
씨를 뿌리러 집에서 나오십니다.(복음)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수많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며
복음의 씨를 뿌렸던 자신의 삶을 전합니다.(제2독서)
■ 복음의 맥락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과
거부하고 비난하는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갈라짐이 점점 깊어갑니다.(마태 11-12)
이제 예수님은 마태오복음 13장에서
하늘 나라의 신비에 대한 여러 비유를 통해
군중과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비유들의 의미와
그것들을 자신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초대합니다.
먼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군중이 그분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집중하게 하면서 가라지,
겨자씨, 보물과 상인 비유 등
여러 가지 비유를 계속 말씀하실 것입니다.
비유의 목적은 들은 사람이
그 비유가 자신을 두고 하는 말임을 깨닫고
결단을 내리게 하는 것입니다.
듣고 깨달은 사람은 예수님 제자로,
세상이라는 하느님 밭에서
씨 뿌리는 농부로 살아갈 것입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을 항상 모세보다 뛰어난
교회의 스승으로 소개하는데 오늘 말씀에서도
예수님은 하늘 나라를 가르치는
지혜로운 교육자의 모습으로 우리를 매료시킵니다.
말씀 경청의 첫 단계는 말씀하시는 분에게 매료당하는 것입니다.
■ 예수님, 지혜로운 스승
예수님은 그분 선교가
위기를 겪는 상황에서도
제자들만 따로 불러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것이 더 보람 있고 열매를 쉽게 볼 수 있었을 텐데
오히려 낯선 곳으로, ‘변방으로’ 가서 가르치십니다.
호수에 떠 있는 배 안에서 물가에 서 있는 군중을 상대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가르치십니다.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교육이 일상화된 시점에서
복음을 읽으니 첫 인상은 이렇습니다.
‘우리 예수님, 적당한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고
환기가 잘 되는 호수에서 군중을 상대로
대면 교육을 하고 계시네.’
예수님은 구약의 지혜로운 교사들이 늘상 하듯이
청중의 수준에 맞게 가르침 도구로 비유를 택하십니다.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당신이 면밀히 관찰하고 선교생활에서
직접 체험한 것을 토대로 하늘 나라의 신비를 가르칩니다.
사실 씨뿌리는 사람 비유는 예수님 자신의 체험입니다.
제자들처럼 예수님께 다가와
질문할 수 있는 친밀한 관계가 아닌 사람들,
아직 ‘물가에 그대로 서 있는’(마태 13,2)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의 신비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영감을 불어넣고 자극하십니다.
결단을 내리라고 강요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찾아보도록 돕습니다.
또 제 시선을 끄는 것은 교사로서
예수님이 보여 주시는 태도, 무한한 관대함입니다.
가르쳐야 할 것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좋은 땅을 가리지 않고 아무 데나 뿌립니다.
바로 열매를 보려고 서두르지도 않습니다.
그분이 뿌린 씨의 완전한 수확은
그분의 공생활이 아니라 종말에 가능할 것입니다.
받아들일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
지금 따를 것인지, 나중에 올 것인지
청중의 자유를 존중하고 그들의 능력을 신뢰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한 것으로 돼 있는
비유에 대한 설명은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이라기보다
씨 뿌리는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마태오 공동체의 성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오 공동체는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랍비 유다이즘이 강화되는 시기에 소수 공동체로 살며,
이 비유를 되새기면서 위기와 역경 속에서
그들의 신앙을 심화시켰을 것입니다.
■ 보고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한 해를 은혜로 기름지게 하시니,
당신이 가시는 길마다 기름진 땅이 되나이다.”(시편 65)
하느님 말씀이 지나가는 길인 내 인생은 얼마나
‘기름진 땅’이 됐을까?
우리 시대에 지혜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힘든 요소는 무엇일까 질문해 봅니다.
저에게 지혜의 말씀에 대한
경청을 막아 버리는 돌밭이나 가시덤불은
지혜 문학에서 자주 말하는 어리석음,
곧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고 쉽게 분노하는 것,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오만,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착각하는 자기 중심적 사고입니다.
