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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6월 27(일) [녹] 연중 제13주일, 교황주일

Berardus 2021. 6. 26. 06:03

[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6월 27(일)

[녹] 연중 제13주일, 교황주일

제1독서(지혜 1,13-15;2,23-24)

제2독서(2코린 8,7.9.13-15)

복음 (마르 5,21-43)

예수님과의 친교로 질병과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난 두 여인 이야기
참된 믿음이란 하느님을 갈망하며 모든 것을 쏟아내고 기도하는 것
절제하고 인내하는 삶을 살며 신앙 공동체로 돌아가 소명 완성해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나태주, 풀꽃)

예수 성심 성월 마지막 주일에

예수님 마음을 더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고,

느끼길 바라며 말씀 묵상을 시작합니다.

벌써 2021년 절반이 지났는데 남은 반년은 말씀을 경청하면서

희미해진 올해 목표를 되새기고,

그리스도인 제자의 길을 충실히 갈 수 있기를,

신적이면서 인간적인 예수님의 사랑,

그분에 대한 ‘믿음’이 마음 안에서 서서히 성장하기를 청합니다.

■ 복음의 맥락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

기원후 60년대 중반

마르코의 청중은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부인하고 살아남을 것인가,

콜로세움에서 사자에게 먹혀 죽을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마르코복음서의 전체적인 요점은

마르코의 청중에게 고통과 죽음은

생명으로 이끈다는 확신을 갖게 하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을 만나 생명을 찾게 된 두 여자가 등장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여성들은 항상

예수님의 정체를 이해하는데 굼뜬 제자들에게 믿음(5,34), 통찰(7,29),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알고 준비하는 신심(14,3-9),

십자가 밑을 지키는 충실함(15,40-41)의 모델로 등장합니다.

■ 여성과 예수님의 만남

오늘 복음에 나오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 이야기와

하혈하는 부인 이야기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느님 자비의 은혜를 받는 두 사람 모두 여성입니다.

또 두 사람은 열둘이라는 숫자로 결합됩니다.

한 사람은 율법에서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병으로 인해,

한 사람은 죽음으로 인해 사람들에게서 소외되고 고립된 처지입니다.

두 이야기를 연결하는 것은 ‘믿다’, ‘구원하다’, ‘만지다’라는 동사인데

예수님과의 친교는 우리의 치명적인 질병과 죽음을 물리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두 이야기 중에 하혈병에 걸린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에 집중합니다.

예수님은 하혈병으로 고통받는 부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라고 말합니다.

12년이나 병을 앓았다면

그 부인이 예수님보다 나이가 많을지도 모르는데,

그 성인에게 ‘딸’이라고 부르는 것이 깊은 감동을 줍니다.

그 부인은 사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 ‘딸’입니다.

예수님이 그녀를 치유해 새롭게 태어나게 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두 번 태어납니다. 부모에게서 태어났을 때,

그리고 자신의 소명을 깨달았을 때입니다.

이제 치유된 여성은 공동체 안에서 정말 하느님 모상을 보여주는

하느님 딸로서 자신의 소명을 살아갈 것입니다.

‘하느님 딸’은 자기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본질적 칭호이자 우여곡절을 겪는 인생 안에서

일관성 있게 살아내야 할 소명이기도 합니다.

하혈병에 걸린 부인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를 창조하고

사랑하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압니다.

알고는 있는데 그분께 다가가지도 않고 청하지도 않습니다.

자녀가 아니라 이방인으로,

하느님 집을 향한 순례자가 아니라

구경꾼으로 살아가는데 만족합니다.

온갖 보화가 가득 찬 선물 바구니를 들고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는데

외면하는 자녀와 같은 우리에게 하혈병이 걸린 부인은

참 믿음이 무엇인지 가르칩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에 대해 말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갈망하는 것, 다가가는 것,

용기를 무릅쓰는 것, 손을 뻗는 것, 대화하는 것, 청하는 것입니다.

“저의 아버지, 지금 저를 도와주세요.

저는 이런 저런 고질병에서 해방되기를,

저의 원래 모습인 하느님 딸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모든 구원의 첫 단계는 ‘원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모두 ‘원한다’ 또는 ‘원하지 않는다’라는 단어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매일 의도적으로 이 단어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할 것입니다.

‘나는 오늘 무엇을 원하는가? 내가 오늘 원하는 것은 나의 구원을 위한 것인가?’

‘구원’이라는 말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여인의 건강을 회복시킵니다.

그리고 사회적, 종교적 차별에서 여인을 해방시킵니다.

