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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8일 복자 요한 둔스 스코투스 / 성 가스토리오와 동료 순교자

Berardus 2021. 11. 7. 20:03


 

11월 8일(11월 7일)
복자 요한 둔스 스코투스


Beato Giovanni Duns Scoto
Blessed John Duns Scotus
The Subtle Doctor; Joannes Scotus; Doctor Subtilis
Born: 1266 at Duns, Berwick, Scotland
Died: 8 November 1308 of natural causes at Cologne, Germany;
buried in a Franciscan church near the Cologne cathedral
Name Meaning: God is gracious; gift of God (John)
Beatified: 20 March 1993 by John Paul II (cultus confirm‎‎‍‍‍‍‍!!!ed)

 


1224년 9월 10일 처음으로 작은 형제들이 도버 해협을 건넜다
(Thomas Eccleston의 연대기 “De Adventu Fratrum Minorum in Angliam”
-영국에서의 작은 형제들의 행적).

작은 형제들은 거기에서 바로 캔터베리와 캠브리지, 그리고 옥스퍼드로 퍼져갔는데,
그곳에서도 그들은 적절한 “학문 공동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 후 그들은 스코틀랜드에까지 가게 되었다.

 

 

1265년 요한 스코틀랜드의 Duns에서 태어났다.
그의 친 삼촌은 그 당시 스코틀랜드 감목구장이었던 Elias이다.
1278년 둔스의 요한은 Haddington에 있는 프란치스칸 학교에 입학하였고,
Dumfries에서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더 높은 차원의 학문 공부를 위해 옥스퍼드와 파리로 보내졌다.

1291년 3월 17일 그는 Northampton에서 Lincoln의 주교였던
Oliver Sutton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캠브리지와 옥스퍼드에서 철학과 신학 교수로 일하였다.
파리 대학의 프란치스칸 학부에서도 가르쳤는데, 그 후 그는
보니파시오 3세 교황을 대항하여 프랑스 국왕 편에 서는 것을 거부하였기에
영국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이것은 1303년의 일이었다.

 

스코투스는 그 당시 총봉사자였던 Valboa의 Gonzalvus의 추천으로
1305년 파리 대학에 복직되었다.
그는 1307년 다시 파리를 떠나 쾰른에 있는 작은 형제들의 학교로 갔다.
그는 1308년 거기에서 세상을 떠났다.


둔스의 요한은 프란치스칸 학파의 신학자이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의 수호자로 유명하게 되었으며,
또한 프란치스코 수도회서, 특히 쾰른과 이태리의 Nola에서 공경되기 시작하였다.

1991년 7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요한 둔스 스코투스를 복자품에 올렸고,
1993년 3월 20일 그를 공경하는 전례를 거행하였다.
(프란치스칸 신학자들과 교회학자들 -작은형제회홈에서)

 


쾰른에도 역시 프란치스칸들이 학생 수도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요한 Duns Scotus는 1308년 11월 8일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여기서 얼마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요한은 1266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으며 Dumfries에서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Oxford에서 공부하였고 1291년 3월 17일 Northampton의 Oliver Sutton 주교로부터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파리에 가서 1293년부터 1297년까지 자신의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는 파리와 Oxford 그리고 캠브리지에서 가르쳤다.
그가 파리에 있는 동안 프랑스 왕을 옹호하고 교황 보니파시오 8세를 반대하는
“libellus”(서명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대학을 떠나야 했지만 1304년 그의 스승이었던
스페인의 관구 봉사자 Bonsalvus의 추천으로 파리 대학에 돌아왔다.
1308년 그는 쾰른으로 돌아가서 거기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1991년 그는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Scotus는 그리스도의 우주적 예정론
(인간의 죄 없이도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었다는 주장)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와 관련한 주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대학들 안에서의 프란치스칸들-작은형제회홈에서)

 


둔스 스코투스는

마리아의 원죄없음이 그리스도의 보편적 구원능력을 삭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돋보이게 하는 것으로 이해 하였다. 

 

그는 세가지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첫째, 하느님께서는 마리아가 한 순간도 원죄의 지배 하에 있지 않도록 하실 수 있다.

둘째, 어느 한 순간만 원죄의 지배 하에 있게 하실 수 있다.

