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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일 성 발렌티노(발렌타인) 순교자 /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Berardus 2022. 2. 13. 17:18


St Valentine Baptizing St Lucilla-BASSANO, Jacopo

c. 1575. Oil on canvas. Museo Civico, Bassano del Grappa

 

2월 14일

성 발렌티노(발렌타인) 순교자


St.VALENTINE of Rome

San Valentino Vescovo e martire

Died:beaten and beheaded c.269 at Rome;

buried on the Flaminian Way; relics later translated to the Church of Saint Praxedes

Valentino=che sta bene(=that it is well),sano(=healthy),

forte(=strongly),robusto(=sturdy)

 

 

성 발렌타인 데이라는 연인들의 명절은, 로마의 풍요의식을 없애기 위해,

곤봉에 맞고 목잘려 죽은 한 신부를 천주교가 수호성인으로 내세우면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4세기초부터

 로마인들은 매년 루페르쿠스 신 앞에서 젊은 남자들의 통과의식을 거행했다.

그들은 상자에 담겨있는 십대 소녀들의 이름을 임의로 뽑았다.

제비뽑기에 뽑힌 소녀는 동반자가 되어 일년동안

서로 즐기고(때로 성적인 즐거움)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게 하였으며,

그 기간이 끝나면 다시 제비를 뽑았다.

그로부터 8백년이 지난 후 이 관습을 종식시키고자 마음먹은

 초대 교부들은 루페르쿠스 신을 대신할 ’연인의 성자’를 찾았다.

 

 

그들은 약 200년 전에 순교당한 주교 발렌타인이 그럴듯한 후보자라고 생각했다.

서기 269년, 로마의 클로디우스 황제는 금혼령을 내렸다.

그는 남자가 결혼을 하면 집을 떠나 전쟁에 나가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형편없는 군인이 된다고 생각했다.

제국에는 군인들이 필요했고,

사람들의 평판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던 클로디우스 황제는

결혼제도를 폐지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인테람나의 주교였던

 발렌타인은 젊은 연인들을 몰래 찾아오게 해서 결혼식을 올려주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황제는 진노해 연인들의 친구인 주교 발렌타인을

궁궐로 불러들였다.

 

 

그런데 황제는 젊은 주교의 위엄과 확신에 감명을 받아

로마신을 믿도록 개종시켜 처형당하는 불행으로부터 구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발렌타인은 천주교를 포기하기를 거부했다.

오히려 섣불리 왕을 개종시키려 했다.

269년 2월 14일 발렌타인은 곤봉으로 두들겨 맞고 돌팔매를 당한 후 효수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발렌타인은 옥에서 처형을 기다리고 있을 때

간수 아르테리우스의 눈먼 딸과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그녀의 시력을 기적적으로 회복시켰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그는, 그녀에게 ’당신의 발렌타인으로부터’라는 작별인사를 서명했고,

그 작별 인사는 그가 죽은 후에도 계속 남게 되었다.

 

 

St Valentine Basilica

 

교회의 입장에서 볼때

 발렌타인은 루페르쿠스의 인기를 빼앗을 수 있는 이상적인 후보로 보였다.

그래서 496년 교황 겔라시우스는 2월 중순에 거행하는

루페르쿠스 축제를 불법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교황은 로마인들이 운수에 자신을 맡기는 제비뽑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그것은 존속시켰다.

제비뽑기 상자에는 자원한 독신 여자들의 이름대신에 성인들의 이름이 담겨졌다.

 

남녀 모두 종이 쪽지를 뽑았고,

자기들이 뽑은 성인의 삶을 모방해서 다음 해를 살도록 되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이전과는 다른 목적을 가진 다른 게임이었다.

여자를 기대했다가 성자의 이름을 뽑는 것은 많은 로마 젊은이들을 실망시켰을 것이다.

전체 행사의 영적인 주관자는 수호 성인 발렌타인이었다.

시간이 가면서 점점 더 많은 로마인들이 마지못해 기존의 축제를 버리고

 교회의 명절로 그것을 대치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발렌티노 사제는

 같은 이름의 성인 여러 명 중에서 가장 세상에 알려진 분이시다.

