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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3일 리에티의 복자 안젤로 딴끄레디

Berardus 2022. 2. 12. 18:34
 


 2월 13일

리에티의 복자 안젤로 딴끄레디


FRATE ANGELO TANCREDI DA RIETI
Bl. Angelus Tancredi of Rieti
Beato Angelo Tancredi da Rieti
 
1첼라노 109, 110 에서프란치스코,
그가 몹시도 그리던 곳(뽀르찌웅꿀라)에서 며칠을 쉬고 나서,
그는 죽음의 시간이 임박하였음을 느꼈다.
그때 그는 형제이며 정신적인 아들로 생각하는 두 형제를(완덕의 거울에 따르면
 안젤로 딴끄레디와 레오이다) 불러 부탁하기를 죽음이 다가오고 있으니,
 아니 차라리 생명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으니
기쁨에 넘친 큰소리로 주님께
찬미의 노래를(이는 태양의 노래를 뜻한다) 부르라고 하였다.
갑자기 그는 온 힘을 다하여 다윗의 시편을 큰소리로 읊었다: "
목소리 높이어 주께 부르짖나이다. 소리소리 지르며 주께 비옵나이다.(시편141) ...
이윽고 그가 성서를 가져오라 명하였고, 요한 복음의 다음 구절부터 읽으라고 하였다:
과월절 6일전에 예수께서는 이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셨다."
(요한12,1; 13,1.3.)


 

성 프란치스코의 무덤과 제대

성 프란치스코의 무덤을 중심으로
오른편에는 루피노, 안젤로 형제의 무덤이,
오른쪽에는 레오와 맛세오 형제의 무덤이 있고,
성인의 무덤 맞은편에는 야고바 형제의 무덤이 있다.



 

세 동료 전기(Legenda trium sociorum)
 
"세 동료 전기"는  그 저자가 누구이든지 간에 프란치스코라는
역사적 인물을 아씨시라는 틀 안에서 제시하고자 목적하고 있는
 가장 세심한 전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사료로써 1246-47년경의 작품이다.
모든 사본들이 그렉치오의 세 동료들의 편지(1246.8.11)를 서두에 달고 있다.
이 때문에 "세 동료 전기"로 불리어 오고 있으나,
오늘날 아무도 이것이 "세 동료들의 전기"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래서 "소위 혹은 이른바 세 동료 전기"라 부르는 것이 가장 올바른 호칭일 것이다.
"세 동료 전기"는 "제1첼라노"와 
 스피라의 율리아노를 사료로 택하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요소들을 첨부하고 있으며 "익명의 뻬루지아 전기"를 그대로 따르면서
 새로운 요소를 첨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세 동료 전기"는 후에 "제2생애" 제1부의 주요 원천이 된다.
아씨시의 성인 프란치스코를 강조하고 있음을 볼 때
 아마도 저자는 아씨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제2첼라노"이전의 작품으로 토마스의 "제1생애"를 반박하기 위한 목적도
 아울러 지니고 있는 듯하다.
"세 동료 전기"에서 나타나는 프란치스코는
 지혜로운 상인이요 사업가이며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
 정중하고 예의 바른 젊은이이다.
그리고 프란치스코의 회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나환자와의 만남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데서 프란치스코 자신이
유언에서 언급하는 회개 여정과 가장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성인을 현양할 목적으로
기적 사화를 전혀 전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한마디로 "세 동료 전기"는 아씨시판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청년기의 프란칫코와 회개 및 형제회의 창설 과정 등에 있어서
 가장 정확한 사료로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들과 문제점)-

-오상선바오로O.F.M. 프란치스칸 삶과사상 1999 특집호202-203쪽에서)-


 

주님이 나 프란치스꼬 형제에게 이렇게 회개생활을 시작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1 내가 죄중에 있었기에 나병환자들을 보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역겨운 일이었습니다.
2 그런데 주님이 친히 나를 그들에게 데리고 가셨고 나는 그들 가운데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3그래서 내가 그들한테서 떠나올 때에는 역겨웠던 바로
그것이 내게 있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얼마 있다가 나는 세속을 떠났습니다.
- 복되신 프란치스꼬의 유언중에서-
 
 The Cross that spoke to St. Francis(THE SAN DAMIANO CROSS)
 
"프란치스코야, 가서 무너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
(1205년(말)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의 계시-세동료 5,13)
 
우리 사부 성 프란치스꼬의 축복 (2첼라노 191)
오!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들, 그리고 영원히 축복받은 아들들,
내 말을 듣고 여러분의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
우리는 큰 것을 약속했고 우리에게는 더 큰 것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약속한 것을 지키고 약속된 것을 갈망합시다. 
쾌락은 일시적이고 형벌은 끝이 없습니다.
고통은 짧고 영광은 영원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힌 사람은 적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아멘
-(작은형제회 홈에서)-
 
