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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2년 3월 27일 (일) [자] 사순 제4주일

Berardus 2022. 3. 26. 06:01

[금주의 말씀묵상]

2022년 3월 27일

(일) [자] 사순 제4주일

제1독서 여호 5,9ㄱㄴ.10-12

제2독서 2코린 5,17-21

복음 루카 15,1-3.11ㄴ-32


못난 아들 감싸 안은 아버지, 주님 사랑은 이런 것

돌아온 자식 맞이하는 부친 모습 그려낸 명화
인간을 보호해주시는 하느님 사랑과 축복 의미
인생의 목적은 모두 ‘자비로운 아버지’가 되는 것



복음의 정수(精髓)요 핵심인 탕자의 귀향

하느님의 연인(戀人) 헨리 나웬 신부(1932~1996)가

빛과 어둠의 마술사 렘브란트(1606~1669)의 걸작 ‘탕자의 귀향’을 접한 후,

깊이 감상하고 묵상하게 된 과정이 정말 흥미롭습니다.

1983년 헨리 나웬이 51세가 되던 해, 시몬이란 친구를 방문했다가,

사무실 안쪽 문에 붙어있는 복사판 그림 한 장을 보게 됐는데,

바로 탕자의 귀향이었습니다. 처

음 접했을 때의 강렬한 느낌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자주색 망토를 넉넉하게 걸친 남자가

남루한 차림으로 무릎을 꿇은 소년의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뜨거운 친밀감, 붉은 망토의 온화한 톤,

소년의 겉옷에 반사되는 황금빛, 그리고 두 존재를 한꺼번에 휘감고 있는

신비로운 광채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일찍이 느낀 적이 없는 감동을 주었던 건

무엇보다도 소년의 어깨를 감싸 쥔 노인의 두 손이었습니다.”

사실 헨리 나웬이

탕자의 귀향을 처음 대면했던 시기, 그는 많이 지쳐있었습니다.

미국 전역을 순회하는 강연을 막 마치고 돌아왔던 것입니다.

남아메리카의 비참한 현실과 불의를 청중들 앞에서 폭로할 때까지는 괜찮았습니다.

함께 힘을 모아 세상의 악과 맞서 싸우자고 연단에서 외칠 때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일정이 끝나고 텅 빈 집으로 돌아오자

엄마 치마폭에 매달려 엉엉 울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처럼 나약해졌습니다.

헨리 나웬은 그렇게

탈진해있던 상태에서 탕자의 귀향을 대면한 것입니다.

그림을 보는 순간 그는 만사 제쳐놓고 둘째 아들처럼 아버지 품에 푹 안기고 싶었답니다.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곳,

아버지 집처럼 편안한 곳에서 아무 생각 없이 두 다리 쭉 뻗고 쉬고 싶었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그는 하버드 대학교 교수직을 미련 없이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캐나다 토론토에 위치한 장애인들을 위한 공동체 ‘새벽’의 일원이 됩니다.

영원한 아버지 집에 대한 그의 간절한 갈망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입니다.

새벽 공동체로 건너가기 전

헨리 나웬은 탕자의 귀향 진품을 관람하기 위해 러

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예르미타시 미술관을 방문합니다.

그림 안에는 아버지와 둘째 아들 외에 4명의 인물이 더 등장하는데,

어떤 면에서 그들은 관찰자요 방관자, 구경꾼들입니다.

그는 자신 역시 오랜 세월 동안 관찰자요 방관자,

구경꾼으로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구경꾼이 아니라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합니다.

둘째 아들처럼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그분 품 안에 꼭 안기고 싶어 합니다.

“저도 둘째 아들처럼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은 채로,

그분의 가슴에 귀를 바짝 들이댄 후,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오랜 시간 아버지 심장의 그 박동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습니다.”

