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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0년 4월 19일 (일) [백]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

Berardus 2020. 4. 18. 06:46

    [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4월 19일 (일)

    [백]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

    제1독서(사도 2,42-47) 제2독서(1베드 1,3-9) 복음(요한 20,19-31)

    하느님을 찬미하십시오.

    예수님 부활 믿지 못해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죄와 죽음에서의 해방 뜻하는 ‘평화’ 선물로 주심 성령과 죄의 용서 사명 주시며 세상 속으로 파견 체험 원했던 토마스의 의심 공감하며 대화로 풀어


      “많은 것을 해왔고 앞으로 많은 것을 할 것이다. 그러나 잠시 그친다… 그러나 사랑은 그치지 않았다. 자비, 기도, 관심, 선의, 감사, 격려, 대화, 배움, 용기, 공동체와 연대도 그치지 않았다. 우리와 함께하는 하느님 현존도 그치지 않았다.” 우리보다 나중에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사태를 겪고 있는 외국 친구가 친구들과 헤어지며 나눈 시입니다. 저는 여기에 덧붙입니다. 하느님 찬미도 그치지 않았다고, 교회 공동체 삶도 그치지 않았다고요. ■ 복음의 맥락 1독서, 2독서, 복음에서 ‘하느님 찬미’라는 단어가 마음에 깊이 남습니다. 우리가 지금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지내면서 모든 것을 함께 나누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삶은 온 백성에게 호감을 얻습니다.(제1독서) 이방인 사이에 흩어져 나그네살이를 하며 시련을 겪는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생생한 희망으로 다시 태어난 것 때문에 하느님을 찬미합니다.(제2독서) 부활하신 분을 직접 만난 제자들은 평화와 성령을 선물로 받고 세상에 파견됩니다. 오늘 시편 화답송은 그런 제자들이 부르는 하느님 찬미가입니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에게 구원이 되어 주셨네.”(시편 118,14) ■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기를!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장소는 문이 잠긴 집 안입니다. 제자들에게도, 교회 역사에도 아주 특별한 날입니다. 문득 복음서 이 장면에서 교황님이 비 내리는 바티칸 광장에서 홀로 온 세상을 향해 호소하신 강론 서두가 떠오릅니다. “우리는 풍랑 속에서 두려워하며 배 안에 있는 제자들과 같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움을 느낀 이유는 마리아 막달레나가 제자들에게 예수님 부활 소식을 전했지만 아직 그분을 직접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 가슴은 믿음과 의심, 절망과 희망, 인간의 미소함과 하느님의 위대함 사이에서 투쟁과 갈등을 겪습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예수님은 제자들 영혼의 ‘어둔 밤’을 알고 그들에게 제일 필요한 것 ‘평화’를 선물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기를!” 이 말씀은 내적인 평화 기원이나 단순한 인사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고별 설교에서 예수님 떠남으로 고통 받는 제자들에게 이미 약속한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예수님 수난의 열매, 죄와 죽음에서의 해방을 뜻합니다. 예수님 죽음과 부활로 공동체가 하느님과 이룬 화해를 상기시킵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죄인일 때 그리스도가 십자가 죽음을 통해 가져다 준 평화를 삶에서 보존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라고 권고합니다.(로마 5,1-11)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는데 이사야가 종말의 하느님 잔치를 묘사할 때 표현한 것과 같은 기쁨입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을 없애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시리라…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사 25,8-9) ■ 성령의 선물과 죄의 용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선물하고 죄의 용서 사명을 주고 파견합니다. ‘죄의 용서’는 예수님 십자가를 떠올리게 합니다. 용서 사도직은 예수님 희생 제사를 우리 삶 안에 실천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는 하느님의 어린 양, 착한 목자 예수님은 우리 죄의 용서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각자 나름 은사에 맞게 새로운 선교를 창안하라고 파견하지 않습니다. 포도나무에 단단하게 붙어 있는 가지처럼 그분에게 결합돼 있는 사람들에게 그분이 한 일을 선교를 통해 계속 확장하라고 파견합니다. 오늘날 빛이신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온갖 어둠의 세력을 드러내고, 하느님 영광인 살아 있는 인간을 비천하게 만드는 죄들을 단호히 거부하는 것, 회개하며 돌아오는 죄인을 따뜻하게 환대하며 하느님 자비를 증언하는 것! 제자들은 이런 사명을 수행하면서 스승처럼 몰이해, 박해, 가까운 이들의 배신, 가난과 모욕, 소외, 여러 형태의 죽음을 체험할 것입니다. ■ 우리 믿음의 쌍둥이 토마스의 체험 복음 후반부에서는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의 부활 체험을 묘사합니다. 