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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8월 8(일) [녹] 연중 제19주일

Berardus 2021. 8. 7. 06:08

[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8월 8(일)

[녹] 연중 제19주일

 

제1독서(1열왕 19,4-8)

제2독서(에페 4,30-5,2)

복음(요한 6,41-51)

 

세상의 빵과 영원한 생명의 빵 사이에서

 

인간의 눈을 현혹시키는 세속적인 것들은 결국 신기루와 같아

예수님은 영원히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양식 주시는 분

우리가 이웃을 위해 헌신하면 주님 성체는 생명의 빵으로 변해

성체와 성혈은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금빛 날개’

 

 

막 수도회 입회했던

지원자 때의 일이 기억납니다.

어찌 그리 빵이 맛있었는지.

요즘은 계란 프라이 하나에 식빵 한 조각이면 아침 끝인데,

그때는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가시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몇 개면양이 찰까 한번 실험을 해봤습니다.

다섯 개, 여섯 개, 열 개,

마침내 길고도 긴 식빵 한 줄이 다 사라지더군요.

 

세상의 빵이 지닌 특징이 있습니다.

늘 부족해보입니다.

많이 먹었다고 생각했는데도 늘 뭔가 양이 차지 않습니다.

한번 배부르게 먹었다고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서 너 시간 지나면 또 다른 빵으로 주린 배를 채워야 합니다.

결국 세상의 빵은 이렇게 유한합니다.

세상의 음식은 우선 우리들의 미각을

자극하지만 먹는 순간 그때뿐입니다.

돌아서면 그걸로 끝입니다.

인간의 입이란 것이 간사해서 그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더 잘하는 집, 더 끝내주는 집을 찾아가게 합니다.

 

세속적인 것들의 특징이 그렇습니다.

우선 우리 눈을 현혹시킵니다.

우리들의 시선을 확 끌어당깁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방울 같다는 것입니다.

신기루 같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배고프지 않을 생명의 빵,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명의 피를 양식으로 제공해주십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찬례 제정을 통해 우리에게

진수성찬 한 상을 차려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밥상에 올라온

음식들의 재료가 예수님 당신의 몸입니다.

당신의 피요 당신의 살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마디 그대로 해석해서

초대교회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인육을 먹는

식인종으로 오해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유다인들 사이에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너무나 심오해서 그런지 백번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예수님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소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보다 진지하게 묵상해봐야겠습니다.

 

■ 납득하기 힘든 성체성사의 신비 앞에서

 

한 의심 많은 신자가

영성이 깊은 사제를 찾아와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질문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놀림감으로 삼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신부님, 어떻게 빵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거 완전 거짓부렁이죠?”

그러자 사제가 진지하게 응수했습니다.

“그건 일도 아니랍니다.

당신도 당신이 섭취한 음식을 살과 피로

별로 힘들이지 않고 잘 변화시키는 마당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똑같은 일을 못하실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남자는 순순히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그토록 작은 면병 속으로 쏙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사제의 대답은 명품이었습니다.

“당신 앞에 펼쳐진 광활한 대자연의 풍경이

당신의 단추 구멍만한 눈 속으로 쏙 들어가는데.

어찌 그게 불가능하겠습니까?”

그래도 남자는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습니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널린

수많은 성당 감실 안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습니까?”

사제는 작은 손거울을 하나 가져와 그에게 들여다보라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 손거울을 바닥에 던져 깨트려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이 의심 많은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얼굴은 하나뿐이지만 이 깨진 거울 조각마다

당신의 얼굴이 동시에 비치고 있는 것, 안보이시나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생명의 빵’과 관련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전혀 납득하기 힘든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좀 더 사랑하면 이해가 됩니다.

좀 더 마음을 정화시키면 이해가 가능합니다.

동료들과 이웃들을 향해 좀 더 나누고

헌신하고 봉사하면 이해가 쉬워집니다.

 

예수님께서 내어주신

몸과 피를 우리는 생명의 빵,

생명의 피라고 칭합니다.

그런데 그분의 성체와 성혈이 ‘정말로’ 생명의 빵,

생명의 피로 변화되는 기적의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셨듯이

우리도 똑같이 우리의 몸과 피로

이웃들에게 밥상을 차려줄 때입니다.

우리가 이웃들을 위해 봉사할 때,

우리가 이웃들에게 헌신할 때,

우리가 이웃들을 사심 없이 사랑할 때,

우리가 받아 모시는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은

참 하느님의 몸과 피로 변화될 것입니다.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마음에서

이웃들의 굶주림 앞에 나 몰라라 할 때,

슬퍼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을

우리의 식탁에 초대하지 않을 때,

나누지 않고 베풀지 않을 때,

성체성사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슬퍼하실 것입니다.

