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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8월 29(일) [녹] 연중 제22주일

Berardus 2021. 8. 28. 05:47

[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8월 29(일)

[녹] 연중 제22주일

제1독서(신명 4,1-2.6-8)

제2독서(야고 1,17-18.21ㄴ-22.27)

복음(마르 7,1-8.14-15.21-23)

 

주님의 뜻을 응원합니다

 

주님은 당신이 계획하신 세상을 반드시 만들어 가시는 분

십계명을 지키며 사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확실한 방법

하느님 믿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헛된 욕심에서 벗어나야

 

 

“세상이 왜 이럴까요?”

요즘 신자분들께 흔히 듣는 얘기입니다.

콕 집어서 과연 세상이 왜 이런지

설명할 재간이 없으니 갑갑하기도 합니다.

더위에 뒤척이던 새벽, 밀쳐놓았던 질문들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일어나 성경을 폈습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루카 9,44)

한동안 그 말씀에 골몰했습니다.

오늘 듣는 모세의 간곡한 당부가 더욱 절실히 들려왔습니다.

“너희는 그것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이제부터는

“세상이 왜 이럴까요?”라는

물음에 답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사제에게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세상의 애도를 멎게 하는” 사명이 있으니까요.

세상의 모든 불안을 다독여 편안히

“잠들게 해 주는 자장가”처럼

모두가 주님의 평화를 누리도록 돕는 것이 마땅하니까요.

저는 이제 분명히 말씀드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꼭 당신이 계획하신 세상을 만들어 가십니다.

저는 그것을 굳게 믿습니다”라고요.

 

성경은 오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언제 어디서 선포되었는지 소상히 밝힙니다.

장소는 “요르단 건너편 아라바에 있는 광야”였고

이집트를 탈출한 지 “사십 년째 되던 해

열한 째달 초하룻날”이었다고 분명히 기록해 두었지요.

아마도 이 일이 주님께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솔직히 주님께서

주신 계명은 딱 열 개뿐입니다.

그런데 열 가지에 불과한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기가 왜 이리 힘든 것일까요?

어째서 주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걸 그토록 버거워하는 것일까요?

주님의 계명을 지키면 우리 삶에

하느님의 탄탄한 울타리가 생기는데 말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에 따라서 살아가기만 하면

참 행복이 보장되는데 말입니다.

딱 열 가지만 지키고 살아가면

만사가 형통할 것이라는 약속까지 해주셨는데 말입니다.

왜, 무엇 때문에 이 복된 길에서 주저하게 되는 것일까요?

 

저는 예수님의 사랑을

딱 열 개의 계명에도

쩔쩔매는 인간의 허약함을

충분히 헤아려 단 두 가지로

축약시켜주셨다는 점에서 뚜렷이 느낍니다.

오직 사랑을 살아낼 수 있도록

단순화시켜주신 사실에 감격합니다.

이야말로 못난 우리의 편이 되시어

아버지께 맞선 도발적 사랑이라 감히 생각해 봅니다.

 

그러기에 신자분들의 질문이

주님의 사랑을 의심할 때, 사제는 속이 상합니다.

‘정말로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지만’이라는

단서가 붙을 때, 당혹스럽습니다.

‘이번 일만 해결해주시면’이라는

조건이 달릴 때 속이 쓰립니다.

모두, 주님의 뜻을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니 그렇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가

오직 건강하고 오래 살면서

흥청망청 돈을 써대는 것에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선물해 주신 삶의 목표가

다만 이 세상에서 근심 걱정 없는 것에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굳이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창세 이래 그런 소망을 위해서 생겨난 종교는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비웃고

주님의 사랑을 타박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맞서셨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모두 꿰고 있는 양 으스대던

그들의 위선과 오만을 모른 척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왜곡시켰던 그들의 거짓과

철저히 각을 세우셨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달리 대하십니다.

“고작 열 개 사항을 지키는 게

뭐 그리 힘이 드느냐”고 야단치지 않으십니다.

“그저 사랑만 하면 되는데 무얼 그리

어려워하느냐”고 꾸짖지 않으십니다.

그저 ‘내 탓’이라 하시며 끝없이 용서하고

당신의 희생으로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성경을 짜고 짜고 또 꽉꽉 짜내보면

남는 것은 사랑뿐이라는 얘기가 진정 참이라 믿어집니다.

 

오늘 독서에서 선포되는

모세와 야고보 사도의 권고는 하나입니다.

믿음은 그분의 규정과 법규들을 잘 듣는 일에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 영혼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며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분의 복음을 알면서도 자기 좋을 대로

무엇을 보태거나 자기 편의에 따라 조절하려는 것은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으로

추락할 것이라는 지엄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이제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목적이 무엇인지 고민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추상적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기 바랍니다.

