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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2년 3월 20일 (일) [자] 사순 제3주일

Berardus 2022. 3. 19. 05:06

[금주의 말씀묵상]
2022년 3월 20일 (일)

[자] 사순 제3주일

제1독서 탈출 3,1-8ㄱㄷ.13-15

제2독서 1코린 10,1-6.10-12

복음 루카 13,1-9


있을 수 없는 일 안에 계시는 하느님

이집트 떠나 인생 역정 겪던 모세
불타는 나무에서 하느님 체험하고
‘이스라엘 해방’ 역사적 사명 받아

불합리하고 불의한 현실 속에서도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


제정 러시아 시절, 가난한 구둣방집 아들

이오시프 주가시빌리는 독실한 정교회 신자였던 어머니의 바람대로

신학교에 들어가서 엘리트 교육을 받습니다.

남달리 영특했던 주가시빌리는 공산주의 이론을 접하면서

신앙으로부터 멀어져 갑니다.

혈기 넘치는 신학생 눈에는 불의한 세상을

단번에 갈아엎지 않으시는 하느님이 영 못 미더웠나 봅니다.

결국 신학교를 그만두고 혁명의 길에 들어선 그는 폭력적인 독재를 통해

자기 이념에 어긋나는 이들을 사정없이 숙청합니다.

정치깡패들을 모아 전투적 무신론자연맹을 만들고

종교 말살을 시도했던 이 독재자는 자기 이름도 스탈린(강철인간)으로 바꿉니다.

무엇이 촉망받던 신학생을 무신론자요

피의 학살자로 변하게 했는지 추측이 분분합니다만,

스탈린이 자기 생각과 다른 하느님의 모습에 실망한 나머지

신앙의 길을 떠나고 말았다는 점에는 대개가 동의합니다.

신앙의 길에는 하느님께서

침묵하시는 듯 느껴지는 시간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불확실하고 불의한 세상에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실 하느님을 바랐건만,

정작 그분은 답을 안 주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입니다.

세상이 내 이상과 달리 흘러가고,

하느님이 계신다면 이럴 수 없다 싶을 정도로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드는 때입니다.

그렇게 내 상식을 배반하는 사건,

사람과 세상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일을 겪으면서

“하느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하며 절규하지만,

그 절규는 종종 차가운 침묵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면 어떤 이들은 자기가 가졌던

하느님에 대한 생각들과 배치되는 현실 앞에서 신앙을 등집니다.

아니, 신앙을 등진다기보다 자기가 신앙이라고 생각했던 그 관념을 버립니다.

하지만 신앙은 기존에 가졌던 생각이나 세계관을 확인하고

강화시켜주는 심리적 기제가 아닙니다

. 하느님을 만남으로써 내 좁은 세계를 벗어나 그분께 자기를 의탁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신앙의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첫째 독서는 모세가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모세는 기구한 인생역정을 겪고 여든 살이 되어서야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습니다.

레위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서 이집트 왕가에서 성장한 다음,

유목민 신세가 되기까지 그의 인생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것이었습니다.

왕실의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학대받는 동족을 보고 의분을 참지 못한 나머

지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자가 된 모세였습니다.

세상은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자신의 정당함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모세에게 세상은 이때까지 ‘있어서는 안 되는 일’로 가득 찬 곳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떠돌이 신세가 된 모세를

불타는 떨기나무 한가운데서 부르십니다.(탈출 3,4)

연약한 관목에 불이 붙었는데 타서 없어져 버리지 않는,

상식과 경험을 거스르는 광경이지요.

하느님은 그 한가운데서 모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 시인의 시구처럼,

모세도 의미 없는 삶에서 “고유한 빛깔과 향기”에 걸맞은

삶으로 옮겨 가게 됨을 암시합니다.

이제 모세는 이리저리 떠돌던 이름 없는 양치기에서

이스라엘의 해방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받은 이로 바뀝니다.

그리고 모세가 하느님의 이름을 여쭈었을 때,

하느님은 “나는 있는 나다”라고 대답하시고 당신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

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며

그 이름이 영원히 불리고 기려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에까지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

느님이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겪은

이 놀라운 체험을 통해서 참 신앙인으로 변모합니다.

이전까지 모세에게 세상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로 가득 찬 불합리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있는 자’ 하느님,

언제나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하면서 이제 세상은 하느님의 신비가 깃든 곳,

하느님의 신비에 의해 지탱되고 방향 지워진 현실이 됩니다.

모세는 이 신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새 삶을 시작하게 되지요.

있어서는 안 되는 사건이라고 낙담하지 말고,

이 말도 안 되는 사건 안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현실을 체험할 때

신앙에 눈 뜨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도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 앞에

혼란을 겪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합니다.(루카 13,1)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려던 의로운 이들을 불의한 이방인이 살해한 것입니다.

뭇 사람들 입에서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푸념이 나올 만한 사건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렇듯 불의한 세상과 정의로운 하느님이라는

두 대립되는 관념을 두고 혼란을 겪는 사람들에게 실로암에서

죽은 이들의 사건을 언급하시면서 하느님의 정의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십니다.

