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7월 11(일)
[녹] 연중 제15주일
제1독서(아모 7,12-15)
제2독서(에페 1,3-14)
복음(마르 6,7-13)
오직 주님 말씀에 따라 청빈한 삶을 살아갑시다
항상 주님 섭리 강조한 예수님
사목 활동 나서는 제자들에게 가난한 모습으로 떠나라고 훈시
속세의 기득권으로부터 벗어나 회개하고 복음적 청빈 실천해야
■ 세상의 힘을 믿기 보다는 주님 섭리의 손길에 우리를 맡깁시다
수도자로서
오랜 초기 양성기간을 마무리한 형제들,
이제 곧 사제품을 받고 본격적으로
사목 일선에 투입될 형제들을 대상으로
‘한 말씀’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결코 만만치 않은 길이기에,
다양한 어려움이 곳곳에 산재한 십자가 길이기에,
선배로서 이런 저런 충고를 하다 보니 말이 자꾸만 길어지더군요.
“잘 아시는 바처럼 사제품은 끝이 아니라 출발입니다.
여러분은 신입사원도 아니고 수습사원인 셈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궂은일을 하는데 주저하지 말길 바랍니다.
만나게 될 신자들과 청소년들, 함께 일하는 직원들 앞에서
한결같은 겸손의 자세를 유지해 주십시오.
‘내가 신부인데! 내가 원장인데!’ 하는 말은 절대 금지입니다.
무엇보다도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한 평생 가난한 사제로 살아주십시오.
소임 이동 때는 여행용 가방 두 개면 충분합니다.
양손에 가방 두 개 달랑 들고 고속버스 타고 이동해주시면
그 자체만으로 사제로서 성공한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사목 실습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저처럼 훈시 한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용 짐을
이런 식으로 꾸리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이기에,
이를 ‘여장 규범’이라고도 합니다.
여러 말씀 가운데 유독 다음의 말씀이 가슴에 꽂힙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갖고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을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마르코 복음 6장 8~9절)
돌아보니 저도 형제들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요구는 무리한 요구를 넘어,
해도 해도 너무한 상상을 초월하는 요구였습니다.
짧지 않은 여행길이었을 텐데, 적어도 갈아입을 여벌옷 몇 벌,
그리고 옷을 넣을 보따리 하나 정도는 지니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벌옷, 보따리도 챙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시 여행 중에 강도나
산짐승들을 만날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방어용 지팡이 하나는 기본이었습니다.
겨우 최후의 생존 수단인 지팡이만 지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긴 여행길에 많은 돈은 아니어도
만일을 대비한 비상금은 필수입니다.
그런데 비상금 한 푼조차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에게
럭셔리한 부자의 모습이 아니라 가장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떠날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이 자신의 힘이나
세상의 힘을 믿기 보다는 주님 섭리의 손길에 맡기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여장 규범와
유사한 말씀이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
11장 6절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사도가 떠날 때에는 다른 곳에 유숙할 때까지
필요한 빵 외에 다른 것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사도가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목자들이 교우들로부터
생활비를 지원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 자신은 스스로 천막 짜는 노동을 해서
생활비와 전도여행 경비를 마련했습니다.
■ 부끄러운 마음으로 오늘의 나를 돌아봅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오늘의 나를,
오늘 우리 교회와 수도회를 돌아봅니다.
예수님의 여장 규범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모습의 부유한 모습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청빈의 삶, 무방비의 삶, 머리 둘 곳조차 없는
떠돌이로서의 삶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철저히 정착하고 안주했으며, 충분한 기득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복음적 청빈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몇몇 수도회·
수녀회들을 바라보며 실낱같은 희망을 지닙니다.
그분들은 가장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들보다 덜 일하고,
덜 고뇌하고, 더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사는 생활을
큰 죄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사목 활동 지역은 언제나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이 살아가는 거주 지역입니다.
그 지역이 개발돼 부촌으로 탈바꿈하면 아
무 미련 없이 또 다른가난한 지역으로 떠나갑니다.
예수님의 미니멀리즘과 관련된
당부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사목자들이 좀 더 헌신하지 못하는 이유,
신앙의 본질과 핵심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
비본질적이고 지엽적인 것들에
몰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제 개인적 생각인데,
아무래도 우리가 행하는 제반 사목에 대한
지속적인 회개의 결핍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님 마음에 드는 사목자로 서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반성이 요구됩니다.
거듭되는 사목적 회개가 필요합니다.
제 개인적으로 은혜로운
사목적 회개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수도회 입회 전, 중고등부 교리교사를 할 때였습니다.
아이들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부족했지만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은
일종의 천국 체험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을 위해 못할 일이 없었습니다.
