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8일
성 벤체슬라오 순교자
St. Wenceslaus of Bohemia
San Venceslao Martire
907 at Prague, Bohemia (Czech Republic)
-martyred 28 September 929 at Stara Boleslaw
보헤미아,체코슬로바키아의 수호자
보헤미아의 통치자 보리보이와
그의 아내 루드밀라의 개종은 그의 민족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동시에 강력한 체크가는 이 신흥종교를 극구 반대하였던 것이다.
915년경, 보리보이의 아들 라티슬라브가 전국을 통치했고,
슬라브족인 벨레시안스의 딸 드라호미라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는데,
프라그에서 태어난 벤체슬라오와 볼레슬라오는 그들의 아들이다.
성 벤체슬라오는 할머니 루드밀라의 배려로
성 메토디오(축일:2월14일)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보데크의 "학교"에서 라틴어와 슬라브어를 익혔다.
그러나 그가 어릴 때에 부친이 마갸르인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는데,
어머니는 크리스챤을 반대하는 듯한 정책을 펼쳤다.
이리하여 크리스챤적인 벤체슬라오와 그 어머니 사이의 대립은 격화된 것이다.
루드밀라는 반그리스도파를 옹호하던 그의 어머니를 대신하여
보헤미아의 통치자가 되도록 그를 격려했다.
성녀 루드밀라(축일:9월16일)는 마침내 살해되었으나,
그리스도교가 승리를 했고 그는 정부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그후 게르만의 왕 헨리꼬 1세가 지방 통치자 회의를 열였는데,
핸리꼬 외에는 대부분의 지방 왕들이 벤체슬라오의 신앙 때문에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 비또를 모시는 성당을 프라그에 세웠고,
게르만과의 우의를 돈독히 하였다.
이 정책이 귀족의 반발을 샀고, 따라서 도처에서 귀족들의 봉기가 있었던 것이다.
만일 성인들의 생애가 ’초자연적으로’ 잘못 묘사되어 왔다면,
벤첸슬라오의 일생은 그와는 대조적인 하나의 본보기가 된다.
그는 10세기의 보헤미아를 대표하는 정치적인 음모 가운데서 그리스도교를 위해 싸웠다.
벤체슬라오의 통치 기간 중 특징적인 것은 교회의 지지, 독일과의 평화 협상,
반 그리스도교파의 반대로 그를 괴롭혔던 정치와 보헤미아 내부의 통일을 위한 그의 노력이다.
따라서 그의 정책은 보헤미아의 종교적 오염을 멀리하고 비잔틴의
정치적 영향을 벗어나는 것이므로 많은 반대와 갈등을 빚었다.
929년 9월, 그는 동생 볼레슬라오의 초대를 받고
성 고스마와 다미아노 축일(9월26일.게시판1386번)을 지내려고 스트라로 갔다.
축제일 저녁, 그가 위험에 처한 줄을 알았다.그 다음날 그는 동생과 추종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성당 문 앞에 쓰러지면서 이렇게 외쳤다:"동생아, 난 너를 용서한다."
그후 그는 즉시 순교자로서 높은 공경을 받았고, 보헤미아 전 주민의 수호자로서 공경을 받았다.
비록 그의 죽음이 근본적으로 정치적 격변으로 인한 것이긴 하지만
벤체슬라오는 신앙을 위한 순교자로 찬미받았으며, 그의 무덤은 성지가 되었다.
그는 보헤미아 국민의 수호자이며 현재 체코슬로바키아의
수호자로 찬미받고 있다.
성 메토디오주교와 성 치릴로 수도자
Saint Methodius and Saint Cyril
Apostle of the Slavs
축일:2월14일.인창동성당게시판959번
옛 슬라브 전기에서
(Edit.M.Weingart,Pragae 1934,974-983)
가난한 이들을 진실되게 판단하시는 임금님의 옥좌는 영원토록 세워져 있으리라
부친인 브라티슬라프가 세상을 떠난 후 보헤미아인들은 벤체슬라오를 왕으로 세웠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는 굳건한 신앙심을 갖고 있었다.
복음의 권고에 따라 모든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헐벗은 이들을 옷 입히며
굶주리는 이들을 먹이고 나그네들을 맞아들였다.
과부들의 권리가 손상되는 것을 용납치 않고
빈부의 차별없이 모든 이들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봉사자들을 도와주며
여러 성당들을 장식하여 주었다.
