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4월 12일 (일)
[백] 주님 부활 대축일 제1독서(사도 10,34ㄱ.37ㄴ-43),
제2독서(콜로 3,1-4 또는 1코린 5,6ㄴ-8),
복음(요한 20,1-9 또는 마태 28,1-10)
빈 무덤은 영원한 생명의 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삶 살았던 마리아에게만 보여주신 부활 계시
‘사도들의 사도’라는 영적 지위도
빈 무덤 사건은 증거의 의미 아닌
영원한 생명 바라보는 영적 체험
주간 첫날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시어 저희 마음에
희망의 등불을 밝혀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빈 무덤’ 사건은
‘부활이요 생명’(요한 11,25)이신 주님께 대한
믿음과 부활의 희망을 새롭게 합니다.
신종 바이러스가
돌풍을 일으킨 사순 시기는 특별합니다.
‘무지의 구름’ 아래 죽음의 공포에 떠는
병든 세상의 민낯을 보았고,
반면에 재난의 극복을 위해 불철주야 사투하는
의료진과 봉사자들의 인내와 희생에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기도와 조용한 봉사로 함께 하면서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힘(1요한 5,4)임을 알고
주님의 영원한 자애에 희망을 봅니다.
코르넬리우스의 집에서
베드로가 행한 설교(제1독서)는
나자렛 예수님을 알고 있는 초기교회공동체에
그리스도에 관한 전형적인 가르침입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됨을 봅니다.
베드로의 증언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역사적 현존과 복음을 보존하고 일치를 이룬
교회의 전통을 충실히 이어갑니다.
사도들은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에 대한 전문가입니다.
베드로는 성삼위께서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공생활,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성찬의 전례, 생명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
이는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말씀과
성체를 모시고 천상생명에 참여(제2독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는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을 생각하지 말라”(콜로 3,2)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는 마음에 간직해야 할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영도자”(사도 3,15)이십니다.
‘영혼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고”(사도 10,43),
다시 오실 때 그분과 함께 하느님의 현존에
함께하는 ‘영광’(콜로 3,4)을 누릴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에 나오는
‘빈 무덤’ 사건은 네 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요한 20,1)” 하고 전합니다.
마리아의 첫 반응은 “누가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릅니다”라고 두 번이나 말합니다.
(요한 20,2.13).
인간의 이성으로
부활의 신비를 어찌 알겠습니까.
첫 새벽에 여자 혼자 문밖에 나가는 것도 이례적입니다.
“마리아야!”(요한 20,16)하고 이름을 불러주신
주님을 만나 뵙고서야 부활의 진리에 경탄합니다.
마리아는 일곱 마귀의 악령에 시달리다 치유의 은총을 입었고,
자기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든 인물(루카 8,2-3)입니다.
마리아는 주님 따라
골고타 십자가의 길을 걸었고,
십자가상에서 숨을 거두시고,
무덤에 묻히시는 모습을 지켜본 뒤,
돌아가 향료와 향유까지 준비(루카 23,49.55-56)합니다.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삶을 산 그녀만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부께로 올라가신다는 특별한 계시를 받습니다.
마리아는 주님 분부대로 제자들에게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말씀을 전합니다(요한 20,17-18).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도들에게
이 메시지를 전한 마리아에게 ‘사도들의 사도’
(교황 베네딕토 16세, 2006)란 영적 지위를 부여합니다.
마리아가 무덤에 간 때는
주간 첫날 아직 어두울 때입니다.
주간 첫날은 안식일 다음 날인 ‘여덟째 날’입니다,
주님 부활로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여신
하느님을 찬송하며 부활 팔일 축제를 지냅니다.
‘주님이 마련하신 날’(화답송)인 주일은 은총의 날이기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의 생명을 누리는
그리스도인은 주일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마리아의 전갈을 받은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중
애제자(요한)가 먼저 무덤에 도착했으나,
뒤에 도착한 베드로가 먼저
무덤 안으로 들어가 조사를 합니다.
요한은 잘 포개놓은 수의를 보고 믿었습니다.
성탄 때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님의 포대기와
빈 무덤에 개켜있는 수의에서
강생의 신비와 부활의 진리를 깨닫습니다.
