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7월 5일 (일)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제1독서 (역대하 24,18-22)
제2독서 (로마 5,1-5)
복음 (마태 10,1722)
의로움에 몸 바친 사제의 사랑
열다섯에 조선교회 위한 투신 서약
혹독한 박해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의 진리를 당당하게 증언
죽는 순간까지 영생의 시작 전하며 사제생활 1년 만에 새남터서 순교
7월 5일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를 현양하는 날입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사제로 성 정하상 바오로와 함께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은’ 한국 대표 성인입니다.
저희도 ‘순교의 빛’을 잇는
‘사랑의 디딤돌’이 되기를 다짐합니다.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 솔뫼(소나무 우거진 동산)에서
태어난 ‘재복’(再福, 사제 아명)이가
열다섯 살에 “조선교회를 위해 몸을 바치겠다.”
서약하고 신학생이 됩니다.
조선 시대에 사제가 되려면
형장에 이슬이 되는 것을 감수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는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서울을 출발(1836.12)
육로로 파리 외방전교회가 있는
마카오 신학교에 도착(1837.6)합니다.
신학생 시절 선교사제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라는
소명에 압록강과 두만강 지대를 탐험합니다.
주림과 추위에 지쳐 눈길에 잠들었을 때
“일어나 걸어라!” 하신 주님의 섭리를 체험합니다.
목선으로 항해하던 중 폭풍우를 만났을 땐
“성모님이 계시니 두려워 마시오!” 하고 용기를 줍니다.
장춘 소팔가자 성당에서
부제품을 받은 그는 선교사제의 입국을 돕느라
일시 귀국했으나 홀로된 어머니도 뵙지 못하고 떠난 뒤
상하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 성품(1845.8.17.)에 오릅니다.
그는 ‘라파엘’ 호를 타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함께 귀국합니다.
고국에 돌아온 김대건 신부는
선교사제의 서해 입국 통로를 개척하다가 체포(1846.6.5)됩니다.
“가엾은 젊은이,
어려서부터 고생도 무척 했군!”
“신앙의 진리가 훌륭하고 도리에 옳으나
임금이 천주교를 허락하지 않는다.”
문초하는 과정에서 관리가 한 말입니다.
그의 뛰어난 외국어 실력과 학문을 인재로 쓰려고
그들은 수차 회유를 하지만 “천주를 숭배해야만 한다.
이를 거절하면 죄를 면치 못한다.” 하고 대답합니다.
교우 이름을 대라 하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천주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짓”이라고 거절합니다.
신부님의 옥중 편지는
신심의 향기를 발합니다.
“천주를 알지 못하면 산 보람이 없습니다.
눈물로 씨뿌린 농부가 추수하는 기쁨을 누리듯
신앙도 좋은 열매를 맺을 때 천국의 기쁨을 누립니다.
박해를 두려워 말고 천주를 섬기고,
순교자들을 기억합시다.
성인들의 발길을 따라 교회에 충실한 시민이 되고,
사랑의 일치로 주님 만나는 기쁨을 누리십시오.”
“나의 마지막
때가 왔으니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내가 외국 사람과 통한 건
오직 천주님과 교회를 위함입니다.
나는 죽으나 여기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여러분도 죽은 후 행복을 얻으시려면 천주교 신자가 되십시오.”
새남터 형장에서 마지막 강론을 마친 그는
칼을 든 열두 회자수에게 “몸가짐이 이러면 쉽게 자르겠느냐?
자, 준비됐으니 내 목을 쳐라.” 말하고,
사제생활 1년, 25세에 여덟 번째 칼날에 순교(1846.9.16)합니다.
제1독서에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힌
즈카르야(역대하 24,20)처럼 사제께서는
신앙의 진리를 당당히 증언했고,
수차례 회유에도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제2독서에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믿음으로
의롭게 된 그는 환난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해 평화를 누립니다(로마 5,1-2).
오늘 복음 말씀처럼
그는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무얼 말할까
두려워하지 않고 성령님이 내면에서 일러 주신대로
진리를 증언(마태 10,19-20)합니다.
주님의 이름 때문에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른 참 목자의 모습입니다.
사제의 얼이 서린 성지입니다.
솔뫼는 그의 증조부(복자 김진후 비오),
부친(성 김제준 이냐시오)을 포함 4대 11명이
순교의 꽃을 피운 ‘아름다운 성지’입니다.
사제기념관에 소장된 친필 서한, 라파엘호, 조선전도,
순례길, 순교일지와 각종 형구에서 의로운 신심을 봅니다.
