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공간 ▒▒ /∞ 말씀♡묵상

[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8월 22(일) [녹] 연중 제21주일

Berardus 2021. 8. 21. 09:36

[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8월 22(일)

[녹] 연중 제21주일

제1독서(여호 24,1-2ㄱ.15-17.18ㄴㄷ)

제2독서(에페 5,21-32)

복음(요한 6,60ㄴ-69)

 

믿음, 그것은 거룩한 고집

 

예수님을 믿는 이는 현재 이 자리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 자녀로서의 풍요로운 삶을 약속하신 주님

믿음으로 우리 생명의 원천인 하느님과 연결될 수 있도록 살아가야

 

“바람이 분다. 어쨌든 살아내야겠다.”(폴 발레리)

 

근처에 있는 작은 공원 숲에 들어갈 때

한 가지씩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고 노력합니다.

요즘 기후위기에서 기후재앙으로 바뀌면서 숲도 진통을 겪습니다.

나뭇잎들이 마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살라버린 것처럼 말라버리고 쓰러지는 나무 기둥들도 보입니다.

그러나 마른 잎과 죽은 나무는

살아있는 나무들의 거름이 되면서 숲을 유지시킵니다.

자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일하는 숲을 보면서

믿음을 살아내기 위해 매일 어떤 노력을 하는지 마음을 여며 봅니다.

 

■ 복음의 맥락

 

복음(요한 6,61-69)은

연중 제17주일부터 시작된 빵의 담화를 마무리합니다.

요한은 본문에서 믿음의 부정적인 모델과

긍정적인 모델을 나란히 소개하는데 모두가 우리에게 교훈이 됩니다.

예수님의 계시 앞에서 믿지 않은 사람과 믿는 사람,

떠나는 사람과 남은 사람이 명확하게 갈라집니다.

중간에 회색지대는 없습니다.

사실 요한복음서는 믿음의 책으로,

이 책의 모든 내용은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로다”로 요약됩니다.

요한 자신은 이 책을 기록한 목적을

“예수님을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20,31 참조)이라고 말합니다.

이를 통해 믿음과

영원한 생명이 연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서 영원한 생명을 갖습니다.

 

■ 믿음과 선택

 

제1독서의 여호수아 이야기에

비추어 복음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땅을 분배한 뒤에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며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주님을 섬기겠다”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선택하는 것임을 모범으로 보여줍니다.

이런 여호수아의 모습은 열 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라고 질문하는 예수님 모습과 비슷합니다.

열두 제자와 구별되는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 ‘하느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그분 정체성을 받아들일 수 없어 제자직을 포기합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열 두 제자에게는

살아있는 교육이 됐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떠나고 싶으냐?”라고 묻는 것은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선택한 삶의 근본이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면서 평생 예수님을

따라다닌다는 것은 큰 불행이요 슬픔, 의미 없는 소모입니다.

처음부터 예수님 옆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 베드로는 예수님 어조에서

스승이 자신들을 격려한다고 느낀 듯합니다.

그래서 열 두 제자를 대표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자체를 가리키는데 그분이 생명을 주는 빵,

생명을 주는 빛처럼 영원한 생명을 주는 분이라는 신앙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목자로서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이들에게 현세의 축복과 성공,

건강, 부, 미래가 보장되는 안전한 직업이 아니라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직접 받은 하느님의 생명,

인간적인 생각을 뛰어넘는

하느님 자녀의 풍요로운 삶을 약속합니다.

믿는 이는 내세가 아니라 살아서 이런 삶을 살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후서에서

사도란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요한의 용어로 바꾸자면 생명의 원천으로

선포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생명이 자신 안에서 드러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룻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2코린 4,7)

믿는 이는 모두 바오로와 같은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 믿다와 알다

 

베드로는 이어서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시라고

저희는 믿어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믿다’라는 동사가 ‘알다’라는 동사로 명시되는데

요한의 다른 구절에서는 ‘보다’와도 연결됩니다.

믿음은 추상적이고 비이성적인 것,

애매모호한 것,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안다’는 것은 삶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메마른 지식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

내면화와 관련됩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그가 100%의 믿음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 앞에서 사는 가난한 사람이 바치는 간청이자

“제 믿음과 지식을 더욱 깊이 있게 해주십시오.

