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예로니모는 기원 후 342년경 판노니아의 국경 근처에 있는
달마시아의 스트리돈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무척 부유하며 가톨릭을 신봉하고 있었으나,
그 당시의 습관을 따라 예로니모가 세례를 받게 된 것은 이미 장성한 후였다.
그는 재능이 뛰어난 원기 활발한 소년으로 354년경 로마의 어느 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했다.
로마는 그 당시 콘스탄티노 대제가 가톨릭을 국교로 정하고 나서 겨우 40년이 지났을 무렵인데,
이교신의 우상이나 이를 제사지내는 신전 등 옛날의 이교의 잔재는 도처에서 볼 수 있었다.
그 뿐 아니라 이기심에서 가톨릭 신자가 된 사람 중에는 이교의 사상을 버리지 않은 자도 결코 적지 않았다.
그 중에도 학문이나 예술, 정치 방면에도 그 좋지 못한 영향이 명백히 드러났던 것이다.
의지가 아직 견고하지 못하고 혈기왕성한 청년 예로니모도
이런 향락적인 이교의 감화를 받아 죄악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 후 곧 중병에 걸려 병상에서 신음하는 신세가 되자
비로소 과거를 반성하고 그 고통도 하느님의 징벌이라 생각했고,
회복된 후는 다시 태어난 사람과 같이 신앙의 길을 걸으며
정결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엘리오 도나토라는 유명한 학자에게서 수사학과 고전문학,
특히 치체로와 비질리오의 라틴어 고전문학에 대해 공부하였다.
라틴어와 희랍어 지식은 물론 고대사에 대한 뛰어난 지식과 연구로 명성을 날린 분이다
이때 그는 세속 학문에 전념하였지만, 주일에는 사도들과 여러 순교자들의 성지 특히
카타콤바를 방문하며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리베리오 교황에게서 세례성사를 받고 신앙 도덕에 위험이 많은 로마를 떠나
당시 로마 황제의 수도였던 독일의 트리엘 시에 갔다.
그곳에서 오로지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할 결심을 하고 성직자의 반열에 들게 되었는데,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아타나시오는
아리우스 이단자들의 반대 때문에 3년간(335-337년) 트리어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동방교회의 수도생활을 소개하였다.
그래서 예로니모는 트리어에 머무는 동안 수도생활에 관심을 갖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아타나시오 축일:5월2일,게시판1137번,1742번.
그는 370년에 고향인 아퀼리아에 돌아와 발레리아노 주교의 지도 아래 같은 뜻을 갖고 있던
친구 루피노, 보노소 크로마치오, 엘리오도로 등과 함께 복음적 공동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때 그는 테르툴리아노, 치프리아노, 힐라리오 등 위대한 라틴 교부들의 저서를 탐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지역교회와 융합하지 못하고 흩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예로니모는 373년에 예루살렘을 순례한 다음 안티오키아에 머물면서
라오디게이아의 아폴리나리스 주교에게서 성서 주석 방법과 그리스어를 배웠다.
그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 다다랐을때 열병에 걸렸던 것이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는 완쾌할 때까지 그리스어를 배웠던 것이다.
이 지식이 뒷날 하느님의 뜻에 의하여 신·구약 성서의 라틴어역을 완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완쾌된 예로니모는 은둔하여 수도에 전념할 결심을 하고
안티오키아 동편에 있는 카르치스의 광야로 가서
그곳에 사는 많은 은수자들과 더불어 기도와 고행과 공부에 힘쓰며
수년간 속죄의 생활을 했다.
그러나 예전의 화려했던 향락의 시기를 회상하고서
종종 현재의 적막하고 부자유스러운 생활에 깊은 의혹의 마음을 가진 때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서운 악마의 유혹이었다. 그는 거의 이에 압도되어
다시 세속으로 돌아갈까 망설인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는 그 유혹을 물리치는 한 방편으로 가장 어려운 히브리어의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스어를 익히고 히브리어를 공부하며,
그가 은수생활을 계속할 것인지 그만둘 것인지 망설이고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너는 치체로 추종자이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네 보화가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꾸중하셨다고 한다.
예로니모는 성직자의 반열에는 들어가 있었으나 아직 사제의 자격은 없었다.
동료들은 이를 애석히 생각하고 신품 성사를 받도록 권유했다.
