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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7월 18(일) [녹] 연중 제16주일, 농민주일

Berardus 2021. 7. 17. 06:50

[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7월 18(일)

[녹] 연중 제16주일,

(농민주일)

 

제1독서(예레 23,1-6)

제2독서(에페 2,13-18)

복음(마르 6,30-34)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물질에 대한 욕망과 무질서한 삶은 인생의 궁극적인 가치 잃는 것

소모적인 행동 멈추고 목자와 함께 살아가기를 제안하시는 예수님

잠시라도 침묵의 대화로 내면의 성령님과 함께하며 주님 영접하길

 

연중 제16주일은 농민 주일입니다. 청

소년 시절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깃발을 들고 흥겹게 불렀던 농부가를 불러봅니다.

“하느님 주신 우리나라 편편옥토(片片沃土)가 이 아닌가….”

우리의 삶에 안전한 먹거리를 공급하는 논밭과 농민은 소중합니다.

지속 가능한 농업과 농촌 살리기로

창조 질서의 회복과 보전을 위해 기도합니다.

 

바빌론 제국의 침략으로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백성들이 유배당하던

고난의 시대에 예레미아 예언자는 산증인입니다.

그의 메시지는 주님께서 흩어진 양들을 모아들여

살던 땅으로 데려와 돌볼 참된 목자를

세워주시리라는 희망을 전합니다.(제1독서)

잃어버리는 양 하나 없이

‘새 계약’으로 구원해 주신

‘주님은 우리의 정의’(예레 23,6)이십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 23,1, 화답송)

유목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인들은

양 떼를 바른길로 이끄시는

주님의 목자 표상과 양들의 신뢰를 노래합니다.

주님은 자애롭고 너그러우시며

은총만이 따르는 목자이심을 고백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푸른 풀밭에서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이끄시어 영혼의 생기를 돋우어주십니다.

 

바른길로 이끌어주시는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양들은

그분의 막대와 지팡이만 보아도 위안이 됩니다.

삶의 여정이 아무리 힘들고 고달파도,

성사를 통해 ‘생명의 빵’과 ‘참된 음료’로 상을 차려주시고,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는 주님의 자애와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은 전적인 신뢰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에페 2,14)이심을 전합니다.(제2독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모든 사람을 하느님과 화해시키고,

원수의 적개심을 ‘조건 없는 사랑’으로

살라버리신 성자께서는 ‘평화의 왕’(이사 9,5)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성령의 친교로

하느님 아버지의 본성인 사랑의 일치를 이루게 해주십니다.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치유하라고 파견시킨 열두 제자가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와 예수님께 보고합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하시고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가시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초대하십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시간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외딴곳’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인적이 드문 곳이나 황량한 광야입니다.

세기 초 이스라엘인의 대부분은 주민이

적은 작은 마을에서 살아갑니다.

나자렛 인구가 백 명 내외에 불과할 정도이고

가족의 소풍도 없던 시절이지요.

 

초대교회 때부터

하느님의 백성이 평일에는 교회 밖에서

각자 일상의 삶을 살더라도 주일에는 사방에서 모여와

빵을 떼어 나누고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성찬례에 참석한 이들 사이에서는 화해와 친교가 이루어집니다.

 

물질문명의 시대에

재물 사랑과 욕망의 노예가 되어

‘시간은 돈’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쉼 없이

무질서한 삶을 살다 보면

인생 여정의 궁극적 가치를 잊어버립니다.

주님께서는 소모적인 삶을 멈추고,

목자와 함께하기를 제안하십니다.

‘너희는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메마른 삶에 갈증을 느끼는 이들이

주님 안에서 활력을 되찾게 이끄십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외딴곳에 먼저 도착합니다.

배에서 내리신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은

군중에 연민을 보이십니다.

참된 목자 없이 살아온 그들이

충족하지 못한 기본 욕구가 있음을 아십니다.

그들의 영적 기아를 충족시키시려고

주님께서는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복음에는 외딴곳이나

광야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많이 나옵니다.