사람들은 정의가

이래야 하고 하느님은 저러셔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생각일 뿐입니다.

그 불합리하고 불의한 현실 안에서도 하느님은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계십니다.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고”,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으며”, “그들의 고통을 알고 계시는”(탈출 3,7)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인내로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불합리하고 불의한 현실 속에

고통받는 인간에 대해서 우리가 책임감을 느끼고,

새로운 삶으로 방향을 돌리도록 기회를 주시는

정의로운 하느님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실망스런 현실에 맞닥뜨리게 되면,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보십시오.

그분은 우리가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일하도록 인내롭게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

▲ 태안 안면도성당 14처



[한주간 전례]

 


2022년 3월 21일 (월) [자] 사순 제3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루카 4,24ㄴ-30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


루카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공적 활동을 시작하시는 장소는 나자렛 회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61,1-2 참조)을 선포하시며

당신의 정체와 파견되신 까닭을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에 대한 청중의 반응은 놀라움과 의심이었습니다(루카 4,22 참조).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선포에 이어지는 사건 상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 안에 있던 청중에게

당시 통용되던 격언(루카 4,24; 마르 6,4; 마태 13,57 참조)을 인용하시면서

당신을 예언자와 동일시하십니다.

이어서 구약의 두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가 소개되는데(루카 4,25-27 참조),

이는 예수님의 예언자적 사명과 정체를 입증하기 위함입니다.

엘리야는 과부이자 이방인, 곧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파견되었습니다(1열왕 17,9 참조).

엘리사는 나병에 걸린 이방인, 곧 사회 종교적으로 배제된(레위 14장 참조)

시리아 사람에게 파견되었습니다(2열왕 5,9-10 참조).

예수님께서는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처럼

기름부음받은이(그리스도)로 파견되시어 가장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십니다.

예언자로서 예수님의 신분은 두 예언자와 이루는 관계로 증명되며,

거부와 배척이라는 피할 수 없는 미래의 운명으로 확인됩니다.

예수님의 파견과 복음 선포에 대한

나자렛 군중의 반응은 부정적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적 활동을 시작하시는 시점에서 그들이 보여 준

적대적 반응은 그분의 마지막 때에 온 백성이 보여 줄 모습을 예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대자의 모함으로 죽음에 이르시지만,

놀라운 ‘탈출’(부활과 승천)로 복음 선포를 이어가실 것입니다(사도행전 참조).

우리는 모두 예수님에게서 파견되어 세상에 나가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정진만 안젤로 신부)-

2022년 3월 22일 (화) [자]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8,21-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마태 16,16 참조) 이후

예수님의 시선은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맞으실 사건,

곧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세 번에 걸쳐 예고하십니다(16,21; 17,22-23; 20,18-19 참조).

세 번의 예고 뒤에 각각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어지는데, 특

별히 두 번째 예고 다음에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설교문’(18장 참조)을 삽입하였습니다.

마태오 복음 18장 1-35절은 제자,

곧 교회 공동체의 삶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어는 ‘용서’입니다.

‘용서’는 마태오 복음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로

예수님께서는 이미 산상 설교에서

용서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5,21-26.38-42.43-48; 6,12.14-15 참조).

베드로는 예수님께 죄지은 형제를 몇 번 용서해야 하는지 묻지만,

그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용서의 횟수는 제한할 수 없다고 답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통하여

무제한적 용서에 관한 가르침을 재확인하십니다.

제자들이 죄를 무제한적으로 용서해야 하는 까닭은

작은 이 하나도 잃지 않는 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18,14 참조).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용서에 대하여 한계를 모르시는 분이십니다(18,35 참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용서로써 공동체와 화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죄지은 형제를 기꺼이 용서해야 합니다.

그들도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용서에 대한 체험은 용서에 한계를 두려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냅니다.


-(정진만 안젤로 신부)-

2022년 3월 23일 (수) [자] 사순 제3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17-19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오늘 복음은 산상 설교의

본론(마태 5,17―7,12 참조)을 시작하는 부분입니다.

서론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참행복’을 약속하시고(5,3-12 참조),

이어서 ‘제자들은 누구인지’, ‘제자들은 무엇을 하는 이들인지’,

곧 부름받은 제자들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하여 가르치십니다(5,13-16 참조).

마태오 복음사가는 산상 설교의 본론을 시작하면서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기본 입장을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나 예언서를 완성하시러

아버지에게서 파견되신 분이십니다(5,17 참조).

오늘 복음의 전반부(5,17-18)에는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과 파견되신 이유가 설명되며,

이는 이어지는 마태오 복음 5장 21-48절에서 제시되는

예수님의 율법 해석과 가르침을 위한 기초 원리로 작용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모두 알고 있던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5,21.27.31.33.38.43 참조)을 비판적으로 보셨습니다.

율법을 해석하는 원리는

사랑의 계명(5,43-48; 7,12; 22,40 참조)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계명을 따르는 사람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과 질적으로 구분되는

‘그보다 더 큰 의로움’을 실천해야 합니다(5,20 참조).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의 근본정신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의 내용과 목적을 완성합니다.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이는

작은 계명 하나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5,19 참조).