토마스는 우리들의 쌍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토마스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함께 죽기를 원했으며 그분과 함께 있기 위해 어디로 가느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요한 11,16; 14,4-5) 이 토마스가 부활 목격 증인인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 믿기를 거부하고 직접 체험하기를 원합니다. 요한 복음서 저자는 당시에 예수님 부활에 대해 믿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의식합니다. 토마스는 그런 사람들(우리들)의 해석자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이지만 실수할까봐 두려워서 개인적으로 자기 의심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예수님 태도는 참으로 온유합니다. 그분은 토마스 안에서 무관심한 회의론자가 아니라 욥처럼 진리를 찾기 위해 끝까지 탐구하는 사람, 믿으면서 진지하게 질문하는 신앙인을 봅니다. 예수님은 토마스와 대화를 나누며 그의 의심에 공감하고 해결합니다. 토마스가 먼저 예수님을 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님 부활 2000년 후 그분을 보지 않고도 그분을 믿고 따르는 제자인 우리에게는 다행입니다. 토마스 때문에 우리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예수님 가르침을 듣게 됐습니다. 우리는 비록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1베드 1,8) 코로나19로 우리 개인의 사도직은 ‘하느님 찬미’와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인간적 자랑의 허무함을 느끼며 “영과 진리 안에서”(요한 4,24) 예배드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고 있습니다. 믿은 이들의 모임인 교회는 오늘도 전염병으로 절망하고 있는 세상에 보편적 형제애를 가르치고 하느님 자비를 맛보게 하는 사명을 수행합니다. “오 주님, 당신의 자비가 제 위에 머무르게 하여 주소서. 오 저의 예수님, 저를 당신 자신으로 변형시켜 주소서.” (파우스티나 성녀) -임숙희(레지나) 엔아르케성경삶연구소 소장- [한주간 전례] 2020년 4월 20일(월) [백] 부활 제2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요한 3,1-8 오늘 독서는 기도에 전념하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최고 의회와 감옥에서 풀려난 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자신들에 대한 종교 지도자들의 박해 때문에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 내용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박해하는 이들에게서 안전하기를 바라기보다 오히려 박해의 위협에도 자신들 안에서 하느님의 일이 계속 이루어지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오늘 화답송의 시편은 바로 이들 교회 공동체가 박해를 각오하면서 바친 기도 속에서 따온 노래입니다. “주님, 당신께 피신하는 이 모두 행복하옵니다.” 그렇다면 박해받으면서도 기도에 전념하며 주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할 수 있었던 초대 교회 공동체 신자들이야말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강조하신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이들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담대함’이란 두려움 없이 용기를 낸다는 말이기에 복음을 전하는 이에게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도 담대하지 않으면 진리 앞에서 자신을 감추려고 합니다.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코데모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박해의 위협에서도 담대히 주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첫 신자들은, 박해의 두려움 속에서도 기도하며 담대히 주님의 말씀을 전한 부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2020년 4월 21일 (화) [백] 부활 제2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3,7ㄱ.8-15 오늘 독서는 예루살렘에 있던 초기 교회의 이상적인 모습을 간략하게 전해 주며, 그 공동체의 삶이 얼마나 복음에 충실하였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루카는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가 완벽하게 복음을 따라 살았다는 사실보다는, 복음적인 공동체가 되려면 본질적으로 무엇이 필요한지를 제시하려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는 먼저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물질의 나눔’을 실천합니다. 그러나 합법적인 재산의 소유를 부정하지 않으며 온전히 자기 결단에 따라 각자의 재산을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내놓았습니다. 그 나눔을 실천하는 바탕에는 “한마음 한뜻”이 있습니다. 그리스에서 우정을 바탕으로 하는 ‘한뜻’은 단순한 친구 사이의 공유를 넘어 믿는 사람들 곧 신자들의 공통적인 신앙에서 비롯됩니다. 여기에 히브리식 개념인 ‘한마음’이 더해집니다. 유다인들은 전통적으로 기도의 시작을 알려 주는 표지로 ‘한마음’을 사용하였습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주님과 이루는 일치와 구성원 간의 친교를 하느님 앞에 드러내고 기도할 때에 모두 한마음이 되어야 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복음을 보면, 세속적인 개념의 차원에서 물질 그 자체에 얽매여 하느님 나라의 이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니코데모가 등장합니다.