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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믿음, 그것은 거룩한 고집

Berardus 2021. 8. 18. 12:29

[말씀묵상]

믿음, 그것은 거룩한 고집

연중 제21주일


제1독서(여호 24,1-2ㄱ.15-17.18ㄴㄷ)

제2독서(에페 5,21-32)

복음(요한 6,60ㄴ-69)

 

예수님을 믿는 이는 현재 이 자리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 자녀로서의 풍요로운 삶을 약속하신 주님
믿음으로 우리 생명의 원천인 하느님과 연결될 수 있도록 살아가야

 

“바람이 분다. 어쨌든 살아내야겠다.”(폴 발레리)

근처에 있는 작은 공원 숲에 들어갈 때

한 가지씩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고 노력합니다.

요즘 기후위기에서 기후재앙으로 바뀌면서 숲도 진통을 겪습니다.

나뭇잎들이 마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살라버린 것처럼

말라버리고 쓰러지는 나무 기둥들도 보입니다.

그러나 마른 잎과 죽은 나무는

살아있는 나무들의 거름이 되면서 숲을 유지시킵니다.

자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일하는 숲을 보면서

믿음을 살아내기 위해 매일 어떤 노력을 하는지 마음을 여며 봅니다.

■ 복음의 맥락

복음(요한 6,61-69)은

연중 제17주일부터 시작된 빵의 담화를 마무리합니다.

요한은 본문에서 믿음의 부정적인 모델과 긍정적인 모델을

나란히 소개하는데 모두가 우리에게 교훈이 됩니다.

예수님의 계시 앞에서 믿지 않은 사람과 믿는 사람,

떠나는 사람과 남은 사람이 명확하게 갈라집니다.

중간에 회색지대는 없습니다.

사실 요한복음서는 믿음의 책으로, 이 책의 모든 내용은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로다”로 요약됩니다.

요한 자신은 이 책을 기록한 목적을

“예수님을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20,31 참조)이라고 말합니다.

이를 통해 믿음과 영원한 생명이 연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서 영원한 생명을 갖습니다.

■ 믿음과 선택

제1독서의

여호수아 이야기에 비추어 복음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땅을 분배한 뒤에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며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선택하는 것임을 모범으로 보여줍니다.

이런 여호수아의 모습은 열 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라고 질문하는 예수님 모습과 비슷합니다.

열 두 제자와 구별되는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

‘하느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그분 정체성을

받아들일 수 없어 제자직을 포기합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열 두 제자에게는

살아있는 교육이 됐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떠나고 싶으냐?”라고 묻는 것은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선택한 삶의 근본이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면서 평생 예수님을 따라다닌다는 것은

큰 불행이요 슬픔, 의미없는 소모입니다.

처음부터 예수님 옆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 베드로는

예수님 어조에서 스승이 자신들을 격려한다고 느낀 듯합니다.

그래서 열 두 제자를 대표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자체를 가리키는데

그분이 생명을 주는 빵,

생명을 주는 빛처럼 영원한 생명을 주는 분이라는 신앙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목자로서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이들에게 현세의 축복과 성공, 건강, 부,

미래가 보장되는 안전한 직업이 아니라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직접 받은

하느님의 생명, 인간적인 생각을 뛰어넘는

하느님 자녀의 풍요로운 삶을 약속합니다.

믿는 이는 내세가 아니라

살아서 이런 삶을 살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후서에서 사도란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요한의 용어로 바꾸자면

생명의 원천으로 선포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생명이 자신 안에서 드러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룻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2코린 4,7)

믿는 이는 모두 바오로와 같은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열두 사도 (이콘).

 

■ 믿다와 알다

베드로는 이어서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시라고 저희는 믿어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믿다’라는 동사가 ‘알다’라는 동사로 명시되는데

요한의 다른 구절에서는 ‘보다’와도 연결됩니다.

믿음은 추상적이고 비이성적인 것,

애매모호한 것,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안다’는 것은 삶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메마른 지식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 내면화와 관련됩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그가

100%의 믿음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 앞에서 사는 가난한 사람이 바치는 간청이자

“제 믿음과 지식을 더욱 깊이 있게 해주십시오.

제가 믿음을 살아내기 위해 더 노력할 수 있도록

저에게 힘을 주십시오”라는 기도입니다.

오만한 사람보다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더욱 쉽게 살아있는 믿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흐르는 물처럼 생생한 믿음은

육신이 쇠락하는 과정과 비례하지 않습니다.

육신은 세월이 흐르면 약해지고 죽습니다.

그러나 믿음, 영적 실재는 우리가 그것을

살아내기를 원하는 정도에 따라 성장합니다.

어떤 거친 바람이 불어온다 해도 쉽게 스러지지 않으며,

끝없이 싹을 띄우고 꽃을 피웁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를 우리 생명의 원천인

살아있는 하느님과 연결하기 때문입니다.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코로나19 시기를 연대하며

함께 통과하고 있는 우리에게 성령께서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지식을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느님의 영은 우리 안에 부드러운 마음. 경청하는 마음을 창조합니다.

그런 마음은 우리가 용기를 가지고 하느님을 믿고 그분을 알도록,

그분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닫게”(화답송) 인도합니다.

이 시기에 믿음을 잃지 않는 태도,

믿음을 살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는 거룩한 고집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