 
작은 형제회(Ordo Fratrum Minorum) 프란치스칸 강좌에서
 
1.17. 이런 획기적인 사건들 중 하나는 1208년 2월 24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에 맞추어 일어났다.
프란치스코는 미사 시간 중에 복음 말씀을 들었는데,
그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지팡이나 지갑도 없이
사도들을 맨발로 설교하러 파견하는 이야기였다.
그들은 순회자 혹은 순례자가 되어,
그들의 말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평화를 설교해야 했다.
프란치스코는 너무 기뻤다.
그것이 바로 그가 오랫동안 찾아왔던 바였던 것이다.
그는 그가 들은 것을 글자 그대로 실행하려고 한시도 지체하지 않았다.
그는 지팡이와, 신발, 그리고 은수자의 허리띠를 벗어버리고,
 타우(T) 모양으로 된 겉옷을 입고 허리에는 허름한 띠를 매고 맨발로 나갔다.
그는 회개의 은수자 삶에서 사도적 설교가의 삶으로 자신의 삶의 양식을 바꾸었다.
이것이 바로 장차 프란치스칸 운동을 도래케 한 이상이었다. 
 
1.18. 프란치스코가 뽀르찌운꿀라에서
첫 번째 형제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바로 몇 주 후의 일이었다.
그들 중 첫 번째 사람은 아시시의 부유한 젊은이인 Quintavalle의 베르나르도였다.
그는 프란치스코를 자기 집에 초대하여 (우연히도 그의 집은 아직도 아시시에 남아 있다)
저녁식사를 함께 하였다.
밤에 프란치스코는 그 친구의 집에서 묵었는데,
 베르나르도는 프란치스코가 밤새도록 기도하고 있었던 것을 알아차렸다.
그 다음날 아침 베르나르도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프란치스코와 함께 그는 아시시 광장에 있는
 성 니꼴라오 성당으로 가서, 함께 하느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 복음서를 들춰보았다.
세 번이나 책을 펼쳤는데, 다음의 구절들이 나왔다:
 “너희가 완전한 자가 되려거든 가서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서 보물을 갖게 될 것인데,
그런 다음 나를 따르라”(마태 19.21); “여행할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루가 9,3);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루가 9,23). 이 성서 말씀들은
프란치스코가 시작한 복음 운동에 있어서의
삶과 회칙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같은 해인 1208년 4월에
2명의 형제가 더 프란치스코와 베르나르도의 삶에 가담하였는데,
그들은 대성당 참사위원이었던 Pietro Cattani와 Egidio 혹은 Giles(영어식 이름)였다.
 이날은 4월 23일이었다.
그들이 합류하자마자 그들은 둘씩 짝지어 설교 여행을 떠났다.
프란치스코와 Giles(에지디오)는 Ancona의 Marches(마르키아 혹은 마르케)로 갔다. 

1.19. 이 작은 형제 공동체는 그 숫자가 꾸준하게 늘어갔다.
 1208년 가을에 형제들은 리에티 계곡으로 설교하러 갔는데,
그들은 Poggio Bustone라는 불리는 작은 마을에 들르게 되었고
 프란치스코는 거기에서 “buon giorno, buon gente”(좋은 하루, 좋은 사람들)이라는 말로
사람들에게 인사하였다.
프란치스코는 몰두하여 기도하는 시간에 자기 자신에 대한 용서와
 화해의 느낌을 심오하게 체험하게 되었다. 

1.20. 1209년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을 위해 간단한 회칙을 써 주었다.
이것은 주로 앞에서 인용한 복음 내용과 비슷한 복음 구절들로 구성되었다.
그는 대담히도 동료들을 데리고 로마에 가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을 만나
자신들의 생활양식에 대한 인가를 청하기로 결심하였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용감한 행동이었다.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그런 평신도 설교가
그룹에 대해서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사실 교황은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단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복음을 설교하였고, 제도 교회의 성직자에 대해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측면에서 복음적 가치들을 살았다.
교회의 성직자들은 비윤리적으로 복음을 설교하는 것에 대해서와
 추문이 될 만한 그들의 예식들에 대해서 비난하였다.
당시 많은 이단파들이 있었는데, 특히 프랑스 남부 지방과
 이태리 북부 지방에 많이 있었다. 이들 중 카티리파 이단이
 가장 위험한 그룹이었다.
마치 평신도가 교회의 제도에 대항하여 치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통찰력이 뛰어난
정치가였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머리였다.
그는 San Paolo의 Giovanni Colonna 추기경이 데리고 온
이 거지 그룹에 대해서 많은 의구심을 품었지만
그후 프란치스코가 이단에 빠지지 않고 평신도들과 성직자들 사이에서
순수한 개혁을 시도하는 데 있어서 도구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전통에 의하면 교황이 꿈에서 교회를 어깨로 떠받치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프란치스코이다.) 그래서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의 회칙과 생활을 구두로 인준해 주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형제들을 작은 형제들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형제들이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진정한 형제들로서,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minores”로서 살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1.21. 12명의 형제들로 구성된 이들은 기쁨에 넘쳐 아시시로 되돌아 왔다.
그들은 Orte에서 잠시 머문 후, 뽀르찌운꿀라에서 약간 떨어진 Rivo Torto에 정착하였다.
 이곳에서 그들은 몇 달간 극도의 가난 속에서 머물렀다.
한 번은 황제로 선출된 Otto 4세 황제가 교황으로부터 왕관을 받기 위해 가는 중에
 가까운 길을 지나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이 때 형제 한 사람을 보내어 황제의 영광은
 얼마 가지 못할 것이라는 걸 대담하게 알리게 했다.
이 힘없는 형제는 황제 경비대에 의해 곧 저지를 받았으며
 황제의 경비대는 이 형제가 말을 하지 못하게 하였지만,
이 형제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 것에 대해서 매우 기뻐하였다.
 어떤 농부가 형제들이 머물던 그 척박한 장소를 사용하기를
무례하게 요구했을 때에 프란치스코와
그의 형제들은 Rivo Torto를 떠나 뽀르찌운꿀라로 돌아갔다. 
-(작은형제회)-


