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 명령을 받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근무를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머물기 힘든 곳,
빨리 떠나고 싶은 곳이 있게 마련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머물렀던 여러 도시들 가운데 코린토는
그에게 별로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던 곳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코린토는 복잡한 항구 도시인데다가 우상 숭배와 퇴폐풍조가 만연한 곳으로,
평판도 좋지 않은 도시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바오로에게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시지만
코린토 선교 활동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유다인들이 바오로를 재판정으로 끌고 가 갈리오 총독에게 넘겨주자,
총독은 바오로에게서 범법 사실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사건에서 손을 뗍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잘못도 없는 회당장 소스테네스를 엉뚱하게 매질하여 화풀이를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자신이 매를 맞지 않았다고 해서 마음이 편안했을까요?
그 뒤에도 코린토 사람들은 바오로를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바오로가 코린토를 떠난 다음,
내일 독서에 소개되는 아폴로가 들어와 선교 활동을 펴 나가자,
코린토 공동체는 바오로파, 아폴로파 등 여러 갈래로 갈라지면서,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고
교회 공동체를 세운 바오로의 권위는 조금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바오로는 코린토에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체험한 바오로의 복음 선포 기간 안에서
1년 6개월이라는 시간은 상당히 긴 기간에 해당합니다.
그렇게 오랜 기간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오직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라는 주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코린토 사람들이 그를 크게 환영한 것도 아니고,
그가 꼭 필요하다고 붙잡고 매달린 것은 더더욱 아닌데도 말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당신 같은 사람 없어도 괜찮으니
이곳을 떠나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바오로를 필요로 하셨기 때문에 그는 코린토에 머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또한 오늘 복음의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깊이 신뢰하면서
바오로는 좌절과 실패를 극복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은 지나간 고통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아기를 낳은 엄마가 자기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과 감격으로 해산의 진통을 잊듯이,
그리스도인은 과거의 어려움과 고통을 잊고
주님께서 명하시는 사명을 묵묵히 수행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과 성령의 도우심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