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
하느님을 찬미하십시오.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제1독서(사도 2,42-47)
제2독서(1베드 1,3-9)
복음(요한 20,19-31)
예수님 부활 믿지 못해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죄와 죽음에서의 해방 뜻하는 ‘평화’ 선물로 주심
성령과 죄의 용서 사명 주시며 세상 속으로 파견
체험 원했던 토마스의 의심 공감하며 대화로 풀어.
“많은 것을 해왔고
앞으로 많은 것을 할 것이다.
그러나 잠시 그친다…
그러나 사랑은 그치지 않았다.
자비, 기도, 관심, 선의, 감사, 격려,
대화, 배움, 용기, 공동체와 연대도 그치지 않았다.
우리와 함께하는 하느님 현존도 그치지 않았다.”
우리보다 나중에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사태를 겪고 있는 외국 친구가
친구들과 헤어지며 나눈 시입니다.
저는 여기에 덧붙입니다.
하느님 찬미도 그치지 않았다고,
교회 공동체 삶도 그치지 않았다고요.
■ 복음의 맥락
1독서, 2독서, 복음에서
‘하느님 찬미’라는 단어가
마음에 깊이 남습니다.
우리가 지금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지내면서
모든 것을 함께 나누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삶은
온 백성에게 호감을 얻습니다.(제1독서)
이방인 사이에 흩어져
나그네살이를 하며 시련을 겪는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생생한 희망으로
다시 태어난 것 때문에 하느님을 찬미합니다.(제2독서)
부활하신 분을 직접 만난 제자들은
평화와 성령을 선물로 받고 세상에 파견됩니다.
오늘 시편 화답송은 그런 제자들이 부르는 하느님 찬미가입니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에게 구원이 되어 주셨네.”
(시편 118,14)
■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기를!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장소는
문이 잠긴 집 안입니다.
제자들에게도,
교회 역사에도 아주 특별한 날입니다.
문득 복음서 이 장면에서 교황님이
비 내리는 바티칸 광장에서 홀로
온 세상을 향해 호소하신 강론 서두가 떠오릅니다.
“우리는 풍랑 속에서 두려워하며
배 안에 있는 제자들과 같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움을 느낀 이유는
마리아 막달레나가 제자들에게
예수님 부활 소식을 전했지만
아직 그분을 직접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 가슴은 믿음과 의심, 절망과 희망,
인간의 미소함과 하느님의 위대함 사이에서
투쟁과 갈등을 겪습니다. 그
런데 모든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예수님은
제자들 영혼의 ‘어둔 밤’을 알고
그들에게 제일 필요한 것 ‘평화’를 선물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기를!”
이 말씀은 내적인
평화 기원이나 단순한 인사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고별 설교에서 예수님 떠남으로
고통 받는 제자들에게 이미 약속한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예수님 수난의 열매,
죄와 죽음에서의 해방을 뜻합니다.
예수님 죽음과 부활로 공동체가
하느님과 이룬 화해를 상기시킵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죄인일 때
그리스도가 십자가 죽음을 통해 가져다 준 평화를
삶에서 보존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라고 권고합니다.
(로마 5,1-11)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는데 이사야가
종말의 하느님 잔치를
묘사할 때 표현한 것과 같은 기쁨입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을 없애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시리라…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사 25,8-9)
▲두초 디 부오닌세냐의 ‘성 토마스의 의심’(1308~1311년).
■ 성령의 선물과 죄의 용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선물하고
죄의 용서 사명을 주고 파견합니다.
‘죄의 용서’는 예수님 십자가를 떠올리게 합니다.
용서 사도직은 예수님 희생 제사를
우리 삶 안에 실천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는 하느님의 어린 양,
착한 목자 예수님은
우리 죄의 용서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각자 나름 은사에 맞게
새로운 선교를 창안하라고 파견하지 않습니다.
포도나무에 단단하게 붙어 있는 가지처럼
그분에게 결합돼 있는 사람들에게
그분이 한 일을 선교를 통해 계속 확장하라고 파견합니다.
오늘날 빛이신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온갖 어둠의 세력을 드러내고,
하느님 영광인 살아 있는 인간을
비천하게 만드는 죄들을 단호히 거부하는 것,
회개하며 돌아오는 죄인을
따뜻하게 환대하며 하느님 자비를 증언하는 것!
제자들은 이런 사명을 수행하면서 스승처럼 몰이해,
박해, 가까운 이들의 배신, 가난과 모욕, 소외,
여러 형태의 죽음을 체험할 것입니다.
■ 우리 믿음의 쌍둥이 토마스의 체험
복음 후반부에서는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의 부활 체험을 묘사합니다.
토마스는 우리들의 쌍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토마스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함께 죽기를 원했으며
그분과 함께 있기 위해 어디로 가느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요한 11,16; 14,4-5)
이 토마스가 부활 목격 증인인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 믿기를 거부하고
직접 체험하기를 원합니다.
요한 복음서 저자는 당시에 예수님 부활에 대해
믿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의식합니다.
토마스는 그런 사람들(우리들)의 해석자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이지만
실수할까봐 두려워서 개인적으로
자기 의심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예수님 태도는 참으로 온유합니다.
그분은 토마스 안에서 무관심한 회의론자가 아니라
욥처럼 진리를 찾기 위해 끝까지 탐구하는 사람,
믿으면서 진지하게 질문하는 신앙인을 봅니다.
예수님은 토마스와 대화를 나누며
그의 의심에 공감하고 해결합니다.
토마스가 먼저 예수님을 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님 부활 2000년 후
그분을 보지 않고도 그분을 믿고 따르는
제자인 우리에게는 다행입니다.
토마스 때문에 우리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예수님 가르침을 듣게 됐습니다.
우리는 비록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1베드 1,8)
코로나19로
우리 개인의 사도직은
‘하느님 찬미’와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인간적 자랑의 허무함을 느끼며
“영과 진리 안에서”(요한 4,24) 예배드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고 있습니다.
믿은 이들의 모임인 교회는 오늘도 전염병으로
절망하고 있는 세상에 보편적 형제애를 가르치고
하느님 자비를 맛보게 하는 사명을 수행합니다.
“오 주님, 당신의 자비가 제 위에 머무르게 하여 주소서.
오 저의 예수님, 저를 당신 자신으로 변형시켜 주소서.”
(파우스티나 성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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