제가믿음을 살아내기 위해 더 노력할 수 있도록

저에게 힘을 주십시오”라는 기도입니다.

오만한 사람보다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더욱 쉽게 살아있는 믿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흐르는 물처럼 생생한 믿음은

육신이 쇠락하는 과정과 비례하지 않습니다.

육신은 세월이 흐르면 약해지고 죽습니다.

그러나 믿음, 영적 실재는 우리가 그것을

살아내기를 원하는 정도에 따라 성장합니다.

어떤 거친 바람이 불어온다 해도 쉽게 스러지지 않으며,

끝없이 싹을 띄우고 꽃을 피웁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를 우리 생명의 원천인

살아있는 하느님과 연결하기 때문입니다.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코로나19 시기를 연대하며

함께 통과하고 있는 우리에게 성령께서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지식을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느님의 영은 우리 안에 부드러운 마음. 경청하는 마음을 창조합니다.

그런 마음은 우리가 용기를 가지고

하느님을 믿고 그분을 알도록,

그분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닫게”(화답송) 인도합니다.

이 시기에 믿음을 잃지 않는 태도,

믿음을 살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는 거룩한 고집입니다.

아멘!

 

-임숙희(레지나)-

 

△길 밤나무

 

[한주간 전례]

 

2021년 8월 23일 (월) [녹]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3,13-22

 

몇 년 전,

한 형제님이 찾아와

기도를 배우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기도하는 방법을 설명해 드리면서,

기도 중에 혹시 과거의 상처가 떠오르면

그때의 상황을 하느님께 자세히 말씀드리되,

있는 그대로, 끝까지 말씀드리라고 하였습니다.

끝까지 말하면 침묵 가운데

떠오르는 말씀이 있을 것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형제님이 찾아왔습니다.

 

“신부님, 답을 찾았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네가 잘되면

우리 집안이 망한다.’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살아오면서 얼마나 아팠는지요.

기도 중에 이 상처가 떠올랐어요.

제가 어릴 때 탁발승이 시주를 받은 뒤

어머니에게 그 아픈 말을 남겼답니다.

그때부터 어머니를 비롯한 집안 어른들은

집안이 망한다는 말을 자주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스님을 원망하며 하느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스님 때문에 집안 어른들까지 저만 보면

그 이야기를 해서 제가 평생 얼마나 아팠는지 몰라요.’

하느님께 매달리면서 방 안을 떼굴떼굴 구르며 울다 보니,

어느 순간 불타는 가시덤불 앞에 선 모세가 보였습니다.

그 가시나무가 불에 타 없어지지 않으면서 불꽃이 일 듯,

제 아픔도 가시나무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픔은 불꽃으로 저를 힘들게 하였지만,

모세가 하느님을 만난 것처럼 저 또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 아픈 가시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조심하고,

또 얼마나 하느님을 찾으며 살았는지요!”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자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하느님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인도하는

너희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하느님이 아닌 세상 것을 중심에 두는 눈먼 자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이 말씀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지도자와 단체장 등

나름 ‘열심히 활동하는 신자’인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닐는지요.

날마다 성찰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8월 24일 (화) [홍]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갈릴래아 카나 출신이다.

필립보 사도가 인도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된 나타나엘과

동일 인물로 보고 있다(요한 1,45-51 참조).

예수님께서는 그를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찬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주님께서 승천하신 뒤

인도와 터키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아르메니아에서 순교하였다.

 

[복음묵상] 요한 1,45-51

 

오늘 특별히 묵상하고 싶은 것은

바르톨로메오(나타나엘)가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머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 안에 머물렀던

안드레아는 베드로를 초대합니다.

이튿날 예수님께서는 필립보를 만나시자

“나를 따라라.”(요한 1,43) 하고 부르십니다.

필립보는 곧바로 나타나엘을 찾아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이 기록한분”,

곧 구약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주인공인 메시아를 만났고,

그 사람이 ‘나자렛 출신 요셉의 아들 예수’라고 알려 줍니다.

