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김대건신부상-김미영수녀작
성 안드레아 김대건 사제의 편지에서
(제23신의 발췌, 옥 안에서, 1846년 8월 26일:이원순, 허인 편저, 1975년,정음사)
천주교는 내게 천주 공경하기를 가르치고 또 나를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합니다.
그들은 저를 잡아 가지고 상륙한 뒤에, 옷을 벗기고
다시 마구 때리며 온갖 능욕을 가하다가 관가로 압송했는데,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관장이 제게 묻기를 "네가 천주교인이냐?" -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 라고 대답하였더니,
"어찌하여 네가 임금의 명을 거역하여
그 교를 행하느냐? 배교하여라." 하길래,
"나는 천주교가 참된 종교이므로 받듭니다.
천주교는 내게 천주 공경하기를 가르치고,
또 나를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합니다.
내게 배교하라는 것은 쓸데없는 말입니다."라고 대답했더니,
이런 대답을 하였다고 주리를 틀고서, 관장이 또 말하기를
"네가 배교하지 않으면 때려 죽이겠다." 하기에,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결코 나는 우리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교의 진리를 알려거든 들어 보십시오.
내가 공경하는 천주는 천지와 사람과 만물을 조성하신 이요,
착한 이를 상 주시고 악한 자를 벌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다 그를 공경하여야 합니다.
관장께서 내가 천주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형벌을 당하게 해주시니 관장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리 천주님이 이런 은공을 갚고자
당신을 더 높은 관직에 올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하자,
이 말을 듣고는 관장과 모든 사람이 비웃었습니다.
그 후에 여덟 자나 되는 긴칼을 가져오기에,
제가 즉시 그 칼을 잡아 제 손으로 제 목에 대니,
둘러섰던 모든 사람이 또한 다 크게 웃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미 배교한 두 사람과 함께 옥에 가두는데,
저의 손, 발, 목, 허리를 어떻게나 몹시 결박하였던지,
걸을 수도 없고 앉을 수도 없고 누울 수도 없었습니다.
또한 구경꾼들이 둘러쌌기에 매우 괴로웠습니다.
저는 밤이 이슥토록 저들에게 교회의 도리를 설명하였더니,
그들은 흥미 있게 듣고 나서,
나라에서 금하지만 않으면 자기들도 봉행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포졸 들이 저의 봇짐에서 중국 물건을 찾아내더니
이튿날 관장이 제게 중국인이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아니오, 나는 조선 사람이오."라고 대답하였더니,
그는 저의 말을 믿지 않고 또 말하기를,
"중국 어느 곳에서 사느냐?"라고 묻기에
"나는 중국 광동현 마카오에서 공부하였소.
나는 교우이므로 구경도 하고
또한 교회의 도리를 전할 마음으로
여기 까지 오게 되었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저를 하옥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서울에 도착하자 도적을 가두는 옥에 수감되었고
아전들은 저의 말하는 것을 들어 보고는
분명히 조선 사람이라고 단언했습니다.
이튿날 저를 관장 앞에 대령시켜 놓고
관장이 네가 누구냐고 문초하기에,
"나는 조선 사람으로서,
공부를 하기는 중국가서 하였소."라고 대답하자
중국말을 하는 통역을 불러 저와 이야기를 시켜 보았습니다.
1839년 박해 때 배교자는
조선 소년 세명이 서양말을 배우러
마카오로 떠났음을 고발하였을 뿐 아니라,
저와 함께 잡힌 교우들이 벌써
제가 누구라는 것을 실토하였으므로,
오랫동안 저의 신분을 감출 수 없음을 짐작하고,
관장에게 "나는 그 소년 셋 중의 하나인
김 안드레아"라고 자백하는 동시에,
고국에 다시 들어오려고 고생하였던 것을
모두 이야기했습니다.
이 말을 듣던 관장과 구경꾼들도
"가련한 소년,
어려서부터 허다한 고생을 많이 당하였구나." 하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 후로는 임금의 명령에 의하여 배교하기를 독촉하기에
"임금 위에 또 천주께서 계시어
당신을 공경하라는 명령을 내리시니,
그를 배반함은 큰 죄악이라,
임금의 명령이라도 옳은 일이 될 수 없습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다시 교우들을 대라고 위협하기에,
우리에게는 애덕의 의무도 있고
천주께서 사람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내리신 까닭에 말할 수 없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들은 다시 교회의 도리를 묻기에,
저는 장황한 설명을 시작하여 천주의 존재,
만물의 조성, 영혼의 불멸, 지옥과 천당, 조물주를 숭배할 의무,
외교의 헛되고 거짓됨을 말하여 주었습니다. 관장들은 대답하기를
"너의 교도 좋거니와 우리 유교도 좋으니 우리는 유교를 한다." 하기에
"당신들의 의견이 그러하다면 우리를 편히 지내도록 할 것이고
우리와 서로 화목해야 하지 않겠소.