율법에는 중요한 계명들(신명 5,7 참조)과 가벼운 계명들(신명 22,6-7 참조)이

구별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계명을 실천하라고 요청하십니다.

만약 가르치는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마태 23,3 참조).


-(정진만 안젤로 신부)-

2022년 3월 24일 (목) [자] 사순 제3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11,14-23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서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루카 11,1-13 참조)

이제 군중을 만나십니다.

앞서 제자들과 만남에서 기도를 통하여 드러나는

아버지의 본질이 중점적으로 다루어졌다면,

이제는 반대자와 빚는 갈등과 깊어지는 적대감이 핵심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는 기적을 보여 주시는데,

이에 군중은 세 가지로 반응합니다.

먼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놀라워하지만,

이어서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기적을 일으켰다고

비난하거나 표징을 요구합니다(11,14-16 참조).

이처럼 구마 기적은 한편으로는

신적 능력을 지니신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반대자와 논쟁을 벌이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기적을 지켜보고도 그가 누구이며

무엇을 행하였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반대자는 예수님을

사탄의 하수인으로 설정하여 그분의 활동과 영향력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보여 주신 기적 행위를 변호하십니다.

예수님 당신께서는 사탄의 하수인도 아니시고

마귀들을 제압하는 마술사나 마법사도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시는 기적 행위로 베엘제불의 힘을 뛰어넘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힘을 보여 주고자 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기적 행위를 통하여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역동적 현존을 체험하도록 초대합니다.

만약 누군가 예수님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한다면,

그는 예수님을 베엘제불의 종으로 왜곡하지 않으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또 다른 표징도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진만 안젤로 신부)-

2022년 3월 25일 (금) [백]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은 말 그대로 주님의 탄생 예고를 기념하는 날이다.
예전에는 ‘성모 영보 대축일’이라고 하였는데,

‘영보’(領報)는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천사에게서 들으셨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도 성모님의 모태에서 아홉 달을 계셨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대축일의 날짜는 주님 성탄 대축일에서 아홉 달을 거슬러 가 계산한 것이다.

[복음묵상] 루카 1,26-38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루카가 전하는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1,5-25 참조) 다음에 자리하는데,

이러한 순서는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 파견된 이입니다(7,18-35 참조).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두 단계로 나누어 선포됩니다.

먼저,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아기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하여 예고합니다(1,30-33 참조).

그 아기의 이름은 ‘예수’이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

곧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며,

다윗의 후손으로 그의 왕권을 누릴 것입니다.

다음은, 태어날 아기가 신적 기원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합니다(1,35-36 참조).

예수님의 잉태는 성령께서 마리아 위에 내려오시고

그분의 힘이 마리아를 덮음으로써 일어났습니다.

‘내려오다’와 ‘덮다’와 같은 동사는 하느님의 영과

능력의 신비로운 개입을 비유적으로 표현합니다.

창조적 능력을 지니신 성령의 개입으로 태어날 아기의

신적 정체성이 구체적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예고에 대한

마리아의 반응은 신앙의 모범을 보여 줍니다.

그는 천사를 통하여 전달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세례자 요한의 잉태 소식을 들은

즈카르야의 반응(1,18 참조)과 대조됩니다.

우리는 마리아에게서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이해하고

응답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정진만 안젤로 신부)-

2022년 3월 26일 (토) [자]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18,9-14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비유를 들어 기도에 관하여 가르치십니다.

먼저, 제자들을 대상으로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기도할 것을 당부하십니다(루카 18,1-8 참조).

이어서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

곧 바리사이들(16,15 참조)을 대상으로 또 다른 비유를 제시하시면서

기도의 올바른 방법과 자세를 가르쳐 주십니다.

비유에서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입니다.

그는 율법을 준수하는 경건하고 신실한 유다인을 대표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지역에서 로마인들을 위하여 세금을 걷는 유다인입니다.

바리사이는 다른 사람들을 ‘갈취하고, 불의를 저지르며,

간음하는 이들’의 범주에 몰아넣고 죄인 취급합니다.

아울러 자신이 단식과 십일조 규정을 준수하는 것을 자랑합니다(18,11-12 참조).

이와 대조적으로 세리는 성전에서 다른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하느님의 자비를 구합니다(18,13 참조).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 세리가 의로운 이였습니다.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고 하였지만,

자신의 신앙 행위에 바탕을 둔 자기 확신으로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우월한 신분을 자랑하였습니다.

반대로 세리는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쳤기 때문에

의로움의 상태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한 세리는 하느님을 바라보며

그분에게서 오는 것을 청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는

바리사이들을 넘어서 그리스도인 전체를 향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바리사이의 모습에서 벗어나

세리의 모습을 닮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겸손할 때 하느님께 받을 상도 클 것입니다.


-(정진만 안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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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관심이 코로나에 집중이 되고 있습니다.
확진잔 30만명, 40만명, 60만명
이전에는 생각도 하지 못한 숫자입니다.
그대로 다행스러운 것은 일주일정도 지나면 나아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휴유증이 있을 수 있는 상황이여서
나 부터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과 행동을 보여 줄 때입니다.
모두모두 힘을 내어 이 어려운 상황을 이겨 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