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영 안에서 새로워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니코데모는 여전히 이를 깨닫지 못합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아버지 하느님과 그 외아드님 예수님에 대한 우리 믿는 이들의 한마음 한뜻이야말로, 물질을 넘어 친교로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2020년 4월 22일 (수) [백] 부활 제2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요한 3,16-21 전례력에 따른 오늘의 말씀들은, 구원을 가져다주는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숙제를 제시합니다. 독서에서 보면 감옥에 갇힌 사도들이 하느님의 천사를 만납니다. 탈옥의 기적 속에서 천사는 사도들에게 성전에서 생명의 말씀을 온 백성에게 전하라고 합니다. 날이 밝자 사도들은 성전에 들어가 생명의 말씀을 전하지만 다시 붙잡힙니다. 사도들은 또 다른 기적 같은 탈출을 기대하였을지 모르나, 박해의 어둠 속에서도 빛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셨던 예수님처럼 생명의 말씀을 전합니다. 또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악을 행하는 것은 어둠을 사랑하는 데서 시작하나 선을 행하는 것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을 진리의 빛으로 이끕니다. 그러나 빛 속에 있다는 것만으로는 그리스도의 빛으로 살아간다고 할 수 없습니다. 빛 속에서 참되게 살아간다는 것은 믿음으로 주님께 헌신하고 사랑으로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선을 지속적으로 행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빛에 더 가까워지고, 우리의 행위가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드러내는 것임을 일깨워 줍니다. 악의 어둠을 몰아내고자 하나뿐인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어 당신의 빛을 비추시는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믿음과 사랑으로 선을 행하여 어둠의 조각조차도 빛으로 물들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처럼 빛 속에서 살면서도 어둠과 싸워야 하기에 그리스도인은 늘 경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2020년 4월 23일 (목) [백] 부활 제2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요한 3,31-36 사도들이 성령 강림 후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 것은, 마치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활동을 전하는 신문 보도 또는 지울 수 없는 드라마 속 명장면과 같습니다. 최고 의회의 수장 대사제의 질문에 베드로와 사도들은 매우 담대하게 답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루카는 베드로 외에 다른 사도들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사도의 개념과 범위를 짐작해 보면, 분명 예수님 생전에 줄곧 함께하였던 이들로서 그분께서 세례를 받으시던 때부터 사도들을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함께한 이들 가운데, 특히 앞서 성전에서 베드로의 첫 기적과 솔로몬 주랑과 최고 의회의 증언 때 침묵 속에 지켜보았던 요한 사도가 함께 있었음은 매우 확실해 보입니다. 대사제 앞의 베드로와 달리 요한 사도는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시는데,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하는 것이다. 대사제는 예수님의 증언을 바탕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이며 전하는 사도들의 말에 크게 충격받습니다. 이제껏 자신을 포함한 최고 의회의 모든 사제가 하느님을 위해서 증언하였을 때 그 자부심이 대단히 커서, 자신들보다 더 크고 높은 권위와 힘은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명령하였는데, 사도들은 사람이 아닌 하느님께 순종하겠다고 하여, 쉽사리 그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대사제 앞에서 사도들은 예수님께 들었던 증언을 통하여 하느님에 대하여 확신합니다. 우리도 사도들처럼 진정으로 예수님의 이 증언을 믿고 기도하며 실천한다면 하느님을 굳건하게 증언할 수 있습니다. 일상의 삶에서 믿음에 따른 행동에 의문을 가지게 하는 사회 제도나 결정에 맞서 우리는 얼마나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습니까?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2020년 4월 24일 (금) [백] 부활 제2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요한 6,1-15 사도들의 복음 선포에 최고 의회 의원들은 분노합니다. 첫 번째 심문에서 위협하는 정도로 그쳤던 의원들이, 이제는 사도들을 없애 버리려 합니다. 그 러나 아직 순교의 차례가 오지 않았습니다. 