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시기가 끝나 가고 있습니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부활 시기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면서
유독 눈에 들어오는 내용이 있습니다.
처음 부활 팔일 축제 동안의 전례는 “알렐루야”를 노래하면서
독서를 통하여 부활, 기쁨, 생명, 평화를 힘차게 선포하지만,
그 이후에 이어지는 사도행전과 요한 복음에서는 오히려 증언,
박해, 순교를 되풀이하여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역시 바오로 사도가 죽음을 향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는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페스투스 총독의 입으로 그가 무죄하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바오로의 죽음이 오직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했기 때문이라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페스투스의 처신과 행동은 마치 빌라도가
예수님이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준 것과 비슷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에 걸쳐 던지신 질문입니다
.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린다 하더라도 자기는 결코 주님을 떠나지 않고
언제나 사랑하겠다고 장담한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께서 수난을 당하실 때
세 번이나 그분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세 번에 걸쳐 사랑을 고백할 기회를 주심으로써
그가 부끄러운 과거를 극복할 수 있도록 이끄신 다음,
“내 양들을 돌보아라.” 하고 말씀하시면서 사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사랑의 고백에 따른 사명은 그에게 십자가를 주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언제나 책임을 동반하고 커다란 희생을 요구합니다
. 베드로는 원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그를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가 죽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신 말씀이 깊은 울림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였을까요?
베드로가 순교하게 되는 시점에서 오늘 복음의 장면을 회상해 봅시다.
그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대신하여 그분의 교회를 헌신적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은 순교였습니다.
그분을 사랑하고 따른 것이,
그분 양 떼를 열심히 돌본 것이 허사로 돌아가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베드로도 바오로도
그 길의 끝은 죽음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 죽음을 거쳐서
부활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도 깨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압니다.
죽지 않고서는 결코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없다는 오묘한 진리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