그런데 그렇기는 고사하고 당신들은 우리를 박해하고,
우리를 가장 극악한 죄인과 같이 혹평을 하니,
우리 교를 옳고 좋은 교라고 인정하는 당신들로서
마치 극악한 교와 같이 박해하는 것은
당신들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입니다."라고 반박하였더니,
이 말을 들은 그네들은 다만 어리석은 웃음을 띄울 뿐이었습니다.
관장은 제게 영어로 된
지구 전도를 번역하라고 분부하기에,
여러 가지 채색으로 두 장을 그렸는데,
한 장은 임금께 드릴 것이며,
지금은 대신들의 부탁으로
간단한 지리서를 편술하기에 분주한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저를 위대한 학자로 인정합니다. 가련한 인생들,
저는 감히 주교 각하께 저의 어머니 우르술라를 부탁 드리옵니다.
저의 어머니는 10년 동안 못 본 아들을
불과 며칠 동안 만나 보았을 뿐 또다시 홀연 잃고 말았으니,
각하께 간절히 바라건데,
슬픔에 잠긴 저의 어머니를 잘 위로하여 주십시오.
이제 저는 진심으로 각하의 발 아래 엎디어,
저희 사랑하올 부친이요 공경하올 주교님께
마지막 하직의 인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그리고 베시 주교님과 안 신부님에게도 공손히 하직을 고하옵니다.
이후 천당에서 만나 뵙겠습니다.
예수를 위하여 옥에 갇힌 탁덕 김 안드레아.
*성안드레아 김대건과 성바울로정하상과 동료순교자대축일:9월20일.게시판1373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1821-1846)
1. 초기 생애
1)가정 환경
김대건(아명 김재복, 족보명 김지식, 안드레아)은
1821년 8월 21일에 충청도 솔뫼 지방에서 태어났으나,
경기도 용인 지방의 ’골배마실’에서 소년 생활을 보냈다.
서당과 할아버지 밑에서 한문을 익히고 열심한 부모,
특히 어머니 고 우르술라에게서 종교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던 그는,
어릴 때부터 훌륭한 재주와 강한 의지력,
경건한 신심을 보여주어 1836년 6월에 사목 방문으로
지방 순회하던 모방 신부의 눈에 띄었다.
모방 신부는 15세의 소년을 며칠 동안 유심히 관찰한 후에
그에게서 사제 성소를 발견하고
그이 부친과 상의하여 예비신학생으로 선발하였다.
김대건은 7월 11일에 모방 신부를 따라 한양에 올라와
먼저 선발된 최양업과 최방제와 합류하여 라틴어와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모방 신부는 세 소년을 안전한 방법으로 효과 있게 교육시키기 위해서
마닐라나 싱가포르 또는 페낭에 있는 신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1836년 12월 2일
김대건은 두 동료와 함께 모방 신부 앞에서 성서에 손을 얹고
조선 교회 책임 신부들에 대한 순명을 선서하고 장상들의 허락 없이는
다른 지방으로 가거나 수도회에 입회하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고,
1주일 후에 귀국하는 유방제 신부를 따라 국경을 넘어 1837년 6월 7일에
마카오에 있는 파리 외방 전교회 지부에 도착하였다.
그곳에는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가 있었다.
여기서 김대건과 동료들이 공부하였다.
그 동안에 마카오에서 내란이 일어나 그는
두 차례에 걸쳐(1838년 8월, 1839년 4월) 동료들과
마닐라로 피난 가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며 병고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역경 속에서 김대건은 어학과
철학 과정을 끝내고 신학 공부에 들어갔다.
2)조선 입국 시도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일어난 아편 전쟁(1840-1842) 중에
프랑스도 중국 이권 경쟁에 개입하기 위해 세실 제독의 ’에리곤호’와
빠쥬 제독의 ’파보리뜨호’를 극동에 파견하였다.
1841년 12월 8일에 마카오에 상륙한 세실 함장은
중국 이외에 조선 왕국과도 통상 조약을 맺으려는 계획을 세우고
파리 외방 전교회의 마카오 지부장인
리보아 신부에게 통역으로 조선인 신학생의 동승을 요청했다.
리보아 신부는 오랫동안 소식이 끊긴 조선 교회의 사정을 파악하고
선교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쾌히 승낙하였다.