발렌티노는 3세기 중엽 로마 교회에서 가장 인망이 높고 덕행으로도 출중했으므로,

그 당시 교회를 박해하고 있던

 클라우디오 황제는 일찍부터 그를 주목하고 그를 불러 배교를 명했다.

그러나 본래 열렬한 신앙을 가진 발렌티노는 배교할 리 만무했다.

그는 어떠한 위협에도 교회를 버리지 않자 황제는 적당한 처치를 하기 위해

 그를 로마 시장(市長)에게 보냈고,

시장은 또한 그를 법관 아스데리오에게 인도했다.

 

발렌티노는 아스데리오의 저택에 들어가자 찬미가를 소리 높이 부르며

"주 예수 그리스도여, 청하오니 이집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천상에서 빛을 내려 주시어

저들을 신앙으로 인도해 주소서!"라고 기도햇다.

 

 

아스데리오는 2년 전부터 소경이 된 딸이 있었다.

그랬기에 지금 성인의 기도 중에 빛이라는 말을 듣고 이를 특별한 의미로 해석해

딸의 눈을 고쳐주는 줄로 생각하고 딸을 성인 앞에 데리고 와서

 시험적으로 딸의 치료를 의뢰했다.

 

발렌티노는 이때야말로 교회가 하느님께로부터 발생되었다는 사실을

실증하는 절호(絶好)의 기회라 생각하고

기적을 이루어 줄 것을 정성껏 하느님께 기도한 후 그 딸의 눈에 손을 대며

"영원한 빛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시력(視力)을 회복해 주시기를 빕니다."라고

기도하자 딸의 눈은 즉시 완치되었다.

 

이런 신기한 일을 친히 목격한 법관 아스데리오는

하느님의 능력의 위대함에 놀라 즉시 개종할 것을 결심하고

 일가족 40인이 모두 성인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견진 성사를 주기위해 교황 갈리스도가

 친히 아스데리오의 저택을 방문했다고 전해진다.

 

 

황제 클라우디오는 발렌티노가 신앙을 버리지 않을 뿐 아니라 그의 힘으로

자기가 신임하고 있던 법관의 집안까지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대단히 분노하여

즉시 병졸들을 파견해 그들을 체포하도록 하고 아스데리오 등은

 오스티아로 끌고가서 참살(斬殺)했고

발렌티노는 가장 미운자로 취급하여 플라미니노의 회당에서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이 날이 270년 2월 14일이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St. VALENTINE of Terni

 

발렌티노 성인은 로마의 사제로서 클라우디우스 로마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치명을 당했고 테제르의 주교이자 의사였다.

그분은 로마에서 열심히 선교하였고, 괴로워하는 사람 ,

가난한 사람 , 아픈 사람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로마의 한 판사가 발렌티노 사제의 선교를 그만 두게 하였는데

 눈이 부자유스러운 아가씨가 발렌티노의 전구에 의해 치유되면서

가족모두가 세례를 받게 되자 황제는 발렌티노와 그 판사를 처형하였다.

발렌티노 성인은 아이나 가축의 병을 잘 고쳐주었기 때문에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세 때부터, 발렌티노 성인의 축일에

사랑 고백의 카드를 성인의 성상에 앞에 놓고 전구했다고 한다.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2월 14일을 발렌티노 축일로 지내는

같은 이름의 또 다른 순교자가 있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St. VALENTINE of Terni-Bishop, Martyr and Patron of Terni

 

로마의 사제이자 의사이던

 성 발렌티노는 끌라우디우스 황제의 크리스챤 박해 때, 로마에서 참수치명하였고,

비아 플라미니안에 묻혔다.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같은 날(2월 14일)에 또다른 발렌티노 축일을 지낸다.

이 발렌티노는 로마에서 60마일 가량 떨어진 떼르니의 주교로서,

집정관 플라치도의 명에 따라 고문을 받다가 참수 치명하신 분이다.