빵은 이웃들을 위해 쪼개어지고 나누어지고

그들의 손에 일일이 건네질 때 참된 성체로 변화됩니다.

쪼개어지지 않는 빵은 참된 빵이 아닙니다.

이웃들과 나누지 못한 음식은 참된 음식이 아닙니다.

쪼갬과 나눔을 통해 빵은

거룩한 주님의 몸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이웃들을 위해 쪼개어지고 나누어진

우리의 삶은 거룩한 주님의 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영하는 생명의 빵인 성체는

세상의 음식들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빵입니다.

우리가 매일 영하는 생명의 피인 성혈은

동네 슈퍼마켓 냉장고 안의 음료수와

결코 비교할 수 없는 음료입니다.

성체와 성혈은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만드는 영약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훨훨 건너갈 수 있게 하는 금빛 날개입니다.

 

순교를 목전에 두었던

이냐시오 성인의 증언은 언제 들어도 가슴이 뭉클합니다.

“세상의 목표도 세상의 왕국도 제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이 세상 끝까지 다스리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이 더 낫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밀이니 맹수의 이빨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양승국 신부(살레시오회)-

 

 

△제주 황사평성지 성모상

 

 

[한주간 전례]

 

 

2021년 8월 9일 (월) [녹]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7,22-27

 

오늘 복음은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 번째 예고와 성전 세를 바치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교회는 왜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이 두 가지 이야기를

오늘 우리에게 함께 들려줄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

들 손에 죽을 것이지만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에서는 베드로가 납득할 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하지만(마태 16,21-23 참조),

두 번째 수난예고 때에는 제자들이 몹시 슬퍼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올 부활과,

그로 말미암은 인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이 슬퍼합니다.

 

성전 세는 스무 살 이상의

모든 유다인 남자가 주님께 드리던 예물입니다.

성전은 유다인들의 삶과 신앙의 중심이었고,

그 성전을 유지 관리,

보수하고 전반적인 운용을 하는 데에 성전 세가 쓰였습니다.

그런데 서기 70년 8월 29일 로마군의 공격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서기 80-90년 무렵 복음을 쓸 때,

성전이 파괴된 것에 대하여 잘 알고 있으면서

왜 성전 세 이야기를 할까요?

유다인의 삶과 신앙의 중심인 성전이

여러 상품을 사고파는 장사의 소굴이 되고,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성전 세를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사의 소굴이 된 성전을 정화하시고,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마태 21,12; 26,61; 27,40 참조).

마태오 복음사가는

‘여러분이 믿고 의지하는 그 성전은 허물어졌지만,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심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라고 강조합니다.

목숨까지 다 바치신 그 사랑은 영원하며,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물건이나 세상의 것을 기대할 것인지

아니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영원한 사랑,

곧 목숨까지 바치신 그 험난하고

지극한 사랑을 믿을 것인지를 말입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8월 10일 (화) [홍]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라우렌시오 성인은 스페인의 우에스카에서 태어났다.

로마 교회의 일곱 부제 가운데 수석 부제였던

라우렌시오의 임무는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고

빈민들을 구호하는 일이었다.

로마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박해자들이 교회의 보물을 바치라고 하자

라우렌시오 부제는 교회의 재산을 남몰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뒤

그들을 박해자들 앞에 데려갔다.

“이들이 교회의 재산입니다.”

이에 분노한 박해자들은

라우렌시오 부제를 불살라 처형하였다.

258년 무렵이었다. 라우렌시오 부제는 가난한 이들이

바로 교회의 보물임을 일깨워 준 성인이다.

 

[복음묵상] 요한 12,24-26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수도였던

‘라벤나’에 ‘갈라 플라치디아의 영묘’라는 건물이 있습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십자가형 건물의 벽과 천장은

모두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는데,

그곳에 낯선 그림이 하나있었습니다.

창문을 중심으로 한쪽에는 네 복음서가 놓인 열린 서가가 있고,

반대편에는 성인으로 보이는 사람 앞에 장작불이 피워져 있으며,

그 위에 큰 석쇠 같은 것이 놓여 있었습니다.