1842년 2월 15일 김대건은 신학 공부를 중단하고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매스뜨르 신부와 함께
에리곤호에 승선하여 2개월 후 양자강 어귀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남경조약의 체결(1842년 8월 29일)로 끝나자 프랑스 함대는
극동에서의 이권 추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조선 출동을 취소하였으므로
김대건은 매스뜨르 신부와 함께 하선하였다.
2개월 후에 최양업이 ’파보리또호’로
만주 교구의 부뤼기에르 신부와 함께 도착하였다.
1842년 10월 20일 김대건 일행은 육로를 통하여
조선에 잠입하기로 결정하고
요동 지방의 백가점(百家店) 교우촌에 도착하였다.
김대건은 몽고 지방으로 떠나는 최양업과 헤어진 후에 매스뜨르 신부와
조선 잠입을 탐색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그는 서양인의 여행이 위험하기 때문에
혼자서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1842년 12월 23일 국경 지방으로 떠났다.
그는 도중에 북경으로 들어오는
조선 사절단 일행에 끼인 김 프란치스코라는 교우를 만나
기해대박해와 성직자 영입 운동의 소식을 듣고 먼저 자신이 입국하여
매스뜨르 신부의 영입을 준비하기로 결심하였다.
김대건은 조선 변문(의주)에서 조선으로 잡임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한양으로 향하다가 부자연스런 언행으로 주민들의 의심을 받아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서는 1843년 1월 6일에
온갖 고생 끝에 백가점으로 돌아왔다.
3)입국
1843년 4월에 김대건은
몽고 팔가자(八家子)로 옮겨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1844년 2월에
페레올 고 주교(1843년 1월 제3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었음)의 명령으로
조선 동북부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 경원(慶源)에서
조선 교우와 만나 주교의 입국을 논의하였으나,
안전하지 않아 압록강의 서북부 국경로를 이용하기로 합의하고
4월에 팔가자로 돌아왔다.
김대건은 1844년 12월 17일에 신학 공부를 끝내고 부제품을 받았다.
1845년 1월에 김대건 부제는 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중국 국경 지방에 도착하였으나 마중나온 교우들이
외국인 주교의 입국이 불가능하다고 말하여
그는 혼자 들어가서 해로를 통한 입국로를 개척하기로 결정하였다.
김 부제는 로사리오 기도를 되풀이하면서
발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맨발로 눈이 쌓인 길과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1845년 1월 15일에 한양에 도착하였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상.
2002년.이춘만1941-.186x74x60cm명동성당
2.사목활동
김대건 부제는
현석문(가롤로)이 마련한 집에 은신하면서
교회 사정을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2월에 그는
고생스러운 여행에서 오는 긴장이 풀려
병석에 누워 2주일 동안 고통을 받았다.
이러한 가운데 김 부제는 리보아 신부에게
그의 귀국 사실과 함께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땅 신부의 순교 상황에 대해서 보고하였다.
또한 그는 당시에 천연두(마마)로 희생되는 어린이들을 구하기 위해
약을 부탁하면서 치료법을 문의하는 등 동포애를 보이기도 했다.
아울러 그는 자기 귀국 사명인 성직자 영입 준비에 착수하였다.
그는 조선에 입국하려는 서양 선교사들에게 조선의 지리 지식을 제공하여
입국을 쉽게 하기 위해서 조선 지도를 제작하였다.
또한 그는 페레올 주교와 성직자들이 입국하여
거주할 집을 충청도 해안 지방에 마련하려고 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서울 석관동에 집 한 채를 마련하였다.
동시에 김대건은 배를 한 척 사서
상해로 여행할 교우를 선정하고 사공들을 구하였다.
1845년 4월 30일에 김대건 부제는
사공 네 명을 포함한 11명의 교우들을 데리고
인천 제물포에서 중국 상해로 출범하였다.
이때에 그는 발각의 위험 때문에 고생하는 어머니에게
자기 귀국 소식도 알리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불효의 고통을 견뎌야만 했다.
그는 바다에서 3일 동안 폭풍우와 해적선의 위험을 극복하고
6월 4일에 무사히 상해에 도착하였다.
김대건은 7월 28일에 페레올 주교에게 자기의 상해 도착을 알리면서
상해로 오시도록 청하는 편지를 보냈고
다음 달에 주교는 다블뤼(안) 신부를 대동하고
상해에 도착했다.