소년 시절 글을 배운 골배마실, 신앙 성숙과
사목활동의 거점인 은이성지, 순교의 피로 물든 새남터,
사제와 모친(고 우르술라)·페레올 주교·
이 빈첸시오의 묘가 있는 미리내, 용수,
나바위, 성품을 받은 성당, 마카오의
카모에스 공원 등 많은 국내외 성지가 있습니다.
한국천주교회는
신부님 탄생 200주년이 되는
2021년을 ‘한국교회의 희년’으로 선포합니다.
2021년은
세계유네스코가 정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기념해’입니다.
새해는 주님의 사랑과 사제의 영성이
더욱 빛날 희망의 해임을 확신합니다.
평신도가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한국천주교회 역사는 236년,
초기 100여 년에 신앙의 선조들이
흘린 피가 밀알이 되어 열매 맺습니다.
한국교회는 103위 순교성인과
124위 순교복자를 모시고 있습니다.
유·무명 순교자들이
우릴 위해 기도해주시니 참으로 든든합니다.
박해가 없는 오늘날이지만
물질문명의 시대 속에 자기중심의 삶으로
기도와 성사와 나눔을 뒷전으로 하는 유혹과
삶의 고통은 늘 우리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겨낼 그리스도의 평화로 무장되어 있는지요?
신앙의 스승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탄생
200주년 기념해’를 맞아, 한마음으로 사제와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복음의 실천으로
충실히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 때
주님께서 강복해주시고 순교자들도 기뻐할 것입니다.
아멘!
-김창선(요한 세례자)-
▲성수동성당 성모상
[한주간 전례]
2020년 7월 6(월) [녹]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9,18-26
오늘 복음은
액자처럼 구성된 이야기입니다.
회당장의 죽은 딸을 되살리는 이야기 안에
혈루증을 앓던 여자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두 이야기는 모두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회당장과 병을 앓는 여자가
보여 주는 굳은 믿음과 간절함을 강조합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회당장의 청은 놀랍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께서 죽은 이도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믿음을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다시 살게 하신다는 것을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회당장이지만
딸에 대한 간절함은 그의 믿음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과 청원처럼 예수님께서는
그의 딸을 되살리시어 회당장의 품에 돌려주십니다.
열두 해 동안
병을 앓던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에서 벗어나고픈 그녀의
간절함과 절실함은 그녀를 구원합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그녀의 간절함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믿음입니다.
이에 어떤 화가는 이 장면에서 한 여자가
많은 사람들의 발 사이로 기어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모습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회당장과 병을 앓는
여자의 치유 이야기는
그들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선물은 믿음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억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보여 주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죽음조차도 넘어섭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7월 7일 (화) [녹]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9,32-38
‘내로남불.’ 좋은 말도 아니고
교육적이거나 윤리적이지도 않고
더욱이 신앙적이지 않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 안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동일한 사건이지만 개인의 입장에 따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용하지 말아야 할 표현입니다.
사람들은 오늘 복음에서
하나의 같은 사건을 경험합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자
말못하는 이가 말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들려 말을 못하였으니
마귀를 쫓아내자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매우 당연해 보입니다.
예수님의 ‘구마’이자 ‘치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사뭇 달랐습니다.
군중은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라며 놀라워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
말하며 예수님을 비하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도
이런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정치나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해석하는 각자의 시선은 참으로 다릅니다.
때로는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기도 합니다.
세상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입장과 시각이
다른 사람들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습니다.
무엇이 좋고 나쁜 것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고민하고 판단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무엇이 복음적인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시각과 잣대로 사건을 볼 것인지,
무엇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기준인지
끊임없이 되돌아보며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인으로서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7월 8일 (수) [녹]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0,1-7
예수님의 기적은
사람들의 눈에 놀랍고 특별한 것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기적은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분의 선포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기적은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눈앞에서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 예가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주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가 왔다는, 하느님의 통치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계속하시려고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열두 명의 제자는 예수님에게
권한을 받아 치유의 기적을 이어 갑니다.
마치 구약 성경에서 열두 부족이
하느님 백성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듯이,
열두 제자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나타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은
같은 이야기를 두 번 전하는 셈입니다.
제자들에게 마귀를 쫓아내고
치유하는 기적을 일으키도록
권한을 주시는 것은,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라는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선포는 그분의 업적을 통하여,
그리고 그분께서 뽑으신
제자들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 현실이 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관계는
모든 신앙인에게 옮아갑니다.