다른 것들은 별로 재미가 없어졌습니다.
자연스레 교리교사로서의 사명에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수도회 입회 후에도
비슷한 체험이 계속됐습니다.
상처 입은 아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틈만 나면 티격태격했지만,
그 와중에 아이들로부터 혈육 이상의 깊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을 맛본 이후사목자로서의 대대적인 회개가 이루어졌습니다.
아이들이 나를 좋아하니
그걸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됐습니다.
힘들지만 아이들 곁에 있는 것이
내게는 최고의 행복이었습니다.
돈이며, 좋은 차며, 메이커 옷도 다 필요 없었습니다.
어디 외출 나가도 머릿속은 늘 아이들 생각이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었습니다.
그저 아이들의 행복, 아이들의 구원만이 유일한 관심사였습니다.
자연스레 나 자신을 위한 투자는 줄어들었습니다.
굳이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레 청빈한 삶이 시작됐습니다.
왜 우리가 부차적인 것들,
외적인 것들, 스쳐지나가는 것들에
그리도 관심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일까요?
진정한 사목적 회개가 이루어지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우리의 사목 대상자들, 양떼들로부터
진한 사랑을 받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그들이 나를 너무 사랑하고 존경해서 틈만 나면
나를 찾고, 내 소매를 붙들고 늘어진다면,
그 사랑 체험을 한 이후 어찌 그들에게 헌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양승국 신부-
△부산 금정구 성 분도 명상의 집
[한주간 전례]
2021년 7월 12일 (월) [녹]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0,34─11,1
아침에 눈을 뜨며
‘5분만 더 잘까?’ 하는 고민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성경을 보고
강론을 준비하면서 어떻게 쓸까 고민합니다.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토론하고 고민합니다.
온종일 우리는 고민과 갈등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러한 고민은 대개 나 자신이 좀 더 편하려는,
더 쉽게 살아가려는,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는 싸움이며,
곧 유혹이라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더 많이 희생하고, 더 많은 것을 내놓기 위한,
남들보다 더 힘들어지는 고민과 갈등은 대부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행복과 평화를 위한 이기적인 고민을
먼저 하다 보면 예수님의 가치와 시선에 대한고민은 뒷전으로 밀려나 버립니다.
그래서 자신만을 위한 선택을 고민 없이,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실행에 옮깁니다.
나아가 그러한 고민이 없는 삶을 평화라 여기며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평화는 버리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타인을 짓밟고
힘으로 누르는 평화를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거대한 힘 앞에서 두렵고 무서워 타협이라는 명목으로
도망치고 비굴해지는 평화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가치와는 다른, 예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예수님처럼 살려고 노력하고 고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고민은 우리에게 ‘칼’과 같습니다.
우리의 삶을 날카롭게 찌르며 고통을 줍니다.
때로는 그 고민의 칼 때문에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기도 하고,
의견이 달라 대립하며 갈라서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칼 때문에 우리를 원망하며
우리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무겁고 감당하기 힘들지만 끝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그 끝에 더 큰 두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끝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우리의 몫인 것입니다.
때로 그 십자가의 무게가 고민의 칼로 다가올 때는
예수님의 삶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신 길의 끝이 죽음이 아닌
부활이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더 고민하고 더 노력해야 하는 쉽지 않은 길이지만,
오늘도 묵묵히 걸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7월 13일 (화) [녹]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1,20-24
어둠 속에 오래 있다 보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차츰 보이게 됩니다.
그 어둠이 지속되다 보면, 생활하는 데 그리 불편함이 없습니다.
이때 갑자기 밝은 빛이 들이닥치면 오히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눈을 찌푸리고 빛을 가리며
어둠을 찾아 스스로 눈을 감아 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고을,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을 꾸짖으십니다.
아마도 그곳에 사는 모든 사람이 회개하지 않고
잘못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막고자
하느님께 청하였을 때(창세 18,16-33 참조),
열 명이라도 의로운 사람이 있다면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신 자비로우신 하느님처럼,
예수님께서도 아무리 타락한 도시라 하더라도
전체가 아닌 개인의 회개를 바라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개인의 잘못된 행동과
의도를 비판하지 않으시고 마을 전체를 꾸짖으시는 것일까요?
그 도시들은 대체 어떤 도시였을까요?
이 세 도시는 갈릴래아 지방에서
큰 규모의 도시들이었습니다.
동북으로 연결된 큰 도로가 지나가던 도시였기에
상업과 무역이 발달하였고, 호수와 맞닿아 있어
경제적 풍요를 누리던 지역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도시들의 문제처럼 빈부의 차가 극심하였고
사회적 부조리도 만연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보다 물질을 더 믿었고, 탐욕과 방탕의 삶이
사랑과 배려를 집어삼켰을 것입니다.
