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대부분의 문제는 우리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에 따라 발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타인의 삶에 지나치게 집중할 때
그 시선은 때론 위험천만한 비교로 이어지게 되며,
무분별한 분노, 상대적 열패감과 공허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국사회 안에 만연한, 타인을 의식하고
긍정적 평판과 소문을 성공과
출세의 지름길로 여기는 분위기는,
기득권의 편의를 포장하는 위선과
윤리적 타락을 양산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세대를 거듭하여 재생산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모순이며 악순환이 아닐까 합니다.
타인의 삶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더욱 정직하고 겸허하게 집중할 때
인간의 삶은 더 많은 의미와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누구의 감시나 무례한 검열에도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빛나게 살아갈 길은 무엇인지를
‘숨겨진 보물’과 ‘값진 진주’의 비유를 통해 알려줍니다.
■ 복음의 맥락
이번 주에도 ‘하느님 나라’가 소개됩니다.
지난주 복음은 ‘밀과 가라지’,
‘누룩’, ‘겨자씨’ 등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특징을 묘사하였다면 이번 주에는
하느님 나라를 찾고 발견한 인간이
개별적으로 취하는 행동에 주목합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주변 국가들의 잦은 침입과
이방인의 강탈로 인해,
그리고 개인의 자산을 맡기고 관리할 은행이나
금융기관이 없었기에 자신의 보물을 땅에 묻어두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
종종 발생하였고 숨겨 놓았던 보물은 의외의 시간에
의외의 사람에 의해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사회적 맥락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 숨겨져 있지만 그 무엇보다도 좋은
복음의 본문에서 하느님 나라는
“숨겨진 보물”과 “좋은 진주”에 비유되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사게 한다는 것’입니다.(마태 13,44-45)
자기 인생을 전부 걸 정도로
귀한 하느님 나라는 ‘좋은’ 것이지만
‘숨겨져’있다는 특성을 가집니다.
“숨겨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크륍토’의 과거 분사형이며,
오래 전 누군가에 의해 감춰지거나
봉인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좋은”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형용사는
‘칼로스’로서, 아름다운, 선한,
유익한 등의 뜻을 가지며,
감히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하느님 나라는 ‘발견하고’,
‘찾는’ 행위를 통해 구현되는데
밭에서 일하다가 보물을 발견한 일꾼처럼 예기치 않게,
느닷없이 발견할 수도 있고, 간절한 희망으로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던 상인처럼
항구한 찾음을 통해 발견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다 팔’ 정도로 소중한
‘하느님 나라’의 가장 고유한 본질은
당연히 ‘하느님이 거처하시는 곳’이라는 점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계시는 곳’,
‘하느님과 더욱 가까이에 있게 되는 곳’이며,
이는 하느님 자신이야말로 숨겨진 보물이고
값진 진주의 실체임을 암시합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 존재 가장 깊은 곳에 계시는,
즉 우리 마음의 밭에 숨겨져 있는 보물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숨겨진 보물이 있는 밭과
좋은 진주를 파는 상점은 그 어떤 다른 곳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 그 ‘중심’이고,
그렇게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발견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를 획득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귀영화나 권력보다
제대로 된 ‘마음’을 갈망하고
이를 하느님께 청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혜의 대왕 솔로몬입니다.
■ 듣는 마음과 완덕의 여정
제1독서는 솔로몬의 지혜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알려줍니다.
솔로몬은 꿈에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2열왕 3,5)라는
하느님의 질문을 받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높은 지위에 있다하더라도
지혜가 없으면 모든 것은 위태롭고
허술한 스펙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획득되는 ‘지식’과 달리
‘지혜’는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주어지는 선물이며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알고 있던 솔로몬은 백성을
분별 있게 통치할 “듣는 마음”을 청합니다.(9절)
“듣는 마음”의 히브리어는 ‘레브 쇼메아’이며,
‘샤마’(듣다)라는 동사와 ‘레브’(마음)라는
명사가 연결되어 있는 ‘연계형’입니다.