1845년 8월 17일에 김대건 부제는
상해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에게서 사제서품을 받고
8월 24일에 만당(萬堂) 소신학교 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
1주일 후에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모시고
상해를 떠나 제주도 연안에 표류하였다가 10월 12일에
충청도 지방의 황산포에 상륙하여
한양에 들어왔다.
1846년 박해
성직자 입국로 모색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에게 선교사가 해로를 통해
입국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래서 김 신부는 1846년 5월 14일에 신자들과 함께
서해안으로 나가 5월 29일에 관리들의 감시망을 뚫고
백령도에 도착하여 조업 중인 중국 어선의 선원들과 접촉하여
페레올 주교의 편지와 자기의 편지(조선 입국을 대기하고 있는 베르뇌 신부와
메스뜨르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조선 지도 등을 전달하고
황해도 순위도에 까지 무사히 돌아왔다.
3.옥중생활
이곳에서 6월 5일에
체포됨으로써 병오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는 다섯 명의 신자들과 함께
해주 감영에 끌려가 네 차례에 걸쳐
심문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했고
다시 한양의 포도청에 이송되어 40차례에 걸친 심문과 고문을 받았다.
재판관들과 대신들은 김대건 신부의
외국어(중국어, 라틴어, 불어 등) 실력과
폭넓은 서양 지식에 놀랐고
어떤 대신들은 그에게 지리서 편술과
세계 지도(영국제)의 번역을 부탁하여
옥중에서 지도를 채색하여 한 장은 국왕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재능은 조정의 인정을 받아
일부 대신들은 김대건 신부를 위한 구명운동을 벌여
그에 대한 판결이 3개월이나 연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46년 6월 세실 제독이 세 척의 군함을 이끌고
충청도 홍주에 나타나 기해대박해 중에
세 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을 처형한 사실에 항의,
문책하는 서신을 주민들을 통해 조정에 전달했다.
이는 조선 정부가 천주교와 김 신부에 대해
강경책을 취하는 계기가 되었다.
4.순교
김대건 신부는 친구인 최양업 신부와
페레올 주교에게 자기 어머니를 부탁하는 마지막 효심을 보이고
교우들에게는 신앙 강화를 권유하는 편지를 보냈다.
1846년 9월 15일에 국사범으로 군문효수의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날 한강 새남터에 끌려 나왔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외쳤다.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였으니 여러분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나의 하느님과 종교를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으며 이제 내게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후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신봉하십시오."
그는 형리에게 편하게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자세를 묻고
그의 주문대로 자세를 취해 주기도 하였다.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 신부는 이렇게 2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참고: 가톨릭 대학교 한국 교회사 강의록)-
聖 김대건 안드레아(1821-1846), 사제 순교자
동방의 나라 조선에
구원의 빛이 동터 올 때까지는 진리를 갈망 하는
선각자들의 연구와 빛을 찾아 나서는 열성으로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놀라운 은총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복음의 씨앗이 자라기에는
너무나 척박한 땅이었고 수없는 난관이 있었다.
조선은 당시 양반과 상민의 계급사회였고
주자가례를 실천 철학으로 삼는 시대였으므로 천주교의 새로운 교리는
기존 사회 제도를 위협하는 도전일 수밖에 없었다.
창립 초기부터 이어지는 박해의 회오리 바람은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전 국토를 혈제의 제단이 되게 했다.
그러나 천주를 향한 믿음의 불꽃은 신앙 고백을 통해
곳곳에서 찬란한 빛으로 드러났고,
하느님의 자비는 초기 순교자들의 피로써
백 배의 열매를 맺게 하실 섭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김대건은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당시로는 면천 고을 솔뫼에서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와 모친 고 우르술라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미 증조부 김진후 비오와 조부 택현 안드레아 등이
순교한 순교자 가문에서 태어난 대건의 아명은 재복이었고
세례명은 안드레아였다.
기해박해 때 순교한 김데레사 성녀는
택현의 딸이요, 대건의 당고모였다.
일찌기 ’내포의 사도’이존창에게 복음을 전해 들은 증조부는
열심한 신앙생활로
신해박해(1791)때 처음 체포되면서 수없이 옥문을 드나들었고
기약 없는 옥 살이 끝에 해미에서 1816년
옥사함으로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가장인 김진후의 순교로 아들들은 박해를 피해 정든 고향을 떠나게 된다.
김대건의 조부 택현은 1827년 정해 교난의 박해를 계기로
낯선 타향인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골배마실로 이주해서 살게 되니
이곳은 비록 험령대산은 아니어도 첩첩산중이어서
그간의 박해를 피해 몰래 이주해 온 교인들이 많은 곳이었다.
김 대건의 나이 7세 때였다.