세기 초부터 많은 수도승이 예수님의 기도 방식을 따라

외딴곳이나 광야로 떠나 삽니다.

고요와 침묵 속에 하느님의 현존과 함께하는

수도원의 기도 전통이 불모지에서 시작됩니다.

 

마음이 혼란한 정도로

번잡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소모적 일상을 잠시 떠나

새 생기를 돋우는 쉼이 필요합니다.

피정의 집이나 골방에서 침묵의 대화로

내면에 계시는 성령님과 함께합니다.

자신 삶을 돌아보고 하느님의 현존 속에 침묵하는 가운데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주님과의 관계를 깊게 합니다.

 

그리스도인 삶의 중심은

미사성제이기에 그리스도인은

‘감사 제사’가 있는 주일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삶의 리듬을 되찾는 주일은 새 희망의 날입니다.

한 식탁에서 나누는 말씀과 성찬이 ‘일용할 양식’이고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친교가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우리는 주님 말씀과

생명의 빵을 나누는 사랑의 일치 속에

활력을 얻어 ‘도시의 광야’에서 천주교인답게 살아갑니다.

정결한 마음으로 성체를 모신 우리의 기도는 ‘사랑의 봉사’입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있는 성전에서 깨달은 대로

충실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삶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꾼이 되게 하소서.

아멘.

 

-김창선(요한 세례자)-

 

△제주 새미 은총의 동산

 

 

[한주간 전례]

 

2021년 7월 19일 (월) [녹]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2,38-42

 

하루는 고향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늘 같은 날짜에 오던 용돈이

이번 달에는 오지 않았다며,

혹시 자식이 송금을 잘못한 것은 아닌지

확인 차 전화하신 듯 하였습니다.

자식은 바쁜 일 때문에 용돈을 보내 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께 죄송하다고 하는 목소리에 미안함이 묻어나옵니다.

아버지는 오히려 별것 아닌 일에

신경 쓰게 했다며 더 미안해하십니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을 자식은 약간의 용돈으로 표현합니다.

받은 사랑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마음입니다.

설령 그 돈을 받지 못하셨다 해도

부모님은 자식의 마음을 모르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믿음은 어떠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 표징을 보여 주어야지만 예수님께서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임을 믿고

의지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을 보고서도

마귀들의 힘을 빌려 표징을 일으킨다고

수군거렸던 그들이(마태 12,24 참조),

이번에는 더 큰 표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이 실체라면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은 그 실체를 드러내는 표징일 뿐입니다.

표징은 실체보다 더 크거나 완전할 수 없습니다.

실체가 있어야 그 표징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표징이 없어도 실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용돈을 드리지 않아도 안부를 묻는 수화기 너머

자식의 목소리가 부모님께는 또 다른 표징이 될 수 있듯이,

어떤 표징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실체를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표징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느님에 대한 의지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표징과 기적이 먼저입니까?

표징을 먼저 요구하는 우리라면,

점집을 찾아가 점을 보고 굿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는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니라며 원망하고 돌아서는 우리는,

용돈을 주지 않는 부모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라며 떼쓰는

철부지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모든 것이 표징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분이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신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7월 20일 (화) [녹]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2,46-50

 

지난 3월 시작된

‘사랑의 기쁨 가정’의 해를 맞이하여

가정 사목에 대한 세미나가 열렸습니다.

전남대학교 교수들과 현시대의

가족에 대한 개념과 문제점을 되돌아보고,

교회와 세상 안에서 진정한 성가정을 이루기 위한

노력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미나를 준비하면서 읽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가족이란 무엇일까?”라는 문장으로 시작한

그 글은 가족이라는 말에 담긴 이중성을 이야기합니다.

