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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9월 5(일) [녹] 연중 제23주일

Berardus 2021. 9. 4. 05:46

[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9월 5(일)

[녹] 연중 제23주일

제1독서(이사 35,4-7ㄴ)

제2독서(야고 2,1-5)

복음(마르 7,31-37)


부드럽고 따뜻한 주님 손길에 우리 모두 치유받습니다



■ 하느님께로 향한 우리의 귀가 활짝 열리기를…

“에파타!”라는 예수님의 외침을 묵상하다가,

오래전 유학 시절 초기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야심만만하게 비행기를 탔을 때만 해도 꿈도 많았습니다.

약간은 고생도 되고, 약간은 향수에도 젖겠지만,

그래도 고색창연한 서구 전통과 문화들이 살아있는

유럽에서의 낭만적인 생활이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마음이 설레기도 했습니다. 신앙의 본산에서 신학도 제대로 배우고,

가끔 성지도 순례하고, 고독도 씹으면서 그렇게 살아야지 생각했습니다.

한국 사람은 저 밖에 없는 공동체에 도착하고 나서,

한 이삼일 동안은 그럭저럭 견딜만 했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해서인지 회원들이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관심도 가져주었습니다.

저 역시 손짓발짓을 동원한 가장 기초적인 회화를 통해서나마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었습니다.

더 이상 대화를 진척시킬 수 없었습니다.

즉시 끔찍한 연옥체험이 시작되었습니다

. 누가 뭐라고 말을 걸어오면 겁부터 덜컥 났습니다.

질문의 요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니, 그냥 실실 웃기만 했습니다.

기본적인 대화가 안 되니 사람들도 답답해하고,

나중에는 아예 무시하는 듯 했습니다.

자꾸만 제 안에 갇히기 시작했습니다.

밥 먹으러 내려가기도 싫어졌습니다.

정말 하루하루가 괴롭더군요.

한국에서 사목활동 할 때는 나름대로 어깨 힘주며 살았는데,

거기서는 완전히 애기 취급을 받았습니다.

애물단지도 그런 애물단지가 없었습니다.

정말 자존심이 엄청 상하더군요.

하느님께서 제대로 된 바닥체험을 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연옥 같은 시절을 보내던 어느 날,

깜짝 놀랄 일이 한 가지 생겼습니다.

빠르게 지껄이던 형제들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어렴풋이나마 뭔가 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말이 조금씩 들리기 시작하면서 언어 공부에도 재미가 붙었습니다.

일단 들리기 시작하니 조금씩 입도 열렸습니다.

공동체 형제들은 그런 저를 기꺼이 대화에 끼워주기 시작했습니다.

‘이제야 조금 숨통이 트인다,

이제야 조금 살맛 난다’는 느낌이 들면서 얼굴빛도 달라졌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영성생활에 있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께로 향한 우리의 귀가 열려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의 뜻을 찾을 수 있고,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인간의 뜻인지 식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부터 제대로 된 영성생활이 시작됩니다.

하느님과의 친밀한 대화도 가능해집니다.

신앙생활의 참 맛도 알게 되고 신앙도 성장하게 됩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귀가 활짝 열리길 기대합니다.

그래서 보다 명료하게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되길 바랍니다.

■ 어떻게 해서든 우리 가까이 다가오시려는 하느님!

제가 몸담고 있는 살레시오회 창립자

돈보스코의 예방교육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아무래도 ‘

교육 대상의 개별화’, ‘1대 1 맞춤형 교육’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대 다수, 1대 그룹이 아니라 ‘나와 너’ ‘스승과 제자’ 사이에 오가는

친밀한 우정관계 안에서 돈보스코 예방교육은 활짝 꽃피어납니다.

돈보스코와 동고동락했던 수많은 청소년들은

어떤 의미로 그의 독특한 교육 방식에 속아 넘어갔습니다.

돈보스코는 단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모든 아이들에게

골고루 듬뿍듬뿍 사랑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 대부분은 ‘돈보스코는

나만 각별히 사랑하고 계시는 것이 분명해.

돈보스코의 마음 안에는 온통 나밖에 없을 거야!’ 라고 착각했습니다.

예수님 역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고루 다 사랑하시만,

또 다른 한편으로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접근하십니다.

