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묵상]
2022년 4월 3일
(일) [자] 사순 제5주일
제1독서 이사 43,16-21
제2독서 필리 3,8-14
복음 요한 8,1-11
있는 그대로, 숨김없이
당신의 영을 채워 축복해주기 위해
모든 인간의 회개를 바라시는 주님
세상 고통 이겨내고 정직한 삶 살며
하느님 나라 입성하는 영광 누리길
지난 3월 8일 저희 신학원에서는 입학식이 있었습니다.
입학미사를 준비하면서 많이 기뻤습니다.
무엇보다 어느 무엇도 예측할 수 없는 혼돈으로 가득 차 버린 세상에서
오직 주님을 향해서 도약하는 결단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가는 축복의 언어로,
제일 귀하고 고귀한 말씀으로 축하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분들 안에 자리한
‘모자람’을 칭찬해 드렸을 뿐입니다.
부디 “하느님의 어리석음”(1코린 1,25)을
더욱 닮아 살아가시길, 기도드릴 뿐이었습니다
. 이야말로 피조물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느님의 더 깊은 진리에
다가가려는 다짐이기에 그랬습니다
. 자신의 처지를 겸손히 인정하는 귀한 고백이기에 그랬습니다.
사순 제5주일입니다. 이제 열다섯 밤만 자고 나면
온 세상에 주님 부활의 축포가 울려 퍼질 것입니다.
언제나, 항상, 변함없으신 주님의 은혜가 온 땅에 쏟아져 내릴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의 희망을 기대하며 한껏 부풀어 오른 마음이
복음 말씀을 읽으며 스러지는 기분입니다.
그날 예수님을 찾았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거스른 행동에
재를 뒤집어쓴 느낌이 드는 겁니다.
그들의 유치한 행동이 너무 치사해서 마음이 언짢은 겁니다.
소위 하느님을 경외하고 섬긴다는 종교인들이
어찌 이렇게나 졸렬할 수 있는지, 어이없는 겁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당시에 바리사이들과 수석 사제들이
예수님을 잡아들이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여의치 않았다는 복음의 전언인데요.
그도 잠깐, 이내 거푸거푸 자행된
‘예수님 죽이기’의 모략이 끊이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속이 타들어 가는 우리네 처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요한 사도는 더 교활해지고 훨씬 교묘해진 그들의 계획이
어둠 속에서 활개를 치던 현장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새삼 그날 그 현장을 지켜보면서도 묵묵하기만 했던 군중들이 야속해지는데요. 그
들 중에는 분명히 그날 이른 아침,
성전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도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아, 이쯤에서 힘없는 사제는 마음이 허탈해집니다.
매일 마음을 모으고 정성을 쏟아서 강론을 준비하고 들려주지만,
빨리도 잊어버리고 팽개쳐지는 현실이 와락 서럽습니다.
잠깐, 사제에게 한없이 요구되는 이해와 사랑과 관용의 무게도 버겁게 다가옵니다.
세상에는 아무 생각 없이 다만 ‘덩달아’ 함께하지 않으면
무리에서 왕따를 당할 것이라는 심약함으로 인해서 한통속으로 뭉쳐,
서슴없이 손에 돌멩이를 움켜쥐는 군중이 산재한 것이 사실이니까요.
그날 주님께서도 그들의
비열함에 마음이 아프고 민망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들이 사탄의 꼬드김에 홀려서
악의 앞잡이가 되어 있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고 속상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눈에는 팽그르르 눈물이 돌았을 것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눈물을 감추시려고 시선을 내려서
땅에 무언가를 끄적이셨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인간이 죄인이지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죄인과 스스로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죄인으로 구별된다는 진리를 밝히십니다.
그리고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자신의 죄를
숨기기에 급급하지 말 것을 당부하십니다.
자신의 죄는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만큼
자신이 지은 죄에서 돌아서기를 촉구하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사로써 영혼이 말끔해지기를 고대하시며
당신께서 손수 우리 영혼을 정갈하게 꾸며줄 수 있기를 소원하십니다.
온 세상이 참회하여서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이 주간 동안만이라도 전혀 예상치 못한
버거운 일들로 혼돈에 휩싸인 세상에서 벗어나기 바랍니다.
온 산야에 여리디여린 새싹을 틔우시며 부활을 일깨우시는 그분께 주목하기 바랍니다.