하여 “그분에 관하여 듣고 또 가르침을 받는 일”에

감사드리며 세상이 추구하는 ‘헛된 욕심’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주님의 뜻을 이 땅에 심어 키우기 위해서는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에서나 하느님의 방법만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기를 원합니다.

 

이래저래 혼란한 세상이지만

주님의 뜻은 변함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통해서 바로 지금,

당신의 뜻을 이루고 계십니다.

늘 선하신 주님의 뜻을 응원해 드립시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끝까지 사랑하므로 그분의 편이 되어드립시다.

 

-장재봉 신부-

 

△밤나무

 

 

 

[한주간 전례]

 

2021년 8월 30일 (월) [녹]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루카 4,16-30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공생활 이전의

모습을 길게 소개한 뒤에,

세례와 광야에서의 유혹,

그리고 갈릴래아의 전교 이야기로

예수님의 공생활을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여러 회당에서

전교 활동을 시작하셨는데,

주로 나자렛과 카파르나움을 중심으로 하여

갈릴래아 호수 주변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갈릴래아는 이스라엘에서 비옥한 곡창지대이지만,

그곳 사람들은 대부분 소작인이어서

부자와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이들을 죄인으로

낙인찍고 상종하려 들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의 수도가 아닌 이방인의 땅,

아픈 이들의 땅인 갈릴래아로 가시어 복음을 전하십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에서

특이한 것은 ‘성령’에 대한 강조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셨습니다”(루카 3,21-22).

또한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강에서 돌아오시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 가시어”(4,1) 유혹을 이기시고,

그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어”(4,14)

복음을 전하기시작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4,18; 참조: 이사 61,1)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처럼 예수님께서는 기름 부음 받은 이,

곧 메시아가 되시어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온 인류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가난한 이, 빚 때문에 투옥되거나 잡혀서

유배당한 이, 육체뿐 아니라

마음까지 어둠 속에 있는 눈먼 이,

사회적으로 짓밟히고 억압받고 소외된 약한 이들,

고통에 울부짖는 이들에게 구원의 손을 내미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이들과 함께 계신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살리십니다.

이제 세례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아파서 울부짖는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과 함께하고, 그들을 살리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8월 31일 (화) [녹]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루카 4,31-37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나자렛의 회당에서,

구원이 당신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선언하신 다음,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시어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 기적을 본 군중과목격자들은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권위와 힘이 있다.’라며 몹시 놀랍니다.

“이 권위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도유되신 데 기인하고

성경 본문을 어떠한 인간적 전통에 의지하여 해설하지 않으시고,

하느님께 직접 말씀을 받아 가르치시는 데서 성립된 것입니다”

(박영식, 『루카 복음 해설 2』, 112면).

여기서 예수님과 같은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은 우리 자신에 대하여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성사에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예식으로는 물을 붓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세례성사의 핵심은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하는 말씀과

비둘기 모양의 성령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셨습니다.

(마태 3,16-17; 루카 3,21-22 참조).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에도 똑같이

성령께서 내려오시어 머무르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머무르시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그 성령께서 내게서 떠나지 않으시기에 우리에게 인호가 생깁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성령께서는 무엇을 하실까요?

성령께서는 우리를 예수님께 인도하십니다.

예수님과 하나 되게 하시고,

예수님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아가게 하시고자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이렇게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랑의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길은 죽을 때까지 걸어야 하고,

죽어야 비로소 완성됩니다.

예수님의 ‘세례’와 ‘죽음’이 대비되듯이,

이 사랑의 길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그 사랑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완성하고자 끝까지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9월 1일 (수) [녹]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공동의 집인 지구를 돌보는 것에 관한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반포하면서 해마다 9월 1일을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로 지내기로 하였다.

이날 교회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의 의미를 묵상하고,

창조 질서를 파괴한 우리의 잘못을 회개하며,

생태계를 보호할 것을 다짐하는 시간을 가진다.

 

[복음묵상] 루카 4,38-44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열병을 앓는 시몬의 장모를 낫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끝나는 저녁부터 많은 병자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쳐 주시고,

마귀 들린 사람들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시어

그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라고 전합니다.

예수님께 ‘외딴곳’은 지친 몸을 쉬게 하는 장소이고,

소외가 아닌 고독의 공간이며,

하느님 아버지를 찾아 만나시는 기도의 장소입니다.

인간의 구원사 안에 계신 성자께서는 ‘

외딴곳’에서 성부와 사랑의 일치를 이루시며

성령과 함께 하나가 되십니다(루카 5,16; 마르 1,45 참조).

