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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7월 25(일) [녹] 연중 제16주일, 농민주일

Berardus 2021. 7. 24. 06:11

[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7월 25(일)

[녹] 연중 제16주일,

농민주일

 

제1독서(2열왕 4,42-44 )

제2독서(에페 4,1-6 )

복음 (요한 6,1-15)

 

살아있는 모든 것 위해, 은혜로 채워주시는 생명의 빵

 

체성사를 통해 교회 안에 항상 살아계시는 그리스도 현존을 체험

파스카는 단순한 연대를 넘어 예수님이 당신 몸을 내어주시는 순간

예수님의 몸은 우리가 합당하게 살아가게 하는 힘과 일치의 원천

 

■ 빵장수 예수님

 

“차가 끓자 차 주전자에서 쉬쉬 소리가 났다.

야곱은 물을 끓이면서 부름을 받을 때까지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부름이 오고 그 소리를 들을 때에는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인내, 차분함, 주의, 활동…. 작은 부엌에서 아침 차를 마시면서

야곱은 그런 생각을 했다.”

-(노아벤샤의 「빵장수 야곱」에서)-

 

오래전 읽은 책이지만

아직도 삶에 영감과 영향을 주고 있는 책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하느님 말씀의 빵만이 아니라

일상의 빵도 함께 나누라는 부름!

 

■ 기적이 아니라 ‘표징’

 

예수님이 5000명을 먹인 이야기는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지닌 힘을 드러내는 절정에 해당하고

독자에게는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아보고

그분에 대한 믿음을 결정하는 순간입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빵의 ‘기적’이 아니라 ‘표징’(세메이온)입니다.

‘표징’은 보는 눈과 이해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영원한 실체를 상징합니다.

요한이 사용한 ‘표징’이라는 말의 배경은구약성경입니다.

 

표징(히브리어 ‘오트’)은 이

집트 탈출을 이끈 모세나 후대 구약 예언자들이

하느님이 보낸 진정한 사자임을 입증하는 역할을 합니다.

제1독서에서 엘리사 예언자가 스무 개의 빵으로

100명을 먹인 일도 그런 사례에 속합니다.

 

요한복음서에서 여러 표징의 목적도

하느님이 파견한 분으로서 예수님의 메시아 신분과 권위,

사명을 여러 측면에서 소개하는 것이 목적이며

‘예수님은 누구인가?’를 보여줍니다.

 

복음 본문은 예수님이 죽은 뒤

5~60년 뒤에 살았던 요한이 청중에게 부활한 그리스도가

교회 안에 항상 살아있으며 성체성사 안에서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 음식 걱정하는 예수님

 

음식은 인간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며,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연결하는 문화적 인자를 대표합니다.

상징적 차원을 받아들일 능력을 갖춘 사람들은

음식에 영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따라온 군중을 보고

제일 먼저 걱정한 것은 ‘빵’,

곧 음식이라는 점이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그 모습은 예수님에게 합당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었지만 어떤 특권도 누리지 않고

목수로 노동을 하면서 일상의 양식을 얻는 일을

걱정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혼자 산에서 기도하며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는 시간과 마찬가지로

그분이 직접 빵을 만들어 사람들과 나누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도 영성 생활의 비결입니다.

5000명을 먹이는 일은 평소에 사람들을 먹이는 일에

관심을 가진 예수님 체험을 토대로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거나 해보지 않은 일을 쉽게 할 수 있을까요?

 

이 이야기는 유대인의

중요한 축제인 ‘파스카’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 파스카는 단순히 연대 표시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 예수님이 생명을 낳는 참된 빵인

그분 몸을 내어주는 탁월한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필립보에게

‘어디에서’ 빵을 살 수 있는지 묻습니다.

필립보가 그 지역을 잘 아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필립보가 모르는 빵에 대해 좀 생각해보라는 초대이기도 합니다.