나아가 여인의 두려움, 낙담, 좌절을 무력화하고

그녀의 마음에 새겨진 희망을 깨닫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제는 그녀가

몰래 숨어서 행동하지 않아도 되도록

그녀를 공동체로 돌아가게 합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자녀들의 믿음을 양육하고 성장시키고

각자의 소명을 잘 완성하도록 가르치는 ‘하느님의 집’입니다.

“진정한 치유는 손상된 것을 고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최선의 역량을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미국 심리학자, 윌리엄 허버트 셀던)

■ 믿음과 덕의 사다리

종종 사람들은

“믿음으로 무엇을 할 수 있나요?”라고 질문합니다.

믿음이 실제로 생계 문제를 해결하거나 공동체와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시각이 그 안에 담겨있습니다.

믿음은 선물이지만

계속 물을 주고 길러야 할 화초 같습니다.

평소에 물을 주지 않은 믿음은 시련의 기근이 올 때 말라버리기 쉽습니다.

초세기말 베드로 후서의 저자는 하느님 본향을 향해

이 세상에서 순례 중인 신자들에게 믿음은 온갖 덕의 으뜸인

‘사랑’에 도달하는 사다리의 출발점이라고 가르칩니다.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2베드 1,5-7)

예수 성심 성월, 하느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열기로 우리의 지친 마음이 힘을 얻기를 원합니다.

삶의 목표가 분명해지기를, 덕의 사다리를 충실하게 올라가기를,

그래서 6월 햇볕의 열기로 달콤하게 무르익어가는

블루베리 열매처럼 삶 안에서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회당장의 딸에게

한 말씀으로 매일 우리를 깨웁니다.

“탈리타 쿰!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매일 예수님 말씀을 듣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내어놓는 사람은

복잡한 일상 안에서도 평화를 맛볼 것이고,

눈을 뜨고 걸으면서 정말 살 것입니다. 아멘!

-임숙희(레지나-

△제주 새미 은총의 동산


[한주간 전례]

2021년 6월 28일 (월) [홍]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레네오 성인은 130년 무렵 소아시아의

스미르나(오늘날 터키의 이즈미르)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공부한 그는 프랑스 리옹에서 사제품을 받고,

뒤에 그곳의 주교가 되었다.

이레네오 주교는 특히 프랑스의 영지주의의 오류를 거슬러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는 일에 많은 힘을 쏟았다.
2세기 교회의 중요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동한 그는,

영지주의 이단의 오류를 낱낱이 지적한 「이단 논박」이라는 유명한 저서를 남겼다.
성인은 200 년 무렵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복음묵상] 마태오 8,18-22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열 명도 없었습니다.

의로운 사람 열 명만 있었다면 그곳은 비록

죄악이 가득했지만 구원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열 명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을 상대로 흥정합니다.

의인 쉰 명에서 시작해서 깎고 깎은 끝에

의인 열 명으로 하느님과 합의를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결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소돔은 말 그대로 파멸됩니다. 의인 단 열 명이 소돔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 성경 전체에서

의인으로 지칭된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그 수가 제법 적지 않으리라 생각되겠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구약 성경에서 의인으로 지칭된 사람은

노아, 다니엘, 그리고 욥, 단 세 사람뿐입니다.

놀랍지 않은가요? 구약의 수천 년 역사 가운데 단 세 명만이

그 이름이 언급되면서 ‘의인’이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이제 다시 질문을 던져 봅니다.

죄악이 가득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 명은 적은 수였을까요?

아니면 많은 수였을까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드라마인

구약 성경 전체에서 단 세 명만이 의인이라고 불렸던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죄악이 가득한 도성 소돔과 고모라에서 의인 열 명은 매우 많은 수였습니다.

어쩌면 그곳에는 의인이 한 명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지나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그토록 죄로 가득한 도성에도 기회를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분께서는 의인을 외면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세상에 의인은 얼마나 될까요?

열 명의 수가 많게 느껴집니다.

오늘도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나부터 의로움으로 나아가는 걸음을 내딛어 보면 어떨까요?

그 발걸음은 나와 우리 공동체를 구원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6월 29일 (화)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베드로 사도는 이스라엘 갈릴래아 호수에 인접한

벳사이다 출신으로 본이름은 시몬이다.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어부 생활을 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베드로(반석)로 바꾸시고,

그를 사도단의 으뜸으로 삼으셨다. 복음서에 소개되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은 소박하고 단순하다.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하여 칭찬받기도 하고,

예수님의 수난을 반대하다가 심한 꾸중을 듣기도 하였다.
로마 교회의 첫 주교로서 첫 번째 교황이기도 한 베드로 사도는,

67년 무렵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였다.