제자들이 발견한 빈 무덤은
부활의 직접증거는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
다시 살아나야 한다.” 하신 성경 말씀
(수난과 부활 3회 예고; 요나의 표징; 사도행전 2,32)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요한 20,9).
그리스도 강생과 십자가 수난과
부활의 신비를 믿고 고백하는 우리는
성경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빈 무덤 사건은
땅에 있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하늘 위에 있는 걸
바라보는 자기발견의 영적 체험입니다.
“영은 생명을 주나 육은 쓸모없다.”
(요한 6,63) 하신 말씀을 되새깁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 그리스도(요한 1,14)이십니다.
십자가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성체가 ‘그리스도의 몸’이듯이 말씀도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친교로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돕는 사랑의 삶이 영원한 생명의 문을 향한
여정임을 깨닫고 하늘 위 하늘을 바라보고 기도와 성사로 나아갑니다.
-김창선(요한 세례자)-
[한주간 전례]
2020년 4월 13일(월) [백]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8,8-15
“평안하냐? ……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는
주님의 부활을 확실히 깨닫습니다.
사실 이 여인들은 부활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려고
그분의 무덤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분을 만났을 때,
그들은 자신들을 묶어 놓았던 슬픔에서 벗어나
부활하신 주님께 스스럼없이 다가가 발을 붙잡고 절합니다.
마침내 여인들은 죽음보다 강한 영
원한 생명의 신비 앞에 몸을 숙여 수난과
고통을 통한 부활의 의미를 진정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경비병들은 겁에 질려 까무러치고,
심지어 수석 사제들에게 돈으로 매수되어
부활 사실을 왜곡하기까지 합니다.
믿음의 여인들과 달리 진실을 감추려는 수석 사제들과
물질의 유혹을 떨쳐 버리지 못한 경비병들은,
죄와 죽음을 이겨 낸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힘을 무시한 것입니다.
겨우내 죽은 듯
무심히 서 있던 나뭇가지에도 새 생명의 기운이 만연한
이 봄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
그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한다면
밝혀진 진실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현실 삶에 만족하려는 유혹을 이겨 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두 여인과 함께 무덤 앞에 서 있습니다.
썩은 시신이 있는 무덤이 아니라
빈 무덤을 증언하려고 그 앞에 서 있음을 기억합시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2020년 4월 14일 (화) [백]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20,11-18
‘복된 하느님의 애인’이라 불리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네 복음사가는
모두 주님 부활 이야기의 첫 장면과
그 중심에 등장시킵니다.
캔터베리의 안셀모 성인은
이처럼 부활의 첫 증인인 그를
다음과 같이 기억합니다.
“그대 선택된 여인이여, 사랑 가득한 선택자여!”
무덤 밖에 선 채로 마리아는 울고 있습니다.
적막한 이른 아침에,
비록 돌아가셨을지라도 곁에 있고 싶어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의 관심과 존경을 받으셨던 예수님께서
비참하게 돌아가신 것도 슬픈데 시신까지 없어졌으니,
그 실망과 허탈감이 끝내 울음으로 터져 나온 것입니다.
너무나 엄청난 사건 뒤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잇달아 큰일이 닥치면 넋을 잃고 하염없이 울다가
끝내 실신까지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 마리아를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마리아야!” 하고 부르십니다.
한처음에 빛과 어둠, 하
늘과 땅을 만들어 이름을 주셨고,
사람에게 온갖 생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신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건네는 것은 관계를 맺는 시작입니다.
사랑으로 맺어진 스승과 제자,
바로 이것이 부활의 신비입니다.
눈물이 주님 부활의 영광을 가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께 눈물 대신 응답해야 합니다.
“라뿌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이름을 부르시고
이에 우리가 그분을 부르면,
부활의 신비는 사랑의 관계로 거듭 완성됩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2020년 4월 15일 (수) [백]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복음묵상] 루카 24,13-35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이야기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있었던 두 제자의 대화는
그들의 삶과 미래 전체가 달려 있던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근심과 걱정,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가가시어,
당신에 대한 성경 말씀을 풀이해 주시며
믿음과 희망을 되찾아 주십니다.
특히 제자들과 함께한 식탁의 자리에서는
부활하신 당신을 알아보게까지 하십니다.