유다인들에게 ‘레브’는 생물학적 기관으로서의
‘심장’을 의미하지만 무엇보다 인간의 내면,
모든 생각과 지성·의지가 조정되는 중심을 지칭했습니다.
‘샤마’는 무엇을 듣는 행위와 그
들음을 통해 동반되는 순종과
주의 깊은 수용까지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듣는 마음’은 주의 깊은 경청과
이를 통한 전인적 소통을 말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찾고
발견하기 위해 인간이 걸어야 할
삶의 여정은 때로는 불행과 역경,
고난을 포함하기도 하는데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이 모든 것이
선한 결과를 내기 위한 필수적 순간들임을 역설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로마 8,28)
하느님 나라를 위한 고난은 어느 것도
무용한 시간으로 폐기되지 않는 것입니다.
‘용기’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courage는
라틴어 cor(심장, 마음)에서 기원하며,
이는 전적으로 ‘마음’을 다하고 그렇게 다한
‘내면의 양심’을 견고하게 지킬 때
우리 각자는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세상을 움직이고 개인의 삶을 존엄하게 지켜주는
가장 강력한 힘은 외부 조건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것이 궁극적 행복의 비밀인 것입니다.
소문과 세상의 평판에 급급해
그 비위를 맞추며 자기 삶을 만들어 가다보면,
고유하고 명료한 내면의 힘은 빈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 집단에 속한 이들조차
주체적 자아는 결핍되고 부재한 채
사회를 이끌어가는 불안을 조성하게 됩니다.
사회적 약자들(여성, 아동, 장애인 등)이
감수해야 할 공포와 수치심, 착취와 학대,
그로인한 절규가 넘쳐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각자에게 질문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2열왕 3,5)
단순하고 순진한 마음으로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숙명적인,
우리 실존 전체를 거는 처절하고도 신중하며
단도직입적인 물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혜윤 수녀-
▲팔당댐 상류를 거닐고 있는 오리가족
[한주간 전례]
2020년 7월 27(월) [녹]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3,31-35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비유로만
군중에게 말씀하셨을까요?
두 가지 생각이 듭니다.
하늘 나라는 비유가 아니면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알고 있지 못하고 상상하기 힘든
하늘 나라의 신비는
비유를 통해서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유를 통한 말씀은 듣는 이에 따라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신비는 비유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밝히 빛나고 빛이 되지만,
그것을 흘려듣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감추어진 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남게 됩니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습니다.
여느 씨앗보다 작지만 어떤 풀보다도 크게 자랍니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처럼 눈에 띄지 않지만,
하늘 나라를 통하여 얻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결과입니다.
하늘 나라는 이렇게 우리 안에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잘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결실을 맺을 때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겨자씨의 비유는 ‘이미’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늘 나라의 특징을 잘 드러냅니다.
감추어진 하늘 나라의 힘이자 능력입니다.
또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습니다.
하늘 나라는 밀가루를 부풀게 하는 누룩처럼
우리 안에서 믿기 힘든 결과를 가져옵니다.
겨자씨의 비유와 비슷하지만
이 비유는 우리를 통하여 하느님의 업적이 드러나는,
우리 안에 작용하는 하늘 나라를 말합니다.
하늘 나라는 겉으로 거창하게 보이지 않지만
신앙인들 안에서 힘이 되고,
그들을 통하여 하늘 나라가
이 세상에 와 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7월 28일 (화) [녹]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3,36-43
어떤 사람들은 구약 성경의
하느님과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나시는 하느님께서
서로 다른 분이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구약 성경은 정의를 강조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으로 하느님을 소개한다면,
신약 성경은 하느님을 자비와
사랑이 넘치시는 분으로 알려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구약을 막론하고
성경은 이 두 모습을 모두 보여 줍니다.
구약 성경은 심판하시는 정의의 하느님을 말하지만,
백성과 화해하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시는 자애로운 분으로도 소개합니다.
복음서 역시 사랑과 자비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말하면서도 종말에 있을 심판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꾸짖으시는 하느님도 이야기합니다.
