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0일(9월 17일,9월 25일)
캄포로쏘의 성 프란치스코 마리아
SAINT FRANCIS MARY OF CAMPOROSSO
CAPUCHIN LAY BROTHER
St. Francis Mary Camporosso, OFMCap San Francesco Maria da Camporosso (Giovanni Croese) Laico cappuccino Camporosso, Imperia, 27 dicembre 1804 - Genova, 17 settembre 1866
1804년 12월 27일 임페리아 근교에서 태어났다. 카푸친 작은형제회 평형제가 되어 제노바에서 대부분의 수도생활을 지내면서 40년간 오직 모든 이들의 선익을 위하는 마음으로 동냥을 다녔다. 그의 인격, 주위에 퍼진 높은 명성으로 인하여 통상 '거룩하신 아버지'라고 불리웠다.
콜레라로 쓰러진 제노바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큰 의지와 사랑의 힘에 이끌려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치길 원했고,
1866년 9월 17일 자신도 콜레라에 감염되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 후 전염병이 물러갔다.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작은형제회홈에서)-
그는 리구리아 해안의 소도시인 캄포로쏘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세 되던 해에 그는 꼰벤뚜알 수도자 한 분을 우연히 만나 자신의 성소를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세스트리 뽀삔떼 수도원에 갔으나 3회원으로 받아 들여졌을 뿐이다.
더욱 엄격한 생활을 원하던 그는 즉시 이곳을 떠나 카프친회에 들어갔고,
여기서 프란치스코란 이름을 얻고 서원하였다.
평수사인 그는 주로 병자를 돌보는 일을 하다가,
원장의 지시를 받고 탁발을 시작하였으나 마음에 들지 않아 고통이 뒤따랐다.
어떤 때에는 빵대신 돌을 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10년 동안이나 겸손하게 탁발한 결과 뛰어난 성덕을 닦을 수 있었다.
그는 "빠드레 산또", 즉 성인 신부로 통할만큼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그의 덕을 흠모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1866년, 제노아 지방에 콜레라가 창궐하였을 때,
그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다가 자기 자신도 희생자가 되어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1929년에 시복, 1962년에 시성되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타우(T)는 그리스어 알파벳의 아홉 번째,
그리고 히브리어의 스물 두 번째, 즉 마지막 글자이다.
타우는 성서적으로 ’하느님의 것’이란 표지요 ’구원의 표’로 인식되었다.
이에 대한 언급은 에제케엘 예언서에 나온다.
"이마에 표(타우)가 있는 사람은 건드리지 말아라"(에제 9,6).
여기서 말하는 타우 표시는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집트에서 구원되었듯이(출애 12, 21-28 참조),
타우 표를 지니는 사람은 구원의 표를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타우 표시는 성서적인 표지일 뿐 아니라 로마의 까따꼼바들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오랜 그리스도교 전통을 지니고 있다.
*카푸친수도회성인들Capuchin Franciscans 비테르보의 성 크리스피노(축일:5월21일(19일),게시판1773번.1891번) 단순성과 기쁨.칸탈리체의 성 펠릭스 (1587년.축일:5월18일.게시판1770번.1166번) 만디츠의 성 레오폴드 사제(축일:5월12일,게시판1759번,1890번) 라코니의 성 이냐시오 수도자(축일:5월11일.게시판1757번) 신앙을 수호하다 순교한 식마린겐의 성 피델리스 사제(축일:4월24일.게시판1727번,1119번) 빠르잠의 성 곤라도 수도자(축일:4월21일.게시판1722번) 성 요셉 레오네사(축일:2월4일.게시판1601번) 꼬를레오네의 성베르나르도 수도자(축일:1월12일(19일),게시판1564번) 아크리의 복자 안젤로(축일:10월30일.게시판1444번) 성 세라피노(축일:10월12일.게시판1417번,691번) 캄포로쏘의 성 프란치스코 마리아(축일:9월20일(25일)게시판1384번) 오상의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축일:9월23일.게시판1379번) 복자 오피다의 베르나르도(축일:8월26일(23일)게시판1334번) 복자 아가탄젤로와 카시아노 동료순교자(축일:8월7일.게시판1305번) 브린디시의 성 라우렌시오 사제 학자(축일:7월21일.게시판1283번)...