그후 은수자들 사이에 아리우스 이단 문제로 대립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379년에 광야에서 나와 안티오키아에 돌아와서 일정한 사목직을 맡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성 바올리노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바울리노를 지원하려는 목적에서 멜레시아노의 이단 논쟁에 개입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성서의 라틴어 번역에만 보냈으나,
그 당시에 있었던 몇몇 이단적인 가르침, 예컨데 오비니아의 성모 마리아 동정 부인과 사제의 독신
그리고 성인들의 유해 공경 반대에 대하여도 그 명확한 근거로 반박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이듬해에 콘스탄티노플에 가서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이던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의
강의를 듣고 오리게네스의 성서 주석 방법에 매료되었으며,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와도 교류를 가졌다.
이때부터 그는 나지안조의 주교 성 그레고리오의 권유로 오리게네스이 호교서와
에우세비오의 교회사 등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했다.
그의 심오한 학식은 그로 말미암아 일시에 세상에 널리 퍼져, 그의 명성은 로마에까지 전해졌다.
그랬던 만큼 382년 교회 회의가 개최되자 당시의 교황 다마소에게 초청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축일:1월2일.게시판833번,1548번.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축일: 3월 9일.
성 다마소 1세 교황 축일:12월11일.게시판795번,1518번.
그리스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한 예로니모는
교황을 보좌하며 여러 문제의 의정(議定)에 공헌한 바가 컸고,
또한 그의 명을 받아 이제까지 사용해오던 이딸라 성서 중의 오역(誤譯)을 수정했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공로는 위대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예로니모는 382년에는 바울리노와 성 에피파니오와 더불어 로마로 가 공의회에 참석하고,
자신은 교황 다마소의 비서로 계속 머물게 되었다.
이때 다마소 교황은 신.구약 성서를 라틴어로 새로 번역하는 대업을 맡겼다.
서방교회 안에는 이미 여러 개의 라틴어 성서 번역본이 있었지만,
교황은 예로니모에게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라틴어 성서본을 만들도록 위촉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로마에는 사치와 냉담의 나쁜 풍습이 만연했다.
예로니모는 이를 매우 염려해 진실한 사람들을 규합하여
그 지도자가 되고,
그들을 통해 일반 시민들에게도 가톨릭의 참된 정신을 고취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예로니모는 귀족 부인들을 권고하여 성서 연구에 관심을 갖게 하였고
수도생활의 이상에 대한 열정을 고취시켰다.
또한 수많은 자신의 반대자를 상대로 하여 사제 독신제와 거룩한 생활을 역설하였다.
이같이 뜻깊은 사업에 협력과 원조를 아끼지 않은 사람들 중에는 원로원 의원 판마키오와 그의 친구들,
집정관 미망인 성녀 마르셀라, 귀족부인 성녀 바울라 및 그녀의 두 딸인 성녀 프리실라와
에수스토치움 등 상류계급의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재능을 시기한 적대자들이
여자들 집에 들락거리는 예로니모를 의심하고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후원자이던 다마소가 서거하자,
그의 반대자들과 또 나쁜 루머들이 난무하는 것을 보고는 동방으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사실 예로니모는 80세 가까이 된 다마소 교황의 뒤를 이을 사람으로 물망에 올라있었다.
그러나 384년에 그를 지원하던 다마소 교황이 사망하고 예상과는 달리
시리치오 교황이 선출되자 상황이 돌변하였다.
적대자들이 그에 대한 비난을 강화하였기 때문에 그는 로마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안티오키아로 가서 바울라와 에우스또치움 및 일단의 로마 그룹과 합류하여
이집트의 니트리아 사막의 은수자들을 방문한 다음 ,
386년에 팔레스티나로 와서 베들레헴에 정착하였는데, 여기는 바울라가 여자 수도원 3곳과
남자 수도원 1곳을 세웠고, 예로니모가 남자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또 그는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를 짓고 수도자들을 위한 학교를 세워 직접 강의하였다.
예로니모는 자신의 경험에서 혼자 수도에 힘쓰는 은수자 보다도 한 지도자 밑에서 공동 생활을 하며
서로 도와 주며 나아가는 것이 훨씬 수덕에 빠른 길이라는 것을 깨달아 친히 수사들을 지도하는 임무를 맡고,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성당에 모여 성무 일도서를 같이 합송하고,
아침 미사에는 완덕에 관한 유익한 설교를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적당히 노동에 종사하기로 했다.
또한 여가를 이용해 신·구약 성서의 사본을 작성케 하고 이를 사방에 보내주었다.