정의와 자비는 많은 경우에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성경에서 정의를 강조할 때 행간에 담긴 의미는
하느님의 자비를,
자비를 말할 때는 하느님의 정의를 생각하게 합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도 그렇습니다.
종말에 관한 이 말씀은
불의를 피하고 정의를 실천하라는 경고입니다.
심판 때에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은 분명 벌을 받을 것입니다.
반면에 의인들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종말과 심판은 아직 오지 않았고
지금 우리는 밀과
가라지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종말과 심판에 관한 말씀이지만,
오히려 지금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정의에 관한 말씀이지만,
우리의 죄를 지금 바로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꾸준한 성찰과
분별을 통하여 가라지가 아닌 밀이,
곧 의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하게 합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7월 29일 (수) [백] 성녀 마르타 기념일
마르타 성녀는 라자로의 동생이자
마리아의 언니로서 예루살렘과 가까운 베타니아에서 살았다.
라자로는 예수님의 기적으로
나흘이나 무덤에 묻혀 있다가 다시 살아난 인물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집에 머무르실 때
언니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으나
동생 마리아는 가만히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루카 10,40)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10,41-42).
주님의 이 말씀에 따라
마르타 성녀는 활동적인 신앙인의 모범으로,
마리아 성녀는 관상 생활의 모범으로 공경 받고 있다.
[복음묵상] 요한 11,19-27
요한 복음은 다른 복음보다
대화를 중요하게 보여 줍니다.
등장인물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일상적인 대화를 넘어 신앙의 견지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라자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슬픔에 잠기시어
그가 살고 있던 마을인 베타니아로 가십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마르타를 만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마르타의 믿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표현은 마르타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안타까움을 잘 보여 줍니다. 예
수님과 함께라면 죽음을 맞지 않았을 것이라는
마르타의 생각은 예수님에 대한 신뢰와 함께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려 줍니다.
그러나 마르타의 믿음은
여전히 부활에 대한
믿음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녀는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지막 부활 때에 일어날 일로 받아들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것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설명을 들은 마르타는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마르타의 믿음은
이미 우리에게 대단해 보입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믿음이 한층 더 깊어지는,
예수님을 좀 더 알아 가는 마르타를 보여 줍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파견하신
당신의 아드님이시자 부활과 생명이신 분으로 표현됩니다.
예수님과의 대화는 이렇게 우리를 더 깊고
굳은 믿음으로 이끌어 줍니다. 믿음은 성장합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7월 30일 (목) [녹]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3,47-53
하늘 나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던져진 그물과 같습니다.
고기잡이를 생각해 보면,
그물은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습니다.
가능한 많은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것이 그물의 역할입니다.
하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물이 가득 차면 어부들이 그물을 끌어 올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골라내는 것처럼,
하늘 나라는 충만해질 때까지 사람들을 모아들입니다.
하늘 나라는 이렇게 모든 사람을 초대합니다.
아직 심판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종말이 오면, 그때에 비로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리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종말에 있게 될 심판을 언급하여
우리에게 의로운 삶을 살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먼저 하늘 나라가
모든 사람을 초대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가 의인이고
누가 악인인지 지금 심판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시간이 주어진 셈입니다.
왜 죄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불행하게 살고,
악을 저지르는 이들이 편하고 행복해 보이는지,
하느님의 심판은 어디에 있는지,
왜 하느님께서는 악한 사람들을
그냥 두시는지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왜일까요? 아마도 그 답은 하느님이 아닌,
내 안에 있을 것입니다.
나도 죄를 짓고 실수를 하지만
지금 심판받지 않고
용서를 체험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비유의 장점은
그 뜻이 무엇인지 찾아가게 유도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나의 삶 속에서
말씀의 뜻을 고민하고 그 의미를 찾게 합니다.
이렇게 하나씩 의미를 깨달아 가는 것이
우리 안에 있는 하늘 나라를 경험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7월 31일 (금) [백]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은
1491년 스페인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군인이 된 그는 전쟁에서 입은 부상을 치료받다가
현세의 허무함을 깨닫고 깊은 신앙 체험을 하였다.