셋째, 마리아가 원죄의 지배를 받더라도 일정 시기가 지난 다음 원죄로 부터 성화하실 수 있다.

그는 하느님께서 이 세 가지 가능성에서 가장 좋은 것을

마리아에게 이루셨으리라고 확신하였다.

 

이로써 "하느님은 하실 수 있었고, 원하셨으며, 따라서 그렇게 하셨다."

(Potuit, voluit, fecit)라는 유명한 공식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에 관한 논쟁은 1854년 12월 8일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

(Ineffabilis Deus )에 의해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 가 교의로 선포되기까지 계속되었다.

-(마리아론-조규만지음.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둔스 스코투스
원어명  Duns Scotus, Johannes 
 

Duns Scotus, Johannes(1265?~1308).

성기(盛期) 스콜라학의 마지막 인물로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다.

1281년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보나벤투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옥스퍼드대학에서 자연과학을 공부하기도 하였다.

수학적인 엄밀성과 명확하게 증명될 수 있는 것을 추구함이 학문의 이상이라 하여

예리하고 비판적인 방법으로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판하였다.

그리스도에 의한 예견구제(豫見救濟)로서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에 대한 그의 주장은 신학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스코투스는 아포스테리오리(a posteriori)한 논증을 개연적이고 불확실한 것으로 배척하고

아프리오리(a priori)한 논증만이 참된 논증이라고 주장하면서

신의 존재와 속성, 영혼불멸 등에 대한 참된 논증은 가능하지 않다고 하였다.

그에 대한 개연적인 논증밖에 할 수 없다고 하여 신을 논증하려는 시도의 무의미성을 비판하였다.

 

신이란 어떤 것에 의해서도 구속받지 않고,

 어떤 근거 없이도 존재하는 무한자(無限者)로

신은 그의 의지에 의해 존재하기 때문에 신의 의지가 선악의 최고원칙이라고 주장하는

 둔스 스코투스는

의지를 오성(悟性)보다 우위에 두었다.

인간에 있어서도 의지가 이성보다 우위에 있으며 인간이 어떤 대상을 인식하거나 어떤 행위를 할 때

오성은 단지 이성의 보조원인(causa subserviens)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에 있어서의 행위는 인간 의지의 자유에 의해 선택된 행위이고,

이 행위의 선악도 신의 의지와 얼마나 일치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은 도미니코회의 의해 채택되어 발전되었고,

둔스 스코투스의 주장은 프란치스코회에 의해 채택되어 발전됨으로써

이 두 개의 수도회가 서로 대립된 입장을 갖게 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둔스 스코투스의 사상은 후에 유명론 자들에게 일정한 영향을 미쳤고

이로 말미암아 둔스 스코투스는 스콜라학과 르네상스를 연결시키는

 교두보의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주요 저서로는 ≪opus Oxoniense≫, ≪Reportatio Parisiensis≫, ≪Questiones Quodlibetales≫,

≪De primo rerumomnium principio≫, ≪Quaestiones Disputatae≫ 등이 있다.

-(가톨릭대사전에서)-

 

루르드 대성당 앞에 있는 벽화와 성상


1981년7월 제42차 국제성체대회가

루르드에서 개회되었음(1989년 44차 대회는 우리나라에서 개회)

 

가운데: 성체운동의 수호성인 성파스칼 바이런(축일:5월17일)
오른쪽: 예수성명 IHS 신심의 시에나의 성베르나르디노(축일:5월20일)
왼쪽: 복자 둔스 스코투스(1265-1308,축일:11월8일)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의 수호자이며,
1991년 7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음.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마리아 대축일:12월8일)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원죄 없는 잉태 
한자  原罪~孕胎 
라틴어  conceptio immaculata 
영어  immaculate conception 
   
마리아가 잉태 첫 순간부터 원죄의 아무 흔적도 받지 않았다는 교리.

이는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기에 적합하도록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에 비추어 미리 하느님이 섭리한신 특전이다.

교회는 ‘원죄없는 잉태’가 사도들에게 계시되어 교회 내에 전래되어 온

 교리의 일부라고 가르친다.

 

성서에는 원죄 없는 잉태 교리에 대한 명시적인 표현이 없다.