그러한 삶의 양식에 그들은 차츰 적응하고 타협하며
그것이 자신의 목표인 양 살아갔을 것입니다.
어둠과 악에 적응하고, 물질과 방탕의 우상에
자신의 영혼을 팔아 가면서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무서운 것은
악에 대한 ‘적응’과 ‘순응’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살아가니까,
나 혼자만 그리 살지 않으면 바보가 되고 뒤처지니까,
적당히 타협하고 스스로 위로하며
어느새 그런 태도가 습관이 되어 버립니다. 그
리고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이제는 오히려
어둠을 사랑하고 빛을 멀리하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둠에 얼마나 적응하셨나요?
물질의 어둠, 탐욕의 어둠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빛으로 나아가십시오.
처음에는 힘들 수도 있겠지만,
견뎌 내면 그 빛 안에서 모든 것을 제대로 보고 바르게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7월 14일 (수) [녹]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1,25-27
사제로서 다른 사제의 강론을
듣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강론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아야 하지만,
정작 가슴으로 듣지 못하기도 합니다.
제단에 올라 강론하려면 어떻게 준비하고,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과 교리의 내용도 오랫동안 배워 왔고,
신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지금 무엇이 필요하고
중요한지를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기에,
좋은 말씀과 강론인데도 마음을 열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유는 자신이 ‘잘 알고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내가 해 봐서 다 알아!’, ‘왜 그 정도밖에 못해!’라며,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거나 듣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자신만이 옳다는 오만과 편견 속에 갇히게 됩니다.
인간은 하느님에 대하여 스스로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이해와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시며,
우리가 바라거나 원하는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으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어쩌면 그
런 오만과 편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하느님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오만함과,
자신이 바라는 방식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방식이라는 편견으로
다른 이들의 처지와 생각을 헤아리지 않은 채
자신의 방식과 뜻만을 강요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그러하였고
빌라도가 그러하였으며 가끔씩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도 그러하였습니다.
편견과 선입관 없이
무엇인가를 판단하기란 어렵습니다.
아니 어쩌면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경험과 삶이 판단의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알고자 한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철부지들처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먼저 많이 바라보고 들어야 합니다.
듣지도 보지도 않고서 판단하고 결정지으며
선택하는 오만과 편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많이 들으십시오.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바라보십시오.
그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7월 15일 (목) [백]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보나벤투라 성인은 1217년 무렵
이탈리아 중부 지방의 바뇨레조에서 태어났다.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의 수도자가 된 그는
파리에서 공부한 뒤 파리 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학문 연구에 많은힘을 기울였다.
작은 형제회의 총장으로 선출된
보나벤투라는 자신이 속한 수도회 설립자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전기를 완성하였으며,
철학과 신학 분야에서도 권위 있는 저서를 많이 남기고
1274년 무렵 선종하였다.
1482년 식스토 4세 교황이 그를 시성하였고,
1588년 식스토 5세 교황은 중세의 뛰어난
철학자이자 사상가로 존경받던 보나벤투라 주교를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복음묵상] 마태오 11,28-30
가볍고 편한 멍에가 세상에 존재할까요?
무겁고 불편해야 멍에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날마다 그러한 멍에를 짊어지고 산다면,
그것이 무거운지도 모른 채 살아갈 것입니다.
그 무게에 짓눌려 어깨는 망가지고 마음도 갈기갈기 찢겨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 나 자신을 발견한 뒤에야,
우리는 이 멍에를 어떻게, 왜 짊어지게 되었는지 생각합니다.
그 고민의 끝자락에서 멍에로 말미암은 고통과
짓눌림의 원인을 내가 아닌 남에게서 찾고 멍에를 사정없이 내동댕이칩니다.
미사를 시작하기 전에
제의를 입으며 침묵 가운데 기도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하셨으니
제가 주님의 은총을 입어 이 짐을 잘 지고 가게 하소서. 아멘!”
그리고 지금 제가 메고 있는 멍에의 무게를 묵상해 봅니다.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어깨에 두른 영대와 몸에 걸치는 제의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지 못할 때도 있으며
누군가를 위한 희생을 스스로에게 강요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 무게에 쓰러져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다시 일어섭니다.
그분께서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시며 세 번이나 넘어지셨고,
다시금 묵묵히 일어나셨습니다.
그 멍에를 내려놓고 싶다고 피땀 흘리시며 아버지께 기도하셨고,
수많은 모욕과 조롱을 받으시면 서도 그 무게를 견디어 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멍에가 무겁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 무게와 고통보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 더 크셨기 때문입니다.
멍에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의 멍에가 다른 사람들의 멍에보다
더 고통스럽고 무겁게 느껴집니다.