온 백성에게 존경받는 율법 교사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사이가 지혜로운 말로 광포한 의원들을 달래면서 사도들은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기원 전후 무렵 자유주의적인 견해와 관용적 태도로 유명하였던 율법 학자 힐렐의 손자로서, 바오로 사도의 스승이기도 하였던 가말리엘은 (사도 22,3 참조),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므로 그리스도인들을 내버려 두자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움직임이 인간적인 것에서 비롯되었다면 그 자체로 사라져 버리겠지만, 하느님에게서 시작되었다면 의회가 결코 없앨 수 없으며, 어쩌면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것이 하느님께 맞서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최고 의회가 온갖 노력을 기울여 예루살렘의 첫 교회 공동체를 막았지만, 급속히 성장하였습니다. 사도들의 복음 선포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하였음이 틀림없으나, 더욱 분명한 힘은 사도들에게 주어진 성령입니다. 복음 속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살펴봅니다. 물론 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와 사도들의 남다른 활동도 기적의 재료와 도움이 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를 바치시며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행하신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자, 사도들은 스승을 주님으로, 메시아로 담대하고 열정적으로 선포하고 증언하였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더욱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세상에서 예수님을 선포하고 증언하는 것을 막으려는 온갖 악에 맞설 수 있도록 담대함과 열정을 허락하시는 성령께 온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2020년 4월 25일 (토) [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루살렘 출신으로,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 사도가 선교 여행을 할 때 동행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다. (사도 12,25; 13,5.13; 15,37-39; 콜로 4,10 참조). 본디 이름이 ‘요한 마르코’(사도 12,12.25 참조)인 그는 베드로 사도의 제자로도 일하였으며(1베드 5,13 참조), 주로 안티오키아와 키프로스, 로마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기원후 64년 네로 황제의 박해가 있고 난 뒤인 65년에서 70년 사이에 주로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을 기초로 삼아 로마에서 「마르코 복음서」를 기술하였다. 이 복음서는 네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저술되었다. [복음묵상] 마르코 16,15-20ㄴ 카이사리아에 있는 회당 앞에서 이교도들의 제사가 행하여지자, 이에 분노한 유다 최고 의회의 지도자들은 모든 이교도의 제사를 금지하였습니다. 그러자 로마 제국은 유다인들의 저항에 잔인하게 대응합니다. 성난 유다 군중이 안토니아 요새를 습격하였고, 로마군은 마침내 기원 후 70년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트리고 성전을 파괴하였습니다. 게다가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는 대화재의 주범으로 몰려 누명을 쓰게 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네로 황제의 박해로 교회의 두 기둥인 베드로와 바오로가 순교합니다. 성전을 잃은 유다인들은,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과 결별하여 그들을 회당에서 추방하였고, 로마인들은 끊임없는 박해로 그들을 위협하였습니다. 마르코는 바로 이 어려운 상황에서 주어진 소명을 다합니다. 마르코는 기적적으로 감옥에서 탈출하여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찾아온 베드로를 만나 그의 마지막 생애에 아들로서, 시종이며 통역관으로 함께하였습니다. 또한 사촌 바르나바의 소개로 함께 복음 선포 여행을 하였던 바오로와도 친분을 쌓았습니다. 베드로가 설명해 주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해석을 덧붙여 글로 남긴 복음사가가 마르코입니다. 그리고 박해받는 신자들을 위한 기쁜 소식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글로 전한 교회의 첫 복음서가 마르코 복음입니다. 마르코는 베드로와 십자가형을 집행하던 로마 백인대장의 신앙 고백을(마르 8,29; 15,39 참조) 담아,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으로 복음서의 제목을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마르코 복음의 마지막 예수님 말씀은 이렇게 풀이됩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참조).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을 지내며 우리 신앙의 정체성을 살피고자,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신가?” 하고 스스로 물어야겠습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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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사를 봉헌하지 못한지가 벌써 꽤 오래되었습니다. 요즘 그래서 유튜브를 통한 영상으로 미사를 본다고 합니다. 새로운 모습으로 처음엔 낯설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일상이 된 듯 자연스럽습니다. 그래도 하루빨리 미사가 정상화되길 소망합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