예로니모는 다시 신약·구약 양 성서를 쉽게 또한 정확하게 다시 번역할 것을 결심하고,
우선 카르데아어(語)를 배우고 나서
386년부터 404년까지 끈기있게 집필을 계속해 드디어 위의 대사업을 완성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유명한 불가타(대중라틴말성서)역 성서인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모든 교부의 저서나 성서의 각서에 대한 주석설명서도 저술하고,
바쁜 중에도 각 방면의 명사와 편지, 서신왕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래서 베들레헴의 수도원은 마치 가톨릭적 생활의 중심지와 같은 감을 주었고,
점차로 순례지처럼 천하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래서 루시니오라는 스페인의 한 부호가 예로니모의 집필로 된 서적을 모조리 수집하기 위해
필사본을 뜨는 사람들 6명을 파견한 적도 있었고,
아프리카, 스페인, 갈리아, 독일 등지에서는 주교, 사제들이 그의 교훈을 청하러 오기도 했고,
또한 이탈리아의 총독이나 갈리아의 귀부인들은 신조에 관한 설명을 들으러 오기도 했다.
이와 같이 그의 학식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져 주었다.
중세기에 이르러서 그의 저서는 더욱 높이 평가되었다.
그는 생존시 이미 당시에서 가장 큰 역사가로서 유명해졌다.
그만큼 유명하고 세인에게 칭찬을 받던 예로니모였지만, 하느님의 시련과 악마의 유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니 없었기는 커녕 오히려 그것은 수십년간이나 그를 못 견디게 했던 것이다.
이에 그가 패배되지 않은 것은 오로지 그가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며 열렬히 기도하는 한편,
늘 몸을 잘 조심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같은 내부의 우환 뿐아니라 소아시아에서 야만족이 팔레스티나에 침입한 것 등의 외환도
두 번이나 있어, 파괴된 수도원 부흥에 크나큰 심로를 맛보지 않으면 안되었다.
410년 고트족이 로마에 침입해 거의 전 시가를 페허로 만들었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을때 그는
"교회의 손해를 듣고, 비통에 가슴이 찢어질 듯하여 통곡하고 체읍하며 말문이 막힐 뿐이다"라고
어느 서한 중에 술회했다 한다.
또한 394년부터 그는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와 서신 연락을 하면서 당시 교회의 큰 골칫거리였던
펠라지우스 이단을 몰아내는 데 공동 보조를 맞추었다.
아우구스티노는 예로니모의 라틴어 번역 사업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를 칭송하였다.
St Jerome and the Angel - VOUET. Simon.
1620s.Oil on canvas. 144.8 x 179.8 cm.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교회는 9월 30일에 그의 축일을 지내고, 그를 ’신학교의 주보’ 또는 ’수덕생활의 주보’로 모신다.
그는 아마 라틴 교부들 가운데 가장 박학한 분이었고,
동시대 사람들 가운데 라틴어와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었다.
예로니모는 엄청난 양의 저서를 남겼으며,
밍네의 라틴 교부 총서(PL) 제22-30권에 그의 저서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총서 한 권은 요즘의 400쪽으로 된 책 40-50권 분량이나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방대한 저서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저서들은 성서 주석서, 성서 번역서, 교의신학서,
이단 논쟁서, 수덕신학서, 역사서, 강론, 서간 등 다양하며, 저서 목록만 열거하더라도 엄청나게 많다.
그가 이처럼 많은 저서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비교적 오래 살기도 했지만,
수도원 안에서 학문 연구에 열정적으로 몰입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성화들이 많은데,
상체를 벗은 은수자의 모습으로 펜을 들고 저술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의 가장 큰 성공은 390년에서 420년까지 이룩된 구약 성서 번역이다.
이것은 히브리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것으로
구약성서의 경우에 처음에는 그리스어로 된 70인역에서 번역하였다가
후에 히브리 원문에서 직접 번역하였다
신약성서의 번역도 이 동안에 완성된 것이다.
예로니모가 번역한 라틴어 성서에 불가타(Vulgata.대중라틴말성서)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예로니모 당시가 아니라 훨씬 뒤인 13세기부터였다.
예로니모의 라틴어 성서본이 원문에 매우 충실하고 정확한 번역일 뿐만 아니라,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라틴어로 되어있었으므로
로마 교회가 트렌트 공의회에 의하여 가톨릭의 공식 라틴어본으로 선언되었다.