이야말로 “땅이 있는 한 씨뿌리기와 거두기,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않으리라”(창세 8,22)는
약속에 충실하신 주님 손길임에 감사드리기 바랍니다.
나아가 어느 누가 아닌, 바로 나를 바라보고 계신
주님의 성심에 집중하시길 권해드립니다.
‘나 때문에’ 아프고 쓰라린 그분의 마음을 느끼기 바라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큰 죄도 서둘러 단죄하지 않으시고 우리 안의 양심이
되살아나길 기다리시는 그분 앞에서 솔직해지시길 바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생명을 창조하고 계십니다.
모든 인간의 생명 안에 당신의 영을 채워 축복하고 계십니다.
추한 죄로 더럽혀지고 고통으로 상처 입은 삶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새 힘을 넣어주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삶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꾸미고 확장시키십니다.
때문에 그날 당신 아들이
세상에서 당한 갖은 고통의 흔적을 고스란히 받아들이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지닌 아픔, 우리가 겪는 고통, 우리에게 각인된 죄악의 너절함마저도
그분께는 천국을 위한 소재임을 알려주는 것이라 믿습니다.
제아무리 죄로 인해서 난도질을 당한 삶을 살았을지라도 회개하고 돌아서면
얼마든지 그분의 나라에 입성할 수 있다는 몹시 중요하고 대단히 소중한 가르침이라 믿습니다.
사순 시기의 막바지,
이제 보름만 지나면 나를 위해서 ‘다시’ 죽으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십니다.
우리의 지금 이 모습 그대로, 그 무엇도 어떤 것도 숨기지 않는 정직함으로
그분께로 다가가는 은혜를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그렇게 진정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어리석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천국의 가족으로 승격하시길, 소원합니다.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원장)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2년 4월 4일 (월) [자] 사순 제5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요한 8,12-20
<나는 세상의 빛이다.>
요한 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입니다.
그래서 이 넷째 복음서는 1장에서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라고
장엄하게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소개한 다음,
성부 하느님의 창조 행위가 성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고
그분께서 바로 메시아,
곧 세상의 구원자이시며 세상의 빛이시라고 복음서 전체에서 전합니다.
이로써 요한 복음서의 저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이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에 관하여 증언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 증언은 유효하지 않다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 심판하지만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심판을 하여도 내 심판은 유효하다. 나 혼자가 아니라,
나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함께 심판하시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메시아, 곧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의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라고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위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입니까?
그분께서 세상의 구원자이시며 세상의 빛이시라고 고백하며 증언합니까?
인간적 두려움, 근심과 걱정 앞에,
또는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벼랑 끝에 서서,
과연 우리 신앙인들은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지요?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2년 4월 5일 (화) [자] 사순 제5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8,21-30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
제1독서에서 불 뱀과 구리 뱀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이집트에서 해방된 히브리 백성은 광야 생활을 하며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불 뱀들을 보내셨고,
불 뱀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물어 죽이기 시작합니다.
곧이어 백성이 모세에게, 모세가 하느님께 간청하자,
하느님께서는 기둥에 구리 뱀을 만들어 매달아 놓게 하십니다.
그 결과, 불 뱀에 물렸던 자들도 구리 뱀을 바라보고 다시 살아납니다.
여기서 불 뱀은 저주와 죽음을, 구리 뱀은 구원과 생명을 상징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향하여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당신께서 십자가 위에 높이 올려지시어
저주받은 죄인처럼 돌아가실 것을 예고하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 영광스럽게 현양되실 그리스도께서는
구약 성경의 구리 뱀과 같이, 죄와 죽음의 저주 속에 갇힌 인류를 구원과
생명으로 이끄시는 구원자이시라는 사실이 세상에 드러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마음이 광야 생활을 하던 히브리 백성처럼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민수기 이야기 속의 불 뱀에게 물린 이들과 같이
저주와 죽음의 상태에 머무르는 것은 아닐까요?
특별히 미사 때마다 높이 들어 올려지는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바라볼 때,
우리는 구약의 구리 뱀을 바라본 이스라엘 백성처럼 영원한 생명과 참된 구원으로 초대됩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2년 4월 6일 (수) [자] 사순 제5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요한 8,31-42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신원은
구원의 보증 수표처럼 이해됩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에 따르면 세 가지 약속,
곧 수많은 후손과 땅과 축복이라는 선물이
상속 재산처럼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창세 17장 참조).
유다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중요시한 이유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복음을 읽으면
유다인들과 예수님의 대화가 입체적으로 다가옵니다.
