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9일
성녀 베로니까 율리안나
Santa Veronica Giuliani Vergine
Sta. Vernoica Julianis, V.
Mercatello, Urbino, 1660 - Citta di Castello, 1727
이탈리아.카푸친 글라라수녀회.원장.
성녀 베로니까 율리안나(수도회축일:7월 10일)는 이탈리아 메르 카텔로에서 태어났다.
우르술라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그녀의 부모는 독실한 신앙인들이었다.
어릴 적부터 신심생활에 매력을 느끼고 수도생활을 꿈꾸었다.
베로니카는 1677년,17세에 움브리아 지방 카스뗄로의 치따에 있는
카푸친 글라라 수녀원에 들어갔다.베로니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Veronica entro diciassettenne nel convento delle
Clarisse Cappuccine di Citta di Castello)
그곳은 성녀 글라라의 첫 회칙이 준수되고 있는 엄격한 수녀원이었다.
여기서 수련장으로서 봉사하면서 순명, 겸손
그리고 극기를 하면시 참다운 수도 생팔의 모범이 되었다.
그녀는 이때부터 그리스도의 수난을 체험하기 시작하여, 1697년에 오상을 받았다.
이 시기에 그녀에게는 여러 번 성흔과 가시관 자국이 새겨졌다.
이 일로 인하여 요즈음도 항용 있는 일이지만
교회 당국자들에게 시달림을 받으며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의 겸손한 순명은 이 모든 현상이 진실임을 확신시켜 주었다.
그녀는 관상생활과 활동을 잘 조화시켰고, 1716년 생애의 말기에
자의와는 상관없이 수도원장에 선출되어 죽을 때 까지 책임을 다 하였다.
베로니카는 여러가지의 초자연적 은혜를 받았는데,
18세기의 위대한 신비가로 유명하다.
그녀는 자신의 신비스런 체험을 "수난의 일기"라는 제명으로 책에 기록하였다.
1839년 그레그리오 16세가 시성하였다.
이탈리아는 옛날부터 수많은 성인, 성녀를 냈는데, 베로니카 율리아니도 역시
1660년에 그 나라의 소도시 우르비노의 메르카텔로에서 태어난 성녀이다.
물론 양친은 명성이 높았고, 특히 그 어머니는 신심이 매우 두터운 분이었다.
베로니카는 우르술라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어릴 적부터 신심생활에 매력을 느끼고 수도 생활을 꿈꾸었다.
그가 네 살때에 어머니와 작별했으나, 그 어린 마음에도 어머니가 십자가를 가리키며
"어려운 때에는 저 예수께 부탁해라"하신 말씀을 잊지 않고
리마의 성녀 로사와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를 거울삼아 고신 극기와 기도생활을 하며
신심생활에 열중했다.
(리마의 성녀 로사 축일:8월23일.인창동성당게시판604번,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축일:4월29일.게시판1129번)
17세때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출가시키려고 했다.
훌륭한 가문의 청년들이 구혼했으나 그녀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기의 뜻에 맞는 사람과 성혼된다면 무슨 요청이든지 다 들어주겠다고 달랬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단 한마디 ’저는 예수의 것입니다."였다.
이와 같은 대답에는 그의 아버지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권유를 끝까지 물리치고, 1677년에 카스텔로에 있는
클라라 수도원에 입회하고 1677년 10월 28일 착복해 베로니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베로니카는 이때부터 그리스도의 수난을 체험하기 시작해
수도원의 모든 규칙을 충실히 지켰다. 성실한 수도자에게는 시련이 더 심했다.
하느님께서는 악마에게 그녀를 시험하는 허락을 주시어,
지옥의 무리들은 갖은 수단을 다해 그녀를 유혹하며 마음을 산란케 하고 육체를 괴롭혔다.
이러한 유혹은 수년간 계속적으로 그녀를 습격했으나,
항상 인내하고 겸손하게 끊임없이 주님의 도움을 구했다.
이에 마침내 주님께서도 그 온정의 손을 베풀어 그녀를 위험한 처지에서 구하시고
가끔 발현하시어 그를 격려하시며 성모 마리아를 보내시어 그녀를 위로했다.
베로니카는 주님께 대한 사랑이 더 깊어져 덕에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시련은 더 커졌다.
그녀는 가끔 예수 수난에 대해 묵상했다. 묵상 때 가끔
예수의 가시관과 매맞으신 상처에 대한 고통을 실감했는데,
특히 1697년 성 금요일에는 예수 수난을 묵상하는 도중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께서 직접 발현하셔서
다섯 상처에서 비치는 눈부신 빛이 그녀의 수족과 늑방을 관통해
고통과 더불어 오상의 상처를 남겨 두셨다
오상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 베푸신 것과 동등한 하느님의 특은이었지만,
동시에 그녀는 이로 말미암아 새로운 고통을 느껴야 했다.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인창동성당게시판676번,
오상축일:9월17일.게시판644번)
즉 이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의심하게 되었고,
그 지방의 주교는 이를 조사하기 위해 친히 그 상처를 검사하며
네 명의 수녀로 하여금 그녀를 감시케 하고,
네 명의 독실한 신부에게 더욱 세밀한 검사를 하도록 명했다.
베로니카는 정신적 고통을 받게 되었다.
전에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가 간청함과 같이 보이는 상처를 없애 주시고
고통만을 남겨주시기를 주님께 겸손되이 간청했다.
기도가 허용된 것은 그로부터 3년 후인 1700년 4월 4일이었다.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께서 발현하시어 그 상처에서 광선이 비치자
그녀의 오상은 즉시 사라지고 붉은 점만 나타났으나 고통을 여전했다.
그녀는 이고통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잘 참으며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희생으로 바쳤다. 이렇게 하기를 5, 6일이 지나자 그 흔적마저 없어졌다.
그녀는 관상생활과 활동을 잘 조화시켰고, 34년동안이나
수련장직을 맡아 수련자들을 어머니처럼 애정으로 대했다.
그녀는 어떤 일이나 항상 깊은 애정과 충실성으로 일을 했다.
1716년에는 원장으로 선출되어 그녀는 겸손한 마음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를 사양했으나,
하느님께 순명하는 마음으로 잘 받아들였다.
겸손한 그녀는 자기로서는 수도원을 개선해 나갈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진정으로 느꼈기에 수도원에 대한 일체를 성모의 전구하심에 일임하였다.
성모께서도 이를 기특히 여기셨음인지 항상 뚜렷한 증거로써 그녀를 도와주셨다.
수녀원은 날로 번창하고 경건한 수도원으로서 타에 비할 바 없는 훌륭한 수도원이 되어,
가끔 기도로 기적이 일어나곤 했다.
수녀원에서 하느님께 봉사하기 50년, 베로니카에게도 천국을 향할 날이 왔다.
1727년 6월 6일 그녀는 갑자기 쓰러지자 재기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병고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내하며 열렬한 사랑으로 성체를 모시고
7월 8일 이세상을 떠났다.
임종 직전에 순명 서원의 기도문을 외우고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눈치였으므로
고해 신부가 즉시 그것을 알아차리고"천국에 가는 것이
주님께서 부르시는 것이니 순명하는 마음으로 안심하고 이 세상을 떠나십시오"하자
베로니카는 그 말을 듣고 잠든 듯이 조용히 운명했다.
베로니카는 여러가지 초자연적 은혜를 받았는데, 18세기의 위대한 신비자로 유명하다.
그녀는 1802년 시복, 1839년에는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