그러나 사도들의 구두 가르침에 이 교리가 포함되어 있었고,

 다른 명확한 가르침에 은연중 내포되어 있었는데,

이는 복음의 씨앗이 그리스도 교인의 가슴에 열매를 맺고 난 이후에 비로소 전면에 드러난 것이다.

성서상 간접적인 근거로 창세 3:15와 루가1:28을 들기도 하지만,

원죄 없는 잉태에 대한 뚜렷한 신앙은

마리아의 성덕(聖德)에 대한 일반적인 교리를 구체화하는데서 비롯되었다.

 

루가복음 제1장과 제2장은 마리아를 예외적으로 거룩한 사람으로 보고 있으며

그녀의 성덕을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선택받은 사실과 관련시킨다.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루가 1:30-31),

이러한 마리아의 성덕은 성모 영보 때 뿐 아니라

마리아의 잉태 순간부터 갖추었음이 수세기가 지난 후에 비로소 밝혀졌다.

 

① 초기의 발전 :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마리아를 거룩하다고 여겼으나 죄의 흔적이 없다고 보지는 않았다.

시일이 지나면서 교회 안에서는 마리아의 성덕에 대한 신심으로 발전하였고,

한편 마리아가 잉태될 때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았다는 신심의 발전을 보았다.

이 신심은 8-9세기까지 비잔틴 세계 일대에 널리 전파되었다.

그러나 서방세계에는 전파 속도가 느린 편이었다.

아와 같은 신심의 발전은 마리아가 받은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나 명제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교인들의 가슴속에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신앙감(sensus fidei) 때문이었다.

복음을 실천하는 일상생활 가운데 그들은 이 진리를 긍정하고 싶은 내면적 요구를 경함한 것이다.

이 신심은 원죄 교리와 조화시키지 못했으나 이 시기에는 별다른 논쟁이 없었다.

 

② 중세 서방교회 :

서방교회는 1125년경 마리아의 잉태를 기념하는 축일을 부활시켰는데,

이때에 즈음하여 미리아의 잉태가 지닌 성격이 논점으로 부각되었다.

스콜라 신학자들에 의하면, 마리아가 원죄에 물든 적이 없다면

만인(萬人)의 구세주인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았다고 할 수 없지 않느냐 하는 점이 문제되었다.

즉 원죄 없는 잉태와 구원의 보편성을 조화시키는 문제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마리아가 원죄에 물들었으나 탄생 전에 원죄의 사함을 받았다고 설명했으나,

요한 둔스 스코투스는 선행구속(先行救贖)이란 개념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즉 마리아는 아담의 후손이므로 의당히 원죄의 죄과를 받아야 했지만 하느님은

그리스도의 예견(豫見)된 공로에 비추어 마리아를 원죄에서 면제해 주기로 하셨다는 것이다.

 

③ 교의(敎義)의 규정 :

역대의 교황은 오랫동안 이 문제를 신학자들의 연구대상으로 남기었다. 17세기에 이르러 이를

믿을 교리로 규정에 달라는 신자들의 빗발치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여러 교황은 거절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5세는 “끊임없이 기도했으나 성령은 이 신비의 비밀을 열어 보이지 않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마침내 1854년 교황 비오 9세는 주교들과 신학자들의 협의를 거쳐

 이를 교의로 선포하였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자기의 잉태 첫 순간에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은총과 특권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에 비추어

원죄의 아무 흔적도 받지 않도록 보호되셨다.”

 

이처럼 단정하는 근거는 성령의 도유를 받은 신자들의 총체가 공통적 신앙감을 지니고

신앙이나 도덕에 관하여 같은 견해를 표시할 때 그 총체는 믿음에 있어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교회 헌장 12참조).

-가톨릭대사전에서-

 


교회는 5세기 말부터 예루살렘의 마리아 성당

 봉헌일인 9월 8일에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을 지냈다.
이 축일을 이전에는 '성모 무염 시태 대축일'이라고 하였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거룩하신 마리아',
이것은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에 대한 신앙의 핵심을 표현하고 있는 이름으로
교회가 초세기부터 불렀던 이름이다 (에페소 공의회 431년).


8세기경부터는 이날에서 거슬러 계산하여 9개월 전인 12월 8일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로 지냈고 이것은 9세기경 서방 교회에 전파되었다.
1476년 교황 식스토 4세는 이를 로마 전례력에 도입하였고,
교황 비오 9세는 1854년 12월 8일에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심을 '믿을 교리'로 선포했다.