불행하게도 이런 내부 요인이 아니라
환경의 영향으로 말씀이 뿌리내리기
힘든 땅들도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오늘 저녁 뉴스만 봐도 우리의 무관심과
편견 때문에 말씀의 씨앗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땅들을 보고 듣고 깨닫게 됩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16)
좋은 땅을 가리느라
노심초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복음서 전체에서
항상 장소를 가리지 않고 씨를 뿌리셨고
어떤 열매를 거둘지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면,
하느님 자녀인 우리도 ‘씨 뿌리는 전문가’인
예수님께 매일 씨 뿌리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씨 뿌리는 장엄한 권한을 나눠 주신 하느님께
결국 그분이 거두셔야 할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1) 아멘!
-임숙희(레지나)-
[한주간 전례]
2020년 7월 13(월) [녹]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0,34─11,1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놀랍고 두렵습니다.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며 속죄하고
화해하는 것이 중요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언자를 통하여 전해지는 이 말씀은
청천벽력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선포합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몸과 마음과 생각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제물을 바치는 것은 속죄하고
화해한 것을 보여 주는 행동입니다.
그보다 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은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이고 화해입니다.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비슷한 의미로 들립니다.
다른 누구보다 먼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요구입니다.
사람 간의 관계에 얽매여 있고
그 관계 안에서만 나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참된 자신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그 관계를 무시하고 무조건 벗어나라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하느님 앞에 있는 자신만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이웃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럭저럭 잘 지내는 것을
평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언자를, 의인을 그리고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진정한 평화가 시작됩니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자신을 깨끗이 하라는 말씀처럼,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를 통하여
이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평화를 위한 길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7월 14일 (화) [녹]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1,20-24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으십니다.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은
모두 갈릴래아 호숫가에 있는 마을입니다.
카파르나움은 ‘예수님의 고을’이라고 표현될 정도로
예수님께서 많은 시간을 보내셨던 곳입니다.
코라진과 벳사이다 역시 카파르나움에서
북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고을들로,
지금도 그곳에는 무너진 마을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 근처의 이 고을들은
오늘 복음에서 불행 선언의 대상이 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다른 곳보다
더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기 때문입니다.
기적은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대한 표현이지만,
그 결과는 항상 예수님을 향합니다.
기적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은 예
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가장 많은 기적을 일으키신 이 고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예수님을 더 믿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야 하였지만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은
그만큼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큰 용서를 받은 사람도 그만큼 많이 용서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많이 받은 사람 역시
더욱 참된 신앙인으로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받는 것에만 익숙하고 베풂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은
감사한 마음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더 좋은 것을, 더 큰 것을 받고자 애쓸 뿐입니다.
우리는 얼마만큼의 은총과 사랑을 받고 용서를 체험하였습니까?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7월 15일 (수) [백]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보나벤투라 성인은 1217년 무렵
이탈리아의 중부 지방 바뇨레조에서 태어났다.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의 수도자가 된 그는
파리에서 공부한 뒤 파리 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학문 연구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작은 형제회의 총장으로 선출된 보나벤투라는
자신의 수도회 설립자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전기를 완성하였으며,
철학과 신학 분야의 권위 있는 저서도 많이 남겼다.
1274년 무렵 선종한 그를 1482년 식스토 4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1588년 식스토 5세 교황은 중세의 뛰어난 철학자이자
사상가로 존경받고 있던 보나벤투라 주교를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복음묵상] 마태오 11,25-27
이런 말을 듣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모르는 것이 약이다.”
때로는 아는 것이 유익할 수 있고,
때로는 모르는 것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그 대상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자면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감사의 기도입니다.
‘지혜’는 선한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지혜는 하느님의 신비를 알게 하고,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길을 걷게 하는 선물입니다.