탕자의 귀향을 앞에 두고 묵상하던 헨리 나웬은

그 작품이 바로 자신을 위한 것이란 생각이 점점 짙어졌습니다

. 하느님이 그에게 들려주시려는 말씀의 핵심뿐만이

그 작품 안에 다 담겨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림 안에 복음의 정수, 핵심, 총 요약이 들어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비로운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탕자의 귀향에 대한

헨리 나웬식 묵상의 결론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우리 안에는 둘째 아들, 그리고 첫째 아들, 최종적으로 아버지,

세 인물이 공존합니다. 탕자의 귀향 스토리는 둘째 아들로부터 시작해서

첫째 아들로 넘어가고, 마침내 아버지에게서 끝납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자비하신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돌아온 탕자를 기쁘게 맞이하는 아버지의 분위기는 참으로 따뜻합니다.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데서 오는 기쁨과 행복이 존재합니다.

죽을죄를 짓고 불안해하는 둘째 아들을 다독여주며 안심시켜주는 모습에서

너그럽고 지혜로운 한 노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에서 주목할 부분이 두 손입니다.

두 손의 크기가 우선 다릅니다. 아들의 어깨에 닿은 왼손은 강하고 억셉니다.

마디마디에 꽤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저 만지는 데 그치지 않고 힘을 주고 강하게 움켜쥐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반면 오른손은 어떻습니까? 부여잡거나 움켜쥐지 않습니다.

귀부인의 손가락처럼 세련되고 부드러우며, 우아하고 다정한 분위기입니다.

손을 사뿐히 올려놓은 듯합니다.

어루만지고 토닥이며 위로와 위안을 주고 있는 어머니의 손입니다.

아버지 안에는 모성과 부성이 함께 공존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면서도 어머니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한편으로는 붙잡아 주시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루만져주십니다.

아버지가 걸치고 계시는 큼지막한 외투 역시

우리의 눈길을 끄는데, 큰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색상이 따뜻하고 고운데다 큼지막합니다.

모양도 아치를 닮아서 깃들이기 좋은 환영의 공간입니다.

세상에 지친 나그네들을 쉬어가게 하는 장막처럼 보입니다.

헨리 나웬은 특별한 표현을 합니다.

“새끼를 품고 지키는 어미 새의 날개를 연상시킵니다.”

결국 아버지의 커다란 망토는 보살핌과 보호 속에

안전하게 쉴 수 있는 아버지의 품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고 우리 공동체는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슴을 치며 집으로 돌아오는 한 존재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극진히 환대하고 있습니까?

괜찮다, 다 괜찮다며 다정히 등을 두드려주고 있습니까?

이제 더 이상 너를 놓지 않겠다는 각오로 그를 꽉 움켜쥐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탕자의 귀향을 감상하고 묵상하며,

나는 과연 돌아온 탕자인가?

아니면 첫째 아들인가? 파악하기 위해 고민합니다.

그러나 렘브란트와 헨리 나웬은 그게 아니라고 외칩니다.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모두 다

자비로운 아버지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해진다는 것은 나이에 상관없이

부단히 둘째 아들에서 첫째 아들로,

첫째 아들에서 아버지로 옮겨가고 변환되어 가는 것입니다.

나이를 꽤 먹은

헨리 나웬의 고백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노년기를 살아가는 분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갈 것입니다.

“나이 들어 쪼글쪼글해진 내 두 손을 바라봅니다. 이제는 알겠습니다.

이것은 고통을 당하는 모든 이들에게 내밀라고,

집을 찾아온 모든 이들의 어깨에 내려놓으라고, 하

느님의 그 어마어마한 사랑에서 비롯된 축복을 베풀라고 주님이 주신 손입니다.”(

-헨리 나웬의 「탕자의 귀향」(포이에마) 참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태안 안면도성당의 14처



[한주간 전례]

2022년 3월 28일 (월) [자] 사순 제4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요한 4,43-54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병으로 앓아누워 있는

왕실 관리의 아들을 고쳐 주시는 기적 사건을 전합니다.

요한 복음서의 저자는 이 사건을 “두 번째 표징”(4,54)이라고 명시함으로써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카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기적 사건,

곧 ‘첫 번째 표징’(2,11 참조)을 상기시킵니다.