 

많은 학자들은 이 두분의 성인은 동일 인물이며,

로마의 사제이던 발렌티노가 떼르니의 주교로서 순교했다는 것이다.

(Some scholars believe that he and Saint Valentine of Rome are the same person.)

 

그런데 소위 "발렌타인 데이" 즉, 2월 14일에 젊은 남여가

 상대자를 고르고 애인에게 선물을 보내는 풍습은 사실 이 축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한다.

아마도 새들이 이 시기에 짝짓기 시작한다는 이교인들의 관습과

이 축일이 혼합된 것으로 학자들은 생각한다.

-(부산교구홈에서)-

 

 

사랑

 

’발렌타인데이’로 유명한 성 발렌티노는 로마인이었고 사제였으며

신앙 때문에 순교했다는 것 외에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따라서 독신 생활을 한 사제의 이름이 어떻게 사랑하는 이들의

 내밀한 사랑 고백과 동의어가 되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성 발렌티노가 연인들의 수호 성인이 된 까닭은 알 수 없어도,

 왜 특별히 ‘사랑’이라는 덕을 담당할 성인이 있어야 하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사랑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다.

갓난아기에게 필요한 영양과 환경을 제공해도 사랑을 주지 않으면

 죽게 되었음을 관찰한 연구 결과가 발표된 적이 있다.

심지어 나무나 동물들도 사랑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사랑은 모든 생명체를 생명체로 존재케 하는 생명의 본질이다.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인간을 ‘우주의 본질’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인간은 그 이상의 존재, ‘사랑’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사랑받는 존재가 된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사용하지 않고 쌓아 두기만 한다면 결국 우리는 허무가 되고 만다.

사랑은 독점욕이나 의존성, 이기심과 같은 편협한 공간에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의 본질은 주는 것이다.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한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깨닫고 있는가?

나는 내가 사랑받고 있음을 안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2월 14일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성 치릴로 수도자


St. Cyrillus

San Cirillo Monaco, apostolo degli Slavi

Tessalonica(attuale Salonicco,Grecia),inizio sec.IX

- Roma, 14 febbraio 869

Born:827 at Thessalonica, Greece as Constantin

Died:14 February 869 at Rome, Italy

Apostle of the Slavs



 성 메토디오 주교


St. Methodius

San Metodio Vescovo, apostolo degli Slavi

Tessalonica(attuale Salonicco,Grecia),inizio sec.IX

- Velehrad, Cecoslovacchia, 6 aprile 885

Born :826 at Thessalonica

Died :6 April 885 at Moravia (Czechoslovakia)

Apostle of the Slavs 

 

 

치릴로는 데살로니카에서 태어났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형 메토디오와 함께 모리비아에 가서 신앙을 전파했다.

 

이 두 사람은 자기들이 창안한 치릴로식 알파벳을 사용하여 전례서들을 슬라브어로 번역했다.

치릴로는 로마에 부름을 받아 갔으며 그 곳에서 869년 2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메토디오는 주교가 되어 헝가리의 판노니아에서 쉬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

반대파들의 질투심 때문에 많은 고초를 겪었지만 언제나 로마 교황의 지지를 받았다.

체코스로바키아의 벨레라드에서 885년 4월 6일 세상을 떠났다.

 

 

슬라비어로 된 [콘스탄티누스 치릴로의 생애]에서

(Cap. 18: Denkschriften der kaiserl. Akademie der Wissenschaften,

19, wien 1970, p. 246)

 

당신 교회를 길러 주시고 모든 이를 일치 안에 모아 주소서

 

콘스탄티누스 치릴로는 많은 격무로 인해 몸이 지쳐 병이 들고 말았다.

여러 날 동안 병상에 누워 있을 때

하느님의 환시를 보고 다음 말로써 찬미의 노래를 시작했다.

"주님의 집에 가자 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

 

거룩한 옷을 입고 나서 온종일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나는 황제의 종도 이 지상의 어떤 인간의 종도 아닌

 전능하신 하느님의 종일 뿐이다.