 

우리는 살면서

‘좀 더 잘 할 걸.’이라며 스스로 책망하기도 하고,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에 쉽게 후회하며,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인 ‘외딴곳’이 아닌

‘어두운 동굴’로 숨어버릴 때가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걱정과 고민으로 어두운 동굴에 숨어

나오고 싶어 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곳은 빛도 하느님도 없는 막다른 골목과 같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인 우리는 어려울 때일수록,

지칠 때일수록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를 찾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삶에서 하느님을 찾는 시간을 만들고,

하느님 안에서 숨 쉬고자 노력한다면,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9월 2일 (목) [녹]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5,1-11

 

군중이 예수님께 몰려듭니다.

그분께서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목말라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하십니다.

그렇게하여 많은 물고기를 잡은 시몬 베드로는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두려움에 휩싸여 자신도 모르는 말을 내뱉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하지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뿐 아니라 그의 동생과 동료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우리는 평소에

얼마나 예수님을 그리워합니까?

얼마나 보고 싶어 합니까?

그분께서 우리에게 오신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우리도 곧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났을 때 베드로와 같이

자신도 모르는 말을 하지 않으려면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아이의 아버지처럼

불신을 버리고 주님께 도움을 청하며(마르 9,24 참조),

신랑을 맞으러 나간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애덕을 통하여 등잔에 기름을 준비하고(마태 25,4 참조),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들의 믿음의 아버지가 된

아브라함처럼(로마 4,18 참조)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믿음을

바탕으로 한 희망을 주님께 두어야 합니다.

 

믿음, 희망, 사랑은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우리가 준비해야 할 자세이며,

신자들이 살아가는 ‘덕’입니다.

언젠가 주님을 만났을 때 베드로 사도처럼

두려워하지 말고 이렇게 말합시다.

“주님, 이 순간을 위하여

제 삶의 등불을 밝히고 주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9월 3일 (금) [백]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540년 무렵 로마의 부유하고 신심 깊은 가문에서 태어났다.

법학을 비롯한 귀족 계층의 고등 교육을 받은 그는

로마의 고위 공직자를 지낼 정도였으나

모든 재산을 교회에 기증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590년에 교황으로 뽑힌 그레고리오 성인은

교황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고 표현한 최초의 교황이다.

교황권을 ‘지배하는 특권’이 아니라

‘봉사하는 특전’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레고리오 성가’가 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듯이,

그레고리오 교황은 전례 음악뿐 아니라

신앙과 윤리에 관한 저서를 많이 남기고 604년에 세상을 떠났다.

 

[복음묵상] 루카 5,33-39

 

오늘 독서 말씀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찬가’로 잘 알려진 부분입니다.

요한복음의 서문과도 비슷한 이 찬가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었다는

‘그리스도의 선재(先在) 사상’을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또한 그분의 ‘십자가 죽음’은,

시작이시며 마침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창조물 사이를 화해시키시는 구원자이심을 알려 줍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신앙인들은 하느님을 알아 갑니다.

또한 세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 ‘안에서’ 살아갑니다(콜로 2,6 참조).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회개와 세례를 통한희망은,

세상이 아닌 그리스도에 대한 강한 믿음을 통하여

그분과 함께하는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는 비유와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는

비유를 들어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통하여,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옛 생활을 버리고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복음의 가치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언제나 그렇게 해 왔다며 행동하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힌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기”

(2016년 1월 18일 성녀 마르타의 집 미사 강론)를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 난 신자들은

‘성령의 새로움’에 마음을 열고

그분의 은총으로 진리를 찾아 나아가야 합니다.

진리의 충만함으로 가득 차 있는 신자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얻습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9월 4일 (토) [녹]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6,1-5

 

바오로 사도는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바리사이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사도 22,3; 26,5 참조).

그러나 다마스쿠스 사건을 체험한 뒤(사도 9,1-19 참조)

그는 자신이 받은 모든 종교적 특권과

윤리적 노력이 하찮다고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율법이 다만 옛것이기에 버린 것이 아닙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하느님의 계명과

율법을 자신들의 위선으로 왜곡하여

하느님께 가는 구원의 길을 막았고

그들의 행동은 ‘육적인 것에 대한 신뢰’,

‘물질적인 것에 대한 믿음’에서 나왔으므로

하느님 계명의 본질적인 의미와

전혀 상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갈라 1,12)이기에

복음을 전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통하여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법을 어겼다며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난합니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는 것이

율법을 어기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참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안식일 법도 중요하고, 그 정신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손수 만드신 ‘우리’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몸소 오시어 구원하시고자 한 대상인,

바로 우리 ‘사람’인 것입니다.

 

혹시 사람보다 일을, 돈을, 명예를

그리고 또 다른 세상의 어떤 것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지는 않나요?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곧 사라져 버릴 것에 믿음을 두지 말고,

영원하신 하느님 그리고 그분께서 만드신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9월이 시작되는 주간입니다.

8월은 무더위와 장마등과 더불어

코로나19의 확산세가 끊임이 없었습니다.

곳곳에 태풍 피해도 심하였습니다.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기도드립니다.

아울러 9월엔

모두가 풍요로운 한 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