그는 이 성서 번역으로 교회 내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또한 이것은 그의 심원한 학식의 최대 결실이라 하겠다
그는 유명한 그리스 교부들의 성서 주석서들,
특히 오리게네스의 주석서들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서방교회에 소개하였다.
게다가 예로니모는 자신이 직접 구약성서의 창세기, 시편, 전도서, 모든 예언서,
그리고 신약성서의 마태오 복음서, 사도 바오로의 필립비서, 갈라디아서,
에페소서, 디도서 등에 대한 주석서들을 저술하였다.
405년부터 임종할 때까지 그는 수많은 성서 주석서를 남겼고,
그의 번역 사업에 대한 귀중한 자료들을 남겼다.
예로니모는 처음에는 은유적 주석방법을 선호하였지만
점차 성서의 본문과 역사를 중시하는 문자적 주석방법으로 바뀌어갔다.
그는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성서의 무류성을 역설하였다.
그가 성서 본문 연구와 주석에 이처럼 주력하였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또한 이 외에도 예로니모에 관한 유명한 전설이 있다.
그것은 어느 날 한마리의 사자가 절룩거리며 그에게 가까이 와서 앞발을 내밀어 자세히 보니,
거기에 커다란 가시가 박혀져 있었다.
그래서 그가 이를 빼주니까 사자는 자못 기쁜듯이 갈기로 덮여진 머리를
성인의 몸에 비비고 그 후는 성인의 곁을 떠난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예로니모가 사자와 같은 용기로써 교회를 위해 투쟁하고,
자신을 극기하고, 자기의 결점,악습과 같은 가시를 제거하는데
끊임없이 노력한 사실을 상징한 이야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St Jerome and St Augustine - CRIVELLI, Carlo
c. 1490.Tempera on wood, 187 x 72 cm.Gallerie dell’Accademia, Venice
불가타 Vulgata
405년에 라틴어로 완역되어 가톨릭 교회에서 널리 사용된 성서(聖書)의 이름,
불가타란 일반에게 널리 보급되고 있다는 뜻으로,
예로니모(Sophronius Eusebius Hieronymus)가 번역하였다.
시편을 제외한 구약성서는 히브리어에서 직접 번역하였고,
신약성서는 이미 번역되어 있던 라틴어 역본(譯本)을 그리스어 원본과 대조해서 정정한 것인데,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그 신빙성을 공인받았다.
1907년 성 비오 10세는 베네딕토회 수사들로 구성된 불가타 위원회를 로마에 설치하여
새로운 개정판 간행을 촉진하였다.
[참고문헌] S. Berger, Histoire de la Vulgate, 1893/
W.E. Plater and H.J. White, A Grammer of the Vulgate 1926.
-가톨릭대사전에서-
[이콘] 거룩한 지혜이신 주님. 소피아(Sophia)
러시아. 스트로가노프(Stroganov)양식. 27x22cm. 18세기.
성모님과 세자요한 사이에 위치한 이분은 소피아 즉 참된 지혜이신 주님을 나타내고 있다.
후광에 십자 모양이 그려지고, 존재자를 나타내는 희랍어 글자가 또한 새겨져 있습니다.
이 글자와 십자 후광은 오로지 하느님,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사용됩니다.
(교회미술 아카데미 장긍선신부.)
이 성화(Icon)는 신성한 지혜의 소피아상이다.
불빛처럼 빨갛고 날개 달린 천사가 신성한 지혜로 상징화되어 있는 소피아로서 왕좌에 앉아 있다.
소피아는 왼손에 창을 들고 있고 오른손은 축복을 내리기 위하여 올리고 있다.
가슴앞에 임마누엘을 데리고 있는 성모님은 왕좌의 왼쪽에 서있고. 오른쪽에는 세자 요한이 서있다.
그 위에는 축복하는 그리스도가 후광(後光) 가운데에 있다.
성화(Icon)의 윗 가장자리에는 천사들이 별들이 그려진 수건을 펼치고 있고
그 수건의 중앙에는 성령(聖靈)을 상징하는 소위 헤토인아시아(Hetoinasia)인 연단이 묘사되어 있다.
성화(Icon)의 왼쪽에는 성자 니폰트(Nifont)의 전신상이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는 성자 아르테미오스 (Arthemios)가 보인다.
