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묵상]
2022년 3월 13일 (일) [자] 사순 제2주일
제1독서 창세 15,5-12,17-18
제2독서 필리 3,17-4,1
복음 루카 9,28ㄴ-36
주님이 보여주신 밤하늘 별빛처럼 살아가리
아브라함에게 후사를 약속하시고
반짝이는 별들을 보여주신 하느님
예수님 변모 바라보는 제자들처럼
주님 주실 영광 온전히 받게 되길
■ 가야 할 길을 계속 갈 수 있게 해 주는 반짝임
오늘 독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고향을 떠나왔고,
약속의 땅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는 여정이 쉽지 않았고 흔들리기도 합니다.
기근이 들었을 때 살길을 찾아서 이집트로 내려가기도 하고,
거짓말을 하기도 합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대를 이을 자식이 없으니,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그런 아브라함에게 후사를 약속하십니다.
많은 후손을 갖게 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밤하늘의 별들을 보여 주십니다.
밤하늘의 빛나는 별들을 보며 아브라함은 믿음을 가졌고,
또 가야 할 길을 계속 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러한 반짝임이 나에게는
어떠한 것이었을지 생각해 보았는데요.
떠오르는 것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신학교에 사는 다른 몇몇 신부님은
신학교에서 사는 것을 다시 양성받는 시간이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양성하면서 새롭게 양성되는 느낌이 있어서 그런가 봅니다.
아이를 낳아 기르다 보면, 부모 마음을 알게 되고
성숙해지는 것과 비슷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어렵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다시 직면하고 바라보게 될 때 그렇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신학생 시절에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말이 없다. 존재감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학교에 와서 여러 신부님들과 함께 있다 보니 그 모습이 여전합니다.
그 시절과 달리 변한 게 없습니다.
비슷하게 말도 없고 존재감도 없습니다.
그래서 부족함도 느끼고
다른 소임을 받고 싶다는 생각도 조금 했었는데요.
그런 순간에도 작은 빛을 만나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개강피정 지도를 해 주신 신부님의 강론 내용입니다.
신부님께서 “여러 가지 부족한 면이 있더라도 ‘주님 제가 이렇습니다.’ 하고
주님께 보여 드리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봉헌해 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주님 제가 이렇습니다’라는 그 말씀을 들었을 때, 마음이 참 편안해졌습니다.
아마 그 말씀이 부족함에 집중돼 있던 제 시선을 주님께 향하게 하고
, 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을 반짝 바라보게 해 주어서 그랬나 봅니다.
변한 건 없는데 왠지 말이 없어도 불편하진 않았습니다.
반짝 하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는 생각을 했는데요.
학기가 지나도 마음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때 윗분한테 이야기를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을 하면서,
합당한 이유가 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스스로 학교에 있으면서 좋은 것이 무엇인지,
힘든 것은 무엇인지를 적어 보았습니다. 좋은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물론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몇 가지 있었습니다.
고민하던 중에 성무일도 성경소구 말씀이 다른 마음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욥기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았는데
나쁜 것이라고 하여 어찌 거절할 수 있단 말이오?”
그 말씀이 ‘힘들어 하는 그 몇 가지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게 해 주었습니다.
교회가 파견한 곳에 심겨서 바로 자라면 좋겠지만,
심겨서 뿌리를 내리는 데 시간도 걸리고 몸살이 걸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신부님의 강론과 성경 말씀이
반짝하고 가야 할 길을 계속 걸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 내 안의 반짝임
최근에 워크숍을 다녀왔는데요.
나를 아는 작업 중에 인상 깊었던 것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긴장하지 않았을 때의 내 모습을 생각해 보는 것이었는데요
. 제가 말도 조금 하고, 친밀감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평소에는 잘 드러나 보이지 않아서 낯설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다른 분이
나를 바라봐 주고 표현해 주었던 내용입니다.
워크숍을 하는 동안 저는 말이 별로 없었습니다.
또 신부여서 그런지 식사할 때 가까이 와서
함께 식사하려는 분들도 적었습니다.
주로 원장 신부님과 둘이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혼자 생각하기에 ‘다른 사람들이 나를
불편하고 어렵게 생각할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나를 바라봐 주는 편지에서
‘신부님의 존재만으로 참 평안하고 편안하다’는 글을 써 주셨습니다.
그 말이 예상 밖이었고 특별하게 다가왔었습니다.
그 모습들을 왜곡하거나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면
내 것이 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내 것으로 믿고 받아들이면,
내 안의 반짝임을 삶 안으로 가져올 수 있습니다.
반짝하고 빛난 그 모습들에 물을 주고 자라게 하면,
언젠가 온전한 것으로 드러나 보일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바라보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합니다.
그 반짝임을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가 아니라,
언젠가 누리게 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어떨까요?