 

‘어디에서’라는 말은 기원, 본성을 가리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어디에서’라는 말을

예수님의 정체성과 관련해 자주 사용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어디에서 생수를 마련해야할지,

니코데모는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카나 혼인 잔치의 과방장은 좋은 포도주가

어디에서 났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주려는 것은

필립보가 아는 빵과 달리 돈으로 지불하거나

사지 않아도 되는 빵입니다.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이사 55,1)

 

예수님은 배고픈 군중에게 일시적이 아니라

영원히 배고픔을 채워주고 정말 살게 하는

힘이 있는 생명의 빵을 주시는 분입니다.

“눈이란 눈이 모두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은 제때에 먹을 것을 주시나이다.

당신은 손을 펼치시어,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은혜로 채워 주시나이다.”(화답송 시편)

 

이 빵의 ‘표징’은 예수님이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아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라고 이르시는데

‘자리 잡다’라는 그리스어 동사는 풀밭 아무데나 옹기종기 앉는 것이 아니라

‘기대어 눕다’라는 뜻으로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이 잔치에서

음식을 먹을 때 갖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요한복음서를 읽는 독자들은

대부분 모세 이야기, 이집트 탈출,

그리고 시나이산 여정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탈출 14-15; 20; 24,4-11) 시나이 계약은 잔치 식사로 이어집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같이 먹고 마심으로써

하느님과 그들이 가족 관계임을 드러냅니다.

예언자들은 신랑인 하느님과 신부인

이스라엘의 영적 혼인으로 이 사건을 해석했습니다.

요한은 복음의 잔치 장면을 통해

예수님이 모든 예언 말씀을 실현하는 메시아이자 신부인

교회와 일치하는 신랑임을 보여줍니다.

 

■ 믿음이란?

 

예수님 잔치의 기반은 한 ‘아이’가

가진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입니다.

‘아이’(파이다리온)라는 말은 ‘종’으로도 옮길 수 있는데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시면서’

그분 몸을 우리에게 내어준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입니다.

 

나아가 이 ‘아이’는 제자들이

따라야 할 믿음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것,

‘아무 것도 아닌’ 것, 그렇지만 아이에게는 전부인 것이

하느님을 위해 더 아름다운 일을 할 수 있는 도구가 됩니다.

 

예수님의 몸은 우리가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게 하는 힘과 일치의 원천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4)

 

믿음은 예수님이 거저 주는

‘생명의 빵’으로 양육되고 성장합니다.

믿음은 오늘 복음의 ‘아이’처럼 우리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때보다 사실은 그것들이 우리에게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내어놓을 때 진정한 부자가 된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체험하는 여정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빵 장수’이며

우리도 그렇게 살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아멘!

 

-임숙희(레지나)-

 

△제주 새미 은총의 동산

 

 

[한주간 전례]

 

2021년 7월 26일 (월)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요아킴 성인과 안나 성녀는

다윗 가문의 유다 지파에서 태어났다.

전승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 성녀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으나, 요아킴 성인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한 뒤 하느님의 섭리로 마리아가 탄생하였다.

안나 성녀에 대한 공경은 6세기부터 동방 교회에서 시작되어

10세기에는 서방 교회에도 널리 퍼졌다.

요아킴 성인에 대한 공경은 훨씬 뒤에 이루어졌다.

 

[복음묵상] 마태오 13,31-35

 

많은 분들이 저에게

‘성소’에 대해서 물어보십니다.

어떻게 신부가 되었는지, 어떤 계기로 사제성소를 택하였는지 …….

그럴 때 저는 늘 대답합니다.

그저 그 물에서 노는 것이 좋았다고 말입니다.

성당에서 노는 것, 그곳의 친구들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들어갔고, 그곳에서도 여전히

어렵고 힘든 일이 있었지만 동료들과 함께 노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렇게 놀다 보니 어느새 개울물은 강물이 되고,

강물은 바다가 되어 있었습니다.