‘가족’이라는 말은 따뜻함과

안정감을 나타내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지나친 간섭과 폭력이 당연시되는 단어가 되기도 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내 기대와 욕구가 투사되는 소유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류도향 교수는 ‘혈연에서 관계로:

확장하는 가족의 원리’라는 글에서 가족의 패러다임이

‘혈연’에서 ‘관계’로 변화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가정 폭력이나 저출산, 이혼가정과

1인 가구의 증가라는 사회 현상도

나타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새로운 ‘가족’에 대하여 이야기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가족들이 찾아왔다고 전합니다.

그는 어쩌면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부정하고,

그분께서 마귀의 힘을 빌려 기적을 일으킨다는

바리사이와 같이(마태 12,24 참조)

악의적 의도를 가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새로운 가족을 소개하십니다.

혈연으로 맺어진 공동체나, 같은 공간에서

함께 먹고 생활하는 공동체,

또는 선택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제대로

실행하는 공동체가 하느님의 새로운 가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족은 공동체입니다.

하나의 구심점으로 같은 삶의 양식을 취하며

서로 위로하고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여러분의 가족은 무엇으로

하나 되어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하느님의 뜻’이

여러분의 가족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 주는

구심점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랑이며,

차별과 질투가 아닌 배려와 나눔입니다.

오늘도 그러한 여러분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십시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7월 21일 (수) [녹]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3,1-9

 

“삶 속의 성경.”

오랫동안 성경을 공부하고

성서 사도직의 소임을 맡으면서

언제나 마음에 품고 사는 표현입니다.

성경을 머리로만 배우고 익혔던 저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지식으로 받아들이기만 할 뿐,

가슴으로 삶으로 느끼고 다가가지 못하였습니다.

성서 사도직 소임을 하면서 성경을 통하여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삶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성경,

나와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며 나에게 말을 건네시는

하느님에 대하여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통해서

또 다른 그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갔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각자가 저마다의 삶 속에서 성경을 읽고

하느님을 만나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태오 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하늘 나라에 대하여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철학적 사유가 담긴 단어로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어렵고 난해한 신학적 단어나,

율법에 나와 있는 개념적 지식으로도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씨 뿌리는 일, 수확하는 일, 빵 만드는 일, 고기 잡는 일,

물건 파는 일 등 그들이 살아가는

일상을 통해서 하늘 나라가 어떤 곳인지,

어떻게 하면 하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할 수 있는지 알려 주십니다.

 

이러한 비유 말씀은

어쩌면 사람들의 언어를 통하여

하느님의 언어를 듣게 하시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삶 속에서 쉬이 지나치고, 또 잊고 살았던

하늘 나라를 찾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는 어려운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를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것을 자신의 삶에 어떻게 비추어 보고

또한 어떻게 그 깨달음대로

살아가야할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 고민은 우리의 몫입니다.

땅을 갈아엎고 돌을 골라낸 뒤 흙을 부드럽게 하고,

가시덤불을 걷어 내어 햇볕이 잘 드는

땅으로 만들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삶 속에서 말씀의 신비를 실현하기를,

나의 마음과 삶을 햇볕이 잘 드는 비옥한 밭으로 가꾸기를 기도합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7월 22일 (목) [백] [백]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복음서에서 여러 차례 나오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루카 8,2)로 소개되어 있다.

그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던 십자가 밑에(마태 27,56 참조),

예수님의 무덤 곁에 있었던 여인이다(마태 27,61 참조).

또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첫 번째 사람으로(요한 20,11-16 참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 주었다(요한 20,18 참조).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

시신이나마 모셔 가려 하였던(요한 20,15 참조)

그의 모습에서 주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마리아막달레나 성녀에 대한 공경은 12세기부터 시작되어 널리 퍼졌다.

 

[복음묵상] 요한 20,1-2.11-18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그리운 노랫소리에 까맣게 잊고 있던 한 사람이 떠오릅니다.

이 노래를 함께 들으며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니,

그와 함께했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갑니다.

그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아쉬움과 후회에서 한동안 벗어나질 못합니다.

지나치듯 들려온 노래 한 곡에

사랑을 주고받았던 추억이 밀려듭니다.