 

그러자 작은 시골 마을 카나 출신인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나올 수 있겠소?” 하며

얕잡아 보고 의심합니다.

사실 나자렛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작은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나타나엘은 “와서 보시오.”라는

필립보의 초대에 응하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자기가 가진 편견, 생각의 틀을 버리고

나설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것처럼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증거는 바로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집 구조는 방이 하나여서

사람들은 무화과나무나

올리브 나무 아래에서 묵상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오로지 하느님을 찾고,

그분을 섬기고자 날마다 기도하는 사람이었기에,

자기 생각의 틀과 편견을 뛰어넘어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 안에 머무름으로써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데 방해가 되는 편견,

내 생각의 틀은 무엇일까요?

나의 기도는 그렇게 만들어진 나를 뛰어넘어

예수님을 만나는 기도인가요?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8월 25일 (수) [녹]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3,27-32

 

예수님께서는,

겉은 아름다워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찬

회칠한 무덤 같은(마태 23,25.27 참조)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불행하다고, 빨리 회개하라고 촉구하십니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잘 설명해 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로마 7,22-24)

그래서 저는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간에게는 두 개의 마음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창세 2,7)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숨이 바로 하느님의 생명이고

또한 성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과

육의 마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마음은 주는 마음이고,

육에서 온 마음은 받는 마음입니다.

주는 마음은 사랑하는 마음이기에 기쁨에 넘치고 또한 살리는 마음입니다.

 

반대로, 받는 마음은

타인으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으며,

더 가지려고 하는 마음이기에 늘 불안과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없을 때

분노하게 되고 큰 상처로 남습니다.

이 마음은 죽이는 마음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주는 마음이 살리는 마음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주는 마음보다는 받고 싶은 마음일 때가 많습니다.

그 받고 싶은 마음이 커져 탐욕과 방종으로 발전하고

끝내 불법을 저지르고 위선자가 되기도 합니다.

 

누가 이 비참함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로마 7,24)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8월 26일 (목) [녹] 연중 제21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4,42-51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람의 마음은 작은 바람에도 떨리는 나뭇가지 같습니다.

그렇게 흔들릴 때 비로소 우리는 살아 있는 것입니다.

주고자 하는 마음과 받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흔들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흔들림 사이에서 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생생함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방황과 고통의 시간을 겪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이 시간을

낭비라 생각할 뿐 아니라 억울하다고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약점과 결점을 통하여

오히려 일이 해결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 하느님 안에서는 이 약점이

이렇게 쓰이는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바람 속 나뭇가지의 떨림처럼 우리는 오락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 또한 악(惡)을 선택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고,

좌절과 절망이 아니라 다시 희망으로 넘어와야 합니다.

이를 알아차릴 때 인간은 하느님을 찾습니다.

나 자신도 갈팡질팡한다는 것을 인정할 때,

다른 이를 함부로 심판할 수 없습니다.

나자신이 언제 어느 쪽으로 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의식 성찰’의 시간입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에 오늘 내가 만난 사람들,

경험한 일들 안에서 일어난 생각과 감정,

그리고 마음의 움직임을 곱씹어 보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 마음의 움직임을

아버지 하느님께 설명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화를 통하여 그 감정이나 행동의 뿌리를

볼 수 있고 정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을 의식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지 보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깨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8월 27일 (금) [백] 성녀 모니카 기념일

 

모니카 성녀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어머니로,

332년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의

타가스테(현재 알제리의 수크아라스)에서 태어났다.

신심 깊은 그녀는 남편을 개종시키고,

방탕한 아들 아우구스티노의 회개를 위하여 정성을 다하였다.

마니교에 깊이 빠져 있던 아우구스티노가 회개하고

세례를 받게 된 데는 어머니 모니카의 남다른 기도와 노력이 있었다.

그녀는 아들이 회개의 길로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387년 로마 근처의 오스티아에서 선종하였다.

모니카 성녀는 그리스도교의

훌륭한 어머니의 모범으로서 많은 공경을 받고 있다.

 

[복음묵상] 마태오 25,1-13

 

모니카 성녀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어머니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교회의 가장 위대한 학자요

4대 교부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하고,

마니교라는 이단에 빠지기도 하였던 성인은

37세에 사제가 되고, 5년 뒤에는 히포의 주교가 됩니다.