그 무게를 견딜 수 있게 지탱해 주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멍에가 가벼워지거나 고통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려움을 견디고 버텨 내는 것입니다.
오늘도 사랑으로 기꺼이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아가십시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7월 16일 (금) [녹]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2,1-8
처음 만난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첫눈에 반하여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매력에 이끌려 설레는 것이지,
진정한 사랑의 모습과는 다를 것입니다.
사랑하려면 많은 것을 알아야합니다.
상대의 장점과 단점,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꿈과 목표 등 그 사람에 대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잘 알아야지만 사랑할 수 있겠지요.
또한 서로에 대하여 알게 된 것을
공유하고 서로 배려해야합니다.
상대와 자신의 모습이 다름을 인정하고
그 거리를 좁혀 갈 때 사랑은 지속될 수 있습니다.
다름을 같음으로 만들어 가려면 상대를 배려하고
내 것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함께 생활하게 됩니다.
함께 즐거워하고 행복해 하며, 때로는 함께 아파하고
그 아픔을 견디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서로 닮아 가며 하나가 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러한 사랑의 관계로 이끌어 가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알려 주십니다.
무엇을 좋아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무엇을 바라시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려주십니다.
이를 기록해 놓은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에는 당신께서 ‘너희의 하느님이 되어 주고,
너희는 그분의 백성이 되게 하겠다.’(신명 26,16-19 참조) 하시며
이스라엘 백성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자 하신
하느님의 의리와 신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앎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과 관계를 맺습니다.
함께 살아가고자 같은 생각과 뜻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내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것으로 채우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뜻으로 자신을 채우지 않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사람들을 통제하고 권위를 세워
자신을 드러내려는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더 많이 사랑하며 살면 좋겠습니다.
우리 또한 나름의 규칙과 법을 정해 놓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한 법을 정해 놓았습니다.
그 법이 누구를 위한 법이고 규칙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편하려고, 나에게 위로와 희망과 즐거움을 주려고 만든 법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 뜻대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에서
지키는 법인지 성찰해 보았으면 합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7월 17일 (토) [녹]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2,14-21
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상황과 삶의 경험치에 따라
누군가의 행동을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그러한 판단이 반드시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기준이 무엇인지 고민해보았으면 합니다.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워 주는지가 기준이라면
그러한 판단은 보류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오랜 친구나 사랑하는 이를 쉽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한 번 더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 사람의 처지에서
왜 그런 행동을 하였는지 고민해 볼 것입니다.
함부로 내린 판단이 우리를 미움과
오해의 길로 이끌어 갈 수 있으니까요.
오늘 복음에서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판단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안식일을 어기고
하느님의 율법을 무시하며,
그동안 율법을 통하여 얻었던 자신들의 부와
명예를 빼앗아 가려는 사람으로 판단하고 ‘없앨 모의’를 합니다.
군중들 또한 자신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좋은 사람’
또는 ‘필요한 사람’으로 판단합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릅니다.
그렇게 그들은 쉽게 열광하지만,
그 필요성이 사라지면 그 들의 마음은 순식간에 돌아설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저자는 쉽게 판단하고 결정하지 말 것을
‘함구령’을 통해서 이야기합니다.
또한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사야 예언서에 기록된
‘주님의 종’에 대한말씀을 들려줌으로써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려 줍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원망해 본 적이 있습니다.
내 기도만 들어주시지 않는 것 같고,
행복보다는 불행과 아픔을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신앙생활이 무거운 짐으로 다가올 때,
절망과 함께 예수님에 대한 원망만이 남기도하였습니다.
그런 때일수록 쉽게 판단해 버리는
나의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합니다.
예수님의 뜻과 가치, 사랑이 무엇인지 고민합니다.
원망이 아닌 희망으로
그 시련과 아픔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합니다.
오늘도 그렇게 주님 안에서 고민하고
아파하고 노력하며 하루를 살아갑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
장마와 더위가 함께 있는 요즘입니다.
게다가 코로나19의 갑짝스러운 확산으로
다시금 활동의 제약이 오게 되었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한 마음으로 극복하고자 노력해야겠습니다.
-Berardus-
'▒▒ 영성♡공간 ▒▒ > ∞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7월 18(일) [녹] 연중 제16주일, 농민주일 (0) | 2021.07.17 |
---|---|
[말씀묵상]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0) | 2021.07.15 |
[말씀묵상] 오직 주님 말씀에 따라 청빈한 삶을 살아갑시다 (0) | 2021.07.07 |
[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7월 4(일) [녹] 연중 제14주일 (0) | 2021.07.03 |
[말씀묵상] 얄궂은 세상, 하느님의 편이 됩시다! (0) | 2021.07.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