물살에 몸을 맡기고 놀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감당할 수 없는 바다에까지 와 있었습니다.

이것이 저의 성소 이야기입니다.

 

창대한 꿈을 꾸며 많은 것을 이루고자

어떤 일을 시작할 때도 있습니다.

큰 기대를 가지지 않고, 즐겁고 좋아하는 일이라서

시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많은 기대를 걸었던 일은 실망하기 일쑤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거나 즐거운 일을 할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그 일을 하고 있음에 만족하고 즐거워합니다.

씨를 뿌리고 물을 주어 새싹을 틔워 내고

꽃을 피우는 그 일을 즐기면 됩니다.

밀가루 반죽을 만들고 누룩을 넣어

빵을 구워 내는 과정이 행복하면 됩니다.

많은 열매를 맺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맛있는 빵을 만들어

부자가 되겠다는 꿈을 꾸면 실망하거나 좌절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일을 하고 많은 수고와 노력을 기울이지만,

어떤 마음으로 다가가느냐에 따라 천당과 지옥을 오갑니다.

당신이 지금 서 있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그 자리에서 즐겁게 살다 보면 하느님께서 열매를 맺어 주실 것입니다.

 

바다에서는 마음 편히 놀지 못합니다.

해야 할 의무가 있고 책임져야 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마냥 놀기에는 바다라는 곳이 너무도 두렵습니다.

그렇지만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더 멋진 곳으로

저를 이끌어주실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여기에서 놀아 보렵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7월 27일 (화) [녹]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3,36-43

 

코로나 시대에 생긴

‘살고픔’이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무엇을 먹지 못하면 배고픔을 느끼듯

사람들을 만나지 못해서 느끼는 ‘살고픔’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만나 인사 나누고, 서로 안아 주고 눈을 맞추며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해 주는 것을 그리워하는

살고픔의 시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본당 소임을 맡지 않고 있는 사제에게도

신자들에 대한 살고픔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려움과 고민을 공유하고 많은 대화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서,

같은 것을 보고 살아간다는 기쁨과 위로를 그

리워하는 마음이 바로 신자들에 대한 살고픔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신자들에게 사제는 어려운 사람입니다.

친해지고 싶지만 언제나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존재지요.

그것은 존경의 의미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자신의 존재가 초라하게 느껴져

다가가지 못하기도 합니다.

또한 늘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접근 자체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교회 내 봉사 등 어떠한 계기로 만남이 잦아지고,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사제에 대한 거리감은 점차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 주위에도 늘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고,

그분의 말씀에 힘과 권위가 있어 일반 사람들은

그분께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였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려고 해도 쉽게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뵐 수도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밭의 가라지에 대한

비유 말씀을 설명해 달라고 거리낌 없이 예수님께 청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 일이

제자들에게는 일상과도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나 그분 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이야기하고

더 많이 그분을 알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더 많이 묻게 되고

더 자연스러워지고 더 친근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더 가까이에서 만나려고 구약에서 성막을 만든 것처럼,

거룩하신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하늘을 찌를 듯

높다하더라도, 우리의 삶 가까이에서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그분을 알게 되고 친근해집니다.

 

예수님에 대한 살고픔을 가지십시오.

늘 그분 가까이에서 그분과 함께 지내십시오.

더 많이 묻고 더 많이 알아가고 그래서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더 많은 것을 예수님에게서 받을 것입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7월 28일 (수) [녹] 연중 제17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3,44-46

 

저는 평소에

투신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몸을 내던지는 삶을 무모하다고,

위험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누군가는 그렇게 몸을 내던져 봤자 돌아오는 것은

실망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저는 투신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또한 어떻게 투신하며 살아야 할지 매번 고민합니다.

 

하늘 나라는 투신의 삶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비유를 통해서 이야기하십니다.