모두가 예수님과 같은 권한을 가질 수는 없지만,
신앙인들도 이 세상에 살면서 하늘 나라가
우리 안에 와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7월 9일 (목) [녹]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0,7-15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십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이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사람들에게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을 모으신 목적을 실행에 옮기시는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이곳저곳을 다니며
기쁜 소식을 전하고 행동으로 그것을 드러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길을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과 비교하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대부분 걸어서 가야 하는 이들에게
여비와 신발과 여벌 옷은 당연한 준비물이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준비물 가운데 꼭 필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겉옷과 지팡이입니다.
겉옷은 저녁의 추위를 막아 주고,
지팡이는 들짐승이나 위험에서
자신을 지키는 데 쓰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다른 것들은 물론 ‘지팡이’마저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시의 제자들에게는 이 말씀이
대단히 야속하게 들렸을 것 같습니다.
그만큼 하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은 지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파견된 제자들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처럼
가장 먼저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를 선포하셨고,
그들과 함께 머무시며 그들을 낫게 하시고
그들에게 참된 평화가 무엇인지 알려 주셨습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함께 머물며 평화를 빌어 주는 것.
지금도 여전히 선교에서 중요한 모습이며
예수님 삶의 요약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면서,
참된 평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7월 10일 (금) [녹]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0,16-23
예수님의 말씀은
가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라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뱀에 관하여
알고 있는 내용은 창세기 3장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는 뱀의 유혹에서 시작됩니다.
간교한 뱀은 아담과 하와의 마음에 있는
욕망을 들추어내고 그들을 죄짓게 만듭니다.
비둘기는 창세기 8장의 노아의 홍수에 등장합니다.
비가 그치자 노아는 비둘기를 날려 보내고
비둘기는 마른 가지를 물고 옵니다.
이레가 지난 후 다시 날려 보낸 비둘기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땅에서 물이 빠졌다는 의미입니다.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이유일 것입니다.
슬기롭다는 것은
분별력이 있고 치밀하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뱀이 슬기롭다고
말씀하시는지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이 말씀은 오늘 독서의 표현을 생각하게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순박하다는 것은
성실하고 단순하다는 의미입니다.
아마도 여러 가지 길을 생각하거나
고민하지 않는 것으로 들립니다.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간다.
분별하고 식별하는 것,
그리고 성실하고 단순한 것은
세상에 파견되는 제자들에게 필요한 덕목입니다.
제자들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도 필요한 자세입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이고 무엇이 세상의 뜻인지,
무엇이 의로운 것이고 무엇이 불의한 것인지 분별하고
그 길을 묵묵히 따라야 할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7월 11일 (토) [백]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서방 수도 생활의 아버지’라 불리는
베네딕토 성인은 480년 무렵
이탈리아의 중부 지방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학업을 마친 그는 수도 생활에 대한 관심으로
동굴에서 3년 동안 고행과 기도의 은수 생활을 하였다.
그의 성덕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이 모여들자
베네딕토는 마침내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서방에서 처음으로
수도회 규칙서에 공동생활의 규정을 제정하였다.
이 규칙서는 수도 생활의
표준 규범서로 삼을 정도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베네딕토 아빠스는 547년 무렵
몬테카시노에서 선종하였다고 전해진다.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은 그를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복음묵상] 마태오 10,24-33
성경에서 말하는
두려움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많은 경우에 경외로 표현합니다.
하느님을 경외함은 “영광과 자랑”이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물”이며
“지혜의 뿌리”로 표현됩니다(집회 1장 참조).
반면에 다른 두려움은 세상에 대한 것입니다.
근심은 걱정을 낳고
걱정이 심해지면 두려움으로 바뀝니다.
세상에서 오는 두려움은
우리 자신을 속박하고 성장하지 못하게 합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두려움이라는 같은 말이지만
그 결과는 사뭇 다릅니다.
같은 두려움이지만 다른 두려움입니다.
하나는 우리를 위축시키고 겁먹게 하는 두려움이지만,
다른 하나는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두려움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은 믿음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다른 모든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하기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그 약함은
하느님을 찾고 그분께 의탁하게 합니다.
약한 것이 문제라기보다 그것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향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그
렇기에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분의 사랑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 사랑을 실천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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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와 무더위가
오락가락하는 요즘입니다.
뉴스에서는 여러가지 사회문제에 대한 내용이
쏟아져 나오고 그중에는 코로나19에
대한 내용도 빠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생활의
일부가 되어 버린 코로나19
주님의 말씀처럼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마태오 10,16) 되어야겠습니다.
-Berar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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