과거에 나는 죽어 있었지만 지금 살아나 영원히 존재하리라. 아멘."

다음날 수도복을 입고는 빛에다 빛을 더하듯이

치릴로(촛불이라는 뜻)라는 수도명을 취했으며,

이 수도복을 입고 50일 동안 수도자로 살았다.

 

영원한 안식을 얻을 시간이 다가와 이 세상을 떠나

하늘 본향으로 옮겨 가게 되었을 때 그는 손을 쳐들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기도했다.

 

"나의 하느님이신 주여, 당신께서는 모든 계급의 천사들과 영의 권세들을 지으셨습니다.

당신은 하늘을 펼치시어 땅을 견고히 하시고 만물을 무에서 존재에로 이끄셨습니다.

주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뜻을 행하시며 당신을 공경하고

계명을 지키는 이들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제 기도를 들어 주시어 당신께서 이 무능하고 무가치한 종인 저에게 맡기신

당신의 충실한 양 떼를 안전히 지켜 주소서.

 

당신을 모독하는 이들의 불신앙과 사악에서 그들을 지켜주시고

당신의 교회를 길러 주시며 모든 이를 일치안에 모아 주소서.

당신 백성이 주님의 참된 신앙 안에서 일치하며 그 신앙을 고백하게 해주시고,

그들 마음에 당신 교훈의 말씀을 불어넣어 주소서.

형제들에게 선한 생활을 하고 당신 마음에 드는 일을 행하도록 격려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파자로서

우리를 받아들여 주신 것은 오로지 당신의 은총입니다.

당신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을 이제 당신 것으로 되돌려 드립니다.

주님의 힘센 오른팔로 그들을 인도하시고 당신 날개 그늘 아래 들게 하시어,

그들 모두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당신 이름을 찬미하고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아멘."

 

모든 사람에게 거룩한 입맞춤을 하고 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를 보이지 않는 원수의 이빨에 먹이로 넘겨주지 않으신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당신은 원수들의 덫을 끊으시고 그 멸망의 수중에서 우리를 구하셨습니다." 말을 마치고 나서,

그는 42세를 일기로 주님 안에서 잠들었다.

교황은 로마에 살고 있는 모든 그리스인들과 로마 시민들이 모여

촛불을 들고 그거룩한 분의 장례를 마치 교황 자신의 장례처럼 거행하고 노래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했다.

-(가톨릭홈에서)-

 

 

치릴로와 메토디오는 그들의 아버지가

슬라브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희랍 지방의 관리였기 때문에,

이 두 희랍 형제는 결국 슬라브 민족의 선교사,스승,수호 성인이 되었다.

훌륭한 학문 연구의 과정을 마친 다음 치릴로-

죽기 얼마 전 수사가 될 때까지는 콘스탄티노롤 불렸다-는 형과 마찬가지로

슬라브어를 사용하는 백성들의 총독이 되라는 것을 거절했다.

그는 형 메토디오가 총독의 직책에 몇 년 있다가 사임하고 수사가 된 그수도원에 입회했다.

 

그들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변화가 온 것은 모라비아(현재의 모라비아와

 슬로바키아)의 공작이 동로마 황제 미카엘 3세에게

독일의 지배로부터 정치적 독립과 종교적 자율권-그들 자신의 성직자와

전례를 갖는 것-을 요구했을 때였다.

이때부터 치릴로와 메토디오는 선교 사업을 시작하였다.

 

치릴로가 한 첫번째 일은 슬라브어의 알파벳을 만든 것으로서

 아마도 유고슬라비아의 전례에서 아직도 쓰일 것이다.

그의 후계자들은 희랍어의 대문자에서 치릴로 알파벳(현대 러시아어)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들 형제는 함께 복음과 시편,바울로 사도의 편지 전례서 들을 슬라브어로 번역하고

그 당시에 매우 부정확하던 슬라브 전례를 만들었다.

 

이러한 일과 그들이 자유로이

모국어를 사용하여 설교하는 것은 독일 성직자들의 반발을 가져왔다.