[이콘]라도네츠의 세르게이 성인에게 나타나신 성모
The Presentation of Mother of God to St. Sergius of Radonezh’s
러시아 야로슬라블(Jaroslavl)화파.18세기.목판 템페라.30.7x27cm
러시아의 위대한 수도자 중 라도네츠의 성 세르게이에게 성모님께서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을 대동하시고 발현하신 기적을 묘사한 성화이다.
중앙상단에는 삼위일체가, 좌우 테두리에는 각기 디미트리와 에프도키아 성녀가 그려져 있으며,
성 세르게이 뒷편 상단에는 카잔의 성모와 니콜라이 성인의 성화가 보인다.
성 세르게이 옆은 세르게이의 제자이다.
기적을 묘사한 성화 중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으며, 색감이 평온하여 마음을 가라앉게 한다.
-The Russian Icons.INSPIRED ART-황규완,장긍선편저.
9월 25일
성 세르지오(세르게이)
St. Sergius of Radonezh’s
San Sergio di Radonez
Rostov, 1314 c. - Monastero della Trinity,25 settembre 1392
ABBOT OF HOLY TRINITY (25 SEPT 1392)
Sergio =che salva, custodisce, seminatore, dal latino
Fu canonizzato in Russia prima del 1449.
러시아의 귀족 가문 출신인
성 세르지오는 로스토프에서 태어나 바르톨로메오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15세 때에 그는 모스크바 통치자들의 로스토프 침략을 피하여 정처없이 온가족이 떠나야 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 모스크바 교외인 라도네즈에서 농사를 지으며 지냈다.
1335년, 부모와 사별한 세르지오와 그의 형 스테파노는 마코프카에서 은수 생활을 하다가,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세르지오란 수도명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러시아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은수생활을 계속하였으므로, 그의 성덕이 널리 알려졌다.
이때부터 제자들이 몰려들므로, 세르지오는 유명하게 된 "성삼 수도원"을 세워 원장이 되었고,
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타타르족의 침략 이후 사라졌던 러시아에 수도공동체를 재건한 것이다.
그 후 그는 헤르쟈크강변에서 은수자 생활을 하던 중,
모스크바의 총주교 알렉시스의 부름을 받았으며,
모스크바의 드미뜨리 돈스코이 왕자는 세르지오의 권고에 따라 타타르족과 싸워서
러시아를 해방시키게 되었다.
이 승리 이후 그의 명성은 더욱 퍼져나갔고, 러시아 왕가의 협조는 매우 관대하여
수많은 교회와 수도원을 짓게 되었다.
1378년, 그는 모스크바 총주교 임명을 끝내 사양했고,
또 1392년에는 자기 수도원의 원장직도 사임한 후 6개월 만에 서거하였다.
성 세르지오는 러시아 최대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성 세르게이는 러시아의 어려운 시대에 살았으며(1314-1392)
몽고치하에서 조국과 민족을 해방시키고 러시아를 새로이 창건하는 일에
깊이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성 세르게이는 1314년 5월 3일, 로스토프에서 출생하였고
40일 째 되는 날, 바르폴로메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성사 주례자 미카엘 신부는 부모에게 "기뻐하십시오,
이 아기는 성 삼위 하느님의 일꾼으로 선택받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본당 신부님의 예언은 적중되었습니다.
그 후 일곱 살이 되어서는 수도원에서 읽는 것과 쓰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자연의 아름다움과 고요함을 더 좋아하였습니다.
바르폴로메오는 글을 읽거나 쓰는 일에는 형제들이나
친구들에 비하여 공부 못하는 아이로 뒤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크게 걱정을 하며 공부하라고 자주 꾸중도 하였습니다.
선생님도 특별한 배려로 지도하였습니다. 그래도 바르폴로메오의
공부 성적은 낙제점이 었습니다.
하루는 바르폴로메오가 뛰어 놀다가
참나무 아래서 기도하는 나이 많은 수사님을 만났습니다.