이 ‘두 번째 표징’으로 앞서 요한 복음 4장 1-42절에서 소개된

“세상의 구원자”(4,42)로서 예수님의 신원이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왕실 관리는 카파르나움에서 카나로

예수님을 찾아와 병들어 누워 있는 아들을 고쳐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외적으로 드러난 기적에 의존하는

왕실 관리의 믿음을 꾸짖으시며 그의 요청을 거절하셨지만,

절박하게 매달리는 왕실 관리의 부탁을 물리치지 못하시고

그의 아들이 살아날 것이라는 ‘말씀’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왕실 관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떠나갔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표징과 기적을 보고 믿었는데(4,48 참조),

그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서 보여 주신

아들의 치유를 체험하면서 더욱더 굳건해졌습니다.

그 결과 왕실 관리의 온 집안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 말씀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서의 저자는 이 치유 사건을 생명의 주인이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는 ‘표징’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눈으로 볼 수 있는 신기한 일이나

기적에만 의존하지 말고 ‘말씀’의 힘을 굳게 믿으라고 요청하십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이 없을 경우

믿음이 쉽게 약해질 수 있는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진만 안젤로 신부)-

2022년 3월 29일 (화) [자] 사순 제4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5,1-16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었다.>

어제 복음(요한 4,43-54 참조)에 이어서

오늘 복음도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두 이야기는 모두 치유 자체가 아니라 치유 기적을 통하여 드러나는

예수님의 정체에 주목합니다.

요한 복음서의 저자가 전하는 예수님의 치유 행위는

특별히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 당신을 계시하시는 ‘표징’입니다(5,17 참조).

예수님께서는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 가에서

서른여덟 해 동안 앓아 온 병자를 만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눈으로 그 병자의 불쌍한 처지를 살펴보시고

그의 병을 고쳐 주십니다.

병자는 예수님의 구체적 행위가 아니라 ‘말씀’으로 치유되었습니다(5,8-9 참조).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 주신 사건은

유다인들과 갈등을 겪는 원인이 되었고 이로써 예수님을 향한

유다인들의 적대감은 커져 갑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비판한 까닭은 그분께서

병자를 고쳐 주신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5,10 참조).

율법에 따르면 누구도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되는데(탈출 20,8-10 참조),

것을 들고 걸어가라는 예수님의 지시는 이 규정을 위반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종교적 관습에 사로잡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아드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일하시며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지켜 주시는 분이시라면,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아드님으로서

아버지 뜻에 따라 일하시는 분이십니다(5,17 참조).

유다인들은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소개하시는 예수님에게

신성 모독의 죄를 씌워 죽이려고 합니다(5,18 참조).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말씀으로

서른여덟 해 동안 앓던 병자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유다인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습니다.

긍정적 반응을 보여 준 카나의 왕실 관리의 모습

(어제 복음 참조)과 차이를 보입니다.

질병의 고통에서 구해 주시는 예수님께 우리는

저마다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정진만 안젤로 신부)-

2022년 3월 30일 (수) [자] 사순 제4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요한 5,17-30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어제 복음(요한 5,1-16 참조)에서

우리는 예수님에게 반감을 품고 그분의 치유 행위를

비난하는 유다인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규정을 위반하셨고,

하느님의 신성을 모독하셨다는 이유로 그분을 고발하였습니다(5,17-18 참조).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누구이신지 깨닫지 못하는

유다인들을 상대로 스스로 변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아버지와 이루는 일치를 강조하십니다.

당신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떠나

홀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으시며,

오직 아버지와 온전히 일치하시어

행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십니다(5,19-20.30 참조).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이루는 관계,

곧 하느님과 맺는 완전한 일치의 상태를 강조하시고자

‘아들’이라는 개념을 여러 차례 사용하셨습니다(5,20.22.23.25.26.27 참조).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행할 때 세상 속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려고 이 세상에 파견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며

아드님을 통하여 구원 계획을 완성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일치하여

생명을 주는 일(5,21 참조)과 심판하는 일(5,22 참조)을 수행하십니다.

아버지에게 유보된 일이 이제는 아들에게 주어진 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부여받은 권한으로

믿는 이에게 생명을 주시고(5,24-26 참조),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5,27-30 참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뜻보다

아버지의 뜻을 먼저 따른 ‘아들’이셨습니다(5,30 참조).

그분의 온 생애가 요한 복음서의 증언을 뒷받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아버지와 맺으신 관계로 초대하시면서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기를 요청하고 계십니다.


