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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6월 6(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Berardus 2021. 6. 5. 07:41

[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6월 6(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제1독서(탈출 24,3-8)

제2독서(히브 9,11-15)

복음(마르 14,12-16.22-26)

 

사람에게 생명 주시는 살아있는 빵이여, 믿나이다!

 

항상 순수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어린아이처럼

예수님 따르면 그것이 주님을 기쁘게 하는 일

작은 빵조각으로 우리 안에 오신 하느님 사랑에 깊이 젖어들길

새벽, 예수님 마음에

가장 깊이 자리했을 인물들이 떠올랐습니다.

아마도 어머니 성모님을 향한 감사가 첫 자리를 차지할 테고

당신을 끝까지 따랐던 제자들과

순교자들을 향한 사랑이 그득 고여 있을듯했는데요.

물론 일상에서 사랑을 살려고 애쓰는 우리를 향한

어여쁨도 때마다 깃들 것이라 싶더군요.

언뜻 요셉 성인을 향한 예수님의 심정이 마음을 적셨는데요.

요셉 성인의 헌신이야말로 예수님의 마음에

은혜로 각인되어 있을 것이라 짚어졌던 겁니다.

때문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올해를 요셉 성인의 해로 반포하시며

그 감사의 마음을 이심전심 느끼도록

해주신 것이라 싶어 은혜로웠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성심을 기억하면

고통을 떠올리지만 예수님의 마음에는 고통을 넘어선

기쁨과 감사가 훨씬 더 크게 자리했을 것임을 이제야 깨닫다니,

송구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주님의 성심을 떠올리면

으레고통받으심에 집중하느라 생각도 말도 행동도 조심조심…,

‘죄인의 자세’를 견지하려 애쓰는 우리 모습을

안타까워하실 것도 같았습니다.

예수성심을 위로한답시고 으레 ‘우울모드’를 장착하는 건

오히려 그분을불편하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당신 앞에서 쩔쩔매는

종으로 여기지 않으시며 당신의 형제로 받아들이고

벗이라 칭하시니 말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늘 고통에 시달리며슬픔으로

점철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성경에서도 분명히 일러주니 말입니다.

“나는 날마다 그분께 즐거움이었고

언제나 그분 앞에서 뛰놀았다.”(잠언 8,30)

 

예수성심을 묵상하는 마음에

매일 봉헌되는 미사를 통해서 은총을 쏟아 주시며

기뻐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겹쳐왔습니다.

미사를 거행하며 당신의 희생을 재현하는

사제의 행복이 차올랐습니다.

예수님의 천국생활이 얼마든지 기쁘고 신나고

유쾌하리라는 걸 어찌 몰랐을까요?

 

두어 달 전, 어느 책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골치 아픈 일이 생기면

그 걱정거리를 메모해서 ‘잠자는 요셉상’ 밑에 끼워두고

주무시면 다 해결해주시더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이 기쁜 얘기를 교우분들께당장 소문냈는데요.

일단 불면증에 시달리는 분들께 ‘특효’라며

시골 약장수처럼 장담도 했지요.

며칠 후부터 진짜로!

오랜만에 단잠을 잤다는 증언이 들려왔습니다.

신기했고 ‘역시, 우리 요셉 성인님!’ 싶더군요.

 

오랜 불면증으로

수면제가 필수였다는 자매님은

요셉 성인을 모신 후부터 약을

1/3로 줄여도 효과가 좋더랍니다.

불안한 마음에 약을 완전히 끊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냐며 놀라워하시더군요.

그런데압권은 네 살 난 손주 녀석의 이야기였습니다.

잠에서 깰 때마다 꿈에 괴물을 봤다며

무서워하던 아이에게 ‘잠자는 요셉상’을

잠을 잘 자게 해주시는 ‘요셉 할아버지’라고 소개하며 선물했답니다.

아이는 “그럼 꿈에 나오는 괴물도 물리쳐주겠네요”라면서

손에 요셉 할아버지를 꼭 쥐고 잠자리에 들었다는데요.

깨어나서는 외치듯 소리치더랍니다.