지혜를 얻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고
그것이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슬기’ 역시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들은
‘스스로 깨달았다고 자부하는’ 이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들 스스로 지혜롭고 모든 것을 깨달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철부지들’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않고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이들에게 당신의 뜻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하느님의 선하신 뜻은 그것에 목말라하고
그것을 찾고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이루어집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7월 16일 (목) [녹]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1,28-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말씀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스스로를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존재로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편하고 가볍게 해 주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만큼 위안과 위로가 됩니다.
사실 오늘 말씀은
비슷한 내용의 반복입니다.
‘멍에’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유다교와 신약 성경에서 멍에는 율법을 나타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당시 율법을 따르며 살았던,
율법을 힘겹게 지켜나가던 사람들입니다.
이것과 반대되는 것은 ‘내 멍에’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당신의
가르침을 따라 살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안식을,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십니다.
율법은 점점 사람들을
힘겹게 하는 틀이 되었습니다.
율법은 부정한 일을 피하도록,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세세하게 모든 것을 규정하고
그 부정적인 것들에서 멀어지기를 요구합니다.
율법은 ‘하라.’는 것보다
‘하지 말라.’는 것을 더 많이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실천하고 행동하라고 요구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가르침은 부정에서 긍정으로,
소극적인 것에서 적극적인 것으로,
피하고 멀어지는 것에서
다가서고 실행하는 것으로의 변화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실천하기가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 그 가르침은
우리에게 안식을, 영원한 생명을 선사할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7월 17일 (금) [녹]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2,1-8
안식일에 대한 논쟁은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입니다.
그만큼 유다교에서 중요한 율법이었고
지금도 유다인들에게 안식일
규정은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예수님 시대에 있던 율법 가운데 삼분의 일 정도가
안식일에 관한 규정이었다는 것은
안식일의 중요성을 보여 줍니다.
안식일의 기본 원칙은 ‘쉬는 것’입니다.
창조 때에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만드시고
하루를 쉬셨다는 말씀에서 유래합니다.
안식일에는 ‘일하는 것’, ‘노동’을 모두 피해야 합니다.
따라서 율법은 무엇이 일하는 것인지 세세하게 규정합니다.
바리사이들의 눈에 밀 이삭을 뜯는
제자들의 행동은 분명 일이고 노동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을 비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예로 답하십니다.
먼저 다윗의 이야기는 아마도
1사무 21,1-7의 내용처럼 보입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사제들에 대한 내용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사제는 안식일에도 하느님께 제물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두 경우 모두 예외적인 내용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시라는 점과
안식일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안식일, 곧 지금 우리에게 주일은 쉬는 날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쉬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의미를 생각하고
하느님의 업적에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의미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화로운 창조에 걸맞은 용서나 자비,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안식일의 참된 의미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7월 18일 (토) [녹]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2,14-21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이미 유다교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려고 마음먹습니다.
그 결과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죽음을 넘어선 부활은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의 예언처럼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고,
사람들은 그것에 희망을 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사람들 가운데에 오셔서
평화로운 방법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복음은 예수님의 활동을 통하여 더욱 잘 드러납니다.
한 분이신 예수님께서 계셨고
하나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그분의 업적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구원자이고 희망이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거짓말쟁이이며
신을 모독하고 군중을 선동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그 말씀은 기쁜 소식이었지만,
들으려 하지 않는 이들에게 그 말씀은
그저 지나가는 말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하늘 나라를 드러내는 표징이었지만
말씀을 듣지 않는 이들에게는 선동일 뿐입니다.
믿음은 말씀을 들은 이들의 결단입니다.
그렇기에 믿는 이들은 말씀을 통하여
위로를 받고 말씀에 희망을 둡니다.
이미 우리는 결단을 통하여 믿음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분명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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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세상이
코로나19로 인하여 일상이 바뀌고 있습니다.
거리에는 마스크를 하는 것이 기본이 되었고
성당에 들어갈 때에는 발열체크와 신상명세서,
마스크 착용을 확인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꼭 지켜야할 규범이 되었습니다.
하루 빨리 이 모든 상황이 정리되길 기도합니다.
-Berar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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