우리의 기억은 그렇습니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사소한

어떤 계기에 수많은 기억이 소환되고는 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분의 무덤을 찾습니다.

그분 곁에 가까이 있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보이지 않으시고,

낯선 이들이 서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마리아는 예수님께 받은

사랑의 기억을 잊지 않았습니다.

다른 상황 속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비록 처음에는 알아 뵙지 못했지만,

그 사랑의 추억 때문에 자신을 부르시는 목소리에

곧바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의심하지 않습니다. 누구냐고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마리아는 그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우리를 불러 주시고 우리와 함께 길을 걸어가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의 뜻을 삶 속에서 발견하며

의심 없이 그분의 음성에 응답하려면,

예수님과 나누었던 추억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 추억들을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 놓아야 합니다.

지나온 삶의 시간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한 기억을

잘 간직해놓아야만 오늘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단번에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분과의 추억을, 그분에 대한 기억을 잘 간직하십시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7월 23일 (금) [녹]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3,18-23

 

신자들이 저에게

성경에 대하여 질문을 많이 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여 답하지만,

마지막은 언제나 “성경에는 정답이 없다.”라고 마무리하게 됩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네 삶을 바탕으로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삶이 다르고, 그 삶 속에서 해석되고 이해되기에,

매번 다르고 새롭게 드러나야 합니다.

똑같은 말씀을 읽는다고 하더라도

어제의 이해와 오늘의 느낌이 다릅니다.

그러나 다른 것일 뿐, 틀린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사람의 손으로 쓰였지만

‘성령께서 지금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씨앗은 가능성입니다.

다만 씨앗을 먹는 것만으로는

배부름과 행복을 느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하늘 나라를 실현시켜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 말씀과 가르침에 따라 살아갈 때,

씨앗은 싹을 틔우고 자라 먹음직스러운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장애물들을 하나씩 걷어 내야 합니다.

일상의 무게로 지치고 힘들다는 이유로

말씀을 멀리하는 나태함과 게으름을 걷어 내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와 논리를 좇으며

그러한 것들에 익숙해져 깊이 생각하지 않고

습관처럼 판단하는 우리의 익숙함을 버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둘러보지 않고 자신의 욕심과

꿈만을 뒤쫓아 살아가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늘 나라를 실현하려면

말씀의 씨앗을 날마다 다르게 다가오는

삶의 자리에서 새롭게 해석해야 합니다.

그 자리가 언제나 좋은 땅일 수는 없습니다.

많은 장애물과 허물을 제거했다 하더라도,

비옥해진 땅은 다시 딱딱하게 굳어 버리고

돌과 가시덤불이 무성한 불모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씨앗을 싹틔우고자 날마다 삶을 가꾸어 나가며

좋은 열매를 함께 나누는 천국을 맛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7월 24일 (토) [녹]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3,24-30

 

항상 옳은 결정을 하고 싶습니다.

그런 결정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바로 알고 그분의 뜻을

실현할 수 있는 선택을 하고자 더 고민하고

자문하며 결정하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 첫 마음이 그대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 생각과는 다르게 일이 진행되거나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깨닫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내 뜻이 되어버린 것을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비유를 통하여 하늘 나라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곳임을 알려 주십니다.

가라지는 불필요한 것입니다.

먹지도 못하고 탐스러운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방해할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라지의 모습이 밀과 비슷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오만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종들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라고 한 질문은

자신의 능력을 맹신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기에

자신은모든 것이 옳고 그분의 뜻을 실현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어쩌면 하느님의 이름을 빌려

나의 뜻과 생각을 관철하려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자신만을 바라보는 어둠의 기운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자신의 행동을

점검하고 첫 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아가 성공이라는 결과만을 위한 타협을 지양해야 합니다.

언제나 의심하십시오, 언제나 들여다보십시오.

우리 안에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가라지가 하느님의 뜻이 아님을 깨닫고

용기 있게 뽑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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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의 날씨입니다.

코로나와 무더위 그리고 마스크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래도 극복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이번 주도 견디어 냅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