원죄 없으신 잉태는 마리아께서 죄에 물들지 않으셨다는 것을 가리킬 뿐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은총을 충만히 입으셨다는 것이다.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는 그분의 승천과 마찬가지로

그분께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Duns Public Park in Duns (Scotland)

 

Tekst op de plaquette:

 

JOHN DUNS SCOTUS
FRANCISCAN AND SUBTLE DOCTOR
WAS BORN IN 1266
IN THIS TOWN OF DUNS.
HIS LEARNING HAS SHED LUSTRE
ON DUNS AND SCOTLAND
THE TOWN AND LAND
WHICH GAVE HIM BIRTH.

 

ERECTED BY
THE FRANCISCAN ORDER
ON THIS SEVENTH CENTENARY
OF HIS BIRTH. SEPTEMBER 1966.

 

SCOTIA HABET CUNAS FAMAM ORBIS
FUNERA RHENUS CAELUM ANIMAM
HIC MAGNI SPIRAT IMAGO VIRI

 


Lord, God,
source of all wisdom,
in Blessed
John Duns Scotus,
priest and champion
of the
Immaculate Virgin,
you have given us
a master of life
and thought.

 

Grant that strengthened
by his example
and nourished
by his doctrine,
we may remain
faithful followers
of Christ,
who lives
and reigns with you
and the Holy Spirit
one God,
for ever and ever.

 



♬Ave Maria - Gregorian chant

 

update 2006.11.8.

 


  카산(Kasan)의 성모. 중앙러시아. 17세기. 30x24.5cm, 저화면(低畵面)

 

러시아 역사와 관련된 기적을 일으킨다는 카산의 성모성화(Icon)는

 1579년에 기적적으로 발견되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성모가 한 소녀의 꿈에 여러번 나타나서 특정한 장소를 파낼 것을 명령했는데

그곳에서 그 성화를 발견했다고 한다.

이 성화(Icon)는 성당으로 받들어 옮겨졌고 기적을 일으켰다고 하며

러시아 군대를 전장에서 비호했다고도 한다.

1710년 러시아의 피터대제는 카산의 성모상을 페터스부르그로 옮기도록 했다.

 

이 성화(Icon)는 같은 부류의 성모상 전형(典型)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다만 성모의 머리와 어깨만 묘사되었다.

성모는 그녀의 머리를 아기 그리스도를 향하여 숙이고 있으며

마리아의 왼쪽 어깨 앞에 서있는 그리스도는 약 4분의 3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오른손은 축복을 내리며 올리고 있고 왼손은 옷자락으로 가려져 있다.

성모의 이마와 어깨에는 동정녀의 상징인 별이 반짝인다.

 

그림의 왼쪽 가장자리에는 성 이사야(Isaja)를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성녀 카타리나(Katarina)를 그려 넣었다.

아름다운 이 성화는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유럽 聖畵(ICON)集에서-

 

 

 

 

11월 8일

성 가스토리오와 동료 순교자


ST. CASTORUS

One of the Four Crowned Martyrs.

헝가리. 306년 순교

 

가스토리오, 클라우디오, 니코스트라토 그리고 심포리아노

(Saint Castorus, Saint Claudius, Saint Nicostratus, and Saint Simpronian)는

디오클레씨아노의 박해 때 헝가리의 판노니아에서 고문당하고 처형당한

"빛나는 네 명의 순교자들"이라고 불린다.

 

전설에 따르면, 그들은 시르미움(Mitrovica, Yugoslavia)에서 조각가로 고용되었는데,

그들의 작품이 황제에게 깊은 인상을 새겨주었다.

디오클레씨아노 황제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많은 조각들과 함께

아에스쿨라피우스상(statue of Aesculapius)을 조각하라고 명하자,

크리스챤들인 그들은 이를 거절하였다.

 

황제가 그들의 신앙을 인정하긴 하였으나, 그들이 신전에서 희생을 거부하자,

투옥시켰다가 모진 고문을 한 뒤에 사형에 처하였다.

그들은 비아 라비카나에 안장되었다가,

후일 교황 밀씨아데스(Pope Militiades)에 의하여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