-(유럽 聖畵(ICON)集에서)-
9월 30일
성녀 소피아
ST.SOPHIA of Rome
Santa Sofia (Sonia) Martire
Sofia = sapienza,saggezza,dal greco.=wisdom
순교자. 성녀 소피아는 어머니이고 나머지 세 성녀는 자녀들이다.
세 자녀들은 트라이아노 로마 황제때, 순교하였으며, 성녀 소피아는 사흘 뒤에 자연사하였다.
성녀 소피아와 그 자녀들이 실제로 존재했는지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러나 동방에서는 성녀 소피아에게 봉헌된 성당이 여럿 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전설에 의하면
성녀 소피아는 동정 순교자 성녀 피데스(Fides)와 성녀 스페스(Spes)
그리고 성녀 카리타스(Caritas, 이상 8월 1일)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자신의 세 딸의 순교한 지 3일 후에 그들의 무덤에서 기도하던 중에 평화롭게 선종하였다.
지혜라는 의미를 지닌 성녀 소피아의 생애와 관련이 있는 전설적인 이야기는,
동방 지역에서 세 가지 신학적인 덕목들 즉 피데스(신덕), 스페스(망덕),
카리타스(애덕)의 원천인 신적인 지혜를 숭배하던 관례에서 비롯된 것으로,
마치 신학적인 덕목들을 의인화해서 우화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가톨릭홈에서)-
Sophia란
"하느님의 지혜(divine Wisdom)"라는 뜻으로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지혜라는 뜻이다"
[Greek Icon]St. Sophia and her daughters Faith, Hope, and Love.
소피아(Sofia)는 천상 지혜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피스티스(Pistis)는 믿음의 뜻을 지니며,
엘피스(Elpis)는 희망을 가리키고,
아가페(Agape)는 사랑을 가리킨다.
실제의 사람이었던 성녀를 나타내기 보다는 지혜를 의인화 한 것이라 함이 옳고
지혜로 부터 파생되는 세 가지 덕목을 또한 아이의 형상으로 형상화 한 것입니다
★1.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성당(Aya Sophia, Hagia Sophia)
ㅇ Sophia란
"하느님의 지혜(divine Wisdom)"라는 뜻으로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지혜라는 뜻이다.
ㅇ 건물내에는 초기 기독교 聖畵 및 회교적 종교 장식물이 공존되어 있어
동-서, 기독교-이슬람 문화의 접촉이라는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ㅇ 비잔틴 제국의 카톨릭 성당으로 오랜 시일이 경과되었음에도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 건축학상 8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Byzantine 건축으로 가장 완벽하게 조화된 건축물로 평가되고 받고 있는 이 건축양식은
현재의 건축기술로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다한다.
ㅇ Sophia 대성당의 현재의 건물은 그 자리에 세워진 세 번째의 건물이다.
최초의 건물은 360년 Constantine 황제의 아들 constantius는 Sophia 성당을 건축하였다.
그러나 404년 불에 타 파괴되었다.
그후 415년 TheodosiusEo 다시 재건 되었다. 그러나 532년에 일어난 민란사건으로 소실되었다.
민란사건이 진압된 후, Justinian 황제는 곧 파괴된 Sophia 대성당을 다시 재건하였다.
따라서 현재의 건물은 Justinian 황제 때 건축된 것이다. (538년 봉헌)
ㅇ 건축가는 비잔틴 제국의 가장 주목할 만한 황제인 유스티니안 황제의 명에 의하여
수학자이며 건축가, 구조학자인 안테미우스(Anthemieus of Tralles)와
이스도루스(Isidorus of Mulet) 가 532년부터 536년에 걸쳐
황금 90톤의 비용을 들여 건축하였으며, 세계 건축사상 가장 뛰어난 건축물의 하나로 평가된다.
성 베드로, 밀라노 대성당, 성바오로 성당에 이어 네번째로 꼽힌다
이 성당을 지은 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내가 이제 솔로몬 당신을 이겼소"라고 고백했다고 전해 지듯
그 웅장함과 아름다움은 로마 비잔틴 양식의 극치를 이룬다.
ㅇ 15층 건물 높이에 해당하는 56m 높이는 거대한 중앙 Dome과 많은 보조 Dome을 갖고 있으며,
거대한 중앙 Dome은
다시 4개의 소형 Dome으로 연결되어 하므로써, 비잔틴 건축물의 표본으로 꼽혀지고 있음.