가진 것을 다 파는 모험과 위험을 감수하는 삶,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삶을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우리는 보물의 가치는 알지만

밭의 가치는 모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보물을 얻으려고 평생을 찾아 헤매면서도,

보물이 숨겨진 밭의 가치가 너무나 보잘것없기에,

또는 너무나 두렵고 위험한 것이기에,

너무 힘들고 아픈 것이기에,

그 밭을 위하여 온 몸을 던지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평생 진주를 찾아다니는 상인은 많은 곳을 찾아 헤매는

고통과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멸시를 감수해야 진주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녀야 하며,

좋은 진주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연구하는 노고를 감수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주 상인에게 주어진 밭의 모습일 것입니다.

하늘 나라를 발견하려면 우리는 그러한 아픔과

고통, 수고와 두려움을 감수해야 합니다.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시는’(마태 14,22-33 참조)

예수님의 목소리에 베드로는 물 위로 자신을 내던집니다.

물 위를 걸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 물에 빠지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풍랑 때문에 놀라고 두려운 마음인 채로 물에 뛰어듭니다.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거기 계셨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투신, 곧 자신을 내던질 수 있었습니다.

 

투신의 삶을 위해서

두려움을 이겨 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불확실에서 기인한 두려움과 의심은

우리에게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두려움과 의심을 이겨 낼 수 있는 것은 믿음뿐입니다.

낭떠러지에서 몸을 내던져도 우리를 받아 안아 주실

예수님께서 계시다는 믿음,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용기와 힘을 주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걸어가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내어 맡기십시오. 두려움 속에서도 투신하십시오.

하늘 나라를 위하여, 예수님의 가치를 위하여,

사랑을 위하여 투신하십시오. 여러분의 그 삶을 응원합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7월 29일 (목) [백]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마르타와 마리아와

라자로는 형제간으로,

예루살렘과 가까운 베타니아에서 살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열렬히 환대하였으며,

마르타는 정성껏 시중을 들고,

마리아는 그분의 말씀을 경건하게 들었다.

그들을 특별히 사랑하신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셨고,

그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셨다.

본디 7월 29일, 오늘은 성녀 마르타 기념일이었으나,

올해부터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로 변경되었다

-(교황청 경신성사성, 2021년 1월 21일 교령).-

 

[복음묵상] 요한 11,19-27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습니다.

하지 않을 수도 없고,

하기 싫다고 도망갈 수도 없습니다.

반면에 하고 싶은 일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하고 싶은 일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해야만 하는 일이 행복하지 않을 때

우리의 삶은 지옥과 같이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일과해야 하는 일이 달라도

지옥이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해야 하는 일을 묵묵히 참아 내며 견디는 가운데

그 나름의 의미와 행복, 재미를 찾아낼 때입니다.

 

오늘은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입니다.

요한 복음은 라자로의 죽음에 관한 예수님과

마르타의 대화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이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복음 대신오늘 선택할 수 있는 루카 복음은

두 성녀의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을 사랑하는

다양한 방법을 보여 줍니다.

 

루카 복음에서 마르타는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해야 하는 일이 있기에 하지 못하고,

불평과 불만이 쌓입니다.

동생 마리아를 보니,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것 같아 보여 속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마르타가 하고 싶었던 일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보고, 그분의 말씀을 더 듣고,

그분께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마르타도 충분히 자신이 바라던 일,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하고 싶고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은 생각에 늘 남과 비교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의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현재의 삶을 지옥으로 만듭니다.

예수님의 협조자로, 교회의 협조자로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분명히 하고 싶은 일이 있을 것이고 바라는 점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소임과 역할이

부담과 짐으로 다가올 때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왜 이 일을 시작하였는지,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가르침대로 살고자

이 일을 시작하지는 않았는지,

또한 지금 이 일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는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여러분은 많은 것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음을 기억하고

현재의 일에 최선을 다하였으면 합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7월 30일 (금) [녹]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3,54-58

 

우리는 모두 예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국어사전의 정의와는 차이가 있지만,

예언자는 미래의 일을

미리 알려 주는 사람(미리 예: 豫)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고(맡길 예: 預)

그 뜻에 따라 살아가면서 그것이

행복임을 주위에 보여 주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로서 살아가려면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과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만나려고 기도하고 성사 생활을 하며,

이를 추억하고 점차 깊은 관계를 맺어 갑니다.

