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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0년 4월 5일 (일) [홍] 주님 수난 성지 주일

Berardus 2020. 4. 4. 06:53

    [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4월 5일 (일). [홍]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제1독서(이사 50,4-7) 제2독서(필리 2,6-11) 복음(마태 26,14-27,66 또는 27,11-54)

    고통이 가라앉자 구원이 떠올랐다

    배신과 모욕에도 침묵하신 예수님 하느님의 도우심에 온전히 의탁 자발적 희생과 낮아짐을 통한 ‘종의 모습’으로 하느님의 일 완성


      사순시기 내내 포스트잇에 써서 기도서에 붙여놓고 보았던 구절이 있습니다. “밭은 기침 콜록이며 겨울을 앓고 있는 너를 위해….” 이해인 수녀님의 ‘촛불 켜는 아침’이라는 시의 첫 구절입니다. 콜록 콜록 사투를 벌이며 아파하시는 분들을 기억하면서 간절한 마음을 모아 봉헌한 사순절이었고 그 막바지인 성지주일에 와있습니다. 이제 교회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고 완성된 ‘성주간’에 들어서게 됩니다. ■ 복음의 맥락 오늘 본문의 처음과 마지막은 배신과 음모의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이 첫 번째 인물로 나타나 수석 사제들과 은밀히 협상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마태 26,15) 긴 죽음의 여정이 끝난 결말 부분에도 악인들의 공모가 언급됩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사흘 만에 되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빌라도에게 가서 “셋째 날까지 무덤을 지키도록 명령”하기로 공모합니다. (27,62-64) 이처럼 고통과 음모, 배신으로 가득 찬 수난의 이야기를 마태오복음서는 자신의 고유한 스타일로 이끌어 나갑니다. 단순히 사건을 시간상으로 배열하는 데에 집중하기보다 이 죽음이 구약성경에 이미 예고된 내용에 얼마나 충실히 부합하는지를 거의 매 구절마다 확인합니다. (26,24.31.53-54.56; 27,9-10 등) 심지어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십자가상의 절규도, 해면을 가져와 신포도주에 적셔 목을 축인 것도 모두 시편 22,2과 69,22의 실현임을 의도적으로 드러냅니다. ■ 배신에 대하여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주제는 ‘배신’입니다. ①유다 은전 서른 닢에 스승을 고발하지만 사실 이 사건은 돈 때문에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생긴 의심과 자기식의 판단이 문제였습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유다의 배신 직전에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와 그때 생긴 갈등을 묘사합니다.(26,6-23)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문학적 복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큰 무리를 대동하고 다가왔을 때 그를 “친구”로 부르며 말씀하십니다. “친구야, 네가 하러 온 일을 하여라.” (26,50) ②베드로와 제자들 겟세마니의 처절함 속에서도 마냥 잠에 빠져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26,40)고 호소하지만, 이후 여전히 잠들어 있는 제자들의 어이없는 태도를 그냥 놔두십니다.(26,44) 잠시 뒤 결정적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때에 제자들은 주님을 버리고 달아났다.”(26,56) 베드로는 그래도 멀리서 예수님을 따라 갑니다.(26,58) 하지만 세 번이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26,70.72.74)라고 부인한 후 닭이 울자 비참함에 슬피 웁니다.(26,75) 이후 베드로의 모습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그는 어디에서 숨죽이고 있었던 것일까요? ③빌라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의인’이며 ‘무죄한 사람’으로 고백한 사람이 있는데 빌라도의 아내였습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꿈 내용을 전하며 충고하고(27,19) 빌라도 역시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게 되지만 군중의 위협 때문에 사형을 선고합니다. 불의에 휘말려 정의를 배신한 것입니다. ④군중들 빌라도가 판결을 주저하자 유다인들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의 자손들이 지겠습니다.”(27,24-25) 하며 단호히 예수님의 죽음을 요구합니다. 불과 며칠 전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21,9)라고 외치며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환호했던 이들이 그토록 빨리 변할 수 있다는 인간의 한계와 가벼움을 여실히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 자발적 사랑으로 하느님의 일을 완성하다 이 모든 배신과 음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침묵을 지키십니다. 빌라도가 “매우 이상하게” 여길 정도였습니다.(27,14) 제2독서는 그 이유를 알려주는데, 모욕과 배신에 대응하는 예수님의 방식은 ‘낮아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원래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고 하느님과 같은 분”이셨지만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십니다.(필리 2,6-8)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시고 ‘하느님과 같은 분’이 ‘종의 모습’을 지니시고 ‘사람들과 같아’ 지셨다는 극명한 대조를 통해 그분의 자발적 낮아짐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1독서는 이런 낮아짐이야말로 하느님이 일하시는 절대적인 조건이 됨을 선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발적 희생과 내어줌으로 낮아지신 분에게 당신 말씀을 직접 듣고 전할 수 있는 혀와 귀를 주시고 “아침마다 일깨워”(이사 50,4) 주셔서 모든 고통과 모독을 감내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는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신다는 믿음으로 뒷걸음치지도 위축되지도 않는데,(50,5-6) 현재가 하느님의 주도권 안에 있다면 그 어떤 고통도 두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낮아짐을 선택하고 그렇게 낮은 자리에 조용히 침잠하고 있을 때 비로소 올라오는 구원의 맨얼굴이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행하는 동안 많은 계획들이 취소되고 일상이 고요히 가라앉자 떠오른 삶의 진실들이 그러했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들 중 뜻밖의 깨달음으로 다가온 것은 ‘모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모두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죽을힘을 다해 전쟁 같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과연 우리가 지킨 것이 사랑이었는지, 혹시 피로와 분노, 혐오로 비뚤어진 일상은 아니었는지, 하느님께서 나에게 부여하신 삶과 구체적 소명은 외면하고 사랑하는 이들을 외롭게 하면서 미안한 일만 더 많이 만든 삶은 아니었는지…. 