후일이 건축물은 이슬람 세계에 영향을 미쳐 이스탄불 회교사원들에서 발견되어지는 비잔틴-
이슬람 문화의 융화라는 독특한 건축양식을 낳게 했음.
다중 돔형의 이 사원은 건축하는데 비교적 짧은 시일이 걸렸으나,
그 규모는 엄청난 것으로 전체적 직사각형의 크기는 71 X 77 미터에 달하며
돔의 직경이 약 30m로 바닥에서부 터 56m나 치솟아 있으며,
중앙부분의 거대한 돔 둘레에는 40개의 창문이 있다.
사원의 내부는 세계적인 수준의 최고급 대리석 유물 및 장식 모자이크로 채웠다.
ㅇ 성 소피아 성당은 통로와 중심, 혹은 통로와 목표가 완벽하게 통합되어 있는데,
이것은 자신이 지상의 순례자로서 영원한 하느님을 향하는 길목에 서 있다는 근본적인
그리스도교 정신의 표출이라 하겠다.
ㅇ 성 소피아 성당은 397년부터 8년간 이곳에서 목회했던 명 설교가 크리소스톰 대주교의
청빈하고 모범적인 삶으로도 유명하다.
성 소피아 성당은 지금도 교회내 좌석과 강단의 차이가 거의 없다.
그것은 크리소스톰이 성도들의 좌석과 목회자의 강단 사이에 높고 낮은 차이를 두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말씀을 증거한 뒤 다시 성도들의 좌석으로 돌아가 앉았다고 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톰 축일:9월13일.게시판1363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ㅇ 1453년 오스만 터어키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으로 회교사원으로 개조 되었으며(916년간 성당으로,
그리고 477년간 회교사원으로 사용),
1930-1935년 아타튀르크에 의해 박물관으로 전환되었다.
ㅇ 성당 밖에는 회교사원으로 사용시 추가된 4개의 회교 첨탑이 시대에 따라 각기 형태를 달리하면서 세워졌다.
1453년 Ottoman 제국이 Constantinople을 점령한 후, 이들은 St.Sophia 를 mosque로 전환시켰다.
즉 minaret를 첨가하였고, 내부에 Moslem 기도처(Islamic Prayer niche, "미랍"(mihrab)이라고 부름.
방향은 반드시 메카쪽을 향한다)를 만들었다.
또한 내부의 모자이크 장식은 일부 파괴되거나, 회질을 해서 없애버렸다.
Moslem에 의해서 훼손된 Mosaic 복원작업은 1840년대부터 일부 시작되었고 1931년에 들어와서
미국의 T.Whittenmore에 의해서 본격적인 복원작업이 진행되었다.
ㅇ 성 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양식의 견본으로서 그 후 비잔틴 건축 양식의 모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회교 사원 양식의 모델이 되었다.
오늘날 회교 사원을 보면 가운데 거대한 돔과 보조돔으로 구성된 것을 볼수 있다.
아야소피아의 이콘.
황제 콘스탄틴 모누마쿠스 4세, 예수그리스도, 죠에 여왕
이층에는 비잔틴 양식의 모자이크 성화가 전시되어있다.
성 소피아 대성당 황제의 문 위에 있는 모자이크로 9세기에 만들어졌습니다.
가운데 예수님이 계시고, 왼쪽 원안에 성모 마리아, 오른쪽 원안에 가브리엘 대천사의 모습이 있고,
예수님 왼쪽으로 비잔틴 제국의 황제였던 레오 6세가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입니다.
*신앙의 땅 터어키의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의 역사와 미술*
330년 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티노플(오늘날의 이스탄불)로 수도를 옮기면서
동로마 시대를 시작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옛 이름 비잔티움을 따 비잔틴 제국으로 불렸던 동로마 제국은
1453년 막을 내릴 때까지 활발한 상업과 교역으로 다져진 부를 바탕으로 눈부신 문화를 남겼다.
중세인들에게 콘스탄티노플은 재물이 넘쳐나고 금빛 찬란한 궁전이 즐비하게 서있으며
일년 내내 축제가 끊일 날이 없는 꿈같은 곳으로 여겨졌다 한다.
그러나 흔히 무역과 상업이 발달한 도시들이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예술 형태들을 내놓은 것과 달리
비잔틴 제국은 전통적이고 엄격한 미술을 전개해나갔다.
그림의 성모자와 황제 콘스탄티누스와 유스티아누스(10세기 말)는
비잔틴 문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모자이크화 가운데 하나이다.