제자들의 대화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며 제자들이 말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오늘 독서에서도
베드로와 요한은
평생을 실의와 절망 속에서
이웃의 물질적 도움에 기대어 살아왔던
불구자에게 새 삶의 희망을 제시합니다.
성령을 받은 두 사도는 주님의 이름으로
바로 그에게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나그네 인생길이며
주님을 따르는 순례의 여정에서
길동무가 되어 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성경 말씀과 영원히 배고프지 않게 할
생명의 빵으로 함께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과연 무엇에
우리 삶의 희망을 두고 있는지 성찰해 봅시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 간절히 청합시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2020년 4월 16일 (목) [백]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24,35-48
도끼를 잃어버린 사람이
도끼를 찾다가 보이지 않자
이웃집 아이를 수상하게 여깁니다.
아이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터인데
머뭇거리고 아이의 행동만 살핍니다.
그 아이가
훔쳤다는 심증이 들자
날이 밝으면 따지겠다고 벼르며
나무를 하러 산에 갔는데
잃어버린 도끼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와 아이를 다시 보니 수상쩍은 데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의심암귀’(疑心暗鬼)
곧 의심이 깊어지면 귀신이 보인다는 말을 합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과 만나시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운 나머지
예수님을 보고 유령 곧 귀신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사실 부활 이전에도 제자들은 스승을
유령으로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심한 풍랑으로
배가 파도에 뒤덮이려 할 때였습니다.
그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의심을 지적하셨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 8,26)
결국 예수님께서는
이 의심을 없애시고자 최후의 만찬 때처럼
제자들과 식사를 하시며,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에게 하셨듯이 제자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의심 많던 제자들의 변화는 오늘 독서에서 나오듯
그들의 굳은 믿음으로 드러납니다.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살인자를 풀어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이 약해질 때마다
사랑의 성찬례인 미사에 더욱
열정적으로 참례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2020년 4월 17일 (금) [백]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복음묵상] 요한 21,1-14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동료 사도들을 처음 부르셨던
루카 복음 5장 1-11절을 떠오르게 합니다.
실제로 오늘 복음 곧 요한 복음 21장은
복음서 전체 가운데 부록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이렇게 내용이 추가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미사 전례를 위하여
“그때에”라고 복음을 시작하였지만
사실 오늘 복음의 성경 본문은
“그 뒤에”로 시작합니다.
“그 뒤”는 초기 교회의 시작을 말하는 것이고,
예수님 부활 직후의 교회 공동체 시기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부록은 이 시기의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는 이 방법을 통하여
앞으로도 교회 공동체에 당신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을 부르시던 때에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동한 끝에
물고기를 많이 잡게 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한 복음의 이 고기 잡는 기적은
예수님 부활 이후의 사건으로서
교회 공동체에 관계해서 전해집니다.
결론은 사람 낚는 어부를 넘어 처음에 없었던
‘아침 식사’ 곧 ‘성찬례’인 미사가 거행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손수 마련하신 아침 식사인 성찬례를 통해서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가 만들어지고 유지됩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몸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부활 신앙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의 가장 큰
임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2020년 4월 18일 (토) [백]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16,9-15
부활 팔일 축제의 마지막 날입니다.
물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과
믿는 이들의 기쁨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 강림의 순간까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죽음을 이기고
죄에 물든 우리가 주님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 기쁨을
우리 가운데 아직도 누군가가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오늘 복음을 반드시 읽고 묵상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불신과 완고한 마음”으로,
주님 부활을 증언하는 이들이 기뻐하며 환호하는
‘알렐루야.’를 받아들이지 못한 자신을 허물어야 합니다.
부활 팔일 축제 동안
우리가 읽고 묵상한 복음 가운데
오늘 처음으로 마르코 복음사가가 전하는
주님 부활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간결하고 단순한 보도 속에
주님 부활 이야기의 핵심만을 전하는 마르코지만,
그가 진심으로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르고자 하는 이들이,
부활하시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싶다면
그분의 실천을 계속 이어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오늘 독서의 베드로와 요한처럼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예고하시면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 됨을 밝히셨던 예수님의 말씀은,
부활 팔일 축제 이후에도
그 기쁨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르 8,34).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동안의 고난을 이겨내고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신 것 입니다.
현재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우리도 힘찬 도약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부활 축하드립니다.
-Berardu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