수사님은 바르폴로메오에게 프로스포라(성찬예배 봉헌용 빵)조각을 주면서
"바르폴로메오야 이것을 받아먹으라.
이것을 먹으면 네가 공부를 잘 할 수 있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바르폴로메오는 축성된 빵(프로스포라)조각을 받아 먹고 나머지는 가방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바르폴로메오는 그 수사님을 자기 집으로 이끌어 모셔갔습니다.
부모님은 수사님을 반갑게 잘 모셔들이고서는 바르폴로메오가 커서 무엇이 될까? 하며
크게 걱정하였습니다.
그런데 글을 잘 읽지 못하던 바르폴로메오는 즉시 글을 읽기 시작했고
한 시간 동안이나 소리내어 읽었습니다. 수사님은 "걱정하지 마시오.
이 어린이는 장차 하느님 앞에서 훌륭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성 삼위일체 하느님의 일꾼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나이 많은 수사님은 떠나가시고 다시는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 나이 많은 수사님은 천사였습니다.
그 후, 1480 년에 바르폴로메오의 부모님은,
나이 많은 수사로 나타났던 하느님의 천사의 발현장소 바로 그 곳,
자기네 집터에 바르닛싸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원 현관에는 바르폴로메오가 천사를 만나
대화하는 장면을 그림으로 잘 그려 봉헌하였습니다.
바르폴로메오의 부모님은 로스토프에서 상류층이며
모스크바에 가서도 살 수 있었지만 하느님의 섭리로 라도네쮜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골로 이사를 하여 동정 성모탄생 성당 가까이에 정착하였습니다.
라도네쮜는 로스토프에서 남쪽으로 160킬로 떨어졌고,
모스크바에서는 동북쪽으로 약 60킬로 거리에 위치합니다. 바르폴로메오의 형과 아우는 결혼하여 독립하였고 혼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중에
광야로 나아가 은수 생활을 하고싶다고 부모님에게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우리들은 이제 늙었고 병들어 돌 봐줄 사람도 없다.
우리는 머지않아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떠날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너무 멀리 가지말고 우리 가까이서 지내자." 라고 말씀하시니
바르폴로메오는 부모님의 청에 기꺼이 동의하였고,
이어서 부모님(끼릴과 마리아)은 호츠코브 인근 수사원과 수녀원으로 각각 들어갔습니다.
라도네쮜로 이주해 온지 6년만에 부모님은 평화롭게 하느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1334년)
바르폴로메오는 20세의 나이에 하느님의 소명을 실천하기 위하여 형
스테파노와 함께 라도네쮜 숲 속으로 들어가서 은수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형 스테파노는 일찍 홀아비가 되었음) 광야의 숲 속에서 은수(隱修) 생활을 한다는 것은
정말 고통이었습니다.
늑대, 곰 등 야수의 위협과 추위 그리고 배고픔, 특히 겨울철에 식량구입문제는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형 스테파노는 도시근교 수도원으로 옮겼으나
바르폴로메오는 홀로 광야의 숲 속에서 은수 수행을 계속하면서 침묵과
기도 중에 수도자 서원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바르폴로메오는 23세 되던 해,
1337. 10. 7, 성 순교자 세르게이 축일에 세르게이라는 수도명을 받고
정식 허원 수사가 되었습니다.
세르게이의 은수처 라도네쮜의 스키트에 관한 소문은 사방에 퍼졌습니다.
다른 곳의 수도자들이 방문하고 먹을 음식도 날라 왔습니다.
그리고 세르게이와 함께 수도생활을 하겠다고,
나이 많은 바실리 수사가 맨 먼저 왔고 그 다음으로 부제 오네시모 ,
사제 엘리사가 왔습니다. 그들은 손수 나무로 집을 지었습니다.
세르게이는 아직 젊었기에 남보다 두 배나 더 일을 해내었습니다.