솔뫼에서 태어나 박해를 피해 골배마실로 이주해 온 소년 김대건은
이 때부터 조부 택현의 지도로 한문을 익히기 시작했다.
김대건의 부친 제준 이냐시오는 열심한 신앙으로 교회 일에 열심 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참수 치명하신 분이다.
그러나 소년 대건에게 깊은 신심을 키워 준 데에는
모친 고 우르술라의 힘이 컸다.
모범적인 신앙인 가정에서 자란 김대건이 첫 영성체를 한것은
1836년 6월 모방 나 신부에 의해서였다.
1836년1월에 입국한 모방 나 신부는
조선인 성직자를 양성하는 데 마음을 쓰며
각 방면으로 적당한 소년을 찾고 있던 중
골배마실 은이공소에서 김대건 소년을 신학생으로 선택하게 되었다.
어린 몸에 어려운 길을 서슴지 않고 따르겠다고 나선
소년 김대건의 결심도 대견했지만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놓는 부모의 결단 또한
놀라운 일이었다. 7월에 소년 김대건은 서울로 올라와
최방제와 최양업을 만났으며, 마침내 그해 12월
중국인 유방제 신부가 귀국하는 길에 세 소년도 함께 떠나게 되었다.
장차 한국교회의 순교성인으로 빛날 교우들인
정하상,현석문,조신철의 호송을 받으며 일행은
고국산천을 작별하고 부모를 떠나 만주땅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세 소년은 조선인 호송자와 작별하고
중국인 안내자를 따라 봉천, 산해관, 북경,
천진, 광동을 거쳐 목적지인 마카오를 향해 떠나게 되었다.
세 소년 신학생은 1837년 6월 6일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의 경리부 책임자인 리브와 신부의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마카오는 1557년 포르투갈이 점령한 이색적인 도시로서
그 당시 서양인의 극동 진출의 근거지가 되었다.
김대건과 최방제, 최양업 세 소년은
얼마 후 마카오에서 청국인들에 의한 민란을 겪게 되어 외방전교회 회원들과 같이
수개월간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난생활을 하게 된다.
다시 마카오로 돌아와 신학생으로 면학이 계속되었으나
곧 동료 신학생인 최방제가 병사하는 불행을 맞는다.
고국산천 멀리 이역에서 동학도이자 동포를 잃은
김대건, 최양업 두 소년의 가슴은
얼마나 쓰라리고 고통스러웠을까.
그러나 그들은 슬픔과 낙담에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또다시 일어난 민란으로 근교에 있는 도미니코회 수도원에 머물면서
면학을 계속하게 되는데 그때가 1839년 4월이었다.
그해 11월에야 다시 마카오롤 돌아오게 된다.
이해는 조선에서는 기해박해가 벌어져
전국적으로 많은 교우들이 순교하는 수난의 해였고,
신학생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와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 프란치스코도 이때 순교했다.
마카오로 귀환한 후 철학 공부에 정진해
1841년에는 철학 과정을 수료하고 신학 과정으로 진급했다.
그들이 전공한 것은 성직자가 되기 위한 철학과 신학이었으나
그것을 익히기 위해 그보다 하부 구조를 이루는
기초교양을 쌓는 서양 학문의 초.중등과정을 거쳐야 했다.
또한 면학 장소가 마카오,마닐라 등 국제 도시여서 학식과 견문이 넓어지고
문화와 교양을 갖춘 이른바 지식인으로 자란
신학생들은 쇄국 조선에서 벗어나
조선인 최초로 해박한 서구 학식을 갖추게 되었다.
두 신학생이 마카오에서 사제 수업을 받고 있던 1840년,
프랑스의 루이 필립 황제는 세 척의 군함을 극동 해역으로 파견해
청국과 조선의 사정을 알아보게 했다.
군함의 사령관인 세실은 마카오에 기착해 파리외방전교회 지부를 찾아와
유익한 자문을 구하면서 보조자를 청했다.
이리하여 김대건과 조선교구 소속의
메스트로신부는 에리곤호에 최양업과
만주교구의 브뤼니에르 신부는 파보리트호에 올랐다.
서품을 기다리던 두 조선 신학생은 이렇게 귀국길에 오르는 꿈에 부풀었다.
두 군함은 1842년 가을에 양자강 어구에 다다르게 되었으나
때마침 영국과 청국 사이에 남경조약이 맺어지고 전란이 끝나게 되자
신부들과 신학생들을 그곳에 내려놓고 돌아가게 되 었다.
김대건의 조선 입국 시도는 이때부터
무수한 장벽과 고난의 길의 연속이었다.