바오로 사도는 열두 제자와는 달리,

비교적 늦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열성적으로 박해하던 사람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려고 다마스쿠스로 가던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뒤 유다교에서 개종하여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들이 사는 여러 지역에 교회를 세웠다.

그 공동체들에 보낸 많은 서간이 오늘날 『성경』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67년 무렵 로마에서 참수되었다.

[복음묵상] 마태오 16,13-19

교회 공동체는 완전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닌,

완전한 사람들의 공동체를 향하여 나아가는

지상 여정의 순례자들의 모임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오늘 축일의 주인공인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모습에서 잘 드러납니다.

베드로 사도는 명문가의 자제도

이른바 잘나가는 사람도 아닌 그저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습니다.

그런 그가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는 예수님의 신원을 정확하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는 결정적 순간에 예수님을 모른다며

두려움 속에서 주님께서 가신 십자가 길을 멀리서 바라보았고,

주님께서 돌아가신 뒤에도 숨어서 지냈습니다.

그런 그가 교회의 반석이 되어 하늘 나라의 열쇠를 관리합니다.

그럼 바오로 사도는 어떠하였나요?

그는 베드로 사도와는 달리 명문가 출신으로

율법의 가르침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정면으로 반대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선동가며 하느님에 관한

가르침을 어지럽히는 불순분자였을 뿐입니다.

그런 그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주님을 박해하는 사람에서 주님을 선포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그렇게 베드로와 바오로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 속에서 교회는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 두 사도를 이끌어 주지 않으셨다면,

그 둘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갔을 것이고

우리는 누구도 그들을 기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완전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완성된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가 변화되었듯이,

우리 자신도 우리가 만나는 공동체의 구성원도

하느님의 이끄심 안에서 변화될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들의 뜻과 계획이 아닌 주님의 뜻에 따라

완전하고 완성된 공동체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6월 30일 (수) [녹]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8,28-34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하가르와

그 아들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졸라 대자

하느님께서는 사라의 부탁을 들어주라 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느님 말씀대로 행동합니다.

그 결과 하가르와 이스마엘은 집에서 쫓겨납니다.

그들을 생각하면 하느님과 사라가 너무 냉정해 보입니다.

그 냉정함은 호칭에서 드러납니다.

사라는 “저 여종과 그 아들”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녀에게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들도 아니고

그저 여종의 아들일 뿐입니다

. 하느님께서도 이스마엘을 ‘네(아브라함) 아들’이 아니라

“그 아이”라고 부르십니다. 이에 이런 질문을 던져 봅니다.

하느님과 사라에게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아들이기는 한 것일까요?

창세기의 저자는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이름이 바뀌기 전에

태어났음에 주목합니다.

하느님과 계약을 맺기 이전, 아브라함의 이름은 ‘아브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마엘은 ‘아브람’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이사악은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그가 새로운 이름을 얻은 뒤에 얻게 된 아들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상속을 약속받은 인물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사악입니다(창세 17,19 참조).

오늘 독서는 가족 간의 갈등을 전해 주는 냉정한 가족사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 약속이 바탕이 된 상속에 위협이 되는 상황을

하느님께서 해결하시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바로 구원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께 항변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시냐고,

계시기는 한 것이냐며,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처지이고 우리의 생각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계획은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외아드님의 죽음으로 완성됩니다.

지금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는 그분의 계획이 잘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감추어진 하느님의 의도가 있음을 믿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7월 1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9,1-8

작년 한 해는 코로나19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미사도, 성사도, 다른 이와의 만남도 모두 조심스럽고 위험한 때였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아졌습니다.

방역 단계가 낮아져 무엇인가를 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이제는 해야만 하는 일마저도 귀찮아져 버렸습니다.

살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는 많습니다.

게으름과 귀찮음, 나약함 때문이거나,

실패할까 두려워하는 경계심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 보았자 결과는 같다고 생각하며 먼저 포기하고

절망해 버리는 패배감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때때로 우리는 여러 핑계로 움직이지도

나아가지도 않고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려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중풍 병자는

온몸이 마비되어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평상에 누워 있을 뿐입니다.

아무런 희망도 열정도 없이 그저 누워 있습니다.

그런 그를 위하여 주위의 다른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합니다.

평상을 들고 예수님께 다가갔고 병자를 대신하여 예수님께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에게 희망과 열정을 보여 주십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두려움과 패배감은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한,

자신이 더 피곤해지지 않기 위한 욕심입니다.

자신이 죄를 지을까 염려하여 병자들을 멀리하였던

바리사이의 죄와 같을 것입니다.