이렇게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훌륭한 주교이며

학자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끊임없이

눈물과 인내로 기도한 어머니 모니카가 있었습니다.

 

한 사제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공부가 부족하여

수도 성소를 포기하고 혼인 성소를 선택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는 그에게 “오 남매를 낳아 아들 둘,

딸 둘은 하느님께 봉헌하고

아들 하나는 데리고 사세요.”라고 조언합니다.

그는 혼인하여 아들 셋, 딸 둘을 낳습니다.

장남을 제외한 자식들에게 “너희는 신학교, 수녀원에 가거라!” 하고,

장남에게는 “너는 내가 데리고 살 아들”이라며 애지중지 키웁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장남이 신학교를 가겠다고 합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입니다.

신학교에 가지 말라는 온갖 설득에도

장남은 신학교로 떠납니다.

입학식 날 어머니는

성모 동산에 올라 6시간을 엉엉 웁니다.

한 달 동안 계속 울며 다니던 어느 날,

다른 사제의 어머니에게서

“그렇게 울면 아들한테 안 좋아!” 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에 정신을 번쩍 차린 어머니는 눈물을 멈추고,

그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날마다

새벽부터 묵주 기도를 바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장남은 사제품을 받습니다.

아들이 사제품을 받던 날,

어머니는 아들 사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참으로 이상하십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장 아끼는,

가장 좋아하는 것을 달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내어놓기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제는

날마다 아침 기도 시간에 자문합니다.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고, 아끼며,

사랑하는 것을 하느님께 드리고 있는가?”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8월 28일 (토) [백]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354년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의 타가스테

(현재 알제리의 수크아라스)에서 모니카 성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하며

마니교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카 성녀의 끊임없는 기도와

이탈리아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영향으로 회개하고 입교하였다.

391년에 사제가 된 그는

5년 뒤 히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아우구스티노 주교는 이단을 물리치며 교회를 수호하는 데

일생을 바치며 참회의 자서전 「고백록」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430년에 선종한 그는 중세 초기부터

‘교회 학자’로 존경받고 있다.

 

[복음묵상] 마태오 25,14-30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는

354년 북아프리카의 타가스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22세에 카르타고에서 수사학 교사가 되었는데,

이때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에서

‘지혜에 대한사랑’(philosophia)이라는 말을 발견하고는,

평생 지혜를 찾고자 노력하였습니다.

387년 세례를 받았으나 신앙생활은 갈등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우구스티노에게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성인이 바로 그 유명한

“집어 읽어라.”(Tolle, Lege.)라는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펴서 읽습니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로마 13,13-14).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수도 생활에 전념합니다.

사제품과 주교품을 받은 뒤 히포의 주교로서 공동체를 돌보고,

이단과 싸우며 교회의 일치와 평화를 이루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오, 그토록 오래되었으면서도

그토록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제가 당신을 너무나도 늦게 사랑하였습니다!

당신께서는 제 안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 저는 밖에서 당신을 찾았습니다. ……

저는 당신 안에 있지 않으며

아무것도 아닌 것에 사로잡혀 당신을 멀리하였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 저는 당신을 맛보았습니다.

이제 저는 당신으로 인하여 허기지고, 갈증이 납니다.

당신은 저를 건드리셨으며, 이제 저는 당신께서 주신

평화를 위하여 맹렬히 불타오릅니다”.

-(『고백록』)-

 

“모든 회개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아우구스티노는 회심하기 전까지 밖에서 살았는데,

하느님께서 그를 내면으로 끌어 들이셨습니다.”

(모리스 젱델, 『감탄과 가난』, 28-29면).

나는 오늘 하루 무엇을 찾고 있나요?

 

-(서철 바오로 신부)-

 

************************************

 

뒷산에 오르는데

밤나무에 밤이 주렁주렁 매달렸습니다.

아직은 초록색의 밤가시가 힘을 내고 있고

밤도 벌어질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세월이 이렇게 지나고 있음을

이곳저곳에서 상징처럼 펼쳐지는 지금

한번쯤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_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