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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오직 주님 말씀에 따라 청빈한 삶을 살아갑시다

Berardus 2021. 7. 7. 06:31

[말씀묵상]

오직 주님 말씀에 따라 청빈한 삶을 살아갑시다

 

연중 제15주일

 

제1독서 (아모 7,12-15)
제2독서 (에페 1,3-14)
복음 (마르 6,7-13)

 

항상 주님 섭리 강조한 예수님 사목 활동 나서는 제자들에게 가난한 모습으로 떠나라고 훈시
속세의 기득권으로부터 벗어나 회개하고 복음적 청빈 실천해야

 

세상의 힘을 믿기 보다는 주님 섭리의 손길에 우리를 맡깁시다


수도자로서 오랜 초기 양성기간을 마무리한 형제들,

이제 곧 사제품을 받고 본격적으로 사목 일선에 투입될

형제들을 대상으로 ‘한 말씀’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결코 만만치 않은 길이기에,

다양한 어려움이 곳곳에 산재한 십자가 길이기에,

선배로서 이런 저런 충고를 하다 보니 말이 자꾸만 길어지더군요.

“잘 아시는 바처럼 사제품은 끝이 아니라 출발입니다.

여러분은 신입사원도 아니고 수습사원인 셈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궂은일을 하는데 주저하지 말길 바랍니다.

만나게 될 신자들과 청소년들,

함께 일하는 직원들 앞에서 한결같은 겸손의 자세를 유지해 주십시오.

‘내가 신부인데! 내가 원장인데!’ 하는 말은 절대 금지입니다.

무엇보다도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한평생 가난한 사제로 살아주십시오.

소임 이동 때는 여행용 가방 두 개면 충분합니다.

양손에 가방 두 개 달랑 들고 고속버스 타고 이동해주시면

그 자체만으로 사제로서 성공한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사목 실습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저처럼 훈시 한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용 짐을 이런 식으로 꾸리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이기에, 이를 ‘여장 규범’이라고도 합니다.

여러 말씀 가운데 유독 다음의 말씀이 가슴에 꽂힙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갖고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을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마르코 복음 6장 8~9절)

돌아보니 저도 형제들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요구는 무리한 요구를 넘어,

해도 해도 너무한 상상을 초월하는 요구였습니다.

짧지 않은 여행길이었을 텐데, 적어도 갈아입을 여벌옷 몇 벌,

그리고 옷을 넣을 보따리 하나 정도는 지니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벌옷, 보따리도 챙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시 여행 중에 강도나

산짐승들을 만날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방어용 지팡이 하나는 기본이었습니다.

겨우 최후의 생존 수단인 지팡이만 지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긴 여행길에 많은 돈은 아니어도

만일을 대비한 비상금은 필수입니다.

그런데 비상금 한 푼조차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에게

럭셔리한 부자의 모습이 아니라 가장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떠날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이 자신의 힘이나

세상의 힘을 믿기 보다는 주님 섭리의 손길에 맡기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여장 규범와 유사한 말씀이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 11장 6절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사도가 떠날 때에는 다른 곳에 유숙할 때까지

필요한 빵 외에 다른 것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사도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목자들이 교우들로부터

생활비를 지원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 자신은 스스로 천막 짜는 노동을 해서

생활비와 전도 여행 경비를 마련했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오늘의 나를 돌아봅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오늘의 나를,

오늘 우리 교회와 수도회를 돌아봅니다.

예수님의 여장 규범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모습의 부유한 모습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청빈의 삶, 무방비의 삶,

머리 둘 곳조차 없는 떠돌이로서의 삶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철저히 정착하고 안주했으며, 충분한 기득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복음적 청빈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몇몇 수도회·수녀회들을 바라보며 실낱같은 희망을 지닙니다.

그분들은 가장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들보다 덜 일하고, 덜 고뇌하고,

더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사는 생활을 큰 죄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사목 활동 지역은 언제나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이 살아가는 거주 지역입니다.

그 지역이 개발돼 부촌으로 탈바꿈하면

아무 미련 없이 또 다른 가난한 지역으로 떠나갑니다.

 

△율리우스 슈노르 폰 카롤스펠트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19세기 중반).

 

 

예수님의 미니멀리즘과 관련된 당부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사목자들이 좀 더 헌신하지 못하는 이유,

신앙의 본질과 핵심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

비본질적이고 지엽적인 것들에 몰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제 개인적 생각인데, 아무래도 우리가 행하는 제반 사목에 대한

지속적인 회개의 결핍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님 마음에 드는 사목자로 서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반성이 요구됩니다.

거듭되는 사목적 회개가 필요합니다.

제 개인적으로 은혜로운

사목적 회개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수도회 입회 전, 중고등부 교리교사를 할 때였습니다.

아이들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부족했지만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은 일종의 천국 체험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을 위해 못할 일이 없었습니다.

다른 것들은 별로 재미가 없어졌습니다.

자연스레 교리교사로서의 사명에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수도회 입회 후에도 비슷한 체험이 계속됐습니다.

상처 입은 아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틈만 나면 티격태격했지만,

그 와중에 아이들로부터 혈육 이상의 깊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을 맛본 이후 사목자로서의 대대적인 회개가 이루어졌습니다.

아이들이 나를 좋아하니

그걸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됐습니다.

힘들지만 아이들 곁에 있는 것이 내게는 최고의 행복이었습니다.

돈이며, 좋은 차며, 메이커 옷도 다 필요 없었습니다.

어디 외출 나가도 머릿속은 늘 아이들 생각이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었습니다.

그저 아이들의 행복, 아이들의 구원만이 유일한 관심사였습니다.

자연스레 나 자신을 위한 투자는 줄어들었습니다.

굳이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레 청빈한 삶이 시작됐습니다.

왜 우리가 부차적인 것들,

외적인 것들, 스쳐지나가는 것들에

그리도 관심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일까요?

진정한 사목적 회개가 이루어지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우리의 사목 대상자들,

양떼들로부터 진한 사랑을 받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그들이 나를 너무 사랑하고 존경해서 틈만 나면 나를 찾고,

내 소매를 붙들고 늘어진다면,

그 사랑 체험을 한 이후 어찌 그들에게 헌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