“꿈에 괴물이 나왔는데 할아버지가 무찔렀어요!

그래서 하나도 안무서웠어요!”

이제는 잠자리에 들 때엔 으레 요셉 할아버지를 챙긴다니,

얼마나 어여쁜 믿음인지요!

그 얘기를 들으며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스쳤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우리에게 어린아이처럼 당신을 따르라하셨는지,

‘어린아이처럼’ 믿는 것. ‘어린아이처럼’ 의탁하는 것,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것만큼 주님을

행복하게 해드리는 건 없다는 진리를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믿는다면서도 수면제를포기하지 못하는

어른의 계략과 무조건 믿고 받아들이는 아이의 순수함….

 

어른이 된 우리는

수없이 계산하며 살아갑니다.

때문에 세상에서 비신자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모습을 살기도 합니다.

이야말로 그분을 모신 거룩한 모습을 다만

‘교회용’으로 간직하고 ‘전례용’으로만사용하는

어리석고 못난 행태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습니다.

이 모자란 믿음이 예수님의 마음에 상처를 낸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그렇습니다.

무엇이 사랑인지,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지,

무엇이 주님을 기쁘게 하는지를 알면서도 행하지 않으니,

반쪽 믿음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이 딱한 ‘어른’들을 사랑하십니다.

때문에 미사를 통해서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요한 17,23) 해주시기를간청하고 소원하십니다.

제발 하느님 아버지 안에서 일치하기를 꿈꾸십니다.

 

그러기에 미사는 하느님 사랑의 최고봉입니다.

삼위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바쳐 이루신 최대의 걸작입니다.

성체성사가 세상을 이기는 힘을 제공하는 생명의 원천인 까닭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작은 빵조각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함께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깊이 젖어들기 바랍니다.

하느님 자녀의 자긍심으로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삶을살기 바랍니다.

“알파요 오메가이고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시작이며 마침”(묵시 22,13) 이신 예수성심께

어린이처럼 의탁함으로 이 땅에서부터

천국의 행복을 누리기 바랍니다.

단순하고 천진한 믿음으로 늘승리하시길,

온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장재봉 신부-

 

▲제주 황사평성지

 

 

 

[한주간 전례]

 

2021년 6월 7일 (월) [녹]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1-12ㄴ

 

부모에게는 자녀의 성공이,

공부하는 학생에게는 좋은 성적이,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에게는 합격이,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승진과 높은 연봉이

행복의 지표라고 여겨질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동의할 수 있으신가요?

 

예수님의 가르침과

내가 살아오면서 가졌던 생각이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

, 오히려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으신지요?

또한 예수님께서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는 이들이 받게 될 상은,

자녀를뒷바라지하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시험을 준비하며,

직장에서 열심히 일해서 얻고자 하는 것들과는

굉장한 거리가 있습니다.

하늘 나라가 나의 것이라고 행복한가요?

자비를 입어 행복한가요?

하느님을 뵐것이라는 게 행복으로 다가오나요?

내가 하느님의 자녀로 불린다는 것이 나에게 행복감을 주나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이처럼 내가 세상에서 바라는 것들을 얻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모습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제법 거리가 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이미 하늘나라를 향하여 있지만,

우리의 시선은 우리를 둘러싼 주변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준으로만 바라보았던 세상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시선 밖에 하느님께서 계시고

하늘 나라가 있다는 것을깨닫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6월 8일 (화) [녹]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13-16

 

성경 전체에서

“세상의 빛”이라는 표현은 단 네 번 등장합니다

. 첫 번째는 오늘 복음인 마태오 복음에 등장하고(마태 5,14),

나머지 세 번은 모두 요한 복음에서 등장합니다(요한 8,12; 9,5;11,9).

두 복음서의 차이는 ‘누가 세상의 빛이냐’ 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9,5).

반면에 마태오 복음에서는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복음서 모두 틀리거나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빛은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빛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해 준

세상의 빛으로 지칭된 “너희”는 어떤 사람들인가요?