어쩌면 바이러스만큼이나 무서운 치사율을 갖고 있던 것은, 인간의 생각과 행동의 자유를 박탈하고 노예화시키며 조정한 경쟁과 탐욕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정부의 지침은 2미터라는 물리적 간격을 요구한 것이었지만, 우리가 정녕 지키고 사랑해야할 소중한 대상에 대한 마음의 거리를 좁히고 가까이가게 했다는 점에서는 분명 하느님의 은총이며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계획하고 질주해야할 때가 아니라 사랑하고 토닥이며 생명의 꽃을 피울 때입니다. 부활을 기다리는 시간, 봄이잖아요. -김혜윤 수녀- [한주간 전례] 2020년 4월 6일(월) [자] 성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요한 12,1-11 성주간 동안 펼쳐지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극적인 사건들에 하루하루 동참하는 가운데, 오늘 독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과 닥쳐올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우리가 죄에서 구원될 것임을 강조합니다.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주기 위함이다.”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베타니아에서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 드리는 아름다우면서 슬픈 예감의 이야기를 묵상하게 됩니다. 죽었다 살아난 라자로와 그의 동생 마리아와 마르타는 감사와 우정의 선물로 식사를 마련합니다. 특별히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예수님께 바릅니다. 그런데 유다는 이웃을 사랑하는 척 자선을 내세우지만 감출 수 없는 탐욕으로 비열한 속내를 드러내고 맙니다. 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께서는 소름 돋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지십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이 지닌 가장 소중한 것이자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바로 목숨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당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하여 내놓으시려는 예수님께 드리는 마리아의 향유는 거룩하신 분의 죽음을 준비하는 도유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도유의 궁극적 의미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이에게 그분께서 부어 주시는 영’ 곧 ‘성령’이십니다. 그러나 유다의 탐욕은 생명의 소중함으로 드러나는 사랑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탐욕에 빠지면 성령을 간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2020년 4월 7일 (화) [자] 성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13,21ㄴ-33.36-38 어제 임박한 예수님 죽음에 대한 예고에 이어, 성주간 화요일인 오늘은 제자들의 배반에 대한 예수님의 예고가 펼쳐집니다. 지상에서 마지막 시간들을 제자들과 함께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극진한 사랑을 최후 만찬 때에 펼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고 당신의 몸과 피를 빵과 포도주로 내어 주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복음은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에 예수님 예언의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돈주머니를 맡아 오던 유다가 종교 당국에 당신을 넘기려는 계획과 늘 말이 앞서던 베드로의 약점이 어떻게 스승에 대한 부인으로 이어질지를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알고 계시면서도 두 제자의 배신과 부인이 그대로 펼쳐지도록 허락하십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 하느님을 굳게 믿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독서인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제자들의 배신과 부인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더 이상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으셨던 이유는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배신자를 친구라 부르시는 사랑으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셨음을 기억합시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14.17ㄴ).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2020년 4월 8일 (수) [자] 성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6,14-25 성주간의 시간이 흘러갈수록 주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생각은 세상 여러 유혹과 그 갈등 속에서 흔들리는 우리 자신을 더 깊이 바라보게 합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은 주님을 배반한 유다 이스카리옷의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서 우리의 속마음까지도 성찰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거울을 보듯 오늘 독서인 이사야 예언서를 다시금 읽어 봅니다. 이사야는 세상을 구원하려고 고통받는 주님의 종이 어떻게 배신의 비열함을 넘어서는지를 노래합니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지친 이를 격려하라고 고통받은 주님의 종에게 혀를 주시고 귀를 일깨워 듣게 하신다고 강조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도우심이, 사랑하던 사람들에게서 받은 비열한 배신과 그에 따른 깊은 상처를 이겨 내게 한다고 이사야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어떠한 배신 없이 주님에 대한 깊은 신뢰를 이어갈 수 있겠습니까? 화답송에서 부르는 오늘의 시편이 답이 되겠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열정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형제들에게 낯선 사람이 되며 친형제들에게조차 이방인이 되더라도, 그분 이름을 찬양하고 감사 노래로 기리며 그분만을 찾는다면, 진정 하느님께서는 배신으로 상처받은 마음에 생기를 돋게 하시며 우리의 간청을 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2020년 4월 9일 (목) [자] 성주간 목요일 - 성유 축성 미사 [백] [복음묵상] 루카 4,16-21 중국 촉나라의 재상 제갈공명이 유비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된 그의 아들 유선에게 위나라를 토벌하러 떠나며 바친 글을 ‘출사표’라 합니다. 