예수님이 수난과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쳐 영광의 모습을 완성하셨듯이,
우리 안에서도 그러한 과정과 길을 거쳐 우리의 모습으로
온전하게 드러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김기현 요한 세례자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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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간 전례]
2022년 3월 14일 (월) [자]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루카 6,36-38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평지 설교’(루카 6,20-49 참조)의 한 부분입니다.
행복 선언(6,20-23 참조)과 불행 선언(6,24-26 참조),
원수 사랑의 가르침(6,27-35 참조)은
심판과 용서에 대한 가르침에 앞서 소개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시어 평지에서,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증언할 증인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그들에게 가르침을 베푸십니다.
루카 복음 6장 36절은 원수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마무리’하면서,
심판과 용서에 대한 가르침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 6장 37-38절은 사중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명령과 그 결과가 같은 형식으로 네 차례 반복되는데,
처음 두 번은 부정 명령이고 다음 두 번은 긍정 명령입니다.
루카 복음서의 저자는 이러한 대조적 구조를 통하여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고,
용서하며 베풀어야 한다는 행위의 절대적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권고와 명령에 따른 실천은 긍정적 결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는 이는 하느님께 심판도 단죄도 받지 않으며
그분의 용서와 선물을 체험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예수님에게서 파견되어
그분을 증언해야 하는 이들을 위한 행동 기준이자
그들이 지향해야 하는 목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심판과 용서에 관한 가르침으로
제자들이 자비로운 아버지의 속성을 배우고 닮도록 촉구하십니다.
-(정진만 안젤로 신부)-
2022년 3월 15일 (화) [자] 사순 제2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3,1-12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마태오 복음 23장은 21─22장에서 소개된
적대자들과 맞선 충돌을 요약하고, 26─27장에서 다루어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준비합니다.
이 장은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이 중심이 되고 있는데,
그들을 향한 비판을 넘어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을 교육함으로써
공동체의 정체성과 가치를 규정하려는 목적도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23장 1-12절에서 시작된 비판은 이어지는
23장 13-36절에서 더욱 날카로워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비판하십니다.
그들은 유다교 안에서 합법적 교사로서 그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역할과 권한을 인정하십니다(23,1-3 참조).
그러나 그들은 위선 때문에 예수님의 비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23,3 참조).
그들은 권력자의 힘과 지위를 이용하여 짐을 지우고,
특별한 표지를 지니고 다니며 특권을 요구하고
대중 속에서 영예를 찾습니다(23,4-7 참조).
예수님께서는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들을 비판만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지켜야 할 가르침을 제시하십니다(23,8-12 참조).
예수님의 제자라면 결코 ‘스승’이나 ‘아버지’나
‘선생님’으로 불리지 않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하느님을 위하여,
그리고 ‘선생님’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유보되어야 합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은 자신을 낮추고 서로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제자들의 교육을 위한 부정적 본보기로 이용하십니다.
잘못된 행위와 태도는 성장과 발전을 위한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때에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다른 이들을 섬기려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정진만 안젤로 신부)-
2022년 3월 16일 (수) [자]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0,17-28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다.>
마태오 복음 16장 21절부터 20장 34절까지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사건,
곧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준비하는 먹구름이 짙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맞으실 비극적 사건을 세 차례에 걸쳐
직접 예고하십니다(16,21; 17,22-23; 20,18-19 참조).
그 가운데 세 번째 예고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에서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에 이어서
‘섬김’에 대하여 가르치십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아들들의 영광을 요청하자,
이 말을 들은 다른 열 제자는 불쾌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를 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세상의 통치자들이 지닌
권세의 남용을 지적하십니다(20,25 참조).
이어서 하느님 나라를 위한 통치자가 지켜야 할
지침을 제시하십니다(20,26 참조).
이 지침에 따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세상의 통치자들처럼 권력으로 백성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 곧 ‘종’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세상의 통치자들이 드러내는 무능을 보여 주시면서,
대조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윤리적 덕목을 실천하도록 요청하십니다.
제자들이 ‘섬기는 사람’, 곧 ‘종’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서 설명됩니다.
예수님께서 섬기시는 분이셨고,
많은 이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바치셨기 때문입니다(20,28 참조).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말해 줍니다.
섬기는 종이 되라는 예수님의 요청은 우리에게 큰 도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섬기셨고 우리의 종이 되셨기에,
우리는 그분의 십자가에서 희망을 봅니다.
-(정진만 안젤로 신부)-
2022년 3월 17일 (목) [자]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16,19-31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루카 복음 16장에서는 재물에 관한 여러 말씀이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에게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재물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소개되는 비유는 바리사이들을 향한
논쟁(16,15.16-17.18 참조)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16,14)을 반박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비유에서는 세 명의 인물,
곧 부자와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
그리고 아브라함이 등장합니다. 루카 복음 16장 19-31절은
루카 복음서에서 유일하게 등장인물의 이름이 언급되는 비유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이의 현세적 모습은 대조적입니다(16,19-21 참조).