성경과 교리의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의 방법과

하느님의 뜻을 깨달으려고 노력합니다.

이처럼 예언자로서 하느님과 만나고

그분의 뜻을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예언 직무를 완성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언자는 현실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지금 이 시대에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적용하고

설명해야 할지를 정확하게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특히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문제들을

바르게 지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의함과 불공정, 인권 침해와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오만함을 용기 있게 지적해야 합니다.

이 일은 예언자로서 선택이 아닌 의무입니다.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특히 사제로서 예언자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첫 번째 역할만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도와 성사 생활만 열심히 하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는 일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제는 예언자로서 세상의 정의와 공정,

평화와 평등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때로는 시대에 대한 비판과 쓴 소리를 해야 하고,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외면하며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언자로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시대의 징표를 바라보고, 그 징표를 하느님의 뜻과

가치로 해석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자신의 이익 때문에,

자신의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느님의 뜻을 멀리하고 외면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자신의 안위만을 바라보는, 그래서 마침내 예수님을 외면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나자렛 사람들이며 유다인들 입니다.

때로는 고향 사람들이나 친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면서도

“예.”가 아닌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예언자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7월 31일 (토) [백]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은

1491년 스페인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군인이 된 그는 전쟁에서 입은 부상을 치료받다가

현세의 허무함을 깨닫고 깊은 신앙 체험을 하였다.

늦은 나이에 신학공부를 시작한 이냐시오는

마흔여섯 살에 사제가 되었고, 이후 동료들과 함께

예수회를 설립하여 오랫동안 총장을 맡았다.

그는 『영신 수련』 등 많은 저술과

교육으로 사도직을 수행하였으며,

교회개혁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1556년 로마에서 선종하였고, 1622년에 시성되었다.

 

[복음묵상] 마태오 13,24-30

 

모든 사람의 생각이

내 생각과 같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생각 가운데 언제나

내 생각이 옳은 것은 아님을

인정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많은 사람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그 의견들을 절충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서로 자신의 생각만을 주장하다 보면 다툼도 있고,

공동체에 분열도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양보하고 한 발 물러서서 서로 타협하고

절충점을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만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하는 모습입니다.

 

타협은 그렇게 각자의 것을

내어놓는 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타협하지 말아야 할 것도 있습니다.

절대 양보하지도, 물러서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지요.

바로 하느님의 뜻이며 예수님의 가치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는 타협하는 헤로데 임금과

타협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이 등장합니다.

인륜과 가족에 대한 사랑 앞에서 헤로데는 타협합니다.

또한 요한의 목숨 앞에서 자신의 체면과 자존심,

힘과 권력에 타협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말씀과 가치, 신념과 믿음 앞에서

자신에 대한 사랑과 세상의 가치와 타협합니다.

그렇지만 세례자 요한은 결코 타협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목숨과 타협하지 않았고

국가의 절대 권력이나 무력과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인기나 부와 명예와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나

다른 이들의 말을 경청하고

나와 다른 생각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오만과 독선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각을 양보하고 절충하면서 타협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만은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통 앞에 중립이 없듯이 가장 가난하고

가장 아파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권력, 돈과 경제적 원리 앞에서

하느님의 뜻을 양보하고 타협할 수 없습니다.

지금 무엇인가에 타협하고 있습니까?

스스로에게 “이 정도는 괜찮아!”라고 말하면서

타협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았으면 합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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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의 확산세가

꺽이지 않는 형국입니다.

벌써 2년째 겪는 상황인지라

이제는 어느 정도 둔감해진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도 이웃을 위한 마음가짐이 앞서야 할 때입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