그러나 어떤 보헤미아인들은 오만해져
"당신의 형 벤체슬라오가 어머니와 자문관들과 공모하여 당신을 죽이려 하고 있소." 하고 말하며
그의 동생 볼레슬라프를 교사했다.
여러 도시에서 성당들의 수호 성인 축일을 지낼 때마다 벤체슬라오는 그 곳들을 방문하곤 했다.
한 번은 어느 주일날 성 고스마와 다미아노의 축일을 맞아 볼레슬라비아라는 도시에 갔다.
미사 참례 후 프라하로 돌아가려 했으나, 볼레슬라프는 악한 마음으로 "형님,
왜 우리를 떠나십니까?"하고 말하며 제지했다.
그 다음날 아침, 아침 기도 종이 울렸다. 그 종소리를 들을 때 벤체슬라오는
"주여, 오늘 아침까지 살게 해주심을 감사하나이다."하고 뇌이면서 일어나
아침 기도를 바치러 갔다.
이때 볼레슬라프는 즉시 뒤따라가 성당 문 앞에서 그를 붙잡았다.
벤체슬라오는 그를 바라보며 "너는 어제까지 나를 충실히 섬기지 않았니?" 하고 말했다.
그러나 볼레슬라프는 악마의 속삭임에 마음이 약해져
칼을 빼들며 "이제부터 더 잘 섬기고 싶소." 하고 대꾸했다.
이 말을 마치고는 칼로 형의 머리를 쳤다. 그러나 벤체슬라오는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얘야, 이게 무슨 짓이니?"
그리고는 동생을 붙들어 땅에 넘어뜨렸다.즉시 볼레슬라프의 부하 한사람이 달려와
벤체슬라오의 손을 내리치며 볼레슬라프를 도와주었다.
상처를 입은 벤체슬라오는 동생을 그대로 두고 성당으로 피신해 갔다.
그러나 두 악한들이 교회문간에서 그에게 치명상을 입히었다.
그리고 또 한사람이 달려와 창으로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벤체슬라오는 땅에 넘어져 "주여,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하고
말하면서 숨을 두었다.
동구(東歐)는 서구(西歐)에 비해 그리스도교의 전파가 늦었고,
7세기까지는 사람마다 여러 가지 우상을 숭배했다.
그리고 6세기 말엽에 그 지방을 침입한 슬라브족 역시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는 무지했으나,
이탈리아 혹은 독일의 선교사들이 빈번히 그 지방에 진출해 전교를 했다.
그 결과 보헤미아 지방에서는 845녀에 14명의 영주(領主)가 세례를 받게 되었으나
아직도 많은 주민들은 우상을 섬기고 있는 처지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40년후에는 보헤미아 왕 볼튜오이와
그의 왕비 성녀 루드밀라가 그리스도교에 귀화하고
그들의 권고로 말미암아 많은 주민들이 개종하게 되었는데,
실지 보헤미아의 사도라고 불리며 그 지방에 가톨릭을 전파한 이는
볼튜오이 왕의 손자에 해당하는 벤체슬라오 왕인 것이다.
프라하 교외에서 보헤미아의 라티스라브 공작과 북부 슬라브 족장의 딸
드라호미라의 아들로 태어난 그의 원래 이름은 바클라프였다.
벤체슬라오의 아버지 라티슬라브는 매우 신앙심이 깊은 가톨릭 신자였다.
그런데 그 어머니 드라호미라는 가톨릭을 매우 싫어하는 열광적인 이교신자였으므로,
그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나쁜 영향을 받을까 두려워
그를 신앙심이 깊은 조모 루드밀라에게 위탁해 교육을 받게 했다.
루드밀라는 뒤에 성녀가 된 분으로, 손자의 종교교육을 위해서는
최적임자요(성녀 루드밀라 축일:9월16일)
어린 벤체슬라오도 할머니의 성덕을 본받아 신앙이 두텁고 행실이 바르며
훌륭한 모범소년으로 자라났다.
이와 반대로 그 동생 볼레슬라오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아
역시 그리스도교를 싫어하는 자가 되었던 것이다.
라티슬라브 왕이 서거하자 그 왕비인 드라호미라는 신앙이 두터운 시어머니에 대한 불안과,
또 자기 마음대로 세도를 부리려는 야심에서 루드밀라를 교살하는 대죄를 범했다.
그리고 벤체슬라오가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것을 기회로 보헤미아의 정치를 자신의 마음대로 하게 되었다.