-(정진만 안젤로 신부)-

2022년 3월 31일 (목) [자] 사순 제4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요한 5,31-4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오늘 복음의 중심 내용은

어제 복음(요한 5,17-30 참조)에 이어서

유다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변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하여 스스로 증언하실 때

그 증언이 유효하지 못하다는 것을 아시고,

당신의 정체를 확증할 수 있는 증언들을 제시하십니다.

첫 번째, 세례자 요한의 증언입니다(5,33-35 참조).

그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1,6)으로,

장차 오실 분에 대하여 증언하였습니다(1,19-34; 3,27-30 참조).

두 번째,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입니다(5,36 참조).

이 일들은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권한을 위임받아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어 행해졌습니다.

세 번째는, 하느님 아버지의 증언입니다(5,37 참조).

그분께서 직접 당신 아들을 위하여 증언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의 증언입니다(5,39 참조).

성경은 신적 기원을 지니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예수님께서 자리하고 계십니다.

성경의 중심 주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에 관한 다양한 증언을 알려 주셨지만,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생명의 원천이시고

아버지에게서 파견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5,40.43 참조).

유다인들의 이러한 배척은 불신에서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안에 하느님 말씀이 머무르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다고 지적하십니다(5,38.42 참조)

. 그들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나누는 영광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5,44 참조).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 주셨고,

인간의 역사 속에서 그분을 알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이 완고하여 우리 자신만 바라보면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신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이시라는 사실을 알려 주며,

우리의 마음을 열어 그분을 받아들이고 구원자로 고백하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정진만 안젤로 신부)-

2022년 4월 1일 (금) [자] 사순 제4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요한 7,1-2.10.25-30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고대 유다교 전통에 따라

‘초막절’은 포도를 거두어들이는 9월에 지냅니다

(탈출 23,16; 레위 23,33-44; 신명 16,13-17 참조).

이때에 하느님께서 베푸신 한 해의 수확에 대하여 감사드릴 뿐만 아니라,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히브리 백성을 해방하셨던

하느님의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드립니다.

한편 구약 후기 문헌에 따르면, 초막절 축제는 메시아 시대에 펼쳐질

하느님의 축복을 예고하는 예언적 특징도 담고 있었습니다(즈카 14,16-19 참조).

오늘 복음은 이 같은 배경 속에서 읽을 때

더 풍성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초막절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구약의 백성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메시아께서

초막절 축제를 지내시러 예루살렘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당시 유다교 지도자였던 최고 의회 의원들이

그분을 죽일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상황입니다.

구세주 메시아를 눈앞에 두고서 알아뵙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유다인들, 그리고 예루살렘 주민들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이와 비슷한 상황을

우리도 일상에서 때때로 경험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복음 정신과 신앙의 가치를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세상 속에 매몰되어 현세적 가치를 좇을 것인가?

이 갈림길에서 종종 갈팡질팡합니다.

이처럼 나약한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는

참된 길이신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정진만 안젤로 신부)-

2022년 4월 2일 (토) [자] 사순 제4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요한 7,40-53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오늘 복음에서는 유다인들과

예수님 사이의 갈등이 깊어지는 상황이 그려집니다.

이야기 속 등장인물인 군중, 성전 경비병들, 수석 사제들, 바리사이들,

니코데모 사이에서도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여러 부류로 나뉩니다.

첫 번째로, 군중은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라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시며(마태 1,1 참조),

베들레헴 출신이시라는(마태 2,1; 루카 2,4 참조) 사실 관계조차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분을 거부합니다.

두 번째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성전 경비병들에게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라며 나무랍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잘못된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를 저지르며,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세 번째로, 니코데모는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라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바리사이들에게서 타박만 듣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수님을 어떤 메시아로 생각합니까? 혹시 우리의 신앙생활이,

각자가 원하는 모습을 그분께 ‘투사’하는 것에 머무르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바라보는 유다인들의 다양한 모습을

우리 각자의 모습에 비추어 바라보아야 합니다.


-(정진만 안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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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봄인 듯 봄이 아닌 듯 한 날씨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주님의 부활이 다가오고 있지만
실감이 아직 나지 않는 것은
저만의 느낌일까요?

그래도

이번 주에는 4월이 시작됩니다.
따뜻한 봄을 기대하며
주님의 부활을 준비합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