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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5일 성 파우스티노와 성 요비타 순교자 / 성 끌로드 라 콜롱비에르 설교가

Berardus 2022. 2. 14. 17:55
 

  

2월 15일

성 파우스티노와 성 요비타 순교자


Santi Faustino e Giovita, martiri

Sts. Faustinus and Jovita

Born :at Brescia, Lombardy, Italy

Died :given to the lions, but they refused to touch the brothers;

beheaded in 120 at Brescia; relics reported in Brescia, Rome,

Verona, and Bologna

 

이 두 성인은 형제들인데, 브레쉬아 태생이다.

브레쉬아에 박해가 시작될 때,

그들의 주교가 은신하였으므로 그들은 겁없이 크리스챤 교리를 가르치고 설교하였다고 한다.

그들의 열심은 교회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자극하여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수 없이 고문당하고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그들이 개종시킨 신자의 수효가 너무나 많았으므로,

하드리안 황제가 참수하도록 직접 명을 내렸다고 한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교회에는 각 나라마다 수많은 순교자들이 나고 있으나,

성 파우스티노와 성 요비타처럼 여러 가지 혹독한 형벌을 받으며 순교한 이는 드물 것이다.

 

성 파우스티노와 성 요비타 형제는 브레쉬아의 귀족으로 태어나

트리야노의 치열한 박해 때 체포되어 이탈리아의 여러 마을에서 혹독한 형벌을 감수하며

용감히 그리스도의 신앙을 보존해 나갔다.

같은 박해 시대에 숨어있던 아폴로니오라는 주교는

그 형제가 관가에 체포되기 전에 그들이 독실하다는 것을 알고

첫째는 사제가 되고 둘째는 부제가 되도록 명한 일이 있었는데

얼마 후에 체포되어 브레쉬아에서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혹은 맹수에, 혹은 불에 던져지는 고통을 받았으나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로 맹수에게서나 화염에서도 무사했다.

 

그들은 결박된 채

밀라노에 와서 마치 금을 불로 다루듯이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가장 가혹한 형벌로 다루게 되었으나 그러한 환경에서 그 믿음은 더욱 빛을 내게 되었다.

 

그 후 로마로 압송되어

 에바리스토 교황에게 더욱 용기를 얻어 그곳에서도 가혹한 형벌로 참아 이겼다.

그리고 다시 나폴리로 끌려가서 그곳의 여러 마을에서 고통을 당하고

 손과 발을 묶인 채 바다에 던져졌다.

그러나 천사들이 도움으로 기이하게 구출되었으므로

형벌에 대한 항구심과 기적의 힘으로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신앙에 귀화시켰다.

 

마지막으로 브레쉬아로 다시 끌려가서

그 당시의 하드리아노 황제에게 여러 가지의 형벌을 받고 나서

마침내 도끼로 찍힘을 받아 영광스러운 순교의 화관을 받게 되었다.

교회의 순교록에 의하면 그때는 120년 2월 15일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밀라노에서 혹은 로마에서 그리고 나폴리에서 아주 훌륭하게 형벌을 당한 사실은

사제들의 기도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이 유해는 브레쉬아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공경을 받고 있다.



  




 

 2월 15일

성 끌로드 라 콜롱비에르 설교가


ST. C. LA COLOMBIERE

San Claudio de la Colombiere Religioso

2 February 1641 at Grenoble, France -

15 February 1682 at Paray-le-Monial of hemoptysis (coughing up blood)

Beatified :16 June 1929 by Pope Pius XI

Canonized :31 May 1992 by Pope John Paul II in Rome

Claudio = zoppo = lame one

Jesuit

 

 

 끌로드는 리용 근교의 도죵에서 태어났고,

그의 가정은 매우 신심이 깊었고 또 유복하여 좋은 가문이었다.

유아기에서 특기할만한 사항은 없지만, 리용의 예수회 대학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수도생활에 대한 강력한 이상에 사로잡혔으나, 얼마 동안 이를 억제하다가 끝내는 입회하였다.

 

아비뇽 수도원에서 수련기를 보내고,

다시 철학과정을 이수한 뒤에는, 5년 동안 교사로서 활약하였다.

이당시에 아비뇽에는 정치적 불안이 일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잘 평정된 후, 아비뇽 주민들은 평화를 되찾았고,

이때 성 프란치스꼬 드 살의 시성식과 방문회의 두 수도원이 이 평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

 

끌로드는 성 프란치스꼬의 시성식 때 생애 처음으로 설교하는 기회를 맞이하였다.

그의 설교는 대성공이었다.

이어서 파리로 가서 신학과정을 마쳤는데,

여기 머무는 동안에 프랑스의 지성이 한데 모이는 이곳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당대의 저명인사인 콜베르와 친분을 가졌으나, 수도회 안에서는 친구가 별루 없었다.

 

사제로 서품된 후에는 아비뇽 대학에서 설교가로 활약하였는데, 큰 호응을 받았다.

그는 특히 예수성심 공경에 전념하였고,

예수님의 생애 나이와 같은 33세 때에는 세상에 대하여

더욱 철저히 죽어야 한다는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종신서원을 발한 후 2달 뒤에, 그는 파레-러-모니알의 원장이 되었다.

이때 그는 성녀 마르가리따 마리아 알라꼭을 만나 그녀를 지도한 것이다.

 

*성 프란치스꼬 드 살 주교 학자 축일:1월24일.게시판1584번.
*방문회 창설자.성녀 요안나 프란치스까 드 샹탈 축일:12월12일(8월12일).게시판1519번.
*성녀 마르가리따 마리아 알라꼭 축일:10월16일.게시판1423번

 

그의 다음 임무는 영국에서의 선교활동이었다.

영국 내의 가톨릭 입장이 최악의 상태에 빠졌을 때 끌로드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어

 영국 가톨릭 재건에 크게 이바지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성공은 많은 반대자들을 만들게 되어 투옥되었다.

그가 비록 순교의 영광을 입지 못했으나, 영국에서 추방령을 받고 떠나야만 하였다.

 

감옥생활로 크게 손상된 그의 건강은 최악의 상태였다.

그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서1682년 2월 15일에 운명하였고, 1929년에 시복되었다.

흔히 우리는 그의 지성은 예리하였고, 판단은 정확했으며, 예술 애호가였고,

프랑스 아카데미의 올리비어 파투뤼와의 친분을 높이 칭송한다.

-(성바오로수도회에서)-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이동축일:
2003년6월27일.게시판1245번, 2004년6월18일.게시판1824번.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는 축일로,

성체성사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첫 금요일에 지낸다.

 

이 축일은 중세에 이르러 일반화되기 시작했으며,

1856년 교황 비오 9세는 예수 성심을 공경할 것을 권장하면서

예수 성심 축일을 라틴 교회 전례력에 도입하였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축일로 지내게 되었다.

 

1995년 한국 천구교 주교회의는

사제들이 복음 선포의 직무를 되새기고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게 하고자,

예수 성심 대축일을 ’사제 성화의 날’로 정하였다. 우리는 사제들을 위하여

특별히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