드라호미라의 독재는 보헤미아 제후(諸侯)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
그녀는 얼마 안 되어 정치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제후들은 그녀 대신 성녀 루드밀라의 지혜와 덕을 물려받은 벤체슬라오를 국왕으로 추대했다.
마음이 착한 그는 동생과의 권력 쟁탈의 추태를 피하기 위해 영토 일부를 분할 해 주었다.
이리하여 선조 전래의 국토와 국민을 통치하게 된 벤체슬라오는 조부 볼튜오이의 뜻을 받들어
어머니 드라오미라의 악영향을 일소하고 전국민에게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도록 하기 위해
독일에서 많은 선교사들을 초청해 왔다.
그러나 더욱 감탄할 것은 그의 전교에 대한 열성보다 그의 성덕이었다.
독일의 황제 헨리코 1세, 오토 1세 등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원수들이 서로 다투어
벤체슬라오 왕과 친교를 맺은 것은 그의 덕망이 높았기 때문이다.
벤체슬라오는 특히 성체께 대한 신심이 두터웠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손수 밀을 심고 거두어 그 가루로 제병을 만들며,
또 미사주를 위한 포도원을 따로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밤중에 일어나 궁중에 있는 성당에 가서 감실 앞에 엎드려
여러시간 동안 기도한 예는 종종 있었다.
이만큼 성체를 사랑했던 그인지라, 성체를 이루는 사제들을 존경하며
미사 성제를 중요시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 이러한 이야기도 있다. 독일의 보름스에서 여러 나라 군주들의 회의가 있었는데,
벤체슬라오 왕은 좀 늦게 입장했다.
이는 아침 미사에 참여하고 왔기 때문인데,
왕들 중에는 늦게 온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엇다.
그런데 오토 1세만은 벤체슬라오 양편에 엄위한 천사가 따라옴을 눈으로 뚜렷이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교에 집착한 그의 어머니 드라호미라와 동생 볼레슬라오는 왕이
그리스도교만을 보호하는 것을 매우 불만스럽게 생각해
기회만 있으면 그를 살해하려 벼르다가 볼레슬라오가 향연을 열고 벤체슬라오를 초대했다.
그 초대연에 참석한 왕은 연회가 끝나고 성당에 기도하러 가던 중,근방에 잠복했던
볼레슬라오가 수명의 부하를 데리고 나타나 창과 칼로 그를 살해했다.
이리하여 벤체슬라오 왕은
지금까지 전교에 큰 공덕을 쌓은 데다가 아울러 순교의 영광을 누린 것이다.
순교라 함은 그리스도교를 위해 일한 탓으로 증오를 사서
그 생명을 빼앗기는 것을 말한다.
정의의 하느님께서는 결코 악인의 행위를 그냥 버려 두시지 않으셨다.
시어머니를 살해한 드라호미라와 형을 죽인 볼레슬라오는 얼마 후 무서운 천벌을 받았다.
그리고 순교를 한 벤체슬라오는 순교자로 공경받을 뿐만아니라,
보헤미아의 수호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9월 28일
성 라우렌시오 루이스와 동료 순교자
St. Laurentius Ruiz et MM
San Lorenzo Ruiz e compagni Martiri
St. Laurence Ruiz, Lawrence Ruiz
c.1600 at Binondo, Manila, Philippines -
29-30 September 1637 at Nagasaki, Japan
by being crushed over a period of three days while hanging upside down;
body burned, ashes thrown into the Pacific Ocean
17세기 초(1633-1637) 라우렌시오 루이스와
그의 동료 순교자 16명은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일본 나가사키에서 피를 흘렸다.
Saint Lorenzo Ruiz, Saint Anthony Gonzales, Saint Guillermo Courtet, Saint Miguel de Aozaraza,
and Saint Vicente Shiwozuka de la Cruz,... S. Dominicus Ibanez de Erquicia, S. Iacobus Tomonaga.
이 순교자들은 성 도미니꼬회 회원과
그 협조자들로서 9명의 사제, 2명의 수사, 2명의 동정녀, 3명의 평신도들인데
그중 한 사람이 필리핀 출신의 라우렌시오 루이스로 평범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이들은 모두 서로 다른 시기와 상황 아래 필리핀과 대만과 일본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씨앗을 뿌리며 그리스도교의 보편성을 경이롭게 드러냈고
자신들의 삶과 죽음의 표양을 통해 미래의 그리스도교를 위한
불굴의 선교 정신을 훌륭하게 심어 주었다.