궁금증은 점 점커져 이를 계기로 성화에 대하여 공부하게 되었고,

어떤 성인을 그릴 때 그와 관련된 대표적 일화나

그의 순교 장면을 묘사하여 그 성인을 나타내고

교육에 이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파하고

칼에 목이 잘려 순교하였기에 손에 성경과 칼을 쥐고 있습니다.

 

라우렌시오 부제는

식스토 2세 교황을 도와 일하였던 부제들 가운데

수석 부제로, 교회 재산을 관리하고

구호품을 나누어 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로마 황제는 교황을 체포하여 참수한 뒤,

교회 재산을 관리하는 라우렌시오 부제에게

재산을 모두 내놓으라고 협박합니다.

그는 3일 뒤에 주겠다고 한 뒤,

교회의 모든 보물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리고 3일 뒤 많은 가난한 이들을 데리고

황제에게 가서 “보시오,

이들이 교회의 보물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이에 격분한 황제는 라우렌시오 부제를

석쇠에 구워 죽이는 형벌을 내립니다.

순교의 순간, 그가 “이쪽은 다 구워졌으니

다른 쪽도 마저 구워라.” 하였다는 말이 전설로 내려옵니다.

그래서 그의 상징물은 석쇠입니다.

 

오늘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도 질문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성당의 보물은 무엇인가?

나의 가장 큰 보물은 무엇인가?’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제3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 중에서).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8월 11일 (수) [백]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클라라 성녀는 1194년

이탈리아 아시시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복음적 생활에 감명을 받은 그는

수도 생활에 대한 열망으로 클라라 수도회를 세웠다.

수도 생활에 대한집안의 반대도 심하였으나,

오히려 동생 아녜스마저 언니의 뒤를 따라 수도자가 되었다.

클라라 성녀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본받아

철저하게 가난하고 겸손한 삶을 계속하였다.

1253년 선종한 그녀를 2년 뒤 알렉산데르 4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복음묵상] 마태오 18,15-20

 

클라라 성녀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복음적 삶에 감동받아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고,

사부인 프란치스코 성인을 본받아 가난의 삶을 살고자 합니다.

지금도 아시시의 산 다미아노 수도원에 가보면 당시 수도 생활이

얼마나 단순 소박하며 가난과 기도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클라라 성녀의 침실은 맨바닥에

약간의 풀을 모아 침대로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는데,

성녀가 구유에 누워 계신아기 예수님의 가난함을

얼마나 닮고자 노력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녀가 숨을 거둔 자리에 있는 장식 없는 십자가는

그녀가 한평생 얼마나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닮고자

노력하였는지 엿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이 십자가를 바탕으로 한

예수님에 대한 관상은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 이어집니다.

1240-1241년 사라센 대군이 아시시에 쳐들어왔을 때,

심한 병 중에 있던 클라라는

무방비 상태에 놓인 아시시시민들과 수도원을 구하고자

성광에 성체를 모시고 나가 적군 앞에 섭니다.

성녀가 기도를 마치자 성광에서 강한 빛이 흘러 나와

사라센 군대는 그만 두려움에 도망치고 맙니다.

 

무엇보다도 성녀의

가장 큰 미덕은 겸손한 생활입니다.

40년을 수도원장으로 지낸 그녀가 가장 좋아한 일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동료 수녀들의

발을 씻어 주고 식사 시중을 드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이신그리스도의 거울을 매일 들여다보고

그 안에 있는 당신의 얼굴을 단장하십시오.”

매일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라는 성녀의 말씀입니다.

창조주 하느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되시어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지극히 놀라운 겸손과 비할 수 없는 가난을 배웁니다.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시고,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시기를 바라신

그분의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거울삼아

우리를 비추어 보아야겠습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8월 12일 (목) [녹]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8,21─19,1

 

베드로 사도가 죄를 지은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예수님께 여쭙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대답하십니다.

한 번도 어려운데 일흔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니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지

예수님께서는 다음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어떤 임금이 자기 종들과 셈을 합니다.

임금은 일만 탈렌트(1탈렌트=6천 데나리온)라는

엄청난 빚을 진 종의 부채를 탕감해 주고 그를 놓아줍니다.

그런데 그 종은 나가자마자 자신에게

백데나리온(1데나리온=당시 노동자의 일당)을 빚진

동료에게 빚을 갚으라며 그를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임금이 이 종을 불러들여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지 않느냐?”

 

이 비유는 우리 각자에게 분명한 가르침을 줍니다.

“자비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것일 뿐 아니라,

참된 하느님 자녀의 식별 기준이 되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단언하십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먼저자비를 입었으므로,

우리도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자비의 얼굴」, 9항).

