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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그래서 더, 알렐루야.

Berardus 2020. 7. 16. 05:00

    [말씀 묵상] 그래서 더, 알렐루야.

    

    연중 제16주일· 제1독서 (지혜 12,13,16-19)  제2독서 (로마 8,26-27)  복음 (마태 13,24-43 또는 13,24-30)

    성령은 우리를 알곡으로 변화시켜주는 하느님 능력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을 살도록 이끄는 주님의 손길 나약한 인간을 위한 간구는 하느님 치유의 증거 사랑·인내·희망, 성령께서 주신 은사임을 새롭게 새겨야


      답답한 요즘입니다. 코로나에게 짓눌린 세상의 아픔은 끝이 아득하여 막막하기만 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읊었던 마음 쓰린 눈물의 애가가 모두 우리의 사연인 듯 마음에 고여 듭니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만 같아 겁납니다. “당신께서 듣지 않으시는데”라며 하바쿡 예언자처럼 항의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습니다. 이 깊고 질긴 시련을 허락하시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여쭙고 또 여쭙게 됩니다. 그럼에도 저는 지금 이런 얘기마저 입에 발린 위로에 그칠지 모른다는 조바심을 떨치지 못합니다. 어떤 격려도 힘을 드리기엔 미흡할 것만 같아,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그런데 오늘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너무너무너무 위로가 되는군요. 그 무엇도 보탤 것 없이 말씀 그대로, 덜어내지도 손대지도 말고 온전히 전해드리고 싶어서 소리 내어 읽고읽고 또 읽었습니다. 이야말로 아픈 세상을 향해서 들려주시는 주님의 고백이니 말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고통을 몰라라하지 않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끊임없이 치유의 손길로 세상을 어루만지고 계시다는 증거이니 말입니다. 때문에 힘 빠진 세상을 위해서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신다는 주님의 고백에 우리 모두가 힘을 얻을 수 있기를 청합니다. 우리 모두가 세상을 위해서 간구하시는 성령님의 심정을 헤아려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시련을 이겨내기 원합니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열매가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호의와 선의와 성실과 온유와 절제임을 기억하여 결단코 기가 꺾이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놓여 있는 역경을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헌신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너끈히 이겨내는 지혜를 얻기를 소원합니다. 지금이야말로 교회에서 배우고 익히고 체험했던 성령의 선물을 세상을 위해서 제대로 활용해야 할 기회이니까요. 성령은 우리를 위해서 쏟아 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가라지 같은 우리를 튼실한 알곡으로 변화시켜주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마침내 당신의 복음을 살아내도록 이끌어주는 주님의 손길입니다. 덕분에 우리는 이 땅의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하늘의 기쁨을 살 수 있습니다. 아니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꼭 그렇게 살아야합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주신 선물을 간직한 그리스도인이기에 그렇습니다. 세상의 절박한 소식이 난무하는 중에도 마음이 짓눌리지 않고 그래서 더욱, 사랑과 인내를 살아내야 하는 믿음인 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사랑과 인내와 희망이 성령께서 선물해주신 은사라는 점을 새로이 새겨 살 것을 권고 드립니다. 더하여 성령께서 선물해주신 인내는 오직 사랑에서 시작되어 사랑으로 귀결되는 사랑의 결실임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그저 단순하게 오래 오래 참아내는 것, 그저 이를 악물고 견뎌내는 것은 사랑이 아님을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사랑이 없다면 제아무리 끈질긴 인내도 희망도 다 부질없는 허세일 뿐입니다. 사랑으로 견디어내는 삶은 거룩한 어느 장소, 특별한 어느 시간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일상에서 하느님을 기억하는 향기로운 기도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도움주시는 하느님께 의탁함으로 완전한 찬미의 삶으로 돋움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하느님과 관계를 맺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인내하고 견디는 일마저도 사랑에서 비롯되어 사랑으로 이어져야 옳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모든 군중에게 직접 속뜻을 풀이해주신 경우는 오늘 복음말씀이 유일합니다. 그만큼 소중한 까닭이라 짚어져서 마음을 여미게 되는데요. 물론 이 말씀은 누구에게나 친근한 이야기일 터입니다. 덕분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실 것입니다. ▲도멘시오 페티의 ‘가라지의 비유’.(1622년)


      문제는 너도 나도 자신은 알곡인 줄로 착각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점이겠지요. 사실은 속은 텅 비어있는 쭉정이 임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를 알곡이라 여기며 자신의 삶을 과대평가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런 분들의 특징은 세상은 원래 다 그렇고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라는 말을 예사로 하는 것에서 드러나는데요.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가지 않느냐고 변명하는 일에도 익숙하지요. 한편 무슨 수로 주님의 말씀을 모조리 지키면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느냐며 말씀을 변형시키는 일마저 서슴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이러한 허세를 지녔다면 이야말로 사탄이 들려주는 사탄의 복음에 오염된 증거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는 자만, 나아가 이만큼 기도했으니 이제는 하느님이 감동하시어 응답해주실 차례라고 여기는 오만이야말로 조잡하고 너절한 ‘인간의 복음’에 불과하니까요. 주님께서는 오늘도 속빈 이삭이 되어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팔랑거리고 있는 우리 모습에 애간장이 타십니다. 멀대 같이 키만 웃자라서 건들건들 으스대는 우리의 꼴에 진저리를 치십니다. 때문에 오늘도 지금 이 순간에도 아버지 하느님께 꿇어 엎드려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시며 피땀을 흘리고 계십니다. 쓸모없는 가라지 같은 나를 알곡으로 변화시키기 원하시는 주님의 호소를 흘려듣지 마십시오. 하느님 자비에는 유예 기간이 있다는 사실에 깨어나 삶을 정리 정돈하도록 합시다. 오늘 우리의 자잘한 시간들은 그날 “해처럼 빛날” 존재가 될지 “불구덩이에 던져”지는 신세가 될지를 결정하는 자료가 됩니다. 지금 우리가 지나치는 모든 찰나와 순간은 그만큼 소중하고 귀합니다. 그분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분의 사랑을 잊지 않으므로 어제보다 한 뼘 더 주님께로 가까워지면 좋겠습니다. 나보다 더 내 삶을 사랑하시는 주님께 온 것을 봉헌함으로 하느님의 용사가 되면 더 좋겠습니다. 길고 길어서 더 힘들고 훨씬 막막한 시간마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좋고 유익한 것’임을 기억하여 ‘아멘’으로 화답해드린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힘들고 어려워서 더욱, 갑갑하고 막막해서 더 더욱, ‘알렐루야’로 하느님께 찬미 드리며 난관을 극복해나가는 용덕이 선물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