조선교회의 소식을 듣기 위해 메스트로 신부와 김대건은
거지행세를 하고 입국의 길을 찾았으나
외국인의 입국이 무모한 계획이라 판단되어
김대건만을 보내기로 하고 1842년 12월 23일
두 명의 중국인 교우와 함께 변문으로 향한다.
변문에서 20리쯤 떨어진 곳에서 북경으로 가는
300명 가량의 동지사 일행과 만나게 된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조선교회가 보낸 밀사 김 프란치스코였다.
이때 그는 품속에서 앵베르 범 주교가 잡히기 전날까지 기록한
순교행적과 모방,샤스탕 신부의 마지막 편지와
다시 성직자를 보내달라는 조선 교우들의 탄원서를 대건에게 내어주었다.
7년만에 만난 고국의 교우와 헤어져 홀로 변문으로 들어가 다음날
의주를 향해 길을 떠난 김대건은 중국인 교우에게
김프란치스코로부터 받은 문서를
메스트로 신부에게 보내주길 부탁하고 130리 길을 하루에 걸어
멀리 의주가 바라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아슬아슬한 순간을 수없이 겪고 관문을 통과해
조국땅을 달리던 김대건은 추위에 못이겨 주막에 들렀는데 사람들이
그의 얼굴과 중국신 등을 수상히 여겨
첩자나 도망치는 죄인으로 보고 고발하겠다고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체포될 것 같아 김대건은 다시 의주로 발길을 돌렸다.
굳센 김대건도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자
지쳐서 눈 속에 쓰러져 잠들었다.
이때 어디선지 "일어나 걸어라"하는 소리가 들리고,
그림자 같은 것이 어둠 속에서 길을 가르쳐주는 것이 보였다.
훗날 김대건은 이 일을 천주의 섭리였다고 말했다.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1843년 1월 6일에는 메스트로 이 신부가 있는
백가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1843년 1월 백가점으로 돌아온 김대건은
그곳에 머무르면서 입국길을 트기 위해 팔방으로 노력했다.
훈춘을 거쳐 함경도 경원에서 조선 교우들을 만나 방법을 찾아보았으나,
거기서 서울까지 무사히 갈 수 없다는 판단이 서자 이계획을 일단 포기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가서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 고 주교에게 부제품을 받았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소정의 공부를 끝냈으나
만 25세가 되지 않아 신품을 받지 못하고 있다가 부제품을 받게 된 것이다.
1845년 1월 초 의주쪽으로 해서 몰래 김대건 혼자 입국하니,
참으로 10년 만에 대하는 고국산천이었다.
그에게는 교회의 실정을 자세히 보고하고 주교를 맞아들여야 하는
중대한 임무가 주어져 있었다.
서울 돌우물골에 작은 짐을 풀고 꼭 만나야 하는 교우들만 접촉하면서
순교자들의 자료를 수집하는 동안,
긴장이 풀린 탓인지 열병을 몹시 앓았다.
하느님의 보호로 건강이 회복되자 준비해 온 150냥으로 배 한척을 사서
성직자를 맞을 채비를 했다.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기해박해 때 남편이 순교하고 이리저리 떠돌며
유리걸식하고 있음을 알고서도 어머니를 찾아 뵈올 엄두도 못내니
김대건은 현석문 등 11명의 교우들과 그해 4월에 상해쪽을 향해 배를 띄웠다.
교우들 중에는 배를 타 본 일조차 없던 6명의 농부도 있었다.
폭풍우를 만나 3일 동안 밤낮없이 시달리어 김대건은
끌고가던 종선과 두 개의 돛대를 베어 버리고
무거운 짐들도 바다에 던져 버렸다.
김대건 역시 심하게 배멀리미에 시달렸으나 힘써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성모 마리아의 성화를 내보이면서 "겁내지 마시오.
성모 마리아께서 도와 주실 것입니다."하고 안심을 시켰다.
이렇게 일행이 곤경에 빠져 있을 때
산동 배가 가까이에서 그대로 지나가려는 것을
김대건이 옷을 흔들고 북을 치면서
구조를 청해 상해까지 배를 끌고 가 주기로 결정받았다.
김대건 부제 일행이 상해에서 페레올 고 주교를 기다리고 있을 때
주교는 마카오에 있었다.
반가운 소식을 접한 고 주교는 다블 뤼 안 신부를 대동하고
상해로 와서 김대건을 반갑게 만났다.
조선 입국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고 주교는
서둘러 김대건 부제에게 서품식을 올릴 차비를 서두르도록 지시했다.