내게 다가오시는 모습이 얼마나 다정다감하신지,

나를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대하시는지,

마치 이 세상에서 나만 사랑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태도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귀먹고 말 더듬는’ 한 사람을 치유하시는데,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치유하십니다.

이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환자의 치유에만 전념하겠다는

예수님의 적극적인 의지의 표현입니다.

비록 지나가다 만난 한 사람이지만,

지금은 오직 이 사람과만 개별적으로 만나겠다,

이 사람에게만 정성을 기울이겠다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환자를 위한 참으로 각별한 배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일련의 치유과정도

동일한 맥락에서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말씀 한마디면 모든 것이 치유되는 능력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몇 가지 단계를 거치십니다.

당신 손가락을 환자의 두 귀에 넣으십니다.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까지 내쉬십니다.

이윽고 “에파타!”하고 외치십니다.

비록 간단한 접촉이지만,

환자 입장에서는 너무나 과분한 은총입니다.

비참한 한 인생길을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만도 감사한 일인데,

그 크신 하느님께서 직접 당신 손을 펼치시어

부당한 한 인간의 신체에 접촉하십니다.

어떻게 해서든 우리 가까이 다가오시려는 하느님,

어떻게 해서든 우리와 접촉하시려는

하느님의 애틋한 사랑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이 환자를 치유시킵니다.

결국 하느님의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이 한 인간을 변화시킵니다.

결국 하느님의 다정다감한 마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치유과정은

우리가 봉헌하는 매일 미사 때마다 다시금 반복됩니다.

말씀의 전례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친히 당신 손가락을 우리 귀에 넣으시어,

말씀 안에서 당신을 알아 뵙게 하십니다.

성찬의 전례 가운데 예수님의 몸과 피는

친히 우리의 오장육부 깊숙한 곳까지 찾아오십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가 매일 거행하는 미사는 치유의 성사입니다.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미사는 기적의 성사입니다.

우리가 매일 거행하는 미사는 사랑의 성사입니다.

이 미사를 통해 우리 역시 치유의 기적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양승국 신부-

 

-제주 김대건신부 제주표착기념관-


[한주간 전례]

 

2021년 9월 6일 (월) [녹]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루카 6,6-11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는 일,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 복음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의 행동을 보면서 배웁니다.

많은 이가 예수님께 찾아와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 하였습니다.

그 수가 오천 명이 넘는 때도 있었고,

길을 지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몰려들 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아이가 봉헌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기꺼이 받으시고 당신을 찾아온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요한 6,1-15 참조).

또 예수님께서는 나무 위에 올라가 당신을 바라보는 세관장 자캐오를 찾아내시고,

그와 그의 집안에 구원을 선사하셨습니다.

이에 자캐오는 가난한 이들에게 애덕을 실천하여,

그들을 현실의 어려움에서 구해 줍니다(루카 19,1-10 참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지금 내 주변의 힘들고 어려운 이들을

쉽게 지나쳐 버리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당신을 고발할 구실을 찾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날카로운 시선 속에서도,

오그라든 손을 가진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그 병자는 오그라든 손으로 말미암아

오그라든 마음까지 치유받았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삶을 실천할 때,

우리는 진리로 나아갑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음”을 말합니다.

누군가에게 정성을 쏟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보여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지금 이 자리에서 실천할 때,

우리는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9월 7일 (화) [녹]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루카 6,12-19

예수님께서는 자주 혼자 기도하셨는데,

특히 중요한 일을 앞두시고는 밤을 새우며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워 기도하신 뒤 열두 제자를 뽑으셨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 된 사람들이지만,

우리 눈에는 제자로서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보이지 않습니다.

겉보기에는 부족해 보이지만,

그들은 부족하기에 겸손하고, 죄를 용서받은 이들이기에 충실하고 거룩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느님 아버지와의 대화이며,

성령과 함께 머무르시는 시간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라고 권고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통하여 주님 안에 머무르는 사람입니다.

시간이 나면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를 위하여 시간을 내야 합니다.

또한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해 주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기도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내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청하고, 주님을 찾고, 주님의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청하는 것을 주시고, 찾는 것을 얻게 하시며,

문을 두드리면 은총으로 당신을 열어 주십니다(마태 7,7-8 참조).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라고 말합니다.

기도 안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실천하며

믿음을 굳게 하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감사와 기쁨이 흘러넘칠 것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9월 8일 (수)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성경에 동정 마리아의 탄생에 대한 내용은 없다.