독일 주교가 슬라브 주교들과 사제들의 서품을 거부하자

 치릴로와 메토디오는 로마에 탄원을 하였다.

그들은 로마에 가서 그들의 새로운 전례가

 교황 하드리아노 2세의 인준을 받게 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치릴로는 오랫동안 수도자로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로마에서 수도복을 받은 지 50일 만에 죽었다.

 

 

치릴로가 죽은 뒤에도 메토디오는 16년 동안이나 선교 사업을 더 계속했다.

그는 교황 사절로서 모든 슬라브 민족에게 파견되었으며 주교를 서품하고

 그곳에 주교좌를 마련했다(현재의 유고슬라비아)

바바리아의 주교들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종전 관할 구역 대부분이

그들의 관할권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자 메토디오에 대하여 맹렬한 비난과 고발로 맞섰다.

그 결과 독일의 루드비히 황제는 메토디오를 3년 동안 귀양보냈으나

 교황 요한 8세가 그를 석방시켜 주었다.

 

여전히 감정을 품고 있던 프랑스의 성직자들은 계속해서 메토디오를 이단자라고 고발했고

이에 메토디오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하여 로마에 가야만 했으며

 슬라브의 전례 사용을 계속 주장했다.

그는 다시 한번 누명을 벗게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메토디오가 성서 전체를 8개월 만에 슬라브어로 번역한 것은

 바로 이 열렬하게 활동하던 시기였다고 한다.

 

그는 그의 주교좌 성당에서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성목요일에 죽었다.

그가 죽은 뒤에도 반대는 계속되어 모라비아에서 이룬 이 형제들의 업적은

 수포로 돌아갔고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제자들의 추방은 이 형제들의 영적,전례적,문화적 업적을 불가리아,

보헤미아 그리고 남부 폴란드에까지 퍼뜨리는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모라비아의 수호 성인으로서, 특히 체코슬로바키아와 크로아티아등의 가톨릭 교회 안에서,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희랍 정교회안에서 공경을 받고 있는 치릴로와 메토디오는

동방과 서방의 오랜 숙원인 교회 일치를 보장하는 데 매우 적합한 인물들이다.

 

 

성덕이란 하느님의 사랑을 가지고 인간 생활에 응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의 인간 생활, 정치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이기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들이 서로 엇갈리는 생활이다.

 

치릴로와 메토디오가 매일같이 짊어진 십자가의 대부분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친숙한 문제로써 해결해 나가야 하는 것, 즉 전례 언어의 문제이다.

치릴로와 메토디오가 성인이 된 것은

그들이 전례를 슬라브어로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겸손과

 용기로 써 그것을 했기 때문이다.

 

 

’교회는 신앙이나 공익에 관계 없는 일에

엄격한 통일성을 강요하고자 하지 않으며, 전례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다.

오히려 여러 종족과 민족의 훌륭한 정신적 유산은 이를 보호 육성한다.

 

로마식 전례의 본질적 통일성을 보존하는 조건하에 여러단체, 지역, 민족,

특히 포교 지방에 합법적 다양성과 적응의 길을 열어줄 것이니

 이는 전례서를 개정할 때에도 그러하다’

-(전례헌장,37-38항)-

 

 

이들은 희랍의 테쌀로니카 태생인 형제들로서 원로원의 자녀였다.

치릴로는 콘스탄띠노라는 이름으로 영세하고,

어린 나이에 콘스탄티노블의 왕립 확교에 보내져서

포씨우스 문하생으로 공부하다가, 사제가 되었으며,

그 후 그 대학교에서 스승 포씨우스를 능가하는 교수가 되었다.

 

메토디오는 옵시키온 지방의 슬라브 식민지 가운데 한 지역을 맡는 총독이 되었다가,

 사직한 후로는 은수자가 되었다.

이들 형제들은 보스포루스의 어느 수도원에서 살고 있었는데,

황제 미카엘 3세가 러시아의 드니에퍼-볼가에 있는 카쟈르복들을 회개시키도록 파견하자,

그들은 카쟈르 언어를 배워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돌아올 즈음에, 메토디오는

 희랍의 어느 수도원 원장이 되었다.