1845년 8월 17일 상해로부터 20리쯤 떨어져 있는
김가항이라는 교우촌의 성당에서
열 명도 안되는 조국 동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대건은
페레올 고 주교 집전하에 한국인 첫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달 24일 주일에는 만당 소신학교에서
안 다블뤼 신부가 복사 하는 가운데 첫 미사를 드리게 되었다.
우리의 수선탁덕 김대건 신부는 곧 교우들이 수리하고 있는 배로 돌아가서
조선으로 돌아갈 즐거움을 그들과 나누고 있었다.
그해 8월 31일에 고 주교와 안 신부가 남모르게 그 배로 찾아와
고 주교는 길이가 25척이고
폭이 9척이며 깊이가 7척밖에 안되던 그 작은 배에
라파엘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김대건 신부,안 신부, 조선교우들은
그 밤으로 조선을 향해 바닷길을 떠나게 되었다.
라파엘호는 처음에는 다행히 요동 방면으로 가는 중국 교우의 배에 끌리어
산동성까지 무사히 이르렀으나 갑자기 거센 풍파를 만나게 되어 키는 부러지고
돛은 찢어져서 더 이상 항해할 수 없게 되었다.
물결이 치는 대로 배를 맡기고 있자난 풍파가 차차 가라 않게 되었다.
새로 키와 돛대를 마련해 동쪽으로 뱃머리를 향했다.
라파엘호는 호수천신의 인도를 받아 9월 28일에는
제주도의 해안에 닿게 되니,
이로부터 전라도와 충청도 사이에 있는
금강으로 접어들어 60리쯤을 올라가서
은진군 강경리 나바위라는 조그만 교우촌에 닻을 내리게 되었다.
사제가 되어 돌아온 김대건과 꿈에도 조선입국을 그리워하며
6년을 준비한 고 주교의 기쁨은 어떠했으랴!
이들은 곧 방갓과 상제옷으로 몸을 가린 후
어두운 밤을 틈타 상륙하게 되었으니
1845년 10월 12일이었고,
상해를 떠난 지 42일째 되는 날이었다.
나바위에서 하룻밤을 지낸 김대건 신부는 다음날 서둘러 떠났다.
고 주교와 안 신부는 그곳에 남아서 우리말을 배우며
성무를 집 행하게 되었는데
나바위 교우들은 두 성직자를 맞아 날 듯이 기뻐했다.
천주의 은총으로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미사 참례를 날마다 하게 되고
주교와 신부를 모시게 되었기 때문이다.
김대건 신부는 용기백배해서 적극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언어와 활동에 제약이 없는 방인 성직자이기에 전국의 교인들을 찾아다니며
영신을 위로하고 전교에 힘쓰며 성무에 충실했다.
다시없이 유능하고 신뢰할 만한 방인 성직자였기에 페레올 주교는
마침내 불고 25세의 청년 사제 김대건 신부를 조선교구 부감목으로 선임했다.
김대건 신부는 먼저 고 주교가 안전하게 있을 곳을 마련해 서울로 오게 하고
자신은 고향으로 내려가 교우들을 돌보고 꿈에도 잊을 수 없던 어머니를 찾았다.
10년 동안 외국을 다니다가 신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대하는 어머니
고 우르술라는 가슴이 메어지느 듯한 벅찬 감격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어머니를 위한 미사를 드리면서 순교하신 아버지를 기억하는 김대건 신부는
자신의 목숨도 이미 천주께 바친 몸이며 한 어버이의 아들이기 전에
모든 교우의 아버지가 된 책임을 크게 느꼈다.
한편 청나라에서는 아직 입국할 기회를 잡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는 메스트로 이 신부와
최양업 부제가 본국에서 오는 연락을 초조하게 고대하고 있었다.
고 주교의 밀명을 받은 김대건 신부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마포 나루를 떠났다.
1846년 4월, 교우 임성룡의 배를 타고 연평도 앞바다를 지나 등산곶에 이르렀다.
마침내 백령도 부근에서 그물을 치고 조기잡이하는 중국어선을 만나
중국말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눈치를 보았다.
그들이 믿을 만한 사람임을 확인하고 준비해 간 편지와 지도를
요동반도와 마카오의 연락장소로 전해 주도록 부탁했다.
김대건 신부는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매우 기뻐하면서
배를 돌려 돌아가자고 했다.
그런데 천만뜻밖에 등산곶 일대를 감시하는 군교들이
중국어선을 몰아내기 위해
배를 빌려 달라고 쫓아왔다.
당시의 국법으로 양반 소유물을 정부에서 징발할 수 없게 되어 있었으므로
김대건 신부는 자기 배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거절했다.