그러나 이들은 죽고 나서 ‘종말론적 역전’을 경험합니다(16,22-24 참조).
부자는 현세에서 안락하고 풍요롭게 살았지만,
그 가까이에 있는 가난한 이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부자는 죽은 뒤에 저승에서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가난한 라자로는 비록 현세에서는 배고프고 비참하게 살았지만,
죽은 뒤에는 아브라함 곁에서 영광과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이의 이름 ‘라자로’는 ‘하느님께서 도우셨다’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엘라자르’가 그리스어로 축약된 표현입니다.
이 이름에 따라 라자로는 현세에서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였지만,
죽음 뒤에 하느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오늘의 비유는 재물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많은 재물을 가지면 타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물에 대한 강한 애착은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길에서
마주하는 커다란 장애물입니다.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경고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합니다.
특히 마지막 말씀은 우리에게 예언이 될 수 있습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도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사도 5,1-11 참조).
-(정진만 안젤로 신부)-
2022년 3월 18일 (금) [자] 사순 제2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1,33-43.45-46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는 21─23장에서
수난 전 예수님의 예루살렘 활동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21,1-11 참조) 뒤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이 다시 시작됩니다(21,23-27 참조).
이 논쟁은 22장까지 이어지는데, 예수님과 반대자 사이에
점차 높아 가는 갈등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포도밭은 이스라엘,
소작인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아들은 예수님, 주인은 하느님 아버지를 가리킵니다.
포도밭 소작인에 관한 비유에 담긴
상징적 의미를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의미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기하고 모함하였으며,
정치적 상황으로 빌미를 만들어 예수님을 돌아가시게 하였습니다.
둘째 의미는, 하느님의 초월적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적대자들의 시기와 모함을 받아 누명을 쓰시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셔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시편 118(117)편 22-23절을 인용하여 예고하였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죽음에서 일으키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비유 이야기를 통하여 거부와 회복,
죽음과 부활이라는 그리스도론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는
‘일상적 현실’을 파괴합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에게 주어야 할 소출이 있었으나
그것을 주지 않았고, 오히려 주인이 보낸 종과 주인의 아들을 죽였습니다
. 파괴된 현실은 지금 우리의 상황을 반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날카롭게 경고하셨듯이,
오늘날 누군가 ‘일상적 현실’을 부정하고 거부하려고 한다면
그도 그 경고에서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일상적 현실’을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아닐까요?
-(정진만 안젤로 신부)-
2022년 3월 19일 (토)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다윗 가문의 요셉은 갈릴래아의 나자렛에서
목수로 일하는 의로운 사람이었다(마태 13,55; 1,19 참조).
그는 같은 나자렛에 살고 있던 마리아와 약혼하였는데,
같이 살기도 전에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하신다.
이러한 사실을 몰랐던 요셉은 파혼하기로 작정하며 고뇌하지만,
천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로써 요셉 성인은 성가정의 수호자가 되어
예수님과 성모님을 보호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또한 성인은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며 거룩한 교회의 보호자다.
[복음묵상] 마태오 1,16.18-21.24ㄱ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합니다.
마태오 복음 1장 2-17절은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다윗을 거쳐 예수님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요약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 이로써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탄생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1장 16절에 따르면,
예수님의 부모는 야곱의 아들 요셉과 그의 아내 마리아입니다.
여기서 마태오는 예수님의 탄생이 성령으로 이루어진 사건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1,19 참조).
요셉의 ‘의로움’은 무엇보다 그가 하느님의 계명,
곧 율법을 충실히 따르는 사람이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러나 엄격한 율법 준수만으로 그의 의로움을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율법(신명 22,20-21 참조)에는
혼인하지 않은 여인이 임신할 경우 받게 되는 형법적 절차가 있었지만,
그는 이를 따르지 않기로 마음 먹습니다.
이처럼 그의 ‘의로움’은 약혼녀 마리아를 향한 사랑, 법규나 규정을 넘어
그 안에 담긴 사람과 생명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온전히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순종한 데 있습니다(마태 1,24 참조).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참신앙의 모습을 배울 수 있습니다.
주님의 천사를 통하여 전해진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뜻을 따라 결정을 내린 요셉은 신앙인의 본보기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 우리는 선택과 결정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정진만 안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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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의 확산이
이제 더욱 가까운 곳에 온 것 같습니다.
본당에서는 많은 신자들이 확진이 되어
미사와 모임에 나올 수 없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강원도 지역의 산불은 아직도 진화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럴 때 일 수록 주님의 보살핌을 간구해 봅니다.
-Berar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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