이제 수도공동체 일원이 된 이들은 매일 성당에 모여 아침기도, 아침예배,
시간기도, 저녁예배, 그리고 종과기도를 바치고 주일과 축일에는
나이 많은 메트로판 신부님을 모셔다가 리뚜르기야(서찬예배)를 봉헌하고
성체 성혈을 영했습니다. 세르게이는 성직자가 된다든지 원장이 되리라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의 하루일과는 주로 장작을 폐거나 부엌으로 나르는 일이거나
부엌바닥을 쓰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밤에는 기도로 시간을 보내고 먹는 것이라고는
작은 빵 한 조각과 물뿐이었습니다.
하루는 수도자들이 세르게이를 스타렛쯔(장상 또는 수도원장)로 선출했습니다.
그러나 세르게이는 자기는 수행능력이 없다고 원장직 수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세르게이는 이 문제를 주교님과 상담하는 중에 주교님은 "형제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성 삼위일체 수도원의 책임자로 점지되었으니
매사를 순명으로 받아들이시오."라고 말하고는
세르게이를 이끌고 성당으로 가서 첫 날에는 차부제로,
이튿 날에는 부제로 마지막 날에는 리뚜르기야 중에 사제로 서품 하였습니다
.(1343) 세르게이는 원장이 된 후 첫 설교로 마태오 복음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시편 34:11, "젊은이들아, 와서 내 말을 들어라. 두려운 마음으로 야훼를 섬기는 길을
가르쳐 주마." 갈라디아서 5:22-23,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에 대하여
가르침을 하였습니다.
성 세르게이가 라도네쮜 광야의 숲 속에서 홀로 시작한 은수처는 스키트로 발전하였고
스키트는 수도원으로, 그 다음에는 전국에서 가장 큰 대수도원(라브라)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성 세르게이 생애의 외적인 패턴은 에집트의 성 안토니오의 생애를 연상하게 합니다.
성 세르게이는 농부생활을 하면서 가난한 이들이 입는 남루한 옷을 즐겨 입는 자기
겸허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세르게이는 모스크바의 대공과는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그는 모스크바 도시를 확장하도록 권했습니다.
그리고 디미트리 돈스코이 대공이 러시아군대의 최고 지도자로 쿨리코프
전쟁에 출전하기 전에 성 세르게이를 방문했다는 것은 깊은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성 세르게이는 탐험가이며 개척자였습니다.
당시 고적한 생활을 찾던 사람들은 먼저 밀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새롭고 작은 기도 공동체는, 새 농지를 갖게되는 수도원 중심 새마을이 형성되었습니다.
라도네쮜 중심지로부터 개척 수도원 새마을은 북 러시아를 가로질러 백해와
북극권까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습니다.
성 세르게이 생전에는 이러한 수도원 중심 새마을이 40여 개가 형성되었으며
그의 사후에는 그의 제자들에 의해 50여 개가 형성되었습니다.
성 세르게이와 그의 후예 수도자들은 탐험가이며 개척자였을 뿐 아니라 선교사였습니다.
그들이 만나는 원주민은 바로 선교의 대상이었습니다.
성 세르게이는 성 그레고리오 팔라마스와 동시대 사람으로서 헤시카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특별히 수도자들에게는 신앙적, 신비적 체험을 하게 하면서 원시림을 개척해 들어가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선교의 대상으로 만나도록 독려하였다.
그는 수도생활을 사회. 경제적인 면과 신앙. 신비적인 양면을 잘 조화시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러한 영향은 전 러시아 정교회 곧 전체 국민들에게 미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정치적으로 모스크바 중심 러시아를 타타르의 압제에 대항하여
해방을 쟁취하자고 독려하였습니다.
성 세르게이 시대에 이어 200년간(1350 -1550)은 러시아 정신문화 발전의
황금기라 합니다.
그래서 성 세르게이를 새 러시아의 창설자라 호칭합니다.
성 세르게이와 그 후계자들은 종교예술 분야,
특히 "이콘"분야에 눈부신 활동을 하였습니다. 라도네쮜의 성 삼위 이콘은
안드레이 류블레프가 그린 작품인데 성 세르게이를 기념하기 위한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성 세르게이가 안식에 든 후 61년째 되는 해에
비잔티움 제국은 터키 지배하에 들어갔습니다. 비잔티움은 한 때
스스로를 하느님 나라의 이콘으로 착각하기도 했었습니다.