 

863년에는, 모라비아의 로스티슬라브 왕자인 포씨우스의 요청에 따라

 모라비아인들의 개종을 위하여 활약하였다.

비록 그들을 개종시키는 일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나,

두 형제의 슬라브어 실력은 대단하였다.

 

 

그들은 글라골로틱이라 부르는 알파벳을 창안하였는데,

 이것이 슬라브어의 시작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치릴로는 메토디오의 도움을 얻어서 전례서를 슬라브어로 번역하였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독일 성직자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교회의 전례에서 슬라브어를 사용한 것과

또 그들이 콘스탄티노블에서 왔으므로,

혹시 서방교회의 이단의 일파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파쏘의 독일 주교가 사제 후보자 선발을 거부한 것이

그들의 선교활동에 치명적인 해를 끼쳤다.

 

이 사건으로 두 형제가 교황 니콜라스 1세로부터 소환되었는데,

그들이 로마로 가던 중에 교황이 서거하였으므로,

그들은 아드리아노 2세 교황에게 크리미아에서 서거하신

 교황 성 클레멘스의 유해를 인도하였으므로,

따듯한 영접을 받았다.

 

 

아드리안 교황은 그들의 정통성을 확신하게 되었고,

또 전례에서 슬라브어 사용을 인가하였으며, 그들이 주교로 승품되었음을 공포하였다.

그들이 로마에 머무는 동안에, 치릴로는 수도자가 되었고,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그 후 얼마 뒤에,

즉 2월 14일에 로마에서 운명하여 산 끌레멘떼 성당에 안장되었다.

 

한편 메토디오는 주교로서 모라비아로 돌아갔다.

아드리아노 교황은 모라비아와 판노니아를 독일 교계에서 독립시켜 대교구로 승격시켰고,

메토디오를 체코슬로바키아의 벨레라트에서 대주교로 착좌시켰다.

 

870년, 독일의 왕 루도비꼬와 독일 주교들은 라티스본 시노드에서

메토디오를 쫓아내기로 결정하고, 그를 가두었다.

그는 2년 후에 교황 요한 8세에 의해 석방되어 자기 교구로 돌아갈수 있었다.

요한 교황은 정책적으로 전례에서 슬라브어 사용만 제한하였던 것이다.

메토디오는 878년에 재차 로마로 소환되었는데,

 또 다시 그의 정통성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며,

전례에서 슬라브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교황은 그의 정통성을 인정해 주고 또 슬라브어 사용을 다시 인가하였다.

그 후 그는 치릴로와 함게 시작했던 성서 번역을 계속하기 위하여 콘스탄티노블로 갔다.

독일 교회와 메토디오간의 투쟁은 그의 일생을 두고 계속되었다.

이윽고 이 모든 투쟁은 그가 스타레 메스토에서 서거할 때까지 계속되었으니,

참으로 힘든 생애를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와 치릴로는 "슬라브의 사도들"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그의 전례는 오늘의 러시아 전례가 되었으니,

러시아, 세르브스,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그대로 전해오는 것이다.

그들의 축일이 전세계로 확대된 것은

1880년, 레오 13세에 의하여 비로소 이루어졌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슬라브 민족은

 본래 동부에 있는 대 평야, 즉 중앙 아시아 지방에 정착했으나,

그 후 차차 발칸 반도를 거쳐 중앙 유럽 즉 모라비아와 보헤미아 지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 민족이 그리스도교의 빛을 받게 된 것은 그들이 발칸에 진출할 때부터였으나

당시는 소란스러운 시대였으므로 전 민족이 그리스도교를 봉행할 수는 없었다.

특히 중부 유럽지방에 진출한 이들은 귀화의 은총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도 복음의 씨를 뿌릴 수 있는 성인들을 파견하셨다.

 

그 중에 유명한 분은 치릴로와 메토디오 두 성인이다.

이 두 분은 테살로니카 시의 레오라는 고관의 자손으로서 형제였다.