마태오 복음은 앞서 빛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여기서 빛은 의심의 여지 없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너희”는 바로 어둠 속에서예수님을 빛으로 체험한 사람들로,

그들이 세상의 빛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빛으로 체험한 사람들,

그들이 빛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둠이 짙게 물든 우리의 삶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때로 빛보다 어둠을 선호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어둠이 눈에 익어

빛이 필요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으면좋겠습니다.

예수님을 빛으로 바라보았던 사람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예수님을 체험하였기에 이미 빛을 보았습니다.

나를 둘러싼 어둠에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어둠이 있기에 우리는 빛이신 예수님을 볼수 있게 됩니다.

 

오늘 미사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빛으로 오시고 그 빛을 나누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빛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어둠에 있는 우리가 내 마음 깊은 곳의 어둠을 발견할 때,

더 밝고 환하게 빛이신주님을 맞이할 수 있고,

동시에 우리가 그 빛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6월 9일 (수) [녹]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17-19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행보는

율법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른바 튀는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상 거리를 두고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는

부정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꺼리지 않으셨고(마태 8,1-4 참조),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도 많이 하셨기 때문입니다(마태 12,1-14 참조).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율법을 목숨처럼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율법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으로비추어지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행위가,

율법의 폐지가 아닌 완성을 위한 것임을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참된 가르침과 본질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니다.

 

‘율법’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떠한 생각이 먼저 떠오르시나요?

무엇인가 딱딱하고 융통성이 없다는 인상이 먼저 떠오를 것입니다.

특히 신앙의 의무를 강조하고 그것을 지키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율

법주의적이라는 부정적 감정은 우리에게 더욱 크게 다가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에게는 여러 가지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의무를 지키지 못하였을 때,

이것을 죄라고 부르면서 고해성사를 통해서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그런데 고해소에서 듣게 되는 죄의 양상은 아주 단순합니다.

세상에 죄는 단 두 가지, ‘주일을 지키지 못한 죄’와 ‘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만 있는 것 같습니다.

 

형식적으로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예수님께서 완성하고자 하셨던

율법과 예언서의 가르침일까요? 물론 아니겠지요.

주일의 의무를 지키지 못한 것만을 우리가 죄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율법주의적 사고에 빠지는것입니다.

구약의 안식일을 ‘주일’로 완성하신

예수님의 참된 가르침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율법을 부과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그저 의무라서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을 마련해 주신

그분의 가르침이기 때문임을 기억해 보면 어떨까요?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6월 10일 (목) [녹]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20ㄴ-26

 

한번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과 비교된다면 어떨까요?

우리의 의로움이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대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들은율법에 기록된 것들은 형식적이라 하더라도

착실하게 지키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우리의 의로움이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못하면

우리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사실에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좌절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의로움은 계명 그 자체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로움이 커지는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단순하게 살인하면 안 된다는 계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형제들에게 성을내지 말아야 합니다.

욕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물 봉헌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물을 봉헌하는 사람의 마음가짐,

이웃들과의 관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의로움을 실천하는구체적 방법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 말씀을 따라 지키면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이것 또한 쉽지 않습니다.

형제와 이웃들을 향해서 욕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고,

성당에서 예물과우리의 마음을 봉헌하면서도

원한 품은 사람들과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럼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 아닐까요?

우리의 의로움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보다 부족한 것일까요?

그래서 우리에게하늘 나라는 도달할 수 없는 장소일까요?

 

지금 우리의 의로움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보다 부족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대로,

우리의 시선을 계명 그 자체가 아닌

우리 주변의 형제들에게 두어야 한다는사실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6월 11일 (금) [백]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이다.

이 대축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내는데,

예수성심이 성체성사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중세 때 시작하여 점차 보편화되었다.

1856년 비오 9세 교황 때 교회의 전례력에 도입되었으며,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해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 성화의 날’을 지내고 있다.

이날은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또한 교회의 모든 사람이 사제직의 존귀함을 깨닫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날이기도하다.

 

[복음묵상] 요한 19,31-37

 

구약 성경은 우리에게

무서운 하느님을 소개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백성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며

그들에게 수시로 벌을 내리시고 심판하십니다.