성 세르게이의 많은 수고로 세워진 새 러시아는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이제 정교회 세계에서 비잔티움의 자리를 이어받았다고 여겼습니다.
새 러시아는 하느님 소명에 충실히 이행할 수 있는 준비되고 자격 갖춘 하느님의 일꾼으로
자처하였습니다.
새 러시아는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과 시행착오와
고난 속에서도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사상 그리고
그분에 대한 신앙을 전 국민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탄의 심한 장난은 마치 의인 욥을 고난과 죽음의 질곡으로
몰아넣었듯이, "하느님은 없다 !"라고 미친 듯이 소리지르며 날뛰던 무신론자들, "
그리스도의 적들"이 하느님의 교회를 약탈 파괴하고 하느님의 백성을 이유 없이
구타 폭행하며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수 많은 백성들의 피를 흘리게 하고 죽였습니다
. 새 순교자들과 목숨을 잃은 이들의 수는 수천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근 한 세기를 나라 땅 안에서 살인적 광기의 정치체제 하에서 목숨 걸고 지켜온
신앙과 교회 그리고 유리사산으로 내나라 땅을 떠나 이역,
나라밖으로 흩어져 고난의 눈물을 흘리면서 신앙을 지켜온
하느님의 백성과 교회는 이제 하나인 하느님의 교회로서
은혜의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21세기의 러시아정교회는 나라를 재건하고 항구적 세계평화 구현,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전 인류의 가슴에 충만하도록 크게 기여해야 하겠습니다.
바로 이 은혜의 시대에 라도네쮜의 성 세르게이의 신앙과 정신은 다시 이해되고
발전되어야 하겠습니다.
- (대한정교회홈에서)-
The Rule of Saint Albert (The Carmelite Rule) Approval of the Carmelite Rule by Innocenzo IV (Author unknown, Carmelite Monastery, Naples, Italy)
9월 25일 성 알베르토 주교
St. Albert of Jerusalem Sant' Alberto di Gerusalemme Parma, 1149 - 14 settembre 1215 Born :1149 at Parma, Italy as Albert Avogadro Died :14 September 1215; stabbed to death in the Church of Saint John of Acre while part of the procession of the feast of the Exaltation of the Holy Cross, by a disgruntled hospital administrator he had been forced to fire 예루살렘 총주교 . Carmelites
알베르토는 '고귀하고 빛남'이란 뜻이다. 베르첼리의 주교이신 알베르토는 파르마의 저명한 가문 출신으로, 신학과 법률을 수학한 후, 롬바르디 모르따라의 성 십자가 수도원에서 수도자가 되고, 1184년, 그의 나이 35세 때, 봅비오의 주교로, 그 다음에 베르첼리의 주교로 이전되었다.
그는 외교적인 수완이 아주 뛰어났기 때문에, 교황 끌레멘스 3세와 프레데릭 바르바로싸의 중재자로 선출되기도 했고,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해서는 북 이탈리아의 사절로 임명되었다.
1187년경, 사라센인들이 예루살렘을 재공격할 때, 신자들과 모함멧 신도들로부터 공경을 받던 알베르토가 예루살렘의 총주교로 선임되었다. 인노첸시오 3세가 성 알베르토에게 다가오는 라테란 공의회에 공헌하도록 요청하였으나, 이 회의에 참석치 못하고 사망하였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The Rule of Saint Albert The begining of the Carmelite Rule according to an ancient codex known as the "Avila" codex (1206 - 1214)
성녀 아우렐리아와 성녀 네오미시아 9월 25일
성녀 아우렐리아와 성녀 네오미시아
Sante Aurelia e Neomisia Aurelia = oro e sole, latino e greco, oppure che brilla, splendente, dall'etrusco (gold and sun, Latin and Greek, or that tipsy, dazzling, dall'etrusco)
동정 이탈리아
동료 성녀 네오미시아St.Neomisia와 함께 로마 성지를 순례함.
순례중 하느님께서는 천둥, 태풍을 만나게 하시고 그들을 회교도에서 구해주셨다고 합니다.
성녀아우렐리아는 마체라따 근처의 동굴에서 은수생활을 하셨음.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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