필리핀의 첫 순교자인 루이스는
마닐라에서 중국인 아버지와 필리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로렌조(라우렌시오)라고 불렸다.
마닐라 비논도에서 성장한 다음, 비논도 교구와 수도원에서 봉사하고
도미니코 수도원에서는 해박한 지식을 습득하였다.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는데도, 로사리오 자선 단체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마닐라에서 스페인 사람과의 싸움 때문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도 종교 박해로 여러 곳에 피신하다가 나가사키로 돌아와서 선교 활동을 하였다.
1637년 일본 정부에 붙잡혀 심한 고문에도 신앙을 꿋꿋하게 증거하다가
1637년 9월 19일 니시자카 형장에서 네명의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루이스는 필리핀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며
박해의 고문을 이겨내는 모습은 당시 일본 나가사키 신자들에게 깊은 감명과 용기를 불러 일으켰다.
1981년 시복되고 1987년에 교황 요한바오로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29일에 순교하였지만 축일은 28일로 지낸다.
-우표로 보는 성인전.최익철신부-
요한 바울로 2세 교황이
라우렌시오 루이스와 동료들의 천상 영광을 공표하기 위하여
마닐라에서 거행한 장엄 미사 강론의 발췌 (AAS 73, 1981, 340-342)
그들은 자신의 피를 흘려 하느님께 향한 훔숭과 사랑 행위를 완수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증거한 그들이 사람들 앞에서
당신께 대한 신앙을 충실히 고백한 순교자임을 하느님 아버지 대전에서 증명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여기서 수많은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이 영광송은
1637년 12월 27일 성 도미니꼬 성당에서 저녁 기도때 울려 퍼진 사은 찬미가 떼 데움을 되살리고 있습니다.
그 시간에 나가사키에서 일어난 순교의 소식이 그 성당에 전해 졌습니다.
16명의 그리스도인들, 그들 중에는 스페인의 데온 출신으로 도미니꼬 회원이며
장상이었던 안토니오 곤잘레스 신부,
마닐라 태생으로 비논도라는 변두리 지역 출신의 한 가장인 라우렌시오 루이스가 있었습니다.
순교자 들은 체포되어 죽음을 맞이하는 동안에도 자비와 권능의 아버지께 시편 기도를 노래했습니다.
그들의 순교는 장장 3일이나 계속되었습니다.
믿음은 세상을 이깁니다.
믿음의 선포는 진리를 알고자 갈망하는 모든 이를 태양과 같이 비추어 줍니다.
이 세상의 가르침은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만 그리스도교 전통은 하나이고 동일한 것입니다.
주 예수는 모든 종족과 언어와 민족과 국가로부터 모여든 당신의 종들을
당신 피로 구속하시고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제의 왕국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16명의 복된 순교자들은 세례와 서품의 사제직을 수행하여 스스로의 피를 흘림으로써
하느님께 사랑과 예배의 위대한 행위를 완수하였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제단위에 희생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사제이시고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가장 가깝게 닮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동시에 형제들을 향한 최고의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우리들도 형제들을 위해 우리 자신을 내어놓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자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먼저 내놓으심으로 본보기를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라우렌시오 루이스는 이를 성취하였습니다.
성령의 인도로 위험에 가득찬 여행을 마치고 예상치 못하던 최후를 맞이하여 재판관들 앞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며 하느님을 위해 죽을 것임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분을 위해서라면 내 생명을 수천 번이라도 바치겠습니다. 결코 배교자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대들이 원한다면 나를 없애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을 위해 죽는 것이 내 소원입니다."
"That I will never do, because I am a Christian, and I shall die for God,
and for him I will give many thousands of lives if I had them. And so, do with me as you please."
여기서 우리는 그의 생명과 신앙이 절정에 달함을 보고 또한 그 죽음의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순간에 이 젊은 가장은 신앙 고백을 하였고
비논도의 성 도미니꼬 수도회의 수사 학교에서 배운 그리스도교 교리를 완성시켰습니다.
교리의 유일한 중심은 오로지 그리스도인데 그는 그 그리스도를 자신의 목표로 삼았고
그리스도 자신이 전달자의 입술을 통해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라우렌시오 루이스가 그 부모로 부터 물려받은 좋은 모범은
우리 자신들에게도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를 지향하여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바로 이를 의미합니다.