여기서 시비가 벌어져 김대건 신부는
폭행을 당하고 옹진 감옥으로 연행돼 갔다.
1846년 음력 5월 12일 밤의 일이었다.
최양업 부제와 이 메스트로 신부 영입을 위해 위험으 무릅쓰고
연평도 조기잡이 배에 접근해 편지와 지도를 전하고
기뻐하던 김대건 신부는 체포됐다.
순위도의 부산진으로 연행된 김대건 신부는 옹진, 해주 감옥을 거쳐
마침내 서울로 압송되었다.
엄중한 문초와 혹독한 고문을 가하는 취조 과정에서 일찍이
천주교를 위해 해외로 파견된 샌학생이었음이 밝혀졌다.
한편 김대건 신부가 갖춘 깊은 학식과 해박한
세계 지식은 박해자들을 놀라게 했다.
김대건 신부는 옥중에서 박해자들의 요청으로
예쁘게 채색한 영어로 된 두 장의 세계 지도를 그려 올렸다.
6년간의 마카오 유학과
4년여의 중국 만주 대륙에서의 활동을 통해 얻은
학식과 견문은 놀라운 것이었다.
김대건 신부의 신분과 경력, 그리고 학식이 유별남에 놀란 정부당국은
40여 차례나 심문했고 국왕을 모신 어전회의를 열어 거듭 논의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때 8월 9일 프랑스 함대가 홍주 앞바다에 나타나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나 시부,
샤스탕 신부의 문제를 가지고
문책 소동을 벌이며 국교를 열 것을 요구해 왔다.
일찍이 청국에서의 아편전쟁 소식을 통하여
서구 식민주의 국가 의 침략행위를 알고 있던 조선정부는
당황해 하며 김대건을 활용할 방도를 강구하려 했다.
그를 프랑스 함대에 보내
전날 세 선교사를 죽이게 된 것에 대한 해명과 함께
앞으로의 화의를 제의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김대건도 살아남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1년 후에 다시 오겠다며
8월 10일 조선을 떠나고 말았다.
조정은 다시 강경한 쇄국정치를 주장하면서
김대건 새신부를 통외(通外)의 위험분자로 몰아서
마침내 최후의 단안을 내려 군문 효수형을 내린다.
1846년 9월 16일 한국의 수선탁덕 김 대건은
한강물 굽이쳐 흐르는 서울 성밖 새남터에서
휘광이가 내려치는 칼날 아래 참수치명했다.
26세의 젊은 나이에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굽힐 줄 모르는
김대건 신부는 처형을 받기에 앞서
"여러분 나의 말을 들으시오! 내가 외국 사람과 교제한 것은
오직 우리교를 위하고 우리 천주를 위함이었으며
이제 죽는 것도 천주를 위한 것이니
내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천주교를 믿으시오"라고
믿음과 신념에 찬 말을 외치고 의연하게 순교의 피를 흘렸다.
수선탁덕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비록 서품을 받은 지 1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성무집행을 했으나
그의 생은 참으로 굵직한 삶이었다.
동북 아시아를 무대로 전개되었던 그의 활동과 국위 구령과 개화를 위해
헌신한 참 삶의 실천은 종교적으로
한국인 성직자 특유의 가능성을 입증한 것이다.
페레올 고 주교는 김대건 신부를 잃은 후
파리외방전교회의 신학교 교장 바랑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 젊은 조선인 신부를 잃은 것은
조선교회에 거의 갚기 어려운 불행입니다.
나는 아비가 그 자식을 사랑하듯이 그를 사랑했습니다.
오직 그의 천국에서의 행복을 생각해서
그를 잃은 슬픔을 겨우 스스로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는 동포 중에서 가장 먼저 사제 성직에 오른 분으로
그것도 오늘까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열렬한 신앙과 진지하고 성실한 공경과 놀란 만한 웅변의 사람으로
한 번만이라도 그와 접촉한 교우는
곧 존경과 사랑을 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고 했다.
김대건 신부의 이러한 영광된 순교는 조선교회의 영원불멸할 명예이며
완전한 승리와 불멸의 약속의 보증이 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순교한 지 11년 후인 1857년 9월 23일에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가경자 칭호를 받게 되고,
1925년 7월 5일에는 북자위에 오르게 되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1949년 11월 15일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성직자들의 대주보를 받들게 되고,
7월5일을 김대건 신부의 축일로 정하게 되었다.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에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03위 한국 순교복자들을 성인으로 선포하면서
김대건 사제 순교자를 그 첫 자리에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