이 “하느님의 자비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는 구체적인 실재입니다.

이는 부모가 자기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녕 애끊는 사랑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랑은 온유한 배려와 너그러운 용서가 넘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솟구치는 사랑입니다”

(「자비의 얼굴」, 6항).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살아 있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받은 그 사랑과 자비를 실천할 때입니다. ‘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인간이 인간에게

구원이 될 수 있을까?”를 묻는 사람입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8월 13일 (금) [녹]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9,3-12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던집니다.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당시 유다인들은 모세 율법을 근거로 하여

이혼을 쉽게 생각하였습니다.

율법에는 ‘아내에게서 추한 것이

드러나거나 눈에 들지 않는 경우,

남편은 이혼 증서를 써 주고

아내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

(신명 24,1-4 참조)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철저히 남성 중심의 법이었습니다.

당시 어떤 이들은 이를 간음죄를 저질렀을 때에만

이혼할 수 있다고 엄격하게 해석하기도 하였으나,

또 다른 이들은 사소한 이유라도 이혼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논란 가운데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당신의 뜻을 밝히라고 강요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에 따라 방종주의자

또는 엄격주의자로 비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의도를 아시고

더욱 근본적인 혼인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창세 1,27 참조)

남자는 부모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게”(창세 2,24) 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으로,

곧 사랑의 구조로 만드셨습니다.

사랑의 구조란 ‘주는 이는 받는 이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만들어졌기에 사랑을 주고자 할 때

받는 이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내어 주고 받아들여 한 몸을 이루고,

죽기까지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혼인이 부부간의 사랑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것이라면,

사제나 수도자들처럼 독신으로 사는 이들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헌신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8월 14일 (토) [홍]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성인은

1894년 폴란드의 즈둔스카볼라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한

그는 1917년 성모 신심 단체인 ‘성모의 기사회’를 설립하였다.

이듬해 로마에서 사제품을 받은 콜베 신부는

평생을 선교사로 살아가다가 독일의

폴란드 침공 때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다.

여기서 한 수감자가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수용소에서는 한 명이 탈출하면

열 명을 지목하여 처형하는 벌이 있었다.

이에 따라 지목된 열 명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에게는 가족이 있다며 울부짖자,

콜베 신부는 그를 대신하겠다며 앞으로 나갔다.

결국 콜베 신부는 다른 아홉 명과 함께

굶겨 죽이는 아사 형벌을 받고 처절한 옥중 생활을 하다가

1941년 지하 감방에서 선종하였다.

이러한 그를 1982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자비의 순교자’라 부르며 시성하였다.

 

[복음묵상] 마태오 19,13-15

 

1941년 7월 어느 날,

아우슈비츠 수용소 14호 막사에서

수감자 한 사람이 탈출하였습니다.

그를 잡아들이는 것에 실패한 나치는 연대 책임을 물으며,

탈출에 대한 경고로 다른 열 명의 수감자를 굶겨 죽이는 형벌을 내립니다.

죽을 운명에 놓인 열 사람 가운데 하나였던 프란치세크는

아내와 자녀들을 떠올리며 울부짖기 시작합니다.

“이제 나는 여기서 죽는구나. 나의 부모, 아내,

자식을 다시는 볼 수가 없구나!”

그 자리에 있던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는

모자를 벗고 조용히 앞으로 나서 지휘관에게 말합니다.

“저는 가톨릭 사제입니다.

저 사람을 대신하여 제가 죽게 해 주십시오.”

죄수 번호 16670번이었던 콜베 신부는

보름 넘게 굶주림의 큰 고통을 겪은 뒤,

8월 14일 독극물 주사를 맞고 순교합니다.

 

이러한 그의 순교는

한순간의 선택이 아니라,

그가 온 생애를 통하여 추구해 오던

신앙 여정의 최종 열매입니다.

성인의 가장 큰 가르침은

‘모든 신자는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인의 길은 몇몇 사람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로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성모님의 ‘거룩한 순명’은 천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순명은 또한 하느님을 닮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탈출 3,7) 하신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고통 받는 이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움직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순명은 고통 받는 이들의 울부짖음 속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엄마가 아이의 부름에 응답하듯이,

콜베 신부가 다른 수감자의 울부짖음에 응답하였듯이,

우리도 고통 받는 이들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응답해야 합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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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이 후반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메달 유뮤를 떠나서 그동안 자기와 싸움에서 이겨낸

모든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선수들의 땀을 보면서

환희와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스포츠의 힘인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파이팅입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