복음 속 유다인들뿐 아니라 인류는 죄의 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그분 말씀 안에 머무른다면,
이 믿음의 진리는 믿는 이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믿는 이들에게
선사하시는 자유는 정치적 자유도 아니며,
인간적 성찰과 사유로 얻게 되는 단순한 내적 자유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자유는 훨씬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면서 얻게 되는 자유로서,
믿는 이들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해 주는 능력입니다.
이 자유는 예수님을 통하여 믿는 이들에게 거저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겉으로 드러나는 칭호나 명예 같은 것들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느님과 이루는 내적 친교와 일치를 생각과 말과 행위로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2년 4월 7일 (목) [자] 사순 제5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요한 8,51-59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어제 복음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둘러싸고
유다인들과 예수님께서 벌이신 설전이 소개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아브라함과 예수님의 권위가 중심 주제로 떠오릅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라는 유다인들의
날 선 반응이 이를 잘 드러냅니다.
이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을 지극히 인간적인 방식으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아브라함을 넓은 지평에서 바라보십니다.
곧 세상 창조와 인류를 향한 구원의 역사라는 ‘큰 그림’ 속에서
당신과 아브라함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세상 창조의 원리가 되신 ‘로고스’이신 성자께서는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시고 훌륭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다인들은
이처럼 위대한 구원의 진리를 눈앞에 두고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각자의 색안경을 끼고
근시안적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것들에서 인과 관계를 찾으려 하거나,
갑작스럽게 닥친 불행이나 위험을 왜곡된 관점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 관점이 기복적이거나
인간적인 방식으로 좁아지기보다,
오히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인류 구원의 역사라는 큰 그림 속에서
더 넓은 시야를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2년 4월 8일 (금) [자] 사순 제5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요한 10,31-42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사순 제5주간에 읽게 되는 복음은
유다인들과 예수님 사이의 긴장 관계가 점차 고조되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돌을 집어 던지려고까지 합니다.
이 같은 위급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다음의 긴 담화를 하시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유다인들은 왜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고 합니까?
요한 복음에 나오는 유다인들은 그 이유를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하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사람이면서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이는 신성 모독이라는 논리입니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기적’이라는 낱말 대신, ‘표징’이라는 낱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다른 공관 복음서들이 예수님의 ‘기적’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면,
요한 복음서는 기적이 ‘표징’으로서 담고 있는 의미에 더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보고,
그분께서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분이심을 깨달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일상에서 겪는 여러 가지 일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합니다.
그 작은 일들 안에서 하느님의 표징을 찾으려 끊임없이 애를 씁니다.
우리 각자에게 선물처럼 주어진 오늘 하루의 일들 안에서
하느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 그 의미를 곰곰이, 차분하게 성찰해 봅시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2년 4월 9일 (토) [자] 사순 제5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요한 11,45-5
<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리라.>
복음에서 유다인들 가운데 종교 지도자들이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죽일 것을 결의하는 과정이 그려집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분을 거부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유다교 내에서 기득권을 쥐고 있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후자에 해당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많은 표징을 믿고 따르는 유다인들과
이를 통하여 군중이 동요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들의 기득권을 한순간에 무너뜨리실 수 있을 만큼,
예수님을 위협적으로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해의 대사제였던 카야파가 말을 잇습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요한 복음서의 저자는 주님의 수난 과정을 그분의 부활 사건에 비추어 해석하면서,
카야파의 발언이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적 차원을 지닌다고 여겨 다음을 덧붙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예수님에 관한 종교적 차원의 담론을
정치적 차원으로 교묘하게 옮겨 가는 카야파의 모습에는
기득권과 체제 유지를 지향하는 정치적이며 이기적인 마음이 숨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얄팍한 속셈과 계산,
속임수에 따라 예수님을 죽이기로 한 바로 그 결정이,
사실은 인류 전체에게 그리스도를 통한
보편적 구원을 가져오는 십자가 사건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이기심과 거짓은 하느님의 이타적 사랑과
진실을 명확히 드러내는 도구일 따름입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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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낮의 햇볕과 나무에
이파리가 점점 많아지는 것을 보면
이젠 봄인 듯 싶습니다.
길가의 노란 개나리들이
어느 새인가 활짝 피고 있고
사람들의 옷차림이 점차 가벼워 지는 것을 봅니다.
이런 봄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우리도 기도와 보속으로 준비해야겠습니다.
-Berar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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