매일같이 자신을 봉헌하는 것,
이는 모든 이가 생명을 얻고 더욱 풍성하게 얻게 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봉헌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일본 교회사
일본에 그리스도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1549년 8월 15일 예수회의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인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Xavier)가
말라카(Malaca)에서 만나 고아(Goa)에서 입교한 일본인
"안지로"의 안내를 받아 가고시마에 입국한 뒤부터였다.
일본에서는 이 때부터 그리스도교를 믿는 신자는 물론 교회에 관한 모든 것을
포르투갈어의 발음을 따라 "기리시땅"이라고 불렀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포교 사업의 수호자
Francisco Xavier (Spain, 1506)
First Jesuit Missionary,
India, East Indies, Japan, 1540-1552
축일:12월3일.인창동성당게시판783번
도꾸가와 이에야스는 1614년 기리시땅의 전면적인 금교령을 선포하고,
성당을 파괴시키고 신자 명부를 작성케 하며
단속을 강화하는 한편 외국인 선교사를 마카오와 마닐라로 추방하였다.
이런 박해 속에서도 일본교회는 수난을 이겨내며 신앙을 고수하였다.
마닐라 등지로 추방되었던 선교사와 그곳에서 성직자가 된 일본인들이 다시 잠입하자
신자들은 목숨을 걸고 성직자를 보호하였다.
목자를 잃는 경우에도 신자들은 신심회를 조직하여 신앙을 굳게 지키고 붙잡히면
고결한 순교자가 되었다.
1623년 도꾸가와 이에미쓰가 3대 장군으로 등장하자 기리시땅 탄압을 철저히 제도화하였다.
그해 10월 두 선교사를 체포하는 한편 에도에서 이름있는 기리시땅 46명을 잡아들여 세 조로 나누어
거리에 조리를 돌리다가 가장 번화한 곳에서 화형에 처하는 등 기리시땅 말살 정책을 강행하였다.
12월 4일에 처형 당한 이 사건을 ’에도의 대순교’라고 한다.
이어 전국적으로 기리시땅 수색을 강화하여
신자를 숨겨준 사람까지 사형에 처하였다.
규우슈우에 잠복해 있던 외국인과 일본인 사제는 모두 색출되어 사형을 받았다.
일반 신자에게는 세뇌공작과 잔인한 고문으로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하였다.
그 결과 1630년에는 일찍이 ’소(小)로마’로 불리던 나가사끼에도
신자가 거의 전멸된 상태였다.
1633년에는 지도급의 기리시땅에 대하여 ’생매장’이라는
잔인한 고문 방식이 채용되었다.
■일본 26 성인상
1593년 프란치스꼬회 선교사들이 일본에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벌인 것이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비위를 상하게 하였다.
또한 1596년 도사에 표착한 스페인 선박 산펠리페호 사건까지 겹쳐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분노를 부채질 함으로써
1597년 2월 5일 프란치스꼬회 수사 6명을 비롯한 3명의 예수회
수사와 바오로 미끼등 일본인 17명이 나가사끼, 니시사까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이들은 1862년 성인 반열에 오르게 되었고
시성 100주년을 맞이한 1962년 6월 10일 기념비가 완성되었다.
화강암 대좌에 26성인의 청동상이 하늘을 우러러 복음을 말하고 있다.
1981년 2월 26일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이 순교지를 방문하여 이 기념비가 전세계를 향하여
사랑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끊이지 않고 신앙을 전파할 수 있도록 기원한다고 말씀하셨다.
26성인중에는 임진왜란 때 포로로 일본에 잡혀가 그곳에서 영세 입교하고
성 프란치스꼬 3회에 입회하여 덕행을 쌓다가
순교한 성 바오로 이바라끼, 그의 동생 성 내오 이바라끼 그의 아들
12세의 소년 루도비꼬가 포함되어 있다.
Paul Miki (Japan, 1564)
First Martyr of Japan, Nagasaki, 1597
성 바오로 미키와 그 동료 순교자들(1564-1597)
축일;2월 6일.게시판935번
■일본교회의 한국인 순교자
임진왜란(1592-1598)의 결과 많은 한국인이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갔다.
일본은 1587-1687년에 이르는 약 100년간 막부에 의한
그리스도교 박해가 계속되어 많은 순교자가 배출되었다.
그 후 1867년 7월 교황 비오 9세는 순교자 205명을 시복하였는데,
그 205명복자 순교자 중에는 9명의 한국인과 3명의 그 일본인 아내가 포함되었다.
이들은 모두 규우슈우의 나가사끼에서 순교했으며 이 밖에도 복자아닌
한국인 순교자 9명이 기록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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