 

서로 받아들임

사도 바오로는 말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같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받아들이시오."(로마15,7)

만약에 어떤 형제회가 구성원들을 선택할 때
그들의 성격,나이,학력,사상,취미 등을 따지고 고른다면.
이 단체는 복음적 형제회가 되지 못할 것이고 오래 지탱하지도 못할 것이다.
형제들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각자가 가지고 있는 성격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각자는 정화와 회개의 수련을 진실히 밟아야 한다.
이 정화란 각자가 자존심과 자기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다른 형제들에게 답답하게 보이는 각자의 습성이나 악의적 경향을 억제하는데 있다.
복되신 프란치스코는 진정한 작은 형제라면
거룩한 형제들의 생활 습성을 본받고 그들의 행적을 따라야 한다고 언제나 말하였다.

곧 베르나르도 형제의 철저한 신앙과 가난에 대한 사랑,
레오 형제의 단순성과 순결,
안젤로 형제의 친절함,
맛세오 형제의 교양과 사람들에게서 받는 호감,
에지디오 형제의 관상의 정신,
루피노 형제의 항구한 기도의 정신,
쥬니페로 형제의 고통을 이겨내는 인내심,
로디의 요한 형제의 영적, 육체적인 굳셈,
로제리오 형제의 자비심,
그리고 천국이 아니고서는 안정된 곳을 찾지 말아야 한다는 이유로
계속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만 했던 루치도 형제의 거룩한 불안정(완덕85)

이처럼 형제들의 성격은 각각 매우 다양했다.
그럼에도 프란치스코는 이러한 형제들과 같이 기쁘게 살 수 있는 놀라운 방법이 있었다.
그것은 각 형제의 장점만 보는 방법이었다.

 
 
BROTHER EGIDIO FROM ASSISI

성인은 "신분이 높은 형제와 낮은 형제가 한데 어울리기를 바랐고,
지혜있는 형제와 단순한 형제가 형제적 사랑으로 결합되기를 바랐으며,
멀리 떨어져 있는 형제들끼리도 그들이 사랑의 힘으로 묶여져 있기를 바랐다.
우리도 서로의 다양함을 잘 받아들일 때
복음적 기쁨 가운데 머무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그 비결을 제시해준다.
곧 각 형제, 각 자매를 있는 그대로, 즉 하느님이 주신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유언14)
성인은 친히 수하 형제들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인도하는데 실패하여
실망에 빠진 어는 봉사자에게 준 대답에서 이것을 확인한다.

"그들이 보다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었으면 하고 바라지 말고
오히려 있는 그대로 그들을 사랑하십시오"(어느 봉사자7)
항상 형제의 입장에 서서 그러한 경우 남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 기경호O.F.M., 회개하는 형제 자매들의 삶, 재속프란치스코회
 -한국국가형제회, 2003, 484-485쪽에서-


 

I Compagni di San Francesco

퀸타발레의 베르나르도(+c 1241) FRATE BERNARDO DA QUINTAVALLE
까따니의 베드로(+1221) FRATE PIETRO CATTANI
아씨시의 복자 에지디오 (+1262, 축일:4월23일) Frate Egidio di Assisi
아시시의 삽바띠노 Frate Sabbatino d'Assisi
모리꼬 Frate Morico 
필립보 롱고 Frate Filippo Longo
리에티의 복자 안젤로 딴끄레디 FRATE ANGELO TANCREDI DA RIETI
아씨시의 실베스텔(+1240) Frate Silvestro di Assis
까벨라의 요한 FRATE GIOVANNI DELLA CAPPELLA
꼰스딴찌오의 요한 FRATE GIOVANNI DA SAN COSTANZO
아시시의 바르바르 FRATE BARBARO D’ASSISI
베르나르도 비질란찌오 FRATE BERNARDO DI VIGILAN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