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언젠가 학생들과 피정을 하면서 이 구절을 큰 글씨로 써서 벽에 붙이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벽에 붙어 있는 글자를 보니,
“그러나”는 빠져 있고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만 붙어 있었습니다.
글자를 잃어버렸는지, 떨어졌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많이 아쉬웠습니다.
“그러나”라는 한 마디 안에는 앞으로 제자들이 겪어야 할 모든 고난이,
그들의 공포와 두려움과 순교를 포함한 온갖 종류의 박해가 응축되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이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분이 세상을 이겼다고 말씀하시니 무슨 뜻일까요?
제자들이 주님을 버려두고 흩어질 것이고,
또 그들이 고난을 겪으리라는 것을 예고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평화와 용기를 말씀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이 말씀을 하신 뒤에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세상을 이겼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과 제자들을 죽이기까지 하는
이 세상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완전히 제압하셨다는 뜻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세상이 당신께 어떠한 폭력과 고문과 악행을 저지를 것인지
분명히 아시면서도 이 참혹한 상황을 외면하시거나 회피하지 않으시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과묵하게 현실을 받아들이심으로써
이 세상의 주인이 되셨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세상의 죄악은 절정에 달하여 승리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분께서는 죽음을 쳐 이기시고 부활하시어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지더라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으시고 평온하실 수 있으셨던 것은,
이러한 참담한 현실 앞에서도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으시고
그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의 나약함을 알고 계셨고
그들이 당신을 배반할 것도 아셨습니다.
인간의 최악의 상태를 알고 계셨지만,
그럼에도 그분께서는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러한 제자들을 신뢰하셨다는 점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나약함을 지적하신 뒤,
낙심하지 말라고 위로하시면서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