그러나 초대 교회 때부터 성모 신심이 계속되면서

동방 교회에서 먼저 이 축일을 지내기 시작하였다.
로마 교회에서는 7세기 무렵부터 이 축일을 지내고 있는데,

예루살렘에 세워진 ‘마리아 성당’의 봉헌일(9월 8일)을

동정 마리아의 탄생 축일로 정한 것이다.

[복음묵상] 마태오 1,1-16.18-23

성경에 동정 마리아의 탄생에 대한 내용은 없지만

성모 신심은 초대 교회 때부터 이어져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미카 예언자는 한 여인에게 태어날

메시아의 탄생에 대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고통 속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메시아의 탄생은 기다림의 정점이었습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언급한 여인이

성모님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성

모님을 통한 예수님의 탄생은 하느님의 오랜 계획

(로마 8,28-29 참조) 안에 있는 일이었습니다.

오늘은 우리의 어머니이시고 위로이시며

피난처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생 축일입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구원 경륜이 인간의 역사 안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예수님의 족보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을 실현하시고자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선택하시어 우리 어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시고 전구하시는 우리 신앙의 어머니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에,

우리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크신 섭리를 깨닫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의 탄생은 소중합니다.

이를 마음에 새기며 우리 모두 저마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뜻을 찾아 기쁘게 살아갑시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9월 9일 (목) [녹]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6,27-38

우리는 하느님께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는지 자주 잊고 삽니다.

또한 지극히 단순하게 나만의 하느님이 되어 주십사 청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우리는 모두 하나이고 한 공동체이며,

이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손해를 끼치고, 고통이라는 감옥에 가두고

많은 것을 앗아간 원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실천하기에 너무 가혹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실은 하느님의 끝없는 자비의 표현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루카 6,36 참조).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가 원수를 미워해서 생기는

더 큰 고통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구원을 받고,

거저 의롭게 되었으며(로마 3,24 참조),

신앙의 신비를 몸소 체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를 사랑함으로써 나 자신의 본모습을 찾아

기쁨 속에서 살아가게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라고 합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소명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선으로 악을 이겨 하느님 사랑 안에서 평화를 누리고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9월 10일 (금) [녹]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루카 6,39-42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정녕 말이 제 혀에 오르기도 전에,

주님, 이미 당신께서는 모두 아십니다”(시편 139[138],1-2.4).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에

우리는 거짓을 말할 수도 교만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 등장하는 위선자는

자기 자신도 모르고 교만하기까지 한 사람입니다.

사실 자신을 모르는 사람은 예수님을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알려고 노력한다면,

분명히 그분께 머물고자 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서는

결코 자신을 올바로 볼 수 없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느님을 향하여 있는 존재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으려는 그리스도인은 위선자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려면 예수님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 어떤 존재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못나고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며 하느님께 무한히 열려 있는 삶을

사는 이들을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보십니다.

위선자와 같은 교만한 사람은 하느님을 보지 못하기에,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렇기에 많은 것을 이룬 듯 보일지 모르지만,

정작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진실된 자신을 보고 하느님을 얻지만,

교만한 사람은 거짓된 자신을 보고 하느님을 잃어버립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9월 11일 (토) [녹] 연중 제23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6,43-4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하고 꾸짖으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추상적인 삶이 아닌 구체적인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사랑이란 그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가 중요합니다.

이처럼 사랑은 ‘행동하는’ 것입니다.”(프란치스코, 『사랑』, 59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로만 하는 사랑은 공허하며 아무 의미 없는 단어일 뿐입니다.

행동으로 보일 때, 그 사랑은 힘이 있습니다.

이 힘이 느껴질 때 우리는 마침내 우리를 사랑하시어 구원하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삶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던 죄인이었지만,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나약하고 부족한 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소하게는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보고 비판하기도 하고,

그 밖의 크고 작은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자신의 잘못을 바라보고 용서를 청하며,

치유의 은사를 받아 다른 이에게도 힘이 되어 주기를 바라십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듯’

우리는 기도와 성사 생활을 통하여 우리 마음의 곳간에

선한 은총을 풍성히 내려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우리가 가진 것을 이웃과 기꺼이 나누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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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은 순교자성월입니다.
특히 올 해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으로
많은 행사등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가톨릭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신
순교선열을 위하여 묵상과 기도를 드립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