금송아지를 보고 ‘이분이야말로 우리를 이집트에서이끌어 내신

하느님이시다.’라고 외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노하시고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도 하십니다(탈출 32,25-29 참조).

또한 그분께서는 광야에서 불평을 늘어놓는 백성에게

불 뱀을 보내시어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게도 만드십니다(민수 21,4-9 참조).

하느님께서는 거룩하시지만 질투하시는

하느님이기도 하셨습니다(탈출 20,5; 34,14 참조).

그리고 하느님 분노의 절정은 왕국의멸망으로 구체화됩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분, 천지를 창조하신 분으로 고백하는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인간적인 감정을 표현하시는 분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구약의 역사 안에서

자비와 분노의 감정을모두 표현하셨습니다.

 

그럼 어떤 하느님의 모습이 진짜일까요?

하느님의 진짜 모습은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당신의 사랑하시는 외아드님을 보내시고,

그분을 죽음에 이르게 하십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연민,

인간에 대한 강력한 구원 의지로 당신의 외아드님을

인간의 손에 맡기십니다.

아울러 예수님 자신도 아버지와 함께

그 사랑을 삶으로 드러내셨습니다.

구약에서 하느님의 분노와 심판이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에서절정에 이르렀다면,

신약에서 분노와 심판은 사랑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절정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완성됩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

그것은 아버지와 예수님의 사랑 그자체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당신을 바치시며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와 물을 쏟으십니다.

그분의 크신 사랑이, 우리의 언어로 담기에는 너무나도 크신 사랑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전해지는 따뜻한 축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6월 12일 (토) [백]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성모 성심에 대한 공경은

17세기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의 요한 외드 성인의

노력 등으로 점점 보편화되었다.

성모 성심에 대한 신심은 예수 성심을

공경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이 신심은 별도의날을 정하여 기념하던 19세기 전까지는

예수 성심 미사에서 기억하는 형태로 전례 안에 들어왔다.

1942년 비오 12세 교황은 성모님의 파티마 발현 25주년을 맞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께 세상을 봉헌하고,

이 기념일을 온 교회가 지내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8월 22일이었으나,

1996년부터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날로 옮겨 지내고 있다.

 

[복음묵상] 루카 2,41-51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위해서

사람들 가운데 가장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을 잉태하실 것이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에,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기꺼이 따르십니다.

어머니의 모범적 모습은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가시는

그 길에 소리 없이 협력하심으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서

차지하는 어머니의 큰 역할에 비하여,

복음서에 어머니의 말씀은 거의전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순간에 어머니께서는 ‘곰곰이 생각하시고’(루카 1,29 참조),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시고

곰곰이 되새기셨다’(루카 2,19; 2,51 참조)고 하십니다.

이렇듯 성모님께서는 좋은 일이든,

섭섭한 일이든, 일희일비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시고 곰곰이 되새기신

성모님을 통해서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렇게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품어 내신 성모님의 마음을 우리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이라 부르고 기억합니다.

 

우리는 성모님을 신앙의 모범으로 바라보며,

‘천주의 성모님’, ‘하늘의 여왕’,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 등

영광스러운 호칭을 드립니다.

그러나 그 영광스러움을 가능하게 하셨던 성모님의 밑바탕에는,

말씀을 곰곰이 생각하시고 마음속에 간직하시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마음’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의 육화는 이러한 성모님의 마음으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을

우리 신앙의 모범으로 삼고 공경합니다.

입으로만 외치는 공경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어머니께서 지니셨던 ‘곰곰이 생각하고’,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마음을 닮고자 노력한다면,

티없이 깨끗하신 어머니의 마음을 기념하는 좋은 길이 될 것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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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로 인한 많은 제약 중에서

요즘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마스크 착용입니다.

 

날씨가 추울 때에는

오히려 방한 효과가 있어

그런대로 착용할 만 하였지만

이젠 날씨가 더워짐에 따라

갑갑함이 더 어렵게 만듭니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를 위한 작은 희생이

전체 공동체를 건강하게 합니다.

 

-Berardus-