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8년 피핀이 죽자
프랑크 왕국의 오랜 관습에 따라 왕국은 그의 두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형제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일어났다.
결국 샤를마뉴는 승리했으며 자기를 배신하고 카를로만의 편을 든 롬바르드를 멸망시켰다.
롬바르드의 수도인 파비아 포위 공격이 아직 진행되고 있는 동안
샤를마뉴는 로마로 가서 교황과 함께 774년의 부활절을 축하하고,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교황령으로 이양하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을
성베드로 성당에서 재확인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넓혀준 교황의 땅은 미미했고 롬바르드 왕국 전역에 대한
통치권은 자신이 차지했다.
799년 5월 교황 레오 3세는 로마에서 반대파들의 습격을 받자
샤를마뉴의 궁정으로 피신해 지원을 간청했다.
샤를마뉴는 800년 11월 교황과 함께 로마로 가서 황제의 예우로 영접을 받았다.
성 베드로 성당에서 열린 성탄절 미사 때 로마인들이 샤를마뉴를 황제라고 찬양하자,
교황은 성유식을 집전하여 샤를마뉴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샤를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황제에 임명했다.
샤를마뉴의 궁정은 그의 가족, '카펠라'라는 왕의 개인 예배를 집전한 성직자들,
그리고 속세의 관리들로 구성되었다. 속세의 관리들 중에는 자신의 영지 안에서
왕권을 일부 위임받아 행사하도록 허용된 영주들, 왕실의 집사들, 왕실 관리인들이 포함되었다.
샤를마뉴는 자신의 궁정을 왕국의 정치와 행정 중심지뿐 아니라
지성의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야심이 있었기 때문에 해외에서도 유명한 학자들을 불러들였다.
이들 가운데 중요한 인물로 아인하르트와 앨퀸이 있었다.
샤를마뉴는 이들을 비롯한 여러 문필가들의 도움을 얻어
교회 신부들의 저술과 고대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는 왕실도서관을 설립했으며,
프랑크 왕국의 젊은 기사들을 가르치기 위해 궁정 학교를 창설했다.
샤를마뉴가 죽은 뒤 그의 뒤를 이은 후세들이
제국 내부의 평화와 통일성 및 국제적 지위를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샤를마뉴의 명성은 죽은 뒤에 더욱 빛났다.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된 뒤에도
서프랑크(프랑스) 왕국과 동프랑크(독일) 왕국,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적 전통은 샤를마뉴가 세운 선례에서 자양을 얻어 생명력을 유지했다.
오토 1세 때 아헨은 독일 통치자들이 대관식을 올리는 도시가 되었고,
로마 교황에 대항한 대립 교황 파스칼리스 3세는 붉은 수염왕 프리드리히 1세의 요청으로
1165년에 샤를마뉴를 성인으로 추증(追贈)했다. 프랑스에서는 존엄왕 필리프 2세가
샤를마뉴를 기리는 전통을 되살렸다.
샤를마뉴의 진정한 후계자가 독일인이냐 프랑스인이냐 하는 문제는
중세뿐 아니라 근대에 접어든 뒤에도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 나폴레옹은 샤를마뉴의 후계자라 자처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그리스도교 국가들이 통합해 '서방' 유럽을 구성하자는 논의는
샤를마뉴의 본보기를 상기시켰다. 민간 전설과 시 문학도
이런 정치적 전통과 나란히 발전해 롤랑을 다룬 서사시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샤를마뉴의 명성은 한때 그의 제국이던 지역 내부에만 머물지 않았다.
일부 슬라브어에서 '왕'을 뜻하는 낱말은
그의 이름에서 파생한 것이다(체크어의 král, 폴란드어의 król 등).
샤를마뉴는 전기적 문서를 전혀 남기지 않았다.
그의 인간성은 그의 행위와 동시대인들이 남긴 기록으로 조립할 수 있을 뿐이다.
샤를마뉴의 강렬한 개성은 분명 신의 뜻이 자신과 함께 한다는 굳은 신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전혀 모순을 느끼지 않고 개인의 독실한 신앙심과 일상생활의 쾌락,
종교적 사명감과 권력에 대한 강한 의지, 거친 태도와 지적 성장에 대한 갈망,
적과 타협하지 않는 태도와 공정함을 양립시킬 수 있었다.
그의 독실한 신앙심에는 정치적 조건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제국과 교회는 제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하나의 단위가 되었다.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에서)
*독일의 사도.성 보니파시우스 주교 순교자 축일: 6월5일, 게시판1800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update 2006.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