늦은 나이에 신학 공부를 시작한 이냐시오는
마흔여섯 살에 사제가 되었고,
이후 동료들과 함께 예수회를 설립하여
오랫동안 총장을 맡았다.
그는 『영신 수련』 등 많은 저술과 교육으로
사도직을 수행하였으며,
교회 개혁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1556년 로마에서 선종하였고,
1622년에 시성되었다.
[복음묵상] 마태오 13,54-58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랍니다.
그런데 그들의 관심은 엉뚱한 곳으로 향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예수님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가르침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둘러싼 것들에 관심을 가집니다.
목수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시자
평범한 동네 청년이신 예수님께서
‘어디서’ 놀랄 만한 지혜와 힘을 얻었는지
그것만 궁금해 할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참인간이시자
참하느님으로 고백합니다.
그분께서는 인성과 신성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한 면만 생각합니다.
그들의 관심은 인간적인 것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때로는 익숙하고
친숙한 것들이 우리를 방해합니다.
이것들은 편하고 좋을 수 있지만
새로운 것을 찾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여기에 안주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에는 새로움이 없습니다.
그저 그렇게 알고 있는 대로만 듣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은 진부하게 느껴집니다.
말씀을 들을 때 새겨듣지 않고
선입견을 가지고 듣는다면, 지루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이 지루하고 진부하게 느껴진다면,
여전히 우리는 나자렛 사람들처럼 듣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말씀을 듣고 그 뜻을 찾고 실천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변하게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그 힘과 늘 새롭게 마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통하여,
나의 삶을 통하여 듣는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8월 1일 (토)
[백]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알폰소 성인은
1696년 이탈리아
나폴리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신심이 두터웠던 그는
법학을 공부하여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사제의 길을 선택하였다.
1726년 사제품을 받은 알폰소는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를 설립하고,
올바른 그리스도인 생활을 위한
설교와 저술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는 나폴리 근처에 있는
고티의 교구장 주교로 활동하다가
다시 수도회로 돌아가 1787년에 선종하였다.
윤리 신학의 대가로 존경받던 알폰소 주교를
1839년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복음묵상] 마태오 14,1-12
‘예언’이라는 말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헤아려
말하는 예언(豫言)과 신탁을 받은 사람이
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과
그 내용을 가리키는
예언(預言)으로 구분하여 쓰입니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은
후자의 성격이 강합니다.
물론 하느님의 뜻을 전하다 보면 때로는
미래의 일도 언급하기 때문에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전자의 의미를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지키지 않고
그분 뜻에서 멀어질 때,
백성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죽음을 무릅쓰고
하느님의 목소리가 되어 진리를 선포해야만 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예언자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두 경우 모두 예언자들의 말을 듣
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예언자들을 없애려고 합니다.
예레미야의 목숨은 유다의 대신들과
모든 성읍 주민들의 무서운 변덕에 달려 있습니다.
사제들과 예언자들도 그가 성전과
예루살렘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마땅히 처형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율법을 어기고
동생의 아내를 차지한 헤로데를
비난한 일로 수감되었습니다. 그
리고 죄인의 사면도 가능한 임금의 생일날에
오히려 참수당하는 끔찍한 일을 겪습니다.
비록 오늘 독서와 복음에
예수님께서 등장하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예언자들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께서
겪으실 일들을 감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사명에 충실하였던 예언자들의 신실에 비추어
우리의 말과 행위를 살펴봅시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망설임 없이 행합시다.
화답송의 시편 저자처럼
예언자로서 겪게 될 고통 속에서도 기도합시다.
“가련한 저는 고통을 받고 있나이다.
하느님, 저를 도우시어 보호하소서.
하느님 이름을 노래로 찬양하리라.
감사 노래로 그분을 기리리라.”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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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폭우로
부산지역 등 남부지방에 큰 피해가 발생하였습니다.
비록 미리 준비를 한다고는 하여도
자연재해 앞에서는 작아지는 우리들입니다.
그래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시는 하느님께 의지하며
이것도 슬기롭게 힘을 모아 극복해야겠습니다.
울님들 모두 건강한 한 주 되세요.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