나태함, 두려움, 절망과 포기 속에서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일어나 걸어가는 것’,

그것이 죄에서 해방되는 또 하나의 발걸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십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와 함께 내가 걸어 주겠다. 함께 일어나 가자.”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7월 2일 (금) [녹]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9,9-13

하루를 살아가며 수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들을 전부 알지는 못합니다.

현대인들은 많은 경우에 자신이 가진 간단한 정보로

타인을 받아들이고 판단합니다.

그가 어디 출신이며 어떤 일을 하는지, 나이는 어떻게 되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느 학교에 전공은 무엇인지 등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또한 그 사람이 어디에서 살고 생활 환경이 어떠한지,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는지에 따라 미리 그를 판단합니다.

누군가를 깊이 알아 가며 인격적인 만남을 바라기보다는,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만남을 이어갑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도

그러한 시선으로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고 만납니다.

바리사이들은 세리인 마태오를,

민족을 배신하고 돈만을 쫓아 살아가는 파렴치한으로 판단합니다.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 또한 죄인이며 배신자로 결론 내립니다.

그러한 선입관에 사로잡힌 바리사이들은 세리와 죄인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조차도 그들과 같은 부류로 판단해 버립니다.

그들의 선입관에는 자신은 깨끗하고 의인이라는 자만심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도, 마태오도,

그리고 다른 세리와 죄인도 진정으로 만나지 못합니다.

그 선입관과 자신의 욕심 때문에 그들에게 다가가지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지도, 그리고 그들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서슴없이 마태오에게 다가가시어 그와 함께하십니다.

색안경 너머로 보이는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그들을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그들 각자의 가난함에 함께 자리하십니다.

슬픔과 두려움, 고민과 갈등에 휩싸인,

그리고 병들어 있는 그들의 아픔에 다가가십니다.

그것이 그분의 자비이며,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어떻게 만나고 있습니까?

그가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로 그를 쉽게 판단하고

그가 나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를 따져 가며

그와 함께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만남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7월 3일 (토) [홍] 성 토마스 사도 축일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쌍둥이’라고도 불렸다(요한 20,24 참조).
갈릴래아 출신의 어부였던 그는 매우 강직한 제자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해치려고 했던 베타니아 마을로 가시려 하자

이를 만류하던 다른 제자들과 달리,

토마스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요한 11,16) 하고 큰 용기를 보여 주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지 못한 토마스는 불신하는 모습도 보였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자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하고 고백하였다.

토마스 사도는 인도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복음묵상] 마태오 8,5-17

성체 분배를 하다 보면

신자의 얼굴보다는 손을 더 많이 보게 됩니다.

때때로 여기저기 갈라진 틈 사이로 기름 때인지

흙먼지인지 모를 노동의 흔적이 남아 있는 손을 발견하고는 합니다.

험하게 살아 온 세월의 흔적을 보여 주듯 손가락의 한 마디가 없는 손도 있고,

손바닥에 굳은살이 붙어 나무껍질 같아 보이는 손도 있습니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직접 대화하지 않아도 그가 얼마나 힘들고 고단하게,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 왔는지를 느끼게 해 주는 손입니다.

성체를 건네는 사제의 손을 숙연하고 미안하게 만드는 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손과 손이 만납니다.

한 손은 십자가의 상처가 남아 있는 손입니다.

뚫린 못 자국의 아픔과 핏자국이 아직 가시지 않은 손이지만,

괜찮다며 먼저 내밀어 주는 손입니다.

또 하나의 손은 확신을 바라는 손입니다.

또다시 실패할까 두려워 믿고 의지하지 못하는 손이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손입니다.

자신의 손짓 하나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오만과 자만의

손이며, 타인의 말과 감정을 듣지도

함께하지도 못하는 매정하고 비정한 손입니다.

그러한 두 손이 만납니다.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손가락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상처 입고 구멍 뚫린 손에 가 닿습니다.

그 한 번의 만남을 통하여

토마스가 모든 것을 깨달을 수는 없었겠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상처의 아픔이,

그 십자가 죽음의 고통이 바로 자신 때문이었음을 말입니다.

이 두 손의 만남은 어쩌면 공감의 마음일 것이고,

어쩌면 외면에 대한 미안함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아 보십시오.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느낌을 통하여

그의 지나온 삶에 공감하고,

조금은 미안함이 깃든 사랑을 만나 보셨으면 합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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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이 시작되는 주간입니다.
한수산 작가님과의 북 콘서트에서
"인생은 짧지만 하루는 길다" 라는 말씀이
무척이나 공감가는 요즘입니다.
아직 반이나 남은 올 해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