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사순 제3주일
있을 수 없는 일 안에 계시는 하느님
제1독서 탈출 3,1-8ㄱㄷ.13-15
제2독서 1코린 10,1-6.10-12
복음 루카 13,1-9
이집트 떠나 인생 역정 겪던 모세
불타는 나무에서 하느님 체험하고
‘이스라엘 해방’ 역사적 사명 받아
불합리하고 불의한 현실 속에서도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
제정 러시아 시절,
가난한 구둣방집 아들 이오시프 주가시빌리는
독실한 정교회 신자였던 어머니의 바람대로
신학교에 들어가서 엘리트 교육을 받습니다.
남달리 영특했던 주가시빌리는 공산주의 이론을 접하면서
신앙으로부터 멀어져 갑니다.
혈기 넘치는 신학생 눈에는
불의한 세상을 단번에 갈아엎지 않으시는
하느님이 영 못 미더웠나 봅니다.
결국 신학교를 그만두고 혁명의 길에 들어선 그는
폭력적인 독재를 통해
자기 이념에 어긋나는 이들을 사정없이 숙청합니다.
정치깡패들을 모아
전투적 무신론자연맹을 만들고 종교 말살을 시도했던 이 독재자는
자기 이름도 스탈린(강철인간)으로 바꿉니다. 무
엇이 촉망받던 신학생을 무신론자요
피의 학살자로 변하게 했는지 추측이 분분합니다만,
스탈린이 자기 생각과 다른 하느님의 모습에 실망한 나머지
신앙의 길을 떠나고 말았다는 점에는 대개가 동의합니다.
신앙의 길에는 하느님께서
침묵하시는 듯 느껴지는 시간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불확실하고 불의한 세상에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실 하느님을 바랐건만,
정작 그분은 답을 안 주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입니다.
세상이 내 이상과 달리 흘러가고, 하느님이 계신다면
이럴 수 없다 싶을 정도로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드는 때입니다.
그렇게 내 상식을 배반하는 사건,
사람과 세상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일을 겪으면서
“하느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하며 절규하지만,
그 절규는 종종 차가운 침묵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면 어떤 이들은 자기가 가졌던
하느님에 대한 생각들과 배치되는 현실 앞에서 신앙을 등집니다.
아니, 신앙을 등진다기보다 자기가 신앙이라고 생각했던 그 관념을 버립니다.
하지만 신앙은 기존에 가졌던 생각이나 세계관을 확인하고
강화시켜주는 심리적 기제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만남으로써 내 좁은 세계를 벗어나
그분께 자기를 의탁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신앙의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첫째 독서는 모세가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모세는 기구한 인생역정을 겪고 여든 살이 되어서야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습니다.
레위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서 이집트 왕가에서 성장한 다음,
유목민 신세가 되기까지 그의 인생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것이었습니다.
왕실의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학대받는 동족을 보고
의분을 참지 못한 나머지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자가 된 모세였습니다.
세상은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자신의 정당함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모세에게 세상은 이때까지 ‘있어서는 안 되는 일’로 가득 찬 곳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떠돌이 신세가 된 모세를
불타는 떨기나무 한가운데서 부르십니다.(탈출 3,4)
연약한 관목에 불이 붙었는데 타서 없어져 버리지 않는,
상식과 경험을 거스르는 광경이지요.
하느님은 그 한가운데서 모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 시인의 시구처럼,
모세도 의미 없는 삶에서 “고유한 빛깔과
향기”에 걸맞은 삶으로 옮겨 가게 됨을 암시합니다.
이제 모세는 이리저리 떠돌던 이름 없는 양치기에서
이스라엘의 해방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받은 이로 바뀝니다.
그리고 모세가
하느님의 이름을 여쭈었을 때,
하느님은 “나는 있는 나다”라고 대답하시고
당신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며
그 이름이 영원히 불리고 기려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에까지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이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겪은
이 놀라운 체험을 통해서 참 신앙인으로 변모합니다.
이전까지 모세에게 세상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로 가득 찬 불합리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있는 자’ 하느님, 언제나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하면서
이제 세상은 하느님의 신비가 깃든 곳,
하느님의 신비에 의해 지탱되고 방향 지워진 현실이 됩니다.
모세는 이 신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새 삶을 시작하게 되지요.
있어서는 안 되는 사건이라고 낙담하지 말고,
이 말도 안 되는 사건 안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현실을 체험할 때 신앙에 눈 뜨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도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 앞에 혼란을 겪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합니다.(루카 13,1)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려던 의로운 이들을 불의한 이방인이 살해한 것입니다.
뭇 사람들 입에서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푸념이 나올 만한 사건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렇듯 불의한 세상과
정의로운 하느님이라는 두 대립되는 관념을 두고
혼란을 겪는 사람들에게 실로암에서 죽은 이들의 사건을 언급하시면서
하느님의 정의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십니다.
사람들은 정의가 이래야 하고
하느님은 저러셔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생각일 뿐입니다.
그 불합리하고 불의한 현실 안에서도 하느님은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계십니다.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고”,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으며”, “그들의 고통을 알고 계시는”(탈출 3,7)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인내로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불합리하고 불의한 현실 속에
고통받는 인간에 대해서 우리가 책임감을 느끼고,
새로운 삶으로 방향을 돌리도록 기회를 주시는
정의로운 하느님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실망스런 현실에 맞닥뜨리게 되면,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보십시오. 그
분은 우리가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일하도록 인내롭게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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