옥좌에 앉은 성모와 아기예수를 중심으로 오른쪽이 도시를 바치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왼쪽이 교회를 바치는 유스티아누스 황제이다.
정면을 향한 성모의 자세, 대칭과 균형이 느껴지는 엄격한 배열, 개성이 배제된 황제의 얼굴,
금색의 배경 등은 그리스 미술의 자연주의적 접근과는 거리가 멀다.
인간 중심의 세속적인 삶을 찬양했던 그리스 미술과 반대로
비잔틴 미술은 철저하게 신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인 미술이었다.
구약과 신약,
성자들의 삶이 미술의 가장 큰 주제로 등장했으며,
미술가들의 개성보다 교회가 정한 원칙이 중시되었다.
개인적인 해석을 시도하는 미술가는 이교도나 신성 모독으로 몰리기도 하였다.
따라서 미술가들은 자연스럽게 양식화의 방식을 선택했다.
마치 정면성의 원칙을 고수했던 이집트 미술가들처럼 정형화된 표현 양식을 통해 초인간,
신성한 것, 절대적인 것을 표현해보려 한 것이다.
모자이크는 이러한 비잔틴 미술의 성격에 매우 적합한 매체였다.
입체적인 묘사를 배제하고 이차원적 도식을 사용하는 방법은 비잔틴 미술의 목표와 일치하였으며,
반짝이는 유리조각이 내는 풍부한 색채와 광채는 교회의 내부를 장엄하고 화려하게 만들고
교회의 신성한 빛을 연상시켜 신자들의 신앙심을 고취하였다.
비잔틴 제국의 역사가 길었던 만큼 후기에는 코라 수도원의 모자이크처럼
자연주의적인 접근이 나오기도 하였으나 비잔틴 미술은 기본적으로 ’유형’의 미술이었다.
비잔틴 화가들이 그렸던 성모는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어머니라기보다는
천국의 여왕으로서의 성모의 모습이었다.
인물의 태도와 성격, 주제의 선택, 작품의 위치와 배열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유형들은
거의 천년 동안 변하지 않았고,
모자이크뿐만이 아니라, 비잔틴 미술의 특별한 장르인 이콘(나무나 상아 등을 이용한
소형 성상)에서도 엄격하게 지켜졌다.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성당 (Aya Sophia)전경
★2. 키에프(우크라이나)의 소피아 성당( Cathedral of Sophia )
러시아 최초의 석재 교회건물은 991년 끼예프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들 건축물은 비잔틴의영향하에 그리스 예술가들의 도움을 받아 건축된 것입니다.
이들 중 대표적인 건물이 11세기 초에 건축된 소피아 성당입니다
우크라이나의 가장 중요하고 대표적인 역사적 건물로 평가받고 있는
소피아성당은 그리스어로 ’하느님의 예지’란 뜻을 지니고 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1037년에 건축된 ’솔로몬 사원’이 있었는데,
이후 18세기에 바로크 건물로 개축된 것으로 Peter 대제가 완성시켰다.
이 건축물의 특징은
여러개의 돔(dome)을 갖추고, 모자이크(mosaic)와 회화로 치장된 것이 특징입니다.
지금 사진에서 보시는 모습은 건축될 당시의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고 후에 증축된 것입니다.
건물 중앙에 있는 금빛 돔을 중심으로 좌우 5개의 대칭형으로 녹색의 돔이 배치되어
흰색 벽면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돔 안에는 기도하는 성모 마리아상이 있고,
그 밑에는 성찬식 장면이 그려져 있으며 벽에는 이콘이 빈틈없이 그려져있다.
수차례의 전란에서도 기적적으로 파괴를 면하고 원래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성당내부의 프레스코화가 유명하다.
콘스탄티노플(현 터키 이스탐불)의 소피아 성당과 쌍벽을 이루는 키에프 소피아 성당은
키에프公國의 기독교 중심지로서 기독교 복음 전도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키에프-페체르스크 라브라의 영적, 정신적 영향은 17C∼19C경 러시아 정교회의
신앙 및 사상 전파에 크게 공헌하였다.
키에프의 소피아 대 성당과 수도원 건물들, 키에프 - 페체르스크 라브라
(Saint Sophia Cathedral and Related Monastic Buildings, Kiev-Pechersk Lavra :
문화, 1990)
★3.미국 LA그리스 정교회 소피아 성당
미국 LA그리스 정교회 소피아 성당의 전능자 그리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