테살로니카는 옛적에 성 바오로께서 전교하시던 곳이요,

현재는 살로니카라고 부르는 곳이다.

그 당시는 각국과 거래하는 일대 무역 항구로서

그 시외에는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곳에서 성장한 치릴로와 메토디오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방의 풍습과 언어를 습득했고,

후에는 그들의 사도로서의 소양을 얻은 것이니,

이 역시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 테살로니카에는 훌륭한 학교가 적지 않아서 이 두 분은

마음대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메토디오는 재질이 풍부하며 아버지와 같이 관리가 되었으나

곧 출세하여 테살리아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세속 생활을 싫어하여 관직을 은퇴하고, 엄격하고 경건한 생활을 택했다.

 

그의 동생 치릴로는 콘스탄티노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역시 재능이 뛰어 나고

 학식이 출중한 청년으로,

궁중에 근무하여 영예그러운 지위에까지 올랐으나 그도 오히려 이를 싫어하고 은퇴해

 어떤 조그마한 섬에 숨어 살았다.

 

그가 다시 발각되어

궁중에 되돌아갔을 때 황제는 명령으로 철학 교수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당시는 회교와 유다교와 논쟁이 벌어진 때였다.

그는 황제 미카엘의 칙서를 받고

그 해박한 지식으로 이교도들과 논쟁하기 위해 바그다드에 갔다.

그곳에서 성공리에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곧 그 형 메토디오와 더불어

흑해(黑海) 지방의 민족을 회개시키기 위해 파견되었고,

그곳에서도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862년, 모라비아의 슬라브족이

 미카엘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어 그의 원도를 간청했다.

그 내용은 그들이 천주교를 봉행하기는 하지만

대세를 억눌려 신자가 되었기 때문에 교리에 무지하니

이를 인도하고 가르칠만한 지도자를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다시 치릴로와 메토디오를 모라비오에 파견했다.

그들은 이를 대환영했다.

치릴로는 이미 사제의 품을 받았었고,

형제는 협력하여 많은 신자들을 교도하고 강론과 교회 예식으로써

그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들은 슬라브족이 아직 글자를 가지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기고

자기들이 창안한 치릴로식 알파벳을 사용하여 이것으로

 성서와 전례서들을 슬라브어로 번역했다.

그러므로 슬라브 문학의 시조는 성 치릴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모라비아 인들은

 훌륭한 천주교 신자로 양성한 두 형제는 그 곳에 3년 동안 체류하고,

그 후 교황의 축복도 받고 자기들을 비난하는 이들에 대한 변명도 할 겸 로마로 향했다.

이에 교황 아드리아노께서는 이 두 분을 매우 반갑게 영접하시고

 모라비아에 있어서의 그들의 수고를 치하하시어

메토디오를 사제로,치릴로를 주교로 승급시키려 했으나,

 

치릴로는 장구한 세월동안 활동과 노고에 힘이 쇠진해 로마에 있는 어떤 수도원에 은퇴하여

수도 서원을 발한 후 50일만에 하늘로 향했다.때는 869년 2월 14일이었다.

 

메토디오는 형 대신 주교로 임명되었다.그는 다시 모라비아로 귀환했다.

그러나 전란으로 인해 포교 사럽에 이바지 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찬노니아로 가서

그 지방민의 회개를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허락 없이 그 지방에서 전교했다는 죄목으로 소송되고 구속 되었으나,

교황께서는 이를 곧 석방케 하셨다.

 

메토디오는 그 외에도 여러 방면에서 장애와 비난을 받았으나,

그때마다 교황의 옹호를 받았다.

세 번째 소송을 당했을 때, 그는 자신을 변명할 겨를도 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때는 885년 4월 6일이었다.

 

여러 가지 고난과 장애를 겪은 두 형제의 전교 사업은 후일에 풍성한 결실을 거두었고,

그들의 노고는 일월과 같이 빛나,  

그들은 슬라브 민족의 사도로서 지금도 온 교회의 존경을 받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