오늘날에는 공적 소임을 맡은 이가 그 일을 시작하며 결심을 표명하는 말을 일컫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지상 공적 직무를 수행하시면서 출사표를 던지셨습니다. 나자렛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던지신 예수님의 출사표, 이사야 예언서 61장은 본디 바빌론으로 유배 가서 억압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느님께서 이사야에게 내리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시는 예언자로 제시되십니다. 또한 포로가 되어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하심은 물론 결정적으로 메시아에게만 유보된 눈먼 자들이 다시 보게 하는 힘을 지니신 참된 메시아로 드러나십니다. 물론 예언자요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증거는 하느님께서 그분께 내리신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주님 세례 때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그분께 내려지시며 당신의 사랑받는 아들, 당신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고 하느님께서는 선언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하느님께 기름부음받으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로서 약속된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때에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사람들 위에 내렸음을 우리는 압니다. 예수님처럼 거룩한 기름인 성령을 받은 이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며 신앙인으로서 나름의 출사표를 던지는 날이 오늘입니다. 바로 이날에 교회는 교구장 주교의 주례로 성유 축성 미사를 봉헌합니다. 사제들의 서약 갱신과 함께 병자 성유, 예비 신자 성유, 축성 성유를 축복하고 또 축성합니다. 이 성유들은 단순히 병자성사와 세례성사 그리고 견진성사만을 거행하기 위한 기름이 아니라, 우리가 기름부음을 받은 참그리스도인이 되며 주님께서 맡기신 사제직, 왕직, 예언자직을 더욱 충실히 수행하게 해 줍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2020년 4월 10일 (금) [홍] 주님 수난 성금요일 [복음묵상] 요한 18,1―19,42 1884년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친구인 헨리 힐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아버지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우리는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집을 우리에게 보여 주실 때 우리는 외면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이 깊은 슬픔에 익숙하다고 털어놓으셨을 때 우리는 그것을 우리 자신도 잘 알고 있었기에 주의를 기울여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에 우리는 깜짝 놀라고 영감을 얻습니다. 특히 그분 부활의 신비가 희망과 함께 우리를 압도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겪으신 시련에 더 친밀함과 일치를 느낍니다. 결국 우리는 주님께서 겪으신 수난과 죽음에서 자신을 깨닫고 우리 믿음의 불씨를 지피며 사랑으로 마음을 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예절인 성금요일의 주님 수난 예식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가장 깊이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성찬 전례 없이 말씀 전례와 십자가 경배 그리고 영성체 예식만 거행하면서, 날마다 보던 십자가도 가려져 있고, 제대보도 치워져 있어,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셨고, 어떻게 고통받으시고 돌아가셨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보라, 십자 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 결국 우리가 이 시간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십자가를 피하기보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기 위함입니다.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자신을 버림으로써 우리는 주님 수난과 죽음에서 그분과 더욱 하나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윤동주 시인의 시구대로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말없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2020년 4월 11일 (토) [백] 주님 부활 대축일 - 파스카 성야 [복음묵상] 마태오 28,1-10 “주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주님 부활의 기쁨이 온 세상 구석구석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해 오는 거룩한 밤입니다. 파스카 성야는 오랜 관습에 따라 주님을 기억하는 밤이며, 등불을 밝혀 들고 주인을 기다리는 충성스러운 종처럼 깨어 준비하는 밤입니다. 이 거룩한 밤에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새 마음을 주시고 새 영을 넣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무덤 위에 앉아 있던 천사의 말을 주님께서 주신 새 마음과 새 영으로 귀담아듣고 믿어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는 줄을 나는 안다.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이렇듯 죄와 죽음은 더 이상 부활하신 예수님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와 관련하여 단 한 번 돌아가셨고,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단순히 이 지상의 생명으로 다시 돌아오신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영광 속에 들어 높여지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신 이 거룩한 밤에 우리는 마땅히 기뻐해야 합니다. 부활의 기쁨은 우리 믿음의 승리요,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승리입니다. 이 기쁜 소식은 아직도 이 세상에서 고달픈 순례자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엄청난 힘과 용기가 됩니다. 온갖 희로애락을 겪는 인생길에서 주님 부활의 기쁨은 은총임을 언제나 기억하며,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아갑시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 꽃들이 서서히 만개하기 시작합니다. 곳곳에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꽃비가 내리고 있지만 이를 보기 위해서 방문하는 것도 금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미사도 무기한 연기한다고 발표합니다. 일상이 무너지는 지금, 비록 여러 가지 여건이 어렵지만 그래도 여기저기에서 피어나는 